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흙덩이와 아이들 =========================================================================
‘지루하진 않겠군.’
영지의 일이 중요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방벽을 만드는 동안 마을을 지켜주고 카인을 단련시켜 주는 것이 현재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였다.
불릿이 도와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호의에서 우러나는 행동이었던 것이고, 막말로 이들과 불릿은 접점하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어떻게 되는 상관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흙덩이가 자주 이쪽을 보는군.’
흙덩이만 보면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도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카인에게 달라붙어 수련을 도와주는 흙덩이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자 애달팠던 시선에 이젠 슬픈 기색마저 어리는 것이 엿보였다.
아무리 둔중한 사람이라도 이쯤이면 이상함을 알아보련만, 불릿은 그저 귀여운 흙덩이로만 보였나보다.
“정령도 열의를 불태우는데 본인도 질 수는 없지.”
그러면서 자신의 계획에 놓친 점은 없나 확인, 또 확인을 하며 점검했다.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미 시작한 일이라면 확실하게 일을 끝내는 것이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짤그락.
‘가면서 조금 쥐어주면 괜찮겠지.’
화전마을은 기본적으로 가난하다. 애시당초 영주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해 도망친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돈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래도 한 번 더 생각했다.
이런 산골에선 돈을 사용하기가 번거로웠고, 자칫 다른 마을에서 신고라도 하면 경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의뢰를 진행해야 하는가?’
입이 가벼운 용병들이라도 기밀성을 요하는 의뢰를 수행하면 그것에 대해선 자신들이 알아서 함구한다.
의뢰를 가볍게 대하는 용병들에겐 그에 걸맞는 의뢰만이 들어온다.
자고로 높은 위치에 올라서는 인간일수록 생각은 가볍더라도 입은 무거워져야하는 법.
이 법칙은 비단 용병만이 아닌 평민도, 귀족에게도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던 것이다.
불릿은 이제는 48골드가 남은 주머니를 매만지며 주민들이 목책을 짓는 동안 소홀하게 될 생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 불릿, 언제 끝나?
흙덩이는 내심 치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계약자는 멀리서 그늘에 앉은 채 편히 쉬고 있는데 자신은 이상한 인간아이와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아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빠르게 변화되는 인간의 삶에 조금씩 물들고 있던 흙덩이에겐 지루한 일.
흙덩이는 불릿과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하루만 고생해주게.”
불릿은 카인에게 알려줄 정령술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카인은 스승도 없이 혼자서 배우고 익혀나가야 했다.
비록 시간이 없어 제대로 가르칠 여유를 가지진 못했으나 기초정도는 튼실하게 잡아야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고심하고 있던 것이지, 결코 놀고 있던 게 아니었다.
- …응.
그래도 오늘 하루만 고생하면 이와 같은 지루함도 끝이란 생각에 특유의 애달픈 눈으로 카인을 바라본다.
움찔.
눈을 감고 있던 카인이 몸을 비틀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했어?
“으, 음? 뭐, 뭘?”
- 했어?
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벙긋거리는 입을 보고서 의미를 추측한 카인. 대뜸 했냐는 물음에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우물거리다 간신히 입을 떼었다.
“했…냐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려.”
흙덩이의 외모가 미소녀이기 때문일까? 카인은 흙덩이를 또래에게 말하듯 대하였고, 흙덩이의 말투 또한 그것과 비슷했으니 어린아이 둘이 속닥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불릿. 그가 대화의 중간에 난입하였다.
“무언가 알 것 같아?”
“확실하진 않은데…, 누가 자꾸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음.”
뜻밖의 말에 불릿은 놀랐다.
‘벌써 계약을 맺고 싶은 정령이 생겼단 소리인가?’
본래 계약은 인간이 먼저 시도를 해야 그것에 응한 정령이 소환되는 것이 먼저였다.
계약여부는 그 이후의 일.
그러나 지금 이 현상은 은연중 카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누군가가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흙덩이와 접촉시키길 잘했군.’
그렇다곤 해도 정령인 흙덩이가 매개체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 목소리는 닿는 것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는 불릿의 호의와 카인이라는 재능 있는 아이를 발견한 우연의 연속으로 생겨난 기연.
재능을 썩히지 않게 되어 카인에게도 좋고,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불릿에게도 좋은 현상이었다.
“흙덩이여, 이제 손을 떼도 괜찮을 것 같네.”
- 불릿, 나, 멀리, 떼어놓지 마…
정령이 계약자와 함께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친밀감이 없다면 명령만 수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흙덩이의 어리광에 불릿은 애완용 개를 떠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 카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회수하고선 입을 열었다.
“카인. 그것은 너와 계약하고 싶다는 정령이 있다는 뜻이야. 일종의 구애행위라고 볼 수 있지.”
“예? 저, 저랑 함께하고 싶다고요? 어떤 정령이 말인가요?”
“글쎄, 계약을 맺기 전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재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본격적으로 돌입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그럼!”
“일단 정령력을 쌓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정령의 소환엔 정령력이 필수이며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들 정령력이 낮으면 하급 정령도 소환할 수 없는 법이다.”
“네…….”
약간 시무룩해하는 모습. 걷는 법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뛰려고 하니 그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불릿은 카인을 귀여워해 정령술을 가르쳐주려했으나 가문비전의 술법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절은 선을 그어야 상대도 그것이 고마운 줄 아는 법.
무분별한 친절은 그것이 호의인줄 모르고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라 생각하며 점차 성격이 삐뚤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카인, 의욕을 보여줘. 그래야 가르치는 나도 힘이 날 것 아니겠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나도 그다지 가르칠 의욕이 생기질 않네.”
“아니에요! 열심히 할게요!”
카인도 이것이 자신의 생에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누가 아무것도 없는 화전마을의 아이를 시간을 들여 가르치겠는가?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 보여줘라. 너의 노력을, 정령에 대한 갈망을!”
카인은 재능만 있을 뿐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있었는데, 말하자면 땅만 있을 뿐이라는 소리였다.
아직 건물을 지을 지식도, 재료도, 공사비용도 없는 카인. 불릿이 제공해주는 것이 바로 그 나머지 부족한 부분인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정령력을 쌓는 수련을 해보자. 잘 따라와 주면 좋겠다.”
“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불릿은 간단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득, 드드득-
그러면서 물을 담은 그릇이나 돌, 불씨가 타오르는 작은 장작을 놓기 시작했는데 그 모양이 무언가를 둘러싸는 형태였다.
준비가 끝나자 불릿이 손을 털며 카인에게 마법진의 중앙으로 들어가라 명하였다.
“저 마법진 가운데에 앉은 채로 명상을 하면 된다.”
“이건 무슨 마법진인가요?”
“기본적인 사대원소의 정령력을 쌓게 해주는 마법진인데,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따로 자리가 없어.”
그러면서 각 속성에 대한 강의를 해주는 불릿.
“불은 존재감이 강렬하기에 준비하기가 까다롭고 유지하기도 쉽지 않으나 그만큼 쌓이는 속도가 빨라. 땅은 바닥이라고 인식하면 좋겠지만 네가 감당할 수가 없기에 돌멩이로 대체한 것이고.”
불은 흔히 정열을 대표한다. 그만큼 존재감이 그 어느 원소보다 뚜렷해 적은 양으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땅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것을 한낱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이기엔 무리. 그래서 작은 물체로 한정시켜서 기운을 쌓는 것이다.
“물은 흐름을 중시하는 원소. 이제 막 입문하는 네가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또한 이 역시 감당하기 벅차기에 그릇의 담긴 물로 영역을 제한했어.”
그가 강의를 하는 동안 흙덩이는 아기가 부모를 따라하듯 불릿의 몸짓과 언어를 따라하며 복습하고 있었다.
- 물은 흐름을 중시하는…
그것을 불릿도 알지만 따라하는 것만큼 2번 설명하는 것도 피곤하기에 그냥 따라하며 배우게 내버려두었다.
“바람은 아까 말했다시피 자유로운 원소. 달리 공기로도 표현되는 바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면서도 포용하는 자비를 가지고 있지.”
“자비는 땅의 여신 가이아가 아니신가요?”
흔히 말하길, 자비로움은 가이아를 따를 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카인의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카인이 궁금함을 가진 채로는 수련이 될 것 같지 않았기에 부가설명을 해주었다.
“바람은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아.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만큼 떠나기도 쉽지. 그래서 사람들은 땅을 어머니라 부르고 바람을 자유라 표현하는 것이야.”
그러면서 슬쩍 흙덩이를 쳐다본다.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도 짐작조차 못할 정령을.
예상으로는 심연 깊숙한 곳에서 왔으리라 생각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흙덩이 본인도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궁금증이 커지려하자 불릿은 상념을 밀어두고 카인을 바라봤다.
“그래서 굳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바람의 자비 안에 있으니 다른 원소를 쌓으면 자연히 쌓이기 마련이니 열심히 해봐.”
이것이 일반적인 정령에 관한 강의였다. 따라서 정령사들은 입문을 할 때에 모든 기운을 느끼며 쌓고, 그 중에서 특히 잘 쌓이는 원소를 골라 집중하는 것이다.
애초에 재능이 없는 원소는 느껴지는 것이나 쌓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카인이 할 일은 어떤 원소가 자신에게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야. 처음엔 그 기운이 미약해 다소 알기가 어려울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확실해지거든 일러주시기를 바란다.”
아직 나이가 어린 카인을 배려한 말.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이것입니다!’라고 선택하라고 해봤자 잘못된 길일 수도 있으니 기운이 뚜렷해질 때까지 쌓아보라는 것이다.
일단 재능이 있으니 그 과정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떠나기 전까지는 알게 될 테니 불릿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명심해. 불과 바람, 비슷할지 몰라도 헷갈리지 말고. 물은 알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불, 바람, 땅을 구분할 수 있다면 남는 게 물의 기운이야.”
“예! 한번 해볼게요!”
“음. 나는 저 뒤에서 수련하고 있을 테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 아, 위험하니까 멀리서부터 소리치고 와야 한다?”
“네!”
어린아이들은 위험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에 때때로 스스로가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쉬운 예로는 뜨거운 물질, 끓는 물이라던가 타오르는 장작.
높은 곳에서 곧잘 뛰어내려 뼈가 부러지거나 탈골되는 경우도 있고, 부모를 따라한다고 식칼을 가지고 장난치다 손가락이 잘리는 아이도 더러 있었다.
이처럼 아이들의 무지는 생각보다 무섭고 위험한 것이기에 미리 경고를 하는 불릿.
카인은 영특한 아이였기에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주욱, 주욱-.
무언가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자 불릿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는데, 흙덩이가 자신의 허리춤을 붙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 흙덩이여?”
외관은 흙덩이보다 카인이 몇 살 더 많은 것으로 보였지만 흙덩이는 정령.
정령에게는 되도록 존대하며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대해주는 것이 좋았기에 하대를 하지 않는 불릿이었다.
그런 말투에 종종 흙덩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되었지만 그게 무얼 의미하는진 알 수 없었기에 넘어갔었다.
- 나는?
“……? 무엇을 말인가?”
- 나는?
재차 반복해서 말하는 흙덩이. 이는 뭘 의미하는 걸까?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