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땅의 하급 정령 =========================================================================
의기소침해진 불릿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후, 그래. 이미 끊긴 인연에 연연해봤자 추하기만 할뿐!”
그러면서 물을 버린 주머니를 도로 회수해 품에 챙겨 넣고선 동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밖에서 자기 머리만한 돌덩이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쿠웅!
“헉, 헉. 물이 안 되면 땅이지. 역시 정령은 자고로 땅속성이야!”
마법진의 중앙에 돌덩이를 두고서 땀을 닦아낸다. 그는 물과 상성이 좋은 땅을 선택했는데, 현재 물이 안 되니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이번엔 많은 걸 바라진 않으마. 괴상하게만 나타나지 말아다오.”
정령은 대개 사용자의 바람에 의해 육체를 구성한다. 강력한 마음으로 형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중간계에 몸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육체는 다음 계약자를 찾지 않는 이상 유지된다. 그러니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던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 물의 정령들이 불만어린 시선을 보내왔던 것이다.
“후우, 그럼, 간닷!”
마정석을 손에 쥐고서 다시 시도하는 소환의식.
“풍요의 상징, 대지여. 나에게 그 이삭을. 삶의 터전, 땅이여.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물의 정령과는 다른 소환용어. 정령사들은 다들 이렇게 자신과 맞는 속성에 관련된 용어를 외우고 다녔다.
그의 경우는 차선책이었지만.
“땅이 있기에 우리가 있음이요, 우리가 있음에 땅은 한결 풍요롭더라.”
“그리하여 가이아가 이르길, 내 아이여 행복할 지어라.”
마지막 말은 땅의 정령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아부였다.
정령들이 좋아할 말을 외우는 것은 정령사들에게 있어 필수. 그는 성격상 정령에게 아부를 못했기에 상급정령을 보지도 못했다. 사랑받는 것은 정령들을 상대로 눈요기를 할 때부터 불가능했고.
정령들도 알 건 다 알았다.
“땅의 하급 정령, 흙덩이! 부름에 답할지어다!”
땅의 정령들은 희한하게 흙이나 돌 같은 단어가 들어간 것을 좋아했다. 이상하게 여기지 말도록.
- 우우웅!
“오, 오옷! 드디어!”
마법진이 공명하며 마정석의 기운이 몸 안으로 빨려드는 감각을 느꼈다.
어째서 물이 아닌 땅인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든 좋았다.
“나와랏, 땅의 정령이여어어어!!!!”
흥분한 불릿이 목청껏 소리치자 그와 동시에 돌덩이가 사라지고 무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오오!”
공명음이 끝나고 나타난 것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정령이었다.
“이번엔 바라지도 않았는데…, 이번 정령과는 궁합이 잘 맞겠군!”
* * *
“하아, 답답하기 그지없군.”
“혹시 본인이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는가?”
“말해보게, 어째서 그러고 있는 것인지.”
“예전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겪은 것인가?”
“무언가 불만사항이 있다면 들어보고 내 수용할 의양이 있다네. 일단 입부터 열어보게.”
- ……
소환된 땅의 하급 정령, 흙덩이는 말이 없었다.
본래 소환된 정령들은 처음 소환되면 마음이 들떠 말이 많았다. 하물며 하급 정령은 되도록 세상과 접촉하는 게 좋았다. 그래야 사용자의 정령력과 융합해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말을 안 하는가! 계약을 맺었으면 소통이 오고가야 하지 않은가?!”
- ……
극도의 고요. 정령이 대꾸를 안 하자 불릿 혼자서 허공에 대화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비록 피부의 색은 누런 황토색이었으나 그 미색만큼은 대단했다. 애달파 보이는 눈과 가녀린 신체, 흙답지 않은 찰랑거리는 머릿결. 그야말로 미소녀였다.
- ……
근데 말을 않는다. 그저 뚫어져라 불릿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니 그로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다시 되찾은 정령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
그는 다시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는 끔찍한 경험을 겪고 싶지 않았다.
“혹시 어디 아픈 겐가? 응?”
- 사…
아프냐는 말에 드디어 입을 떼는 하급 정령 흙덩이. 그 덕분에 그는 한껏 기대를 품게 되었다.
“오오! 그래그래, 어디 한번 속 시원하게 풀어보게나!”
- 사…
“그래, 사? 사 뭔가?”
- 사…
“사! 죽을 것 같이 아픈가?!”
자꾸 ‘사’만 반복하자 살짝 짜증이 난 불릿. 이윽고 정령이 완성한 말은 다음과 같다.
- 사… %^$%@$#!&[email protected]$#…
그것은 정령어였다. 이 정령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것이었다.
* * *
“어이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아니, 정령이 언어를 몰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정령은 인간보다 뛰어나다. 그들은 소환의 형태를 빌어 중간계에 나타나지만 실체화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언제나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바다, 산, 들, 강, 심지어 하늘까지.
다만 각 정령마다 특색이 있어 아주 가끔 이렇게 말을 못하는 정령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 말하지 못하는 종족도 있나? 이 정령은 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것이야?”
땅의 정령은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한 곳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가끔 등장하는 말 못하는 정령은 대부분 땅의 정령에게서 나왔다.
“어디 심층에 있다 왔나? 지상이라면 수백 년에 한 번이라도 누군가 발을 들이밀었을 텐데.”
하다못해 바람의 정령이 곳곳을 다니며 정보를 물어다 준다. 정령계의 파발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바람의 정령. 근데 이 정령은 어디에 있었길래 단 한마디 ‘사’밖에 못하는 것일까?
“끙. 하필 소환을 해도 이런…, 이크. 크흠.”
말조심을 해야 좋을 것이었다, 그로서는.
“크흠. 근데 계약은 어떻게 성공한 것일까? 말도 못 알아듣는데.”
정령들이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이유. 말을 모르면 계약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령들도 더 크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 그 중에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인간과의 계약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 등장하는 벙어리 정령이 희귀한 이유. 말도 못하는데 계약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서 그렇다. 물론 계약은 못 맺었지만.
“진짜 희한한 기사(奇事)로군. 혹시 명령만 알아듣는 것인가?”
문득 그것이 궁금해진 그는 흙덩이를 소환했다.
“으흠, 흙덩…이? 저어기, 동굴 안에 보이는가?”
불릿은 그가 나온 동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흙덩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가리킨 동굴입구로 애달픈 시선을 돌렸다.
“옳지, 그래 저기. 저기 안에 있는 것들을 몽땅 다 밖으로 내다주겠나?”
- ……
“너무 어려웠나? 그러면 여기 돌, 돌이 있잖은가? 이걸 저기로 옮겨보게.”
- ……
그의 연속된 명령에 단 하나도 응답하지 못하는 흙덩이. 대체 소환명령은 어떻게 알아듣고 나타나는 걸까?
“흙의 하급 정령이여, 본인을 따라와 보겠는가?”
그러면서 흙덩이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 불릿. 흙덩이는 특유의 애달픈 눈빛으로 멀어져가는 그를 지켜봤다.
“어, 어? 옳지옳지! 그래, 따라오는 것이야!”
- ……
흙덩이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으나 묵묵히 그의 뒤를 쫓아왔는데, 불릿은 드디어 하나 시켰다며 기뻐한다.
그렇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흙덩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불릿은 이번엔 다른 명령도 시켜보기로 했다.
“정령이여? 한발자국만 움직여보게.”
- ……?
“흙덩아. 여기로. 여기. 여기 말일세, 여기.”
- ……
잠깐 갸웃하는 듯했으나 역시 묵묵부답. 명령 또한 실행되지 않았다.
결국…….
“답답하군, 답답해! 여기라고, 여기!”
차마 정령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던 그는 뒤돌아서서 산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제발 말귀 좀 알아들어라!”
알아들어라…
알아들어라……
알아들어라………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누군가가 연상되는 장면이었다.
그 와중에도 흙덩이는 애달픈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 ……
“흙덩이여, 본인의 이름은 ‘불릿 폰 바포’ 백작이라 하네.”
- ……?
“으음. 본인의, 이름은, 불릿 폰 바포. 이해했는가?”
- 본인… 본인…
무얼 지칭하는지 모르는 건가. 설명을 돕기 위해서 불릿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불릿 폰 바포. 불릿 폰 바포.”
- 부…릿, 부릿…
“끄응. 다시 해보게.”
불릿은 흙의 하급 정령, 흙덩이에게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고 있었다.
이 정령은 도대체 어디에 짱박혀 있다가 나온 것인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해력이 나쁜 것은 아닌지 따라하려는 의지를 보여서 알려주고는 있었으나 진도를 나가는 것이 쉽진 않았다.
“자, 다시. 본인의 이름, 무엇인가?”
- 바아…포…, 부울릿 폰 바포오…
“그래, 옳지! 잘한다, 잘했어!”
드디어 이름을 외우는 것에 성공하자 그것이 기특했는지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불릿.
흙덩이는 그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다 착각했는지 자신의 머리위에 올라온 불릿의 손을 붙잡았다.
덥썩.
- 아…, 아? 아아……
“음?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군.”
불릿이 손을 내리려했지만 흙덩이는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한손으로 붙잡고선 같은 말을 반복했다.
- 아, 아아…, 아아아? 아아……
“호오, 이것도 궁금한 것이더냐?”
불릿이 흙덩이를 가르치며 알아낸 것. 무언가 궁금할 때엔 ‘아아’라는 말을 언급했고, 이해했을 때는 가르친 단어를 연속해서 반복했다.
“이것은…….”
흙덩이에게 머리를 쓰다듬은 행위를 가르쳐주려던 불릿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백작 체면에 ‘귀여워서 쓰다듬었다’라는 것은 어찌 보면 체면이 손상될 수도 있는 행동.
근엄해야할 백작이 함부로 타인의 머리에 손을 얹다니, 자기 스스로 깎아먹는 행동이었다.
그가 얼굴을 굳히자 흙덩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손을 흔들었다.
- 아, 아아, 아……
“이것은, 이것은….”
- 아아…?
“이것은…, 계, 계약자간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의식이라네.”
- 아아아…?
흙덩이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단어를 익혀나가는 와중인데 이런 복잡한 단어의 조합을 이해할 리 만무.
불릿은 그 나름대로 당황했다. 물의 정령들의 모습을 감상하긴 했어도 이렇듯 감정을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저 아름답기에 본다, 그것일 뿐이었는데….
“몸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인가?”
- 아아, 토, 토옹제에…
“끄응,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
- 끄응……
자신의 혼잣말을 따라하는 흙덩이를 보고 고개를 젓자 그 모습 또한 따라하려는 흙덩이.
불릿은 입조심을 명심하며 다시금 교육을 시작했다.
“본인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 불릿… 폰 바포…
“맞다네. 그렇다면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 ……
“자신을 가르키는 단어는 ‘나’라네, 따라해보게. 나.”
- ……
“따라해보게. 나.”
- 나아아아……
흙덩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불릿. 이건 숫제 유아교육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자, ‘나’는 불릿 폰 바포 백작. 당신의 이름은?”
- 나, 나아아…
“음, 더 간단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불릿 폰 바포.”
좀 더 짧게 줄인 후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이름을 밝힌다. 그리고 손가락을 흙덩이에게로 돌리며 이름을 묻자 드디어 흙덩이가 다른 말을 꺼냈다.
- 나, 나아아…, $^$%#^&$%&……
“끄으응! 정령들과의 접촉 자체가 없는 것인가? 인간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도통 모르는군!”
정령들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면서 기본적인 정령사와의 소통에 대해서도 학습한다.
방법까지는 모르겠으나, 소환했던 물의 중급 정령 엘레노아를 통해 알아낸 사실.
그들끼리 이름을 따로 부르는지, 아닌지는 정령들이 밝히지 않았기에 모른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해선 인지하고 있어야 했을 터인데…
“간신히 소환했건만 당장 써먹을 수도 없겠군. 명령을 이해 못하는데 어쩌겠나?”
불릿은 짧은 탄식을 터뜨리며 고생길이 훤하다는 것을 예상했다.
당장 이 상태로 영지에 복귀해봤자 하등 도움 될 것이 없기에 전력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러한 와중에 이러한 의사소통의 부재는 큰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 아아아, 아아…
톡, 톡.
그가 고민에 빠지자 멍하니 앉아있던 흙덩이가 일어서 다가왔다.
앉아있는 폼조차 불릿을 따라했으니 완전 아빠 따라하는 아기와 비슷한 양상.
흙덩이가 주절거리는 불릿을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아차 하는 심정으로 흙덩이를 바라보는 불릿.
“무슨 일인가?”
- ^#$^&^$%##……
“뭐라고 하는 거지?”
============================ 작품 후기 ============================
9시, 12시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