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게릴라 =========================================================================
“인간이여,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구나.”
“흠, 그대가 고블린들의 로드(lord)인 게로군.”
“그렇다, 간사한 인간이여.”
고블린들의 중간에 나타난 녀석은 체구가 다른 고블린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근육은 오크도 아닌 것이 우락부락했다.
하지만 총기가 맺힌 눈은 고블린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맑았는데, 그 속에 스며든 흉폭함은 숨기지 못한 듯했다.
“간사하다라, 패배한 후 도주한 로드도 로드라고 할 수 있을까?”
꿈틀.
고블린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도 고블린족장을 도발하는 이유. 위기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군.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패배자놈이 말이 많구나! 당장 내 앞에 무릎이나 꿇어 보거라!”
“이노옴! 끼긱! 끼기기기이익!”
그의 도발에 말려든 고블린족장은 우렁찬 고함을 치며 주위의 고블린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토록 신중을 기하던 고블린족장이 병력을 무질서하게 돌진시키는 것은 그래봤자 몬스터의 세계에서 아랫줄에 놓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걸려들었군.”
- 불릿, 무엇? 무엇?
“그럴 땐 어떻게 라고…, 나중에 배우도록하지. 흙덩이여, 돌벽!”
- 돌벽…
드드드득!
불릿은 고블린족장의 정면에 돌벽을 설치하고 그대로 후퇴했다.
돌벽에 가려져 한순간 시야가 가려진 고블린족장은 그들의 움직임을 놓쳤고, 불릿이 흙덩이에게 명령했다.
“쌍주먹 쾅!”
- 쌍주먹…
콰광!
- 쾅…
“끼이익!”
“끄에에-!”
비명을 내지른 고블린들이 나가떨어지자 사방에서 독침이 몰아쳤다.
불릿은 머리가 날아간 고블린의 사체를 방패막이삼아 자리를 탈출했는데,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독침이 박혔다.
푸푸푹.
푸부부북!
“헉, 헉. 겨우 이 정도로 쉽게 흥분하다니, 어리석군.”
- 불릿, 무어…, 어떻게?
“헉…, 정면에 돌벽 2개 나란히 설치하도록.”
- 돌벽…
드드득!
드드드드득!
가로세로 2미터나 되는 돌벽을 2개나 연달아 펼치느라 고블린들과의 거리가 좁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릿은 기어코 완성시키더니 돌벽을 스쳐지나가자 그의 모습이 감춰졌다.
“끼긱! 끼이익!”
조장쯤으로 보이는 고블린이 소리를 꽥꽥 지르자 다른 고블린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서 돌벽의 뒤로 돌아섰다.
“끼긱!… 끽?”
“끼기긱?!”
“끽! 끽끽!
놀랍게도 돌벽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나 없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알아차린 조장고블린.
놈의 녹색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며 벌벌 떨더니 소리를 지르며 고블린들을 사방으로 흩어놓기 시작했다.
“끼에엑! 끼기긱!”
마치 ‘찾아! 찾으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어찌나 절묘해 보였는지 언어가 다름에도 매치가 되었다.
그렇게 고블린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불릿과 흙덩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갔나?”
- 아직. 조금 있어.
“의외로 끈질기군.”
공간이 협소한지 불릿이 몸을 웅크린 상태로 물었고, 키가 작은 흙덩이는 그대로 서있는 채로 대꾸했다.
사방의 흙벽, 그렇다. 그들은 땅을 파고들어 숨어있던 것이다!
상황이 급박했으나 불릿은 당초 상황이 악화되면 이렇게 할 용도로 지옥구덩이에 대해 구상하기도 했었다.
“본인은 인간이니 숨 쉴 구멍도 만들어놓게.”
- …응
자기도 모르게 질식사를 할까봐 공기가 통할 구멍도 만들라는 지시에 흙덩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모티브는 지옥구덩이에서 따왔으나 이곳은 평범한 구덩이. 날카로운 송곳이 튀어나올 일은 없었다.
천장부분은 정령의 힘으로 메꾸어 고블린들이 밟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푹!
그때, 천장에서 날카로운 쇠붙이 하나가 흙을 뚫고 천장을 관통했다.
“으, 으음…….”
불릿의 바로 코앞에서 대롱거리던 그것은 쑥하고 위로 올라가더니 몇 차례 같은 짓을 반복하고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은 불릿은 목을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리가 아주 없지는 않나보군. 이래서 어느 조직이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아마도 고블린족장이 수하들을 시킨 결과일 것이다. 하마터면 얕보고 있던 고블린에게 비명횡사할 뻔했으니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 괜찮아? 아파?
그 모습을 바라본 흙덩이가 애달픈 눈으로 그에게 말을 걸자 불릿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헛기침을 뱉었다.
“커허험. 물론 괜찮고말고! 본인이 저런 얄팍한 수에 당할 것 같은가?”
- 하지만…
“크흠, 자네가 보기에 본인이 비리비리해 보이는가?”
- 비리비리? 뭐야?
“……관두도록하지.”
비리비리라는 단어에 관해서 설명하려던 불릿은 이게 뭐하는 짓인지 떠올라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놈들이 본인을 찾겠다고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불릿이 고블린부락이라는 강한 적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은 것은 이름도 없는 화전마을을 위해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들에게는 안 좋은 감정만이 있기에 애착은커녕 친밀감도 없었다.
하지만, 어른의 잘못을 아이에게까지 부과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사슴고기도 챙겨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으나….”
눈에 밟히는 아이들이 떠오르자 문득 선물을 사오라던 앙큼한 꼬마들 덕분에 한줄기 미소가 생겼다.
- 불릿, 아파?
“음? 거듭 말하지만 본인은 괜찮다네.”
- 하지만, 얼굴이 아파, 아파해.
“…….”
미소를 짓는 와중에도 몸에 배인 근엄이라는 것이 억눌렀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흙덩이가 보기에 괴롭다는 말이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흠흠. 아무래도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겠군.”
- …아아…?
“흙덩이여, 본인이 이 한 몸 숨기고자 이곳에 은신해 있으면 고블린들이 더 넓은 곳을 수색하지 않겠는가?”
불릿이 고민하던 문제. 그것은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놈들은 자신을 찾기 위해 숲을 들쑤실 것이다.
“안타깝게도 놈들이 전력을 다한 이상 물러설 수 없겠지.”
놈들은 부락의 모든 인원을 긁어모아 본거지를 뛰쳐나왔다.
자신을 잡기 전에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지금 생각해도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이었다.
“무식한 만큼 본인에겐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힘과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일개 단신인 불릿으로선 뾰족한 수가 없다.
불릿도 자신을 찾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고블린처럼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때론 단순한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였다.
“하는 수 없군.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을 뿔뿔이 흩어놓는 것이 최선인가.”
적의 수는 많다. 고블린이라지만 지시를 내리는 조장이 있고, 조장에게 명령을 내리는 족장이 있다.
무엇보다 족장은 강하다. 힘과 지략이 공존하는 놈을 상대로 어떻게 상대하느냐를 고심해야 할 때.
놈을 호위하는 친위대의 존재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 불릿. 나, 뭐해?
멀뚱멀뚱 혼잣말을 쳐다보던 흙덩이의 물음에 불릿은 잠시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단판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 지금만 하더라도 여러 기술을 연계하여 펼쳤기에 정령력의 소모가 심했다.
다행히 이렇게 은신한 채로 소모한 정령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
“흙덩이여, 자네는 잠시 돌아가 있어야겠네.”
- 나 싫어?
애달픈 눈빛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자 그게 평소의 표정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진다.
아이를 싫어하지 않는 불릿이기에 흙덩이의 외관은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미소녀의 모습, 말이 필요한가?
그러나 그는 귀족들의 선두.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백작이 개인의 감정에 흔들려서는 아니 되었다.
“자네는 본인에게 소중하고, 본인도 자네에겐…소중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은 힘을 아껴야 할 때. 그렇지 않고서는 적을 물리칠 수 없네.”
- 그럼? 아아……
아직 단어의 조합에 익숙하지 못한 흙덩이의 물음에도 불릿은 잘도 알아채고 대답해주었다.
“철괴는 베기 어려우나 철판은 벨 수 있다는 말이 있지.”
- …무엇?
“놈들을 흩어놓고 우두머리를 친다.”
불릿, 그가 나서기 시작했다.
* * *
사삭.
사사삭!
흔들리는 수풀, 그것은 벌레조차 잠든 고요한 숲속에선 천둥과도 같이 큰 소리였다.
그리고 그것을 놓칠 리 없는 녹색괴인, 고블린이 날카로운 창날을 쑤셔 박았다.
푸욱!
“끼이익!”
‘잡았다!’라는 의미로 보이는 외침. 그러나 고블린이 창을 빼었을 때 그곳엔 핏물한점 없었다.
“끼이익?”
“끼긱! 끼기긱!”
고블린이 의문에 휩싸여 있을 때 멀리 흩어져 있던 고블린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 물었다.
“끼긱! 끼기긱!”
수풀에 창을 찔러 넣은 고블린이 발발 뛰며 소리치자 고블린들이 수풀을 둘러싸고 푹푹 찌른다.
푹, 푹.
푸북!
그러나 아무리 찔러도 핏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고블린 하나가 수풀을 잡아 뜯었으나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끼익!
빡!
열이 받은 고블린이 최초 발견한 고블린의 뒤통수를 후려갈기자 그 고블린 또한 화가 나 창대로 후려갈긴다.
퍽, 퍽.
그렇게 시작한 난투극은 누가 시작했는지 중요치 않게 되었고 서로 뒤엉켜 싸우는 고블린들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반짝.
“흠, 역시 미개한 종족이로군. 본인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금세 망각하지.”
멀리서 지켜보던 이는 인간남성, 바로 불릿이었다.
그는 고블린이 겨우 보일 정도로 멀리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그가 수풀을 건드렸을 것이라 생각한 이들은 의문을 자아낼 장면이었다.
“간단한 함정에도 저리 난리를 치다니, 족장이란 놈이 신기할 노릇이군.”
확실히 몬스터는 지도자가 있고 없고가 달랐다.
마물과의 전쟁 때도 작은 지휘관이라도 있으면 몇 배고 결속력을 보이곤 했었다.
‘웃기는 족속들이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함정에 걸린 고블린들을 비웃었다
불릿은 수풀과 수풀사이에 가느다란 나무줄기를 엮어놓고 그 위에 돌멩이를 살짝 얹어놓았을 뿐이었다.
함정이라고 말하기도 조잡한 장치였으나 둔감한 고블린들은 이러한 함정에 잘도 걸렸다.
고블린이 지나치며 나무줄기가 끊어지자 올려져있던 돌멩이가 수풀로 낙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평소라면 신경도 안 쓸 소리였으나 지금은 불릿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상황. 얘기가 다른 것이다.
“오래가진 못할 터, 다른 놈들도 잡아놓아야겠지.”
현재 불릿은 이러한 방식으로 다섯 가량의 고블린무리를 잡아두었다.
일부러 보여줄 용도로 찍어놓은 발자국을 부락을 향해 놓았으니 저 중에서도 더 멍청한 놈들은 새끼들이 있는 부락으로 향하리.
그러나 불릿은 잔챙이에겐 관심이 없었다.
“우두머리만 잡아내면 나머진 오합지졸. 나중에 천천히 잡아도 되겠지.”
오직 족장만을 위해 정령력을 비축해둔 채 육체의 힘만으로 고블린무리를 혼동시키는 불릿.
정령사인 그가 언제 이처럼 고생을 해봤을까?
“그래도 오크를 잡았을 때보단 낫군.”
…있었다. 오크와 1:1 사투를 겨누던 때가.
그래도 그때는 이때와 같이 다수에게 목숨을 위협받진 않았다. 이 정도면 가히 일개 군대와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 말이다.
“움직이자.”
사삭, 사사삭.
사사삭.
허리를 낮추고 움직이자 욱신욱신 고통이 느껴졌다. 최후의 결전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했던 그가 강대한 적도 아닌 고블린들을 상대로 허리를 굽히고 있던 것이다.
‘귀족의 명예란 허세나 오만이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그는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언제나 그 역할에 충실해왔다.
지금은 허리를 숙이는 것이 맞을 때,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고위백작의 이름이 아까울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고.
“놈들이 보이는군.”
고블린족장은 자신이 있는 것인지, 오만인지 아까의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있었다.
마치 올 테면 와봐라, 이런 자신감까지 엿보일 정도.
이에 불릿은 코웃음을 쳤다.
“흥, 하찮은 마물이 인간을 따라하는구나.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주제에.”
그에게 있어 저 고블린족장은 경쟁구도에서 밀려난 수많은 패배자중 하나일 뿐, 저 모습에 의미조차 두지 않았다.
어디서 난 것인지 조잡한 왕좌에 앉아 몸을 깊숙이 묻은 모습은 악덕상인이나 돼지처럼 살찐 귀족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불릿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중 하나.
불릿은 흙덩이를 소환하여 공격준비를 하였다.
-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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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12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