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흙덩이 =========================================================================
불릿은 흙덩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몸으로 먼저 보여준 후 말로써 설명을 해주었다.
“방금 보여준 것은 적의 공격을 막으려는 용도로 쓰인다네.”
- 막아…막아…아아아
“그렇지, 이렇게, 막는 것이라네.”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그는 판자하나를 들어 막는 시늉을 하다가 자리에 세워두고 멀리서 돌로 판자를 때렸다.
툭, 투둑.
“이런 식으로 적의 공격을 막는다는 소리네. 역할은 방패이나 크기는 벽 정도로 해줬으면 좋겠군.”
- 벽… 벽…
흙덩이는 특유의 애달픈 눈으로 불릿을 바라보다 이내 앞으로 나서서 행동을 개시했다.
- 벼억…
투확!
땅에서 솟구친 땅의 기운이 뭉쳐 무언가를 형성했는데, 그것을 보고 탄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흙덩이여, 확실히 본인이 시범을 보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본인의 모양을 본뜨라곤 안 했네.”
흙덩이가 만들어낸 것은 불릿과 판박이인 토인(土人)이었는데, 쉽게 말해서 인형이었다.
물론 여러 개를 만들면 적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겠으나 빈틈도 많았고, 무엇보다 불릿 본인의 정신에 좋지 않았다.
“크흠, 나무라는 것은 아니나 적의 공격에 본인의 분신이 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그렇군.”
귀족은 체면을 중시하는 자. 자신을 닮은 인형이 적의 공격에 갈기갈기 찢기거나 터지면 심기가 좋지 않았다.
- 아아아…
흙덩이가 궁금하다는 뜻의 ‘아아’를 연발하자 불릿이 차근차근 설명해가기 시작한다.
“간단히, 이것처럼, 크고 넓게.”
- 아… 크… 넓…
“음? 이 와중에도 말을 배우는군. 여하튼 그런 것이라네, 한번 해보도록하지.”
불릿이 한발 뒤로 물러서자 앞에 남겨진 흙덩이가 손을 꾸물거리며 잠시 멈춰있었다.
그러다 구상이라도 끝낸 것인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간…단…히…
쿠구구-.
땅에서 직사각형을 본뜬 땅의 기운이 올라온다.
- 크… 넓게…
콰과과과!
그것은 점차 크고 넓어지더니 종국엔 가로세로 2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벽을 만들어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불릿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띠며 다가와 벽을 만져보았다.
- 아……
갑자기 흙덩이가 탄식을 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불릿. 그는 갑작스런 상황에 반응할 수 없었다.
퍽.
“크윽?!”
불릿은 자신이 손을 댄 자리가 터지자 고통과 놀람으로 황급히 물러섰다.
“크으윽… 무슨 일이 벌어진 겐가?”
신음성을 흘리는 불릿의 손은 살이 벌어져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흙덩이가 재빨리 다가왔다.
- 아, 아아, 아아아…
“으음. 괜찮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흙덩이가 걱정스러운 듯 상처 난 손을 매만지자 불릿은 고통을 참으며 대답해주었다.
이번에 소환된 흙덩이는 인간계에 무지한 존재. 자신이 하나하나 가르쳐가는 중이었으므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기술을 만들어내는 도중. 불안정할 수 있는 기술을 인간의 손으로 만졌으니 다쳐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괜찮네, 괜찮아. 크게 다친 것은 아니니 마을로 돌아가서 치료받으면 괜찮을 듯하이.”
- 아우아우… 아아우…
아직 제대로 된 소통은 불가능했으나 흙덩이는 도리질을 치며 불릿의 손을 매만졌다.
그것이 멋쩍었던 불릿은 이내 손에서 고통이 느껴지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느낀 그가 손을 빼려고 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보게, 이제 슬슬 상처를 치료하러… 으음?”
스르륵…
피가 새어나오던 그의 손이 천천히 아물기 시작하더니 이내 피가 멎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현상에 불릿은 그저 놀라워만 하고 있었고, 아직도 흙덩이는 그의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보들보들하며 포근한 감촉에 정신을 차린 불릿이 살며시 손을 빼며 이리저리 손을 둘러보았다.
“그것참, 설마 상처까지 치료할 줄이야. 포기했던 능력 중 하나였을 터인데….”
물의 정령의 특기 중 하나인 상처치료능력. 그것을 은연 중 포기하여 공격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능력을 발견했다.
익숙하기에 상실감도 컸던 바로 그 능력, 치유를 말이다.
기분이 한껏 상승된 불릿이 머리를 매만져주자 가만히 서있는 흙덩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가 그만두자 그의 손을 다시금 잡아가려 했다.
“흙덩이여, 본인의 손은 다 나았다네. 짚어보면 본인의 실수가 크니 마음 쓰지 말도록.”
- 아우아우… 아우…
좀체 물러나지 않는 흙덩이를 보고 불릿은 흙덩이에게 다른 말도 가르치려 했다.
“그렇게 마음이 쓰인다면 그럴 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네. ‘미안하다’라고 말일세.”
- 마…음이 쓰인다…
“아니아니, 그것 말고, 미.안.하.다. 말일세.”
- 불릿… 미안…다…
“허허허, 그렇다면 됐다네. 허허허.”
빠르게 기술을 습득하고 그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꺼내놓는 흙덩이. 그것이 기꺼워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는 것도 잊는 불릿의 모습을 저 멀리 숲속에서 누군가 훔쳐보고 있었다.
“미친, 저게 뭐지?”
다음날이 밝자 촌장은 불릿이 수련하는 장면을 훔쳐보고 있었다.
오늘이 약속했던 3일째이니 그가 떠난다면 다른 돈이 더 나올까 털어볼 요량으로 의사를 물어보려 왔었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폭음이 계속되자 기척을 죽이고 몰래 지켜보고 있자니, 이 청년이 보통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건 뭐지? 소녀의 손이 쏘아지고, 이상한 벽도 만들고….”
평생 정령이란 것을 보지 못한 무지렁이인 촌장은 갑자기 나타난 소녀의 정체를 알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촌장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게 만들었으니….
“저게 말로만 듣던 마법? 정령? 그런 것인가? 우왓, 저건 또 뭐야!”
계속되는 폭음에 움츠려있던 촌장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격기에 화들짝 놀랐다.
“지옥구덩이!”
- 지옥… 구덩이…
새로운 기술이라도 만든 것인지 바닥에는 구멍이 생기며 커다란 나무가 갑자기 반쯤 밑으로 쑥 빠진다. 그리고 구덩이의 벽에서 송곳 같은 것들이 찔러대자 잘게 부서지며 사라지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바닥에 누워 아가리를 벌린 채 입안에 들어온 먹이를 씹어 먹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삽시간에 커다란 나무가 사라지자 그는 오들오들 떨며 그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으,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저 소녀를 다루는 것을 보니 평범한 사람이 아니구나.”
그가 공포에 떨며 바라보는 불릿이 소녀에게 지시를 내리자 소녀가 그에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을 보고 그가 윗줄에 놓였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머리가 약간 모자란 사람일 것이다.
이 와중에도 불릿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쿠드드득-
“오, 오오오….”
이번엔 무얼 시킨 것인지 땅이 꾸물꾸물 움직이는데, 저 위에 누군가 서있었다면 바로 주저앉을 만큼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기억을… 되찾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헤실헤실 웃으며 1골드라는 거금을 싸구려 식량 3일치와 맞바꾸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보복이 두려웠던 촌장은 망설이던 끝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불릿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후우, 지치는군.”
- 지치…는군, 지치는군…
“자네는 ‘힘들다, 지친다’ 이렇게 말해도 좋네.”
- 지친다, 힘들다… 아아…?
휴식을 취하면서도 궁금해하는 흙덩이에게 이것저것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흙덩이도 자신의 곁에 앉혔는데, 정령이 육체적으로 힘들어할 리는 없지만 외관이 소녀라 못내 신경 쓰였으리라.
그러한 가운데 그들에게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쥐새끼처럼 숨어보더니 이제야 나타나는군.”
그는 진즉에 누군가 숨어있음을 알아챘으나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혼란스러운 세상, 자신도 이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들의 앞에 다가선 촌장. 당당하던 그의 기색은 어디로 가고 우물쭈물 안절부절 못하는 겁쟁이만이 놓여있었다.
“간밤에 편히 쉬었는가?”
“그럭저럭 쉬었습니다. 한데, 무슨 일로?”
다행히 불릿이 자신을 박대하지 않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헛기침을 뱉으며 말을 잇는다.
“크흠, 아, 아무래도 내가 돈 계산을 잘못한 것 같으이. 산골무지렁이인지라 그런 것이니 자네가 이해하게.”
“괜찮습니다. 돈값만 제대로 해주신다면 저도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놈, 어제의 그놈이 아니다!’
대화를 나누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자는 기억을 되찾았거나, 잃은 척을 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무력까지 구경한 뒤라 식은땀이 줄줄 흘렀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동굴은 좀 어떻던가?”
촌장의 말에 불릿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일단 너무 습하고, 춥습니다. 게다가 더럽기가 장난이 아닌지라 사람이 살 곳이 못 되겠습니다.”
“그, 그런가?”
“예. 그러니 마을에 제가 살 곳도 만들어주시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이상하군요. 1골드면 도시에서도 얼마간은 배부르고 등 따시게 지낼 수 있는 것을.”
자신의 지식까지 드러내며 촌장에게 대꾸하자 그는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겠지? 크흠, 큼. 아, 알겠네. 내 만들어보도록 하지.”
“그럼 저는 수련을 계속할 테니 저녁에 돌아가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시지요.”
“으, 으응?”
“그 정도도 못하시면 저는 남은 금액을 회수하고 다른 곳으로 찾아갈 수밖에요.”
시종일관 불릿에게 이끌려 다니던 촌장은 그가 전날 자신이 속여먹었던 얼치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게다가 1골드도 내놓기 싫었기에 촌장은 고개를 끄덕일 방법밖엔 남지 않은 상황.
결국 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알겠네. 식사는 매 끼니 제공하고 숙소는 여관이 없으니 마을주민 중 한 가족과 지내야할 걸세.”
“저는 촌장님 댁도 괜찮습니다만.”
“아, 아니. 그 가족과 지내면 더 편할 걸세. 빨래도 해주고, 식사도 차려주고. 크흠, 큼.”
이미 겁을 집어먹을 대로 집어먹은 상황에서인지 촌장은 불릿과 함께 지내길 꺼려하는 모습이었다.
불릿도 그걸 알기에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여기나 저기나 별 차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그럼 이따 봄세.”
“예, 그럼 이따가 보시지요.”
섬뜩해진 촌장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고, 불릿은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겁을 먹어도 너무 집어먹은 것은 아닐지…. 그래도 정체를 드러내진 않았으니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하겠지.”
굳이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기에 청년연기는 계속했으나 어설픈 수법에 당하기는 싫었기에 자신을 약간 보여주었다.
이제 기억상실증연기는 그만둘 테니 알아서 모셔라, 이런 의미.
“자, 휴식도 취했으니 수련을 계속함세.”
- 아아아… 수, 수련…
“그래그래, 수련일세, 수련.”
- 주먹 쾅…
하나의 주먹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며,
콰광!
- 쌍주먹 쾅…
다시 흙덩이의 두 주먹이 목표를 강타했다.
콰과광!
- 돌벽…
가로세로 2미터의 돌로 된 벽이 솟아나 앞을 가린다.
콰드드득!
- 지오, 옥구덩이…
땅에는 원형의 구멍이 생기며 그 안에 송곳 모양의 가시가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푸확-, 피슉! 피슉! 슈슉!
“그만. 잘했네, 흙덩이여.”
불릿의 명령에 기술을 연속해서 선보이던 흙덩이는 주변을 원상복귀하고 쪼르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선 불릿의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위에 올리니 그가 마지못해 머리를 쓰다듬는다.
원래 체면상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으나 흙덩이는 명령이 끝난 직후엔 항상 이것을 바라왔다.
해주질 않으면 해줄 때까지 ‘친밀, 의식’을 반복하며 말하니 그도 반쯤 포기하고 해주는 상황.
스윽스윽.
“커허험, 어흠.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겠군.”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연마하니 녹초가 된 불릿. 그는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본론을 꺼내놓았다.
“흙덩이여, 오늘은 본인이 지친 까닭에 여기까지만 소환하겠네.”
- 아, 아아아…
무슨 뜻이냐는 의미의 ‘아아’. 그것을 알아들은 불릿이 재차 답을 주었다.
“소환, 그만, 내일 다시.”
- 친밀, 친밀, 친밀…
말의 뜻을 알아챘는지 흙덩이는 자신의 머리에 놓인 손을 붙잡고 친밀을 외치며 놓아주질 않았다.
난감해진 불릿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자네가 어디에 있었는지 본인은 알 수 없으나,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할 수 있다네.”
============================ 작품 후기 ============================
내일도 5연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낮 12시, 3시, 6시, 9시, 밤 12시 순이니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