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게릴라 =========================================================================
“크윽.”
아무래도 근거리에서 맞다보니 아무리 꽁꽁 여몄다 한들 천옷으로는 미처 막질 못했나보다.
허벅지에 틀어박힌 독침에서부터 마비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자 불릿은 유인하던 것도 멈추고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쑤욱!
“케엑!”
그 와중에 고블린 한 마리가 빠져서 발버둥치자 재빨리 함정을 가동시키는 흙덩이.
슈슈슉! 슈슈슈슈슉!
삽시간에 피떡이 되어 죽어버리자 남은 두 고블린이 구덩이 안의 동료를 보고 눈을 크게 뜬다.
불릿은 그 모습을 보고 한층 흉악해진 놈들에게 큰 것 한 방을 먹여주려 했다.
“흙덩이여! 왼쪽 주먹 쾅! 오른쪽 함정 가동!”
아직 아무것도 빠지지 않았음에도 지옥구덩이를 움직이라하자 이해할 수 없었으나 흙덩이는 곧이곧대로 행동했다.
흙덩이는 한꺼번에 하나의 기술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동안의 시간은 오로지 불릿이 끌어야만 하는 억겁의 시간.
불릿은 어느새 빼어든 단검으로 고블린을 위협했다.
“흐아앗!”
오로지 놈들의 전진을 막는 용도로 휘두르는 단검은 멋이 없었으나 고블린들의 눈에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왼쪽의 놈이 불릿에게 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오른쪽에 있던 놈이 사납게 달려들고 있었다.
“캬아악!”
침을 질질 흘리며 움직이는 순간, 드디어 흙덩이의 기술이 발동되었다.
- 주먹 쾅…
퍼어억!
불릿이 상대하던 놈의 몸통이 꿰뚫리며 나무에 처박혔고, 오른쪽의 놈이 달려드는 것을 본 불릿이 발로 걷어찼다.
뻥!
“지옥에나 가거라!”
“캬아악-!”
놈은 지옥구덩이에 떨어지면서도 불릿을 잡으려 발버둥을 쳤고, 그 와중에 하마터면 불릿도 지옥구덩이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
파슈슈슉!
콰드득, 슈슈슈!
찍.
놈이 발버둥치는 와중에 떨어져서 그런지 도중에 튄 핏물이 불릿의 얼굴에 묻었다.
“허억, 허억….”
눈알을 굴리며 주변에 적이 없는지 확인하던 불릿은 끝났다는 것을 깨닫자 자리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장난 아니군. 허억.”
원래 불릿의 계획대로라면 지옥구덩이에 하나씩 빠트려 조용하고 깔끔하게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전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놈들의 움직임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고, 그의 반응은 상상보다 느렸다.
드디어 진정됐는지 불릿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이래가지곤 하루에 한 개 조만 잡아야겠어. 연속해서 뛰었다간 내가 죽겠군.”
빠르게 놈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자 계획을 변경하는 불릿.
- 불릿, 괜찮아?
곁에 서서 우물쭈물 말을 못 걸고 있던 흙덩이가 불릿이 원상태로 돌아오자 그제야 말을 걸어온다.
어째서 안절부절 못하며 있었고 하니, 이내 깨달은 불릿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러자 예의 애달픈 눈빛으로 불릿을 쳐다보며 가만히 서있는 흙덩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불안한가? 본인의 잘못이 크구나.’
잘못된 버릇으로 정령하나 버려놓은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해지는 가운데, 흙덩이가 나무에 쓰러진 고블린을 가리켰다.
- 저거, 먹어?
아직도 피가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고블린의 시체를 흙덩이가 가리키며 묻자 불릿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동물이 아니라네. 애초에 마물을 먹는다는 발상을 하다니, 그런 것은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군.”
- 잘못…, 미안…
“딱히 나무라던 것은 아닌데…, 본인이야 말로 사과하고 싶군.”
첫 사냥이 계획대로 되지 않자 흙덩이 또한 의기소침했는지 침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말에 저리도 시무룩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인도 반성해야겠군. 무의식적으로 아직도 중급 정령사인 줄 착각하고 있었어.’
물의 중급 정령사. 그것은 웬만하면 대륙의 사람들이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경지를 말한다.
그러나 하급 정령사는 의외로 많았다. 정령사 자체가 희귀한 직업군에 속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급 정령사까지 귀한 대접을 받진 않았다.
어딜 가나 각 직업군의 최하층은 대접이 좋지 못한 법, 그것은 마법사나 정령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었다.
“크흠, 흙덩이여. 고블린의 사체들을 땅에 묻어주겠는가?”
- 왜?
“아직 놈들에게 발각되면 안 되니 말일세.”
그의 말에 흙덩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멍을 덮는다.
토닥토닥.
기운을 끌어올려 흙으로 구멍을 메우더니 종종걸음으로 그 위에 올라가 손으로 토닥인다.
무슨 짓인가 해서 쳐다봤더니 약간 달랐던 흙의 색이 주변과 동화되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군.’
그리고서 나무에 엎어져있는 고블린을 끌어오더니 남은 지옥구덩이에 던져놓고 잘게 부순다.
슈슉! 슈슈슉!
‘윽….’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기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순간.
흙덩이가 구멍을 메우고서야 불릿은 그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 몬스터의 사체를 훼손했는가?”
- 훼손…? 아아…, 무엇?
“함정의 발동이유를 말하는 걸세.”
- 흙…, 섞어…
“흙이랑 섞어? 왜 그런 짓을?”
- 냄새…없애… 흙으로… 이게 먹어…
그러면서 손으로 송곳니모양을 만들어 파헤치는 흉내를 낸다.
흙덩이의 설명에 불릿도 알게 되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흙의 냄새와 뒤섞어 모호하게 만들고 들짐승이 흙을 뒤집어엎어 먹지 못하게 만든다는 소리군!”
시체를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줄이야!
불릿 자신도 생각지 못한 것을 하급 정령인 흙덩이가 스스로 해내자 불릿은 감탄과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이게 진정 하급 정령이란 말인가?’
아무리 성장가능성이 있는 하급 정령이라 한들 이 정도로 능동적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그가 겪고 봐온 정령들은 시키는 것만 하는 노예나 다름없던 존재들.
그러나 흙덩이는 왕성한 호기심도 그렇고, 하나의 지적생명체라 여겨도 좋을 정도로 뛰어남을 자랑했다.
‘그래도 중급 정령엔 못 미치지.’
중급 정령은 제한적이나마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기에 불릿의 영지가 가뭄걱정을 한 적이 없던 것.
그래도 이만하면 하급 정령으로선 매우 준수하다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불릿은 흙덩이의 머리를 매만지며 첫째 날을 보냈다.
* * *
둘째 날.
이튿날의 사냥도 전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흙덩이가 생성한 함정으로 불릿이 고블린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리고 죽이기를 반복.
다만 전날 너무 어렵게 사냥했기에 불릿은 나무막대기를 만들어 거기에 단검을 장착했다.
그것은 무력이 부족한 불릿이 함정에 고블린을 쑤셔 넣으려는 용도로 만든 것.
“키야악!”
“어허, 가만히 있도록. 찌르기 힘들잖나.”
푹, 푸푹!
“키에엑!”
덜커덕, 털썩.
“좋아, 빠졌군. 흙덩이여, 시작하게.”
- 응…
“키에엑-!”
푸슈슉! 슈슉!
불릿이 창으로 찔러 넣으면 흙덩이가 지옥구덩이를 가동해 놈을 고깃덩어리로 만든다.
이 작전은 꽤 잘 통했다.
일단 조잡한 놈들의 공격에서 한발 떨어져있기에 다칠 염려도 없었다. 게다가 거리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기에 독침이 옷감에 박혀도 살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더 좋은 점은, 창으로 찌르며 놈들을 지옥구덩이에 빠트린 후 나오지 못하도록 눌러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만들었지만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었어.’
지옥구덩이는 구멍의 벽에서 여러 개의 송곳을 동시에 발출한다. 송곳의 길이가 짧기에 둘러싸서 갈아버리는 방식인데,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소환해야 하기에 딜레이가 발생한다.
함정이 발동되기까지의 짧은 시간,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이었기에 전날보다 매우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빠각, 빠가각!
“아쉽군. 오늘도 마정석은 없구나.”
- 미안…
“어허, 그런 말은 쉽게 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가 본인에게 잘못한 점이라곤 일랑 없으니 그러지 말도록.”
불릿은 아침이 돼서야 전날 마정석을 캐지 못한 것을 깨닫고 흙덩이에게 명령했으나 흙덩이가 고개를 젓더니,
- 없어, 없어.
라며 파헤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불릿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흙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알 수 있다니 불릿으로선 수고를 덜었다.
알 수 있다고는 했지만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셋째 날이 되자 불릿은 드디어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반짝반짝!
“으음. 겨우 이것 하나 얻기가 이토록 어려워서야,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채로 햇빛에 반짝이는 이 물체는 바로 마정석이었다.
슬슬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도시락도 떨어진 찰나 타이밍 좋게 마정석이 나와주어 기분이 좋았다.
“일단 흡수부터 하고….”
우우웅……
힘이 모자람을 절실히 느꼈던 불릿은 흙덩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음에도 다짜고짜 흡수부터 하고보았다.
이윽고 마정석이 빛을 잃고 돌멩이로 변하자 천천히 눈을 뜨는 불릿.
“후우우. 어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나. 다 자네를 믿고 본인도 힘을 키울 수 있던 것이야. 본인의 그릇이 커져야 자네도 쑥쑥 크지.”
계약자의 정령력은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 바탕이 크고 거대해지면 보다 강대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원래 약한 정령이라면 보다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불릿이 숲속 한복판에서 마정석을 흡수한 것은 흙덩이를 믿을 수 있기에 행한 일.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저번처럼 거창한 비술을 사용할 게 아니라면 마정석 흡수는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자, 이제 가볼까…, 음?”
문득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숲은 항상 벌레나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으로 시끄러웠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진 것이다.
- 불릿…, 불릿…
거기다 흙덩이까지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안해하자 바짝 긴장한 불릿.
아직 하급 정령에 지나지 않은 흙덩이는 이처럼 생명체가 많은 숲속에서는 영 반응이 느렸다.
그것을 구분해낼 능력이 되지 않기에 벌어진 일.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사고를 불러왔다.
부스럭, 부스럭.
앞뒤좌우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존재에 불릿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생엔 길과 흉이 있다더니…, 그렇다고 하루 만에 이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투덜거리는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의 고블린무리였다.
“크륵, 크르륵….”
“끼기기, 끼긱!”
“끼익, 끼익….”
“흠, 이상하군.”
불릿은 놈들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히 포위해놓고 아직까지도 공격을 가하지 않은 것이다.
성급한 몬스터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통제받는 모습. 이러한 모습에 불릿은 불현 듯 어떤 존재가 떠올랐다.
“그렇군. 족장이 나선 것인가.”
고블린족장. 한 부락의 우두머리이며 모든 고블린들을 다스리는 놈. 말하자면 한 지역의 패자인 셈이다.
놈은 영리하게도 자신의 전사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자 불릿의 존재를 알아채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나선 것이다.
“흙덩이여, 자신에게 당당하게. 은밀함이 사라진 이상 몸을 숨길 필요가 없다네.”
불릿은 자신에게 바짝 붙어 불안함을 보이는 흙덩이에게 귀족의 명예를 가르쳐주었다.
당당함, 그것은 귀족을 귀족답게 만드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가리지 않고 행해야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치욕적이거나 죽음에 가까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 괜찮아?
“흙덩이여. 본인은 수많은 귀족 중에서도 당당히 영지를 거느린 고위귀족, 불릿 폰 바포 백작 ‘진(眞)’이라네.”
- ?
“말하자면, 이런 조잡한 위험은 가볍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뜻일세.”
- ……
자신의 정령에게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불릿은 상관하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인 것엔 변함이 없으나 그 정도가 낮다. 이 정도 역경은 헤쳐나갈 수 있어야 백작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것이다.
그래도 말이 어느 정도는 먹혔는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던 손을 놓고 옆에 나란히 섰다.
“자, 고블린들이여. 본인에게 용무가 있지 않은가? 그대들의 으뜸을 내세워보게나.”
고블린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리 없었으나 불릿이 대화를 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반 고블린들은 몬스터 특유의 흉폭성과 낮은 지능으로 인해 타 종족의 언어를 익히기 어렵다.
그러나 샤먼이나 족장쯤 되는 놈들이라면 단순히 강함만으로 올라설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러니 놈들이 있다면 자신의 말에 답을 할 것이다. 이것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적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한 불릿의 전략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존재가 앞으로 나섰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저녁 6시, 밤 12시 2편이 올라옵니다.
오늘 하루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