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2 떠나며 =========================================================================
그는 눈앞의 촌장을 믿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탐욕에 눈이 멀어 마을의 대표라는 인간이 금화를 혼자서 꿀꺽한 상태였다.
게다가 마을의 모든 어른들이 영 못마땅했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상황.
당연히 시선이 고울 수가 없었다.
“아뇨. 그다지.”
“예에…, 그렇군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땀을 뻘뻘 흘리며 굽실대는 촌장.
정령사의 존재가 이만큼이나 큰 것이다. 비록 아직까진 힘을 온전히 되찾지 못해 하급 정령만을 다루고 있었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군요.”
갑작스런 폭탄발언에 촌장이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를 버리시다뇨!”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저 멀리서 일을 하던 주민들이 힐끗 바라 볼 정도였다.
하지만 불릿의 태도는 냉정했으니….
“버리다니, 무슨 말씀을 그리 함부로 하십니까? 그리고, 제가 뭘 잘못했길래 태도가 그따위시죠?”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마을을 떠나시겠다고….”
“기억도 되찾았겠다, 돌아갈 곳도 있는데 제가 제 발로 못갈 일이라도 있습니까?”
“끄응, 그게 아니고…….”
아직도 기억상실증 연기를 하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불었는지 촌장은 말 한마디 잘못 놀려서 대꾸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아시고, 주민들에게도 알려주세요. 촌장님처럼 갑자기 떠난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러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마을로 들어서는 불릿이었다.
홀로 남은 촌장은 연신 끙끙 앓으며 대책을 강구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는지 좀체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어? 볼레트 아저씨다.”
“오늘은 너무 일찍 오시는데?”
자기들끼리 놀던 아이들은 마을로 불릿이 들어서자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이를 본 불릿이 손을 앞으로 내밀어 정지시켰다.
“진정들 하시지요. 매번 그렇게 달려들면 제가 버티질 못합니다.”
“에이, 형은 다 좋은데 엄살이 너무 심해.”
“엄살이 아니야. 잭스는 리아에게 나쁜 말을 가르쳐주지 말려무나.”
불릿의 진짜 정체는 한 영지의 영주, 그것도 고위귀족인 백작.
당연히 체면과 몸가짐을 중시하기에 이런 산골 아이들의 들이대는 것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귀여워했기에 야단치기 보다는 행동을 교정해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크게 혼이 났으리라.
“볼레트 아저씨,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신디라는 여아의 말에 불릿이 대답했다.
“내가 목책에 손을 좀 댔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아저씨, 말투 재섭써. 할아버지 같아.”
“어허, 여자아이가 그런 말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니다.”
“그것 봐, 완전 꼬부랑 할아버지랑 똑같아. 지팡이만 들면 딱일 것 같아.”
“끄응….”
역시 아이들과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제에서 쉽게 벗어나고 새로 만들어내니 암계에 능한 그로서도 지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인 것을.
“신디, 내가 볼레트 씨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었지? 진짜 혼나볼래?”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한줄기 빛은 있었으니, 혜성같이 등장한 카인이 아이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힝. 카인 미워. 내가 뭘 어쨌다고.”
“론, 핑코. 너희들 신디 말에 무조건 좋다고만 하지 말라고 했었지? 내가 너희들 부모님한테 다 이른다?”
“헉!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것만은!”
“알았다고, 알았어. 쟤도 은근 애늙은이라니까.”
론과 핑코라는 남자아이들은 투덜대면서도 카인의 말에 잘 따랐다.
아무래도 론과 핑코라는 아이가 신디를 좋아해서 발생한 일 같았는데, 카인의 저런 지도력을 보니 앞으로 마을은 카인이 잘 이끌어갈 것 같았다.
“모처럼 공사도 완료됐으니 다 같이 고기라도 먹어볼까 해서 사냥을 좀 다녀올까 해서 준비를 하려고 돌아왔지.”
고블린을 소탕한 뒤로 다시 숲은 균형을 되찾았는데, 그 뒤로 짐승들이 돌아와 자리를 틀자 고기의 수급도 원활해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기 전 불릿은 그들에게 작은 축제를 벌여주고자 사냥을 갈 채비를 준비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아이들은 만세를 외치며 굉장히 기뻐했다.
“와! 고기다, 고기!”
“나는 사슴고기!”
“넌 뭐 맨날 사슴고기냐? 나도 사슴고기!”
“푸핫! 웃기는 애들이네? 그럼 나도 사슴고기!”
울상을 짓던 아이들도 고기라는 소리에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을의 주민들도 가끔 사냥을 나가지만 실패하는 일이 더 많았다.
애초에 영지에서 착취당하던 이들이 사냥을 시도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농사나 짓던 이들이 동물을 죽여 본 일이나 있을까?
“얘들아, 내가 볼레트 씨에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었지?”
찔끔.
환호하던 아이들이 목을 움츠리며 불릿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의 동작조차 귀여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으나 짐짓 근엄한척하자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카인이 한마디를 꺼냈다.
“부탁을 할 때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흠흠.”
목을 가다듬던 카인.
“볼레트 씨, 멧돼지도 좋지만 사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피식-.
결국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불릿이 미소 짓자 아이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뭐야, 결국 카인도 똑같잖아!”
“나는 정중하게 말을 돌려서. 너희는 예의 없이.”
“웃기고 있네. 너야말로 우리한테 좀 혼나봐라. 얘들아, 덮쳐!”
“와아!”
“위에서 눌러!”
“케헥, 안 비킬래, 이것들아?!”
잭스의 선동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카인을 아래에 깔고 샌드위치처럼 겹치자 맨 아래에 깔린 카인이 괴로워하며 소리 질렀다.
불릿은 슬쩍 자리를 피하며 미소를 유지한 채 작게 속삭였다.
“다녀오겠습니다.”
* * *
풀썩.
“꾸엑!”
지옥구덩이는 바닥에 구멍을 파내고 그곳에 빠진 적을 구덩이의 벽에서 솟아나는 송곳들로 잘게 부수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송곳을 제외한 지옥구덩이는 평범한 구멍이란 소리였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땅의 정령은 땅파기의 달인, 삽질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구덩이를 만들 수 있었다.
“꾸엑! 꾸에엑!”
“시끄럽군. 흙덩이여, 기절시켜주게.”
- …아아?
말을 배운 이후로 궁금한 점은 곧장 묻는 흙덩이였으나 간혹 이해되지 않을 때 혼잣말처럼 ‘아아’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지금 흙덩이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애달픈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가르쳐주는 것에도 능숙해졌는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기절이란 일정한 충격을 받아서 대상이 의식을 잃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네.”
- 못 움직여?
“보통 기절시킬 때에는 머리나 뒷목을 가격하거나 호흡기를 막아 산소를 차단하는 방법이 있지.”
- 죽이면 돼?
사실 죽이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먹으려고 사냥하는 놈, 꾸익꾸익 시끄럽게 구는 멧돼지 따위 죽던살던 알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불릿의 생각은 달랐나보다. 흙덩이에게 기절이란 단어와 수법을 가르치면서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거였다면 본인이 기절이란 것을 언급하며 설명하지 않았겠지. 나중에 종종 써먹을 기회가 있을 터이니 한번 해보시게.”
- 어려워…, 어떻게?
기절에도 수많은 방법이 있다. 그걸 사회초년생이라 칠 수 있는 흙덩이가 알기란 무리.
종종 기발한 발상을 보여주지만 해보지도 않은 것을 응용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흠…. 아직 위력조절이 어려울 테니 흙으로 코와 입을 막아보면 어떻겠나?”
- 응.
그러자 흙으로 구멍을 덮어버리려는 흙덩이. 이를 불릿이 급히 막았다.
불릿은 먹으려고 멧돼지를 사냥한 것도 있지만 가죽도 사용할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흙으로 더럽혀지면 뒷일이 귀찮아지니 이를 막은 것이다.
이러저러한 시행착오를 거쳤으나 흙덩이는 기절이란 것을 훌륭히 해내었다.
쉬익-, 쉬익-.
커다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숨을 내쉬는 멧돼지.
흙덩이에게 멧돼지를 옮기라 명하자 인간이 낼 수 없는 괴력을 선보이며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번쩍 들고선 앞장서는 불릿을 따라간다.
사냥을 마친 불릿은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며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사슴고기는 마지막까지 선물로 가져가질 못했군.”
* * *
그날 저녁, 불릿이 사냥한 멧돼지 고기로 조그마한 축제가 벌어졌다.
사실 축제라 부르기엔 조금 민망한 규모였다. 약간의 싸구려 술, 말린 과일, 평소에 먹던 식단.
거기에 불에 굽고 있는 통돼지 한 마리.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이들에겐 이만큼 진수성찬도 없었다.
마을에는 사냥꾼이 없었기에 육류의 취식율이 저조했는데, 불릿 덕분에 그동안은 간간히 먹을 수 있었다.
“하하하.”
“적당히 마셔, 다른 사람도 먹어야지.”
“론, 이놈의 시끼! 엄마가 술 먹지 말랬지!”
“으앙! 잘못했어요!”
오랜만에 근심을 놓고 웃고 떠드는 이들, 몰래 술을 마시다 혼이 나는 아이.
비록 깔끔한 파티나 연회는 아니었지만 이 모습에서 불릿은 과거 결사대의 일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후우…….”
즐거웠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들. 자신이 살아남은 것도 기적이라 부를 만했으니 다른 이들이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기분이 우울해진 불릿은 그토록 귀여워하던 아이들조차 내버려두고 멀리서 혼자 술을 홀짝였다.
“맛없군.”
싸구려 술은 맛이 없었다. 무슨 종류인지 짐작도 안 되는 알코올이 정신을 흩트리려하자 손에서 잔을 놓았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의자. 컵을 놓은 반동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어졌다.
사람이 살긴 했으나 열악한 환경.
불릿은 문득 자신의 영지가 그리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야겠군.’
원래 이곳에서 이렇게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영주가 영지를 비우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일.
흑마법사들 때문에 결사대에 참전해 전쟁을 치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일정을 늦출 수 없었다.
그가 다짐을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카인이 다가왔다.
“볼레트 씨, 잠시 괜찮으신가요?”
“흠…, 그래, 무슨 일이지?”
마을사람들도 이미 불릿이 떠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촌장이 미리 알려주기도 했고, 축제를 시작하면서도 본인의 입을 통해서 알린 것도 있었다.
이렇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마음의 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불릿에게는 카인의 문제만을 해결하면 더 이상 화전마을에서 볼 일이 없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카인이 불릿에게 다가온 것이다.
굳은 결의를 각오했는지 딱딱한 자세로 입을 뗀다.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어요.”
불릿이 떠난다. 이 말은 그동안 안전했던 마을이 더 이상 그것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알지 못했으나 오크뿐만이 아니라 더 큰 위협, 고블린부락을 아예 쓸어버린 불릿이다.
오크들도 무리를 짓고 있겠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상황.
불릿이 해준 일은 오크를 해치워주고 주민을 구한 일, 방벽을 세우는 동안 지켜주고 그것을 더 강하게 보강해준 일, 그리고 아직 행하진 않았으나 가는 길에 용병들을 통해 물자를 지원해줄 것이다.
이토록 많이 해준데다가 카인을 정령사로 키워주는 것까지.
은혜를 입어도 보통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마을을 부흥시킨 것이나 마찬가지.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카인정도의 영특한 아이면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니 해준다고는 사전에 알려주었지만 자신의 입으로 부탁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의 정령력이었나…, 맞지?”
“네, 맞아요. 저는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와 계약을 맺고 싶어요.”
“좋은 선택이다. 재능이 있다지만 초심자가 감당하지 못할 힘을 얻으면 재앙만 초래할 뿐이지.”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본의 아니게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5연참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3시, 6시, 9시,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