00023 떠나며 =========================================================================
카인의 재능이라면 물의 중급 정령도 소환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카인의 재능을 알아본 정령이 계약까지 맺을 수도 있겠지만, 카인은 어디까지나 이제 막 입문한 초보.
정령력은 매우 낮았으며 기술 한두 번 사용했다고 탈진되면 차라리 하급 정령만 못한 것이다.
정령들이 그런 것까지 생각하진 않을 것이니 이는 계약을 맺을 인간의 판단이 중요한 시점.
그런 면에서 카인은 자신의 분수를 안다고 볼 수 있었다.
“운디네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목록과 활용용도는 외웠니?”
하급 정령은 할 수 있는 일이 적었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위기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불릿은 물의 중급 정령사로 연륜이 깊었다. 게다가 대륙 최정상이라 할 수 있는 원정대의 일원.
그는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하급 정령에 한해서지만.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니 가르침을 받는 자는 한없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카인이 감동한 것은 당연지사, 그를 마치 스승으로 모시듯 지극정성을 보였었다.
“네! 다 외웠어요! 운디네가 너무 기다려져요!”
불릿에겐 ‘겨우 그것밖에 못해?’라는 심정이 드는 하급 정령이지만 카인에겐 얘기만으로도 꿈의 신세계나 마찬가지.
어른도 흥분할 마당에 어린애가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 곧 이루어지겠지. 내일 계약을 맺을 것이니 준비 단단히 하고, 오늘 축제라고해서 늦게 자지 말려무나.”
“알겠어요, 볼레트 씨.”
카인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불릿이 이를 거부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 고위귀족인 자신이 이름을 걸고 인과가 엮인다면 카인에게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이 나서야 했다.
군주로서 선택은 신중하게 해야 했다. 카인이 서운해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다행히 카인은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아쉬워하진 않았다.
지금 이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은혜. 더 바라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리라.
“오늘은 몸을 좀 굴렸더니 피곤하구나. 나는 자리를 좀 더 지키다 쉬러갈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즐기다 자렴.”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뵐게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카인은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놀고 시작했다.
영특하고 어른스럽지만 카인은 어린아이. 자기 또래와 어울리는 편이 즐겁고 편안할 것이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불릿은 자신을 곁눈질로 훔쳐보는 촌장을 한차례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뚜벅, 뚜벅.
홀로 집안으로 사라지는 불릿의 모습이 마을의 주민들과 대조되고 있었다.
* * *
“준비는 되었니?”
“네! 주, 준비됐어요!”
잔뜩 긴장한 모습의 카인. 카인은 불릿이 그려놓은 마법진에 올라서 있었는데, 정령소환을 하는 것이 긴장됐는지 경직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시작한다.”
우우웅-
불릿의 말과 동시에 발동되는 마법진. 그 위에 있는 카인은 온 정신을 집중해 물의 정령을 간절히 떠올렸다.
한껏 정령력을 개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어 계약을 맺고자하는 정령이 찾아오게끔 했는데, 소환과 계약을 동시에 해야 했기에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 카인은 불릿이 있기에 그를 믿고 처음임에도 열성적으로 응했다.
“만물의 근원 물이여, 부름에 응답하소서. 생명의 근원 물이여, 나의 바람에 답하소서.”
“물은 나요, 나는 물이니, 그대는 나의 부름에 답해주세요!”
이윽고,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 소환!”
스르륵…
허공에 조금씩 물방울이 맺히더니 그것은 이윽고 어떤 형상을 만들었다.
흐물흐물한 그것은 아직 제대로 모습을 갖추지 못했는데, 언뜻 보이는 그것은 사람처럼 보이는 듯했다.
“흐음…, 역시 한 달만으로는 저 정도가 한계인가.”
카인은 불릿의 특훈을 받기 이전엔 정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당연히 정령력이 있을 리가 없었고, 엘프들처럼 정령의 축복을 받지 않았으니 이처럼 비루한 정령력을 보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어라, 으으?”
생각했던 자태가 아니자 카인의 당황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불릿에게서 사전에 경고를 받긴 했지만, 이건 조금 심하다 생각했다.
끊임없이 꾸물꾸물, 흐물흐물. 그러면서도 형태를 형성하려 움직이는 것이 징그러웠던 것이다.
‘이, 이게 아닌데…….’
카인이 바랐던 것은 이게 아니다. 지금도 그의 시선은 불릿의 옆에서 애달픈 시선으로 소환된 정령을 쳐다보는 흙덩이에게 가있었는데, 흙덩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던 이상향인 것이다.
불릿도 카인의 실망을 알았는지 머리에 손을 얹고서 쓰다듬었다.
“카인, 실망하지마라. 네 정령력이 궤도에 오르면 자연스레 형상이 굳어질 것이니. 지금도 저 정령은 너의 바람에 따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확실히 소환된 물의 정령은 카인의 바람에 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모습을 유지하려하고 있었다.
카인이 바라던 인간의 모습, 그것이 어떤 것인지 현재로썬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정령은 소환자의 바람에 몸의 형태를 구성한다.
그러니 실망해선 안 되는 상태. 이를 카인도 알아채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하죠?”
배웠던 것을 까맣게 잊은 상황. 그렇게 달달 외우며 머리에 쑤셔 박았지만, 막상 실전이 닥쳐오니 제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소환 이후 계약과정을 어떻게 거쳐야하는지 백지상태가 된 카인을 대신해 불릿이 나서기 시작했다.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여, 그대는 이 소년의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것이 맞는가?”
- ……
불릿이 눈앞의 물의 하급 정령의 계약자가 아니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경험이 있기에 유추할 수는 있었다.
저 흐물흐물한 형태의 물의 정령이 무슨 의미의 동작을 하는지 파악한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인을 향해 돌아보았다.
“카인, 운디네에게 계약을 맺자고 하거라.”
“네, 넵!”
대답한 카인이 물의 정령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의 하, 하급 정령이여, 나 카인과 계약을 맺겠습니까?”
그러자 카인의 머릿속에 신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대, 본인과 계약을 맺겠는가?
사람물 좀 먹은 정령인지 하급인데도 불구하고 말이 아주 능숙했다.
사실 가장 밑바닥이랄 수 있는 하급 정령들이 오히려 인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한 계약도 잘 맺었다.
그 이유는 상위의 정령들을 소환하기에 대륙의 정령사들이 수준이 낮아서 그러했는데, 때문에 하급 정령일수록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었다.
- 그대는 본인과 계약을 맺기 싫은 것인가?
당황한 카인이 대꾸를 못하고 있자 정령이 재차 물음을 건넸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카인이 허겁지겁 소리친다.
“맺어요! 맺습니다! 우리 계약 맺어요!”
무슨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고백하는 것도 아니건만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정령은 만족스럽다는 음성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 나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는 인간 카인과 언약을 맺었음을 정령의 이름으로 알린다.
“아, 예! 잘 부탁합니다!”
정령과 정령사는 동등한 계약관계이지만 예의바른 카인은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이를 지켜본 불릿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쁘진 않군.’
상황을 보아하니 계약자체는 잘 이루어진 것 같았다. 정령의 실체화가 한층 더 확실해진 것을 보니 계약을 통한 교감도 이루어진 듯했고.
얼핏 보이는 윤곽이 소녀임을 보건대 정령이 카인의 요구사항을 들어준 것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굽실거릴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을 떨치지는 못한 불릿.
“…내가 이상한 것인가…….”
보통 정령사들은 정령에게 매우 잘 대해준다.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수록 정령과의 교감이 커져 더욱 큰 힘을 낼 수 있고, 상위의 정령으로 진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릿은 그러하질 못했다.
고위귀족인 백작으로서, 한 지역의 패자인 군주로서의 자존심이 허리를 굽히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물의 정령들은 별 것도 아닌 일로 짜증을 내거나 그를 멀리했고, 그는 오랜 기간 중급 정령사에 머물며 정체됐었다.
“본인의 잘못만은 아니라곤 하나….”
저렇게 밝은 얼굴로 손짓발짓을 하며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와 대화하는 카인을 보자니 일말의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
그가 나직하게 독백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흙덩이가 다가왔다.
스윽-.
아무 행동도 명령하지 않은 후인데도 흙덩이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자신의 머리에 얹더니 자신의 손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부빗부빗.
- 친밀, 친밀…
처음엔 갑자기 흙덩이가 왜 이러나 싶어 어떤 명령을 내렸었나 기억을 되짚던 불릿은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본인을 위로하고자 하는가?”
- 친밀…
그의 말에도 흙덩이는 별다른 말을 않고서 불릿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문지르기만 할 뿐.
설마 정령에게 위로받을 줄은 몰랐던 불릿은 그리 나쁘지 않다 여기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본인도 자네와는 친밀하게 지내고 싶다네.”
그러면서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조그맣게 속삭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는 바로 앞에 있어도 듣기 어려웠지만 흙덩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 나도 좋아해.
애달픈 눈빛에 언뜻 미소가 어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불릿이 이를 확인하고자 다시 흙덩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것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흙덩이의 좋아한다는 말이 인간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며 좀 더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하는 불릿이었다.
* * *
“그동안 고마웠어요!”
“흑흑, 안녀엉-!”
“볼레트 씨, 나중에 꼭 한번 들러주세요!!”
“바이바이!”
모든 일을 끝마친 불릿이 마을을 떠나자 주민들은 그를 배웅하며 산이 울리도록 인사했다.
개중엔 눈물 흘리는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어린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불릿으로 인해 생겨나는 이득이 사라짐을 알아서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불릿은 어른들에게 그나마 있던 잔정마저 모조리 사라짐을 느꼈고, 반대로 아이들에게 더욱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다들 잘들 있으시길.”
담담히 인사말을 건넨 불릿이 떠나려하자 카인이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스승님! 나중에 뵙겠습니다!!”
멈칫 발길을 멈춘 불릿은 뒤돌아 카인을 바라보았다.
카인의 곁에는 작은 소인이 공중에 부유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소녀의 모습을 한 물의 집합체였다.
시종일관 카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노니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카인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리고 저 모습은 불릿이 예전에도 겪을 수 없었던 모습.
자신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카인의 모습에 내심 쓴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자랄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스승이라는 말을 허락한 적은 없었지만.’
제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부정할 생각도 없었기에 그저 손을 흔들며 마을에서 멀어져가는 불릿이었다.
터벅터벅.
산을 내려가는 불릿은 작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시에는 들려야 했다.
도시가 아니더라도 규모가 어느 정도 있어야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지부가 있다.
용병들과 함께 생필품을 보내면 카인이 성장할 때까지 안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마을의 발전도 꾀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가는 길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많은 금액을 책정할 수는 없으므로 기간은 많게 해줄 수 없다.
6개월에서 1년 정도라면 카인도 마을을 보호할 정도로 성장 할 것이다.
“흙덩이여, 주위에 몬스터는 없는 것인가?”
- 응……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가 대답했는데, 유난히 기운 없어 보였다.
흙덩이는 마을을 떠나오는 내내 계속 이 상태였는데, 떠나기 싫은 눈치였던 것이다.
‘이유는 알겠지만…….’
자신이 최초로 계약을 맺은 장소. 인간뿐 아니라 정령에게도 처음은 소중했는지 흙덩이는 좀체 동굴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릿에게는 그저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었지만 흙덩이에게는 불릿과 자신을 이어준 소중한 장소이지 않은가?
정령이 이런 적을 본 적은 없었으나 연륜이 있는 불릿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흙덩이여, 폭포가 있는 곳이 그리운 것인가?”
하도 의기소침해 있기에 불릿이 물어보자 흙덩이가 한층 더 애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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