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할리우드의 영화 촬영 (41/51)

4장 할리우드의 영화 촬영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게 리처드 레이 감독은 모든 배우에게 대본을 외우라고 강조했다. 이미 외우고 있었던 민후의 경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고 다른 배우들도 토를 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할리우드의 촬영은 더욱더 감독의 말이 우세를 보인다. 그리고 배우들도 자신들의 연기력도 한몫하지만 실질적으로 영화의 성공을 이끌어가는 것이 감독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만들고 동작을 연습할 체육관으로 배우들이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예 모든 스케줄을 뒤로한 상황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CF 몇 건, TV 출연 몇 번 하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영화 촬영을 더욱 잘하는 것이 의미 있고 더욱 성공할 수 있는 길임을 아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촬영에 임하고 있어도 CF나 TV 출연 등 얼굴을 알리는 행위를 자주 하나 할리우드의 경우 ‘하나에 딱 집중하자!’라는 생각이 굳건히 박혀있는 듯싶었다.

무술팀 인원은 상당했다. 국내의 무술팀이 20여 명 정도가 팀을 이뤄서 움직인다면 이곳은 총 80여 명의 전문 스턴트맨들이 있었다.

할리우드는 방대한 영화를 자주 촬영하기도 하기 때문인 듯싶었고, 그들 모두가 딱 보기에도 탄탄한 몸을 보였고 듣기로는 영화 ‘스파르타’에서 쩍 갈라진 복근을 드러낸 이들이라고 한다.

무술 감독은 로버트 마이클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무술 감독이었으며 그만큼 엄격했다.

스턴트맨들은 마치 군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뛰어도 열을 맞춰서 뛰었고 기합을 넣었다.

민후에게도 혹독한 과제가 주어졌다. 분명 그는 군더더기 없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다른 할리우드의 남자 배우들도 민후의 몸을 보고 감탄을 크게 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스톰 쉐도우 자체가 날렵해 보이는 이미지였고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어야 했다. 로버트 마이클은 날렵해 보이는 몸을 원했고 그러면서도 단단한 몸을 만들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후에게 하루에 닭가슴살 200g과 견과류 몇 개, 샐러드 등의 식단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 민후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미 그 정도 각오는 끝내놓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민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스턴트맨들에게 오디션장에서 보여주었던 동작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타탓!

팟!

수웅, 수웅.

탓!

수우웅!

그는 빠르게 쌍검술을 휘두르면서 나비처럼 날고 벌처럼 쏘듯이 움직였다. 스턴트맨들은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배우 강민후의 움직임이 대단했다.

“이 동작 본인이 만들었나요?”

“아뇨. 알고 지내던 관장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누구신지는 모르시겠지만, 검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아요. 아주 좋아요. 짧고 간결하잖아요. 근데 조금 아쉽게도 영화라는 게 더욱 멋이 들어가야 좋으니까요.”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작을 만든 이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장관장의 우려처럼 그가 만든 동작과 무술팀이 요구하는 동작은 달랐다.

스네이크 역할의 경우 체중을 실으면서도 강한 공격을 목적으로 하고 쉐도우의 경우는 민첩한 손놀림과 여러 차례 끊어서라도 상대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가는 검술식으로 표현할 거라고 여겼다.

민후의 앞으로 쌍검술을 든 이가 있었다. 일본인이었다. 나카츠카 타케시라는 친구로 스턴트맨이 되고 싶었고 확실하게 배우고 싶어 할리우드까지 넘어온 친구라고 들었다.

가라데와 더불어 이도류에 능통한 친구라고 들었는데, 쌍검술도 수준급의 실력이라고 하였다.

타케시는 167㎝ 정도의 작은 체구였고 눈매는 무서웠으며 코는 뭉툭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환상적이었다. 와이어를 매달고 있는 그는 5m 높이의 점프대에서 단숨에 뛰어내렸다. 양팔로 칼을 옆으로 쭉 뻗으며 날아오는 그의 모습은 무척 멋졌다.

바닥에 착지한 그는 오른손, 왼손을 좌우로 한 번 움직이고 양팔을 펼치면서 몸을 두 바퀴 돌렸다. 그러고는 땅을 박차고 와이어의 힘을 받아 허공으로 높게 도약하더니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며 두 개의 검으로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내리쳤다.

땅에 착지한 그는 거친 기합을 흘렸다.

“히야아압!”

좌우로 적이 온다고 생각하고 한 이의 검을 막아내고 바로 옆쪽에 있는 이의 복부를 찌른다. 방금 전 검을 막아낸 이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린 후 단숨에 목을 베어낸다!

그의 움직임을 보면서 민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난 스네이크일까.”

“그래도 스네이크는 정의의 사도잖아요.”

옆에서 파크가 한탄을 한다. 자신도 저와 비슷한 동작을 펼쳐야 했다. 실상 두 사람은 성향이 달랐다. 쉐도우는 빠르다. 스네이크는 짧고 강하다. 하나 두 사람이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는 스토리라 기본적인 틀은 모두 같았다.

파크는 나이가 적지 않았다.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본다. 그런 그가 스네이크 역할로서 멋진 검술을 소화해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검술을 모두 펼친 타케시가 다가왔다. 그가 민후와 파크를 집중적으로 맡아서 가르쳐주기로 되어 있었으며 이 안에 있는 동안만큼은 타케시는 민후와 스네이크를 전담하고 항시 옆에 붙어있을 것이다.

“잘 봤습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방대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일본어를 잘하시는군요.”

타케시는 민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활기를 띠었다. 그의 일본어 실력이 너무 능통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파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도 현재 일본어 공부에 한창이었지만 그게 쉽게 되지 않았다.

곧 타케시가 민후와 파크에게 기초적인 동작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타케시에게 집중했다.

다른 나라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민후가 영어에 능통하다고 해도 서로 말하고자 하는 의견이 엇갈릴 수도 있었고, 아시아인인 민후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집이 최고다, 라는 말이 실감 나는 때였다. 그래도 어떻게 익숙해져 2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준비 기간을 끝내려면 한참은 먼 상황이었다. 그나마 차츰 배우들의 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할리우드 액션의 대부분은 대역을 쓰지 않는다. 모든 위험을 몸으로 부담해야 했다. 그 때문에 준비 기간 동안 동작을 익히고 수백 번을 맞춰 보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민후는 숙소에서 페이스북을 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어머니와 새아버지, 혜인이가 다정하게 해돋이를 보러 간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 자리에 자신도 껴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민후의 나이가 스물아홉이 되었다. 정말 적지 않은 나이를 먹어버렸다.

“으크! 오늘도 이렇게나 많이 왔네.”

그나마 그런 민후를 달래주는 건 매일같이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서 날아오는 팬들이 보내주는 선물과 편지였다. 정수의 양팔로는 산더미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바닥에 우르르 쏟아내고는 다시 밖에 나가서 이번에는 상자로 보내진 우편물을 가져왔다.

민후는 그래도 팬들이 보내준 선물은 꼬박꼬박 확인하고 편지를 읽는 편이었다. 그가 듣기로 어떤 이는 귀찮다고 팬들이 준 것을 그대로 버리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만심이며 미친 짓이다. 아무리 자신이 바쁘다고 정성을 버린다는 건 민후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사생팬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민후는 편지를 읽고 상자를 커터 칼로 개봉해서 보았다. 간식거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라면들도 상당했다.

확실히 가장 힘든 건 먹을거리였다. 마이클은 혹독한 관리를 시키지만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원하는 것을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정말 1년간 그렇게 산다면 사람은 미쳐버릴 것이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이다.

매일 닭가슴살과 샐러드, 견과류 등만 먹다가 어떤 때는 스파게티를 먹고, 어떤 때는 유명하다는 수제 햄버거를 먹기도 했지만 역시나 한국인에게는 한국 음식이 최고였던지라 차라리 그런 날에는 정수와 함께 숙소에서 김치찌개 등의 요리를 해 먹고는 한다.

“아그, 너희 어머니가 해주시는 밑반찬 먹고 싶다.”

“저도요.”

정수의 한탄에 민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도 한참은 더 이곳에 있어야 했지만 벌써 집이 그리워진다.

띠링.

-민후 보고 찌푼데에에에!

노트북에서 울리는 페이스북 알림에 확인했다. 윤하였다. 윤하와 자주자주 통화하고 있었고 영상통화도 하고는 하였지만 실제 살결이 맞닿는 것과 영상통화는 확실한 차이가 분명 존재했다.

민후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도 보고 찌푼데에에……!

-헐? 그럼 빨리 와.

-1시간 내로 갈게.

-에이…… 거짓말……ㅠ

-……ㅠㅠ 4개월 남았어. 좀만 참아.

-4개월…… 흐규흐규.

이제 스물아홉. 어른이라면 어른인 나이지만 두 사람의 연애에는 풋풋함이 항상 남아있었다. 6개월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연습에 들어가고 또 촬영 준비가 완전히 마무리되면 다시 한국에 들어갔다가 1년을 넘는 기간 동안 쭉 할리우드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민후는 외로운 밤을 윤하와의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서 달래고 있었다.

탁! 탁탁탁!

타케시와 민후의 목검이 부딪쳤다. 주로 공격은 타케시가 행하였고 민후는 막으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생각보다 타케시는 실력자였다.

하물며 타케시가 가르쳐준 틀에 의존하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음대로 목검을 휘두른다면 민후의 실력이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틀을 지켜야 했다.

수웅!

탁!

민후가 기회를 노려 하단을 공격했으나 목검이 막아냈다. 곧 오른손으로 공격하려 할 때 목검이 턱 끝에 닿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현재 타케시의 쌍검술을 거의 따라잡아 가고 있었다.

타케시는 무척 놀라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자신이 1년을 넘게 연습한 것을 흡수해내는 강민후에게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련을 끝내고 타케시가 건네는 물을 받았다.

“정말 잘해요.”

“감사합니다.”

타케시와 민후의 키 차이가 크게 났기에 민후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20분 정도 쉬고 타케시는 파크와 검을 맞추기 시작했다.

타케시와 마주 선 쌍검을 쥐고 있는 파크의 팔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도 사실 대단한 배우였다. 중년이었으나 멋있는 몸을 만들어냈고 생각보다도 뒤처지지 않고 있었다.

민후는 앉아서 물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배우들도 한창이었는데, 제각각 맡은 것에 대한 연습을 충실히 행하고 있었다. 그중 채닝 테이는 와이어를 매달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나리오에서 그가 파워슈트를 입고 적을 쫓는 장면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 슈트를 입고 내달리지는 않고 CG 처리를 하겠지만 채닝 테이의 경우 파워슈트를 입었다고 가정하고 몸을 움직이는 동작을 연습하고 있었고 와이어를 달고 자주 연습했다.

“난 아이언 보이다! 푸슈우웅!”

와이어를 매달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선 채닝 테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면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육중한 갑옷을 입고 있다고 가정하고 걷듯이 움직여보는 자세를 취한다. 그의 동작도 꽤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맞춰놓은 동작대로 한 번 높게 도약한 후 바닥으로 내려섰다. 한데 내려선 순간 그의 발이 그대로 꺾였다.

“억!”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가 바닥에 넘어졌다.

그가 바닥으로 넘어지자마자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민후도 발목을 부여잡으면서 쓰러진 그를 향해 뛰어갔다.

“채닝 테이!”

“이런……!!”

순식간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갔다. 채닝 테이가 어쩌면 세계적인 스타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나 사람과 사람 사이라면 누군가 다쳤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민후는 조심스럽게 그의 발목에 손을 뻗어봤다.

“아야야! 크윽! 아프다, 후!”

“괜찮아요?”

“별로 괜찮지 않아. 이거 내가 너무 까불었어.”

어쩌면 와이어가 문제가 있을 수도, 정말 채닝 테이가 너무 까불어서 이렇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채닝 테이는 쿨하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얼버무렸다. 로버트 마이클은 화가 단단히 난 듯싶었다.

스턴트맨들에게 와이어 점검하라고 외치면서 한 번만 더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면 모두에게 큰 기합을 주겠노라고 큰소리쳤다. ‘이럴까 봐 그런 건데…….’라고 채닝 테이가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이 피해를 보게 하지 않기 위해 무조건 자신 탓이라고 했어도 먹히지 않았다. 채닝 테이는 어떻게 보면 멋진 남자였다.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려고 한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바보 같기도 했다. 어떠한 것이 문제가 있는지 확실시하게 따져볼 줄 아는 생각도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채닝 테이의 그런 언급은 남에게는 바보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는 좋게 보였다.

“일단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민후의 말에 채닝 테이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또 기자들이 오겠군.’ 하는 표정이다.

다행히도 채닝 테이가 입은 부상은 심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삐끗하였다고 하고 와이어 점검 결과에서도 와이어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정말 테이가 좀 까불다가 다친 것이다.

우스운 해프닝이었지만 일주일 만에 그는 다시 연습하러 나왔고 다시 순탄하게 연습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총 기간 10개월,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드디어 준비 기간을 마무리하고 일주일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일주일간의 휴식 기간이 끝이 나면 배우들은 매일같이 함께 생활하다시피 할 것이다.

촬영 기간은 현재 최소 1년에서 1년 6개월로 책정된 상황이며 더 오래 걸릴 수도, 짧게 걸릴 수도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정수와 함께 내린 민후는 감회가 새롭다.

마치 군인일 당시 휴가를 나왔다가 버스 안에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깥 풍경을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그가 나오자마자 플래카드와 더불어 기자들이 빼곡하게 보였으며 기다리고 있던 안전요원들이 민후의 곁에 붙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별, 할리우드의 스타 강민후! 반갑습니다!

-할리우드의 별 강민후 사랑해요!

민후는 팬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 빙긋 웃었다. 할리우드의 별이라. 별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너무나 작은 별이라는 게 흠이다. 물론 자신의 나이가 아직 어리기에 크게 상심하진 않는다.

팬들과 기자들은 뜨겁게 강민후를 반겨주었다.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고 온 선수를 반겨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틈에서 민후가 가장 반가운 것은 다름 아닌 가족과 윤하였다.

민후가 해외에 가 있는 동안 이미 어머니와 윤하는 안면을 트셨다. 듣기로는 윤하가 직접 어머니의 가게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무척 친해진 것 같았다. 자주자주 페이스북을 통해 함께 찍은 사진이 게시되기도 하였고 어머니는 게시 글에 ‘우리 며늘아기가-’라고 써서 올리기도 했다.

이젠 정말 결혼만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후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안아 드리고 윤하를 안아줬다. 혜인이는 6개월 안 본 사이에 키가 훌쩍 컸다. 새아버지는 이젠 가족들 틈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시게 되었다.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이 양반들은 지치지도 않나, 우리보다 더 빨리 와서 기다리더구나.”

새아버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가족들도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겠지만, 기자들과 팬들은 더 빨리 왔을 것이다. 조금 우스운 일이긴 했으나 그만큼 강민후라는 배우가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뜻일 것이다.

가볍게 인터뷰를 마친 후 집으로 향했다.

현재 또 집을 이사했다. 80평 가까이 되는 넉넉한 집이었다. 30억을 웃도는 가격인 것으로 아는데, 순전히 민후의 돈은 포함되지 않은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돈으로 얻은 집이었다.

물론 민후의 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듣기론 계속 번창하던 어머니의 가게가 국내에서 브랜드만큼의 값어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국내에 체인점이 3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늘어난 상황이었으며 계속해서 가게를 내고 싶은 이들이 나온다고 들었다.

또한, TV에서도 광고할 정도로 유명해진 상태였고 어머니는 수십억 재벌 CEO가 되셨으며 얼마 전에는 책에도 나오시기도 했다. ‘성공비법’이라는 책이었는데 ‘우리나라의 10명의 100억 부자들’이라는 것으로 가난했으나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물론 민후는 단숨에 책이 나오자마자 정독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라는 부분에서 웃음이 나왔었다.

집은 눈에 익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이라는 생각만 하면 숙소와는 다른 편안함이 생겼다. 민후는 오랜만에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었다.

물론 내일부터는 다시 이런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촬영까지는 일주일이 남은 상황이었다. 만약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먹어대다가 살이 찌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어이가 없지 않겠는가.

“두 사람,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잡채를 집어 먹었던 민후는 목이 메어 콜록대었다. 윤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새아버지도 한몫 거드신다.

“민후 영화 끝나고 하면 서른이야. 이제 슬슬 해야지.”

“그렇죠.”

민후는 물을 마시고는 답했다. 슬슬 정말 해야 했다. 민후가 촬영을 끝내면 서른 살에서 서른한 살이며 해외 곳곳을 돌며 홍보를 하면 서른두 살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느덧 정말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있었다.

“엄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남자 셋 여자 셋만 낳았으면 좋겠구나.”

“우아! 그럼 나 동생이 여섯 명 생기는 거네?”

혜인이가 되레 좋아했다. 윤하는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목구멍 끝까지 ‘어머님- 그러다 저 죽을 수도 있어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기색이었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결혼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민후가 조금 얼버무렸어도 윤하는 크게 서운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행이었다. 일단은 할리우드 촬영이 끝난다면 여유 시간을 생각해서 그녀와의 결혼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빠, 근데 약속은 언제 지킬 거야?”

“응?”

그런데 난관이 하나 더 생겼다. 두 눈이 똥그랗게 크고 천사 같은 혜인이 눈을 앙증맞게 뜨면서 한 말이다.

“무슨 약속?”

“우리 학교 오기로 했잖아! 친구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놀린단 말이야.”

“아…….”

민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결혼식 날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도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혜인이 친구들이 안 믿는다더라.’, ‘동심은 지켜주라고 있는 거네.’라고 말씀하셨다.

민후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가야지.”

“언제?”

“내, 내일.”

“정말?”

“응.”

어차피 일주일은 말 그대로 휴식 기간이었다. 국내의 스케줄은 아예 없었다. 덧붙여 기자들이 인터뷰하려고 하여도 소속사 측에서 대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 말을 해줄 것이다.

일주일은 말 그대로 민후가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이었고 쉴 수 있는 기간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어차피 혜인이 학교에 갔다 온다고 한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그럼 엄마가 간식 좀 준비해줘야겠네.”

“우리 쪽도 도울게, 여보.”

“하이그, 매상이나 좀 올리세요.”

“우리도 매상 좀 오르고 하고 있어요.”

“우리 매장의 반밖에 안 되던데?”

어머니는 새아버지의 투정에 콧방귀를 뀌셨다. 어머니가 계시는 현재 본점은 200평의 크기였고 다른 체인점에 비해 월등히 버는 수익이 컸으며 홍대점이었다. 새아버지의 가게의 경우 강북점이었다.

어머니의 가게는 본점답게 이벤트가 자주 있었고 어머니가 간혹 단골손님들을 찾아가 서비스도 주시고 입담도 발휘해주시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매출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국 어디에서도 본점만큼의 인기는 없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혜인이의 학교에 방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전교생에게 간식을 다 돌리고 싶은 것이 민후의 마음이었으나 실상 그렇게 치면 1천여 명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이 있어야 했다. 그러기에는 불가능했던지라 본점에서 140개. 강북점에서 60여 개를 받아서 6학년 아이들에게만 돌리기로 했다.

음식들을 한 아름 싣고 혜인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였다. 한창 먹을 나이의 아이들이니 충분히 간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민후는 정수와 가게 세 사람을 함께 데리고 왔다. 일단 간식을 교무실 쪽으로 옮기고 난 후 민후는 문을 두들겼다. 일부러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이제껏 알아봤던 눈썰미 좋은 아이는 다행히도 없었다.

6학년 3반 앞에 선 민후는 슬쩍 창가로 고개를 내밀어 혜인이를 찾았다. 키는 조금 작은 편인지라 혜인이는 앞쪽에 앉아있었다. 귀엽고 똘똘하게 생긴 혜인은 칠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동생을 보러 오는 기분이어야 하는데 저절로 할아버지의 손녀 보는 미소가 지어진다.

“표정이 왜 그냐, 애늙은이같이.”

“아, 아하하!”

정수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헛웃음 지었다. 앞쪽 문을 노크를 하였다. 이미 사전 통보를 하고 온 것이었기에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선생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셨다.

민후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선글라스는 미리 벗었다.

“우왓! 강민후다!”

“우와!”

“우앙!”

민후가 들어오자 아이들이 술렁였다. 좋은 점은 아이들인지라 강민후를 봤다고 해서 돌진해오지는 않았다. 단지 놀랄 뿐이다. 혜인이만 빼꼼 자리에서 일어나서 민후에게 달려왔다.

“오빠아-”

어려도 자부심은 있었다. 혜인이는 민후의 품속에 안기더니 친구들에게 V 자를 보인다.

“우와아아!”

동시에 탄성이 터졌다. 선생님은 쿡쿡 하고 웃었다.

“전 혜인이 오빠 강민후라고 해요, 여러분.”

“혜인이가 했던 말이 사실이었어.”

“혜인이 뻥쟁이라고 놀렸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

“우리 혜인이 거짓말쟁이 아니니까 앞으로 놀리시면 안 돼요. 특히나, 남자분들은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민후는 장난스레 웃었다. 어린아이들이지만 여자 보는 눈은 있을 터이고 혜인이에게 대시를 한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그런 모습을 생각하면 귀여웠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몇 마디 더 일러주고 민후는 밖으로 나왔다. 혜인이에게 아이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지는 것이 들렸다. 이제 혜인인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

간혹 가족이 연예인인 것을 숨기려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피곤하고 귀찮아서라고 한다. 그러나 혜인이는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드디어 6학년까지 왔네요?”

“네?”

민후는 혜인이 담임선생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셨어요? 부모님들께서 1학년부터 해서 5학년까지 계속 간식 보내주셨거든요. 그리고 강민후 씨 오실 때 6학년까지 쏘신다고…….”

“하, 하하! 그렇군요. 어쩐지 말이 너무 척척 맞았어요.”

민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어제 혜인이와 어머니 아버지의 쿵짝이 너무 잘 맞았다. 딱 보니 반에서 혜인이를 친구들이 자주 놀렸나 보다.

강민후가 오빠라고 거짓말을 한 거짓말쟁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때문에 혜인이 기를 살려주기 위해 입을 맞춘 것 같았다. 그러나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오빠로서는 그런 일을 동생이 겪는다면 해줄 수 있었기에 크게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쉬는 동안 소속사 대표인 태웅도 만났으며 이태나, 민정도 만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부쩍 의젓해져 있었다. 민정은 명실공히 떠오르는 톱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태의 팬클럽 회원 수가 자그마치 4만 명이었다. 이태는 연예인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대단했다. 그리고 의외의 얼굴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내일이면 곧바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 촬영에 임할 준비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갈 사람은 김채은이었다.

그녀는 유럽 쪽을 중심으로 돌면서 다양한 요리를 더욱 배우고 5개월 전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민후가 잠시 들어왔다는 소식에 그녀는 민후에게 연락을 했었으며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윤하와 함께 나와 달라는 말을 하였다. 그 말에 그저 기분이 좋아진 민후다. 완전히 그녀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함께 보자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이 정리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었다.

윤하가 있는 인천으로 내려가고 있는 민후였다. 딱히 약속 시각까지 할 일도 없었고 오랜 시간 민후를 기다렸던 윤하와 어떤 방식으로든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 그녀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가 촬영하고 있는 장소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녀는 현재 ‘감시자’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초반부 촬영에 있었다. 주연으로는 윤하, 경우, 우영 세 사람이 가장 눈에 띄는 주연이었다.

겸사겸사 임 경우 교수에게 인사도 할 겸 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우영이라는 배우의 경우 오랜 시간 배우 계에 머물렀던 배우로서 다부진 체격과 큰 키로 항시 이목을 받는 배우였으며 중국의 배우들과 함께 ‘강호’라는 작품을 주연을 맡아서 촬영하기도 한 베테랑 배우였다.

아마 그라는 배우가 가장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히트’라는 작품일 것이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거친 학생의 사랑을 담기도 했다. 가장 명장면은 오토바이에서 양팔을 쭉 펼치고 내달리는 장면일 것이다.

해프닝으로는 그 당시 우리나라의 수많은 고등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 하다가 많이 다쳤다는 것이다. 인천으로 내려온 그는 논현동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햄버거 카페를 검색해서 찾아갔다.

말 그대로 막 시작하는 부분의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윤하가 맡은 역이 임경우가 맡은 역할에 평가를 받는 장면이었다.

햄버거 카페로 올라온 민후는 입구 쪽부터 가득 채우고 있는 촬영팀 인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민후를 알았고 윤하가 사전에 말했었기에 인사를 해 보였다. 민후 역시도 인사를 했는데 그중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민후의 첫 데뷔작인 논스톱 5에서 카메라 감독을 맡았던 분이다. 간혹 방송국에서 마주치기는 했었고 그때마다 활발하게 인사를 했었다.

반가운 포옹을 나눴다. 그는 어느새 이렇게 컸냐면서 하하거리면서 웃는다. 어느덧 윤하가 다가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날 보러 온 게 아니라 카메라 감독님을……? 호, 혹시?”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민후와 카메라 감독을 번갈아 보았다. 카메라 감독이 ‘쓰읍! 우리 마누라 들으면 큰일 날 소릴!!’ 하면서 웃었다.

안에는 임경우 교수님도 계셨다.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계시던 교수님은 민후가 다가오자 몸을 일으켰다.

“이야, 이거 할리우드 스타 강민후 아냐?”

“하하, 아닙니다.”

“스타가 되더니 요새 잘 안 찾아오는 못난 제자이기도 하지.”

“끄응.”

경우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같은 소속사라고 해도 배우들이 항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이 소속사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다는 모습이었다. 촬영팀 인원들은 식사하고 있었다. 촬영장 자체가 햄버거 카페였기에 햄버거들을 먹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 햄버거 세트 하나만 더 주세요.”

“누구 거?”

“네 거.”

“아니야, 됐어.”

“왜에?”

“몸 관리 해야 해. 마이클이 알면 날 죽이려 할 거야.”

민후는 울상을 지었다. 결국, 윤하는 햄버거 세트 하나를 취소했다. 그녀는 햄버거를 야금야금 맛있게 먹었다. 소스가 뚝! 하고 떨어지려 했다. 손가락으로 그 소스가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이 아까운 걸.”

“그냥 먹어-”

“끄응, 안 돼.”

할리우드는 정말 엄격했다.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달랐다. 얼마 전에는 채닝 테이가 몰래 밤중에 술을 마셨다가 마이클로부터 크게 혼이 빠지도록 기합을 받았다.

마이클은 세계적인 배우이고 뭐고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세계적인 배우라고 하여서 지도할 때 빌빌 긴다면 그 정도 위치까지 오르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채닝 테이도 그 기세가 강한 편이었으나 마이클에게는 꼬리를 말았다. 물론 이곳에서 마이클이 지켜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을 자신도 스스로 지키고 싶었다.

촬영팀의 식사가 끝이 나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민후는 촬영을 지켜보았다. 임경우 교수님이야 국내 최고의 배우였고 윤하도 날이 갈수록 연기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흐아! 대단하다, 대단해.”

“논스톱의 인연이 여기까지…….”

카메라 감독은 논스톱 당시 민후와 윤하를 함께 봐 왔던 사람이다. 그 당시에도 두 사람이 무척 닮았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연인 사이가 되어버렸다.

카메라 감독은 추억이 새록새록 한다는 듯이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다. 민후는 윤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오늘은 학원이 아닌 마포구 쪽의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5개월 전 국내에 돌아온 그녀는 학원 운영에 다시 손을 뻗는 것에도 모자라 이탈리아 요리점을 냈으며 인기가 크게 좋았다. 먹으려면 항상 예약해야 할 정도라고 하였다.

얼마 전에는 그녀가 TV의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인 ‘힐링’에 출연하였던 적이 있었다. 주로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였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성공비법과 더불어 강민후와 관련한 이야기도 하였다.

자신만의 짝사랑이었고 이젠 잊었다는 식으로 말을 했던 것으로 안다.

그녀가 창업한 ‘토브 이탈리아’라는 가게로 도착했다. 가게는 독특하게도 지하에도 있었고 2층과 3층에도 있었으며 층마다 주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독특한 구조였으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창업할 당시 큰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하나, 그녀에게 주방 몇 개 더 늘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이 가게가 흥하는 이유는 딱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열린 주방. 누구든 원하면 주방에 들어가서 제조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재탕 따위는 없었다. 손대지 않은 피클도 모두 버린다.

둘째, 국내의 이름 있는 요리사 김채은이 운영한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오고 있었다.

셋째, 서비스가 다양했으며 메뉴 중 하나는 ‘원하는 식의 요리 해드립니다.’라고도 적혀 있었다.

즉 손님이 재료 선택을 하고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하면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안의 대부분 요리사는 국내에서 상당한 경력을 자랑하던 요리사들이다.

채은이 상당한 연봉을 제시하여 불러들인 실력자들이었다.

민후는 채은의 문자에 따라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는 모두 룸 형식이었고 커텐이 쳐져 있었다.

내려오자 카운터 앞의 직원이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이동해 룸으로 들어갔다. 꽤 크기가 넓은 룸이었다. 그 안에 더욱 예뻐진 채은이 있었다. 그녀는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윤하에게 인사를 했다. 윤하도 빙긋 웃었다. 참 다행이었다. 어쩌면 윤하도 채은도 서로에게 악감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서로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려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어쩌면 채은과 이런 식이라도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윤하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녀는 채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였고 그녀에게 잘해주라고 항시 말했다.

식사 주문을 했다. 아이패드였다. 아이패드로 윤하와 채은이 음식을 선택했다. 민후는 ‘원하는 식의 요리’를 클릭해 들어가 재료들을 훑어보았다.

그는 닭가슴살과 채소들을 클릭했다. 그리고 문구에 ‘소스는 넣지 말아 주세요.’라고 적었다.

“할리우드가 조금 힘들긴 한가 봐?”

“아깐 햄버거도 안 먹더라고요.”

“삐쩍 꼴아 가지고는. 남자가 말이야.”

“호호, 부슬부슬 해요-”

채은의 장난스러운 말에 윤하가 대신 대답했다. 못 본 새에 채은이 본 민후는 무척 야위었다. 그리고 비실비실 하다고는 하나 그 안이 근육질인 것은 윤하와 채은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기대해도 좋아. 소스를 첨가하지 않아도 닭가슴살과 채소만으로도 환상적인 맛을 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지.”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얼마 후 음식이 나왔다. 윤하와 채은은 스파게티였다. 민후의 경우 닭가슴살과 더불어 양배추와 오이, 양파 등을 곁들인 음식이 나왔는데 닭가슴살의 바로 위에는 얇게 노란색으로 고구마가 펴져 있었다.

스테이크 식으로 나온 닭가슴살 요리를 민후는 썰어서 먹었다. 맛이 훌륭했다. 최고다.

아마도 소스를 대신해서 으깬 고구마를 그 위로 뿌려 달콤함을 더한 것 같았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려내어 만든 창작요리라고 하기에는 훌륭했다.

확실히 흥하는 가게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

“이럴 때 한 번쯤 빠져주는 눈치도 있어야 하는데요.”

식사하면서 민후보다는 윤하와 채은이 더욱 오래 알던 사이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윤하가 민후를 보면서 한 말이다. 민후는 그 말에 헛기침했다.

“갑자기 화장실이…….”

그는 커튼 밖으로 나섰다.

“좋은 남자예요, 민후. 잘 보살펴주세요.”

채은은 물끄러미 그가 나선 자리를 바라보았다. 윤하에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심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또 너무 근면 성실이다 보니 몸 걱정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자주 들어요. 윤하 씨가 그만큼 옆에서 힘이 돼 주세요. 말한다고 해서 멈출 남자는 아니니까요.”

채은의 말에 윤하는 그저 빙긋 웃었다. 그녀가 해주는 조언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아무리 자신이 민후의 여자 친구라고 해도 채은이 알던 것을 자신이 모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채은의 조언은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일지도 윤하는 잘 알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는 기분 나쁜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덧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민후가 들어왔다. 윤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민후가 오면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릴레이네? 윤하 씨 다녀오면 나도 화장실 좀 다녀와야 하나?”

민후는 그녀의 능청스러운 농담에 쓴웃음을 지었다.

“나 어때 보여?”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민후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그녀가 괜찮은지 이 자리에서 아프지는 않은지 눈물이 날 것 같지는 않은지, 아니면 이것들은 다 걱정일 뿐이고 정말 그녀는 괜찮은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나 괜찮진 않아. 완전히 잊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니까. 그래도 너희 두 사람의 사랑은 정말이지 축복해. 차라리 윤하 씨여서 다행이야. 내가 얻지 못했는데 만약 윤하 씨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면 그 여자를 내가 어떻게 했을지 몰라.”

그녀는 장난스레 웃었다. 그만큼 윤하가 능력 있고 좋은 여성이라 자신이 민후를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물러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자는 항상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해. 만약 당장 오늘 싸워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풀리는 게 여자의 마음이야. 잊지 마. 그리고 너희 결혼식 때는 꼭 초대해. 뷔페는 내가 맡는다.”

그녀는 쿨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하다.

“참! 그리고 여기 계산은 네가 해. 공짜는 세상에 없어. 내 것도-”

민후가 픽 하고 웃어버렸다. 무거워지려던 분위기를 그녀가 잡아줬다. 어느덧 윤하가 돌아오고 가게를 나섰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윤하도 그러한 듯 평소보다 웃음이 가득했다.

다시 출국 시간이 다가온다.

촬영이 한번 시작되면 국내로 돌아올 때는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오늘 서울 일대의 풍경은 평소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 * *

비행기를 타고 다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에게 주어진 것은 일정표였다. 일정표는 입을 떡 벌어지게 하기 충분하였다.

전 세계 25개 지역에서 180개에 이르는 세트 로케이션을 돌릴 예정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가운데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규모의 촬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훑어보아도 에펠탑 붕괴 장면 등도 찾아볼 수가 있었으며 각 지역이나 나라마다 그에 걸맞은 세트장이 형성될 예정이었다.

괜히 1억 8천 달러의 촬영비가 소요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외 곳곳을 돌면서 촬영하게 되면 촬영팀 인원들은 전용 비행기를 타게 될 예정이었다.

또한, 배우들은 따로 20인승 비행기에 탑승하고 가게 될 것이었다. 표에 적혀진 것에 따르면 컴퓨터 그래픽 등이나 특수효과, 시각효과 등등은 트랜스포머 작업을 한 디지털 도메인이 맡은 상황이었으며 특수분장 등은 아이언 보이의 스튜디오 제작팀이 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촬영하면서 움직이게 되는 이동 인원수만 하여도 200여 명을 훌쩍 넘어 250여 명 정도는 되는 숫자였다.

촬영이 시작되고 민후는 절로 할리우드의 스케일에 감탄하고 있었다. 일단은 한 번 촬영할 때마다 실제 우리나라 돈으로 10억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깨지는 듯하였다.

어느덧 초반부 몇 컷을 촬영한 후 미국의 다우니로 넘어왔다. 다우니에는 과거 항공기지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지아이오 팀의 세트장으로 변신될 예정이었다.

이곳 다우니에서 꽤 많은 장면을 촬영할 것이었다. 아무리 제작비가 넉넉해도 계속해서 돌면서 촬영하는 게 아니라 다우니 쪽에서 해야 할 촬영을 전부 완료한 후에 다른 곳으로 넘어가 세트장을 형성하고 다시 촬영한다.

형성되는 세트장을 보면서 민후는 감탄을 흘렸다. 촬영팀 인원들이 최고의 베테랑만 모였다더니 사실이었다. 그들은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일을 척척 해나가는 중이었다.

한편에는 실제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기도 하였으며 특수 장비 팀에서 만들어낸 물품들이 주를 이뤄놓기도 한 상황이었다.

벌써 이 안에서만 촬영을 진행한 지 한 달깨나 지난 상황이었다. 지아이오 1은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최첨단 무기를 듀크가 지휘하에 운반하는 임무 중 정체불명의 공격으로 팀원을 모두 잃고 본인도 죽음 앞에 이르렀을 때 지아이오 팀이 구해줌으로써 연이 되어 지아이오 팀의 일원이 된다는 식으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민후가 연기할 스톰 쉐도우는 악의 무리인 코브라에서 노련한 칼솜씨와 냉정한 성격으로 지아이오를 수차례 위험에 빠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촬영해야 할 분량은 스톰 쉐도우가 일행을 이끌고 지아이오의 본부에 쳐들어와서 무기를 탈환하고 스네이크 아이와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탁! 탁탁탁!

목검을 쥔 민후와 파크의 검이 허공에서 몇 차례 맞부딪쳤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합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동작만 해도 벌써 몇 번을 맞췄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손아귀가 지끈거릴 정도라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검을 부딪친 후 두 사람이 검을 내려놨다. 파크도 무척 아픈 것인지 검을 내려놓자마자 바닥에 던지듯이 놓으면서 손을 확인했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지. 나만 휘둘렀나.”

민후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파크는 황당하다는 웃음이다. 누가 들으면 자신 혼자서 합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촬영장에는 항시 마이클도 함께 있었다. 그는 계속 촬영장에 있으면서 배우들의 액션 동작을 봐주고 있었으며 수십 명의 스턴트맨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리처드 레이 감독에게 마이클이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지아이오의 본부에 쳐들어온 코브라의 스톰 쉐도우와 배로니스가 뉴욕 한복판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나노탄을 탈환했다. 비상경보가 울리고 지아이오 팀 인원들이 그를 제지하려 한다.

그러나 함께 동반된 코브라 팀의 인원들이 두 사람의 탈출을 막기 위해 공격을 가한다. 하얀색 복면의 쌍검을 등 뒤로 차고 있는 스톰 쉐도우는 도망을 치려 했지만 계속해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듀크의 친구이자 전장의 동기인 립코드가 권총을 겨눈다. 그러나 쉐도우는 검을 휘둘러 철로 이루어진 총기조차도 단숨에 두 동강을 내버린다.

“헉!”

립 코드는 당혹한 표정이었다. 스톰 쉐도우는 가차 없었다.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검은 복면의 스네이크가 그의 검을 막아냈다.

“오랜만이다, 형제여.”

쉐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맞붙은 두 사람의 검에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 함께 검을 배웠던 두 사람이었지만 스네이크는 천성적으로 선의적인 성격을, 쉐도우는 악의적인 성격을 갖추고 태어났다.

스네이크는 아니었지만 쉐도우는 항상 그를 앙숙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는 미소였다. 스네이크 역시도 쌍검술을 구사하는 이였다.

총 네 개의 검이 거친 소리를 내면서 맞부딪쳤다.

“크윽!”

스네이크가 돌려친 발차기에 쉐도우는 안면을 가격당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들을 빠르게 막아냈다. 이번에는 쉐도우의 반격이었다. 명치를 거세게 발로 걷어찬 후 높게 도약하여 난간으로 올라섰다.

난간으로 올라선 그의 앞으로 지아이오 팀이 있었다. 단번에 횡으로 검을 그어 죽였다.

그 순간 스네이크의 검이 다시금 그를 압박해왔다.

챙챙, 탱! 챙챙!

불꽃이 튈 정도로 빠른 싸움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더 이상 지아이오 팀 인원들이 압박을 가하기 전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이 곤두섰다.

스네이크의 안면을 가격한 그는 부웅 하고 몸을 띄웠다. 그 순간 스네이크와 쉐도우 사이에서 폭발이 크게 일었다.

탁!

다시 바닥으로 내려선 쉐도우는 서둘러 비행 슈트를 입었다. 양손을 슈트가 옭아매고 등으로는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위쪽으로는 접혀있던 날개가 독수리의 것처럼 활짝 펼쳤다.

양손의 버튼을 누르자 위이이잉! 소리와 함께 도약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만 16시간을 계속해서 촬영했다. 일단 위험한 장면이 많았다. 와이어를 타고 난간으로 올라가는 장면이나 바닥으로 착지하는 장면. 가검이라고 할지라도 검을 휘두르는 장면 자체가 상당히 힘든 장면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민후의 손은 더욱 지끈거렸다. 정수가 다가와 그의 손에 파스를 뿌려주었다. 시원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한결 나아졌다. 파크의 매니저도 그의 손에 파스를 뿌려주고 있었다.

“고생했어. 후!”

“파크 씨도요.”

“이거, 시원한 맥주가 먹고 싶네. 안 되겠지? 흐흐”

“안 됩니다.”

“거참, 뻑뻑하긴-”

누구보다도 민후와 스네이크의 체중 관리가 제일 철저한 편이었다. 두 사람은 몸에 착 달라붙는 특수 전투복을 입었다. 몸매가 확실하게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이클이 너무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한번 풀어지면 두세 번 풀어지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행하는 것이다.

파크는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었다. 민후가 가장 호흡을 많이 맞추는 이는 바로 파크다. 그런 파크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다혈질이었다.

촬영이 끝이 나고 세트를 거두진 않았다. 어차피 내일 또 이곳에서 촬영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200평을 자랑했다. 총 4층까지 존재했으며 층당 50평씩이었다. 앞으로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배우들은 주연급 이들로서 출연 빈도가 가장 높은 이들이었다.

워낙 지아이오라는 영화가 얼굴을 많이 알린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영화였지만 그만큼 출연 빈도가 높은 이들도 따로 분류되었다.

채닝 테이와 파크, 민후, 고든, 밀너, 니콜스, 토머스였다.

이중 토머스의 경우는 실상 주연이라고 하기에는 비중이 작은 편이기도 하나 채닝 테이가 연기하는 배역과 절친한 친구로서 나오는 역할이라 촬영 빈도는 무척 높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 외에 출연 빈도가 높지는 않은 배우들은 다른 숙소에서 개인이 생활하고 있었고 촬영 날에 오거나 혹은 항시 대기하고 있는 예도 있었다.

일부러 주연급 배우들을 모아놓은 이유는 담합과 더불어 그들이 촬영 중 엇나가지 않게 하고 다르게는 신속한 촬영을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혹여 다른 이가 몸이 안 좋으면 다른 배우의 분량을 곧바로 촬영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다.

1층은 오락이나 게임, 휴식, 식사 등을 할 수 있었고 2층은 여성들이 3층은 고든과 토머스, 채닝 테이, 4층은 민후와 파크가 사용하고 있었다.

실상 4층의 경우 테이가 쓰기를 민후도 원했고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이는 함께 연기의 합을 맞추고 대본을 맞출 수 있으며 검술 동작 역시도 맞출 수 있을 테니 민후와 파크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피곤했어. 그렇지 않나, 후?”

파크는 민후보다 열 살은 더 많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손에 얼음주머니를 쥐고 있었고 다른 손에 있던 것은 민후에게 던졌다.

“손이 남아나지 않겠어요. 손목도 아프고요.”

파크는 빙긋 웃었다. 두 사람이 함께 쓰는 50평 공간은 무척 넓었다. 방은 하나였으나 말이 하나였지 없는 게 없었다. 침대 두 개, 옷장, TV, 냉장고, 대형 에어컨이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장소. 다섯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풀장까지 2층과 3층도 모두 이런 형식이었다.

파크는 민후의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오늘은 검술 동작 맞추지 말자, 후.”

“하루쯤은 쉬는 것도 나쁘지 않죠. 읏차!”

민후의 평소의 성격 같았으면 혼자서라도 연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 스스로도 무척 힘이 들었다. 정말 검이 계속 부딪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표현하면 날아오는 공을 야구 방망이로 계속해서 치는 것과 같은 통증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쉬지 않고 반복하니 피로도 오고 고통도 잇따를 수밖에 없었다.

“후, 힘들진 않아?”

“……안 힘든 게 있나요.”

함께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파크의 질문에 민후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안 힘든 건 없었다. 모두 힘들지만 웃으면서 살아간다.

“후가 코리아에서는 최고의 배우 중 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런 대접도 못 받잖나.”

“대접 바라고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즐겁잖아요.”

“그거 하나는 나하고 같네.”

파크는 빙긋 웃었다.

“파크도 힘들지 않아요?”

민후가 외딴곳에서 다른 나라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게 힘들어 보이는 것처럼 민후가 본 파크도 어쩌면 힘들지만, 그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힘들지. 내가 거리를 걸으면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 알아?”

그는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민후는 웃지 못했다. 얼굴 없는 배우.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호칭이었다.

“그래도 돈은 많이 받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몰라. 엑스맨이라는 대작에 출연했어도, 스타워즈에 출연했어도 그 작품이 대박이 나도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몰라.”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곧 명쾌하게 말했다.

“그런데 연기를 한다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해. 이렇게 손에 불이 나게 검을 휘둘러 볼 때가 어디 있겠어? 또 이래 봬도 나 수입으로는 평균 상위권에 든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얼굴로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어떤 배우가 자신의 얼굴을 정작 사람들이 모르는데 기뻐하겠는가. 그나마 파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중에 촬영 끝나면 한번 놀러 와요. 서울에는 예쁜 여자들도 많고 놀 거리나 먹거리도 무척 많거든요.”

우리나라를 좋아하는 파크를 위한 말이었다. 실상 지아이오의 시즌의 촬영이 모두 끝이 나면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민후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파크는 이곳 할리우드에 남아 다시 얼굴 없는 배역을 찾을 것이다.

“그거 좋지. 나 그거 먹고 싶어, 막걸리 아이스크림?”

“한국에 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그의 말에 민후는 픽 웃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쌉싸름한 그 맛이 자신도 그리워진다. 오늘따라 더욱 본국 대한민국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 * *

영화 지아이오를 보면 스네이크와 쉐도우의 아역 배우들이 등장한다. 스네이크의 아역 배우는 금발을 가진 레오가 출연하게 된다. 올해 13살이 된 아이이다. 그리고 민후가 맡은 스톰 쉐도우의 아역은 브랜든 수후라는 아이였다. 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본국은 미국인 아이였다.

사실 첫 설정에 관련하여서 리처드 레이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쉐도우는 분명 일본 검술을 구사하는 이이다. 그러나 민후는 한국인이었다.

원작의 경우는 스톰 쉐도우의 어린 시절이 일본인이었다고 표현이 되고는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강민후는 한국의 배우였으며 그에 관련한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민후는 영화 자체가 흥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우리나라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존에 계약을 맺기 전 리처드 레이 감독에게 웬만해서는 복면을 쓰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원작 만화에서 보면 쉐도우는 거의 대부분 복면을 쓴다. 그러나 실제 영화 촬영에서 민후는 복면을 자주 벗고 촬영에 임한다. 자신을 알리자는 의미도 있었으나 한국 배우를 알리자는 생각도 있었다.

리처드 레이 감독과의 이야기 끝에 스톰 쉐도우의 어린 시절을 우리나라로 잡기로 결정이 났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어린 시절을 표현할 브랜든 수후는 분명히 미국인이었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에게 대사는 몇 마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그 대사 부분을 원어민 정도의 실력으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민후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브랜든 수후는 할리우드에서 몇 번 촬영을 한 적이 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상대역인 레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는 전형적인 미국 아이의 생김새를 가졌다. 금발 머리가 매혹적이고 뽀얀 피부가 무척 인상적인 소년이다.

그리고 브랜든 수후는 태국인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동양인이었다. 체격은 두 사람이 비슷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때문에 민후에게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으로 오면서 레오와 함께 가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민후는 흔쾌히 그러라고 답했다.

띵동!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주자 두 아이의 보호자인 어머님들과 그 밑으로 의젓하게 서 있는 레오와 수후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민후는 두 부모님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수후와 레오는 내부를 들여다보더니 ‘우와!!’ 하는 환호성을 뱉는다.

아이들의 경우 출연하는 분량이 적었고 평소 생활하는 집에서 생활하다가 레이 감독에게 콜이 오면 촬영을 하러 가게 되는 식이다.

이러한 숙소를 아이들은 본 적이 없을 것이고 다르게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곳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집 안에 풀장과 더불어 펌프게임이나 다양한 놀 거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숙소에는 모두가 촬영을 나간지라 아무도 없었다. 민후만 오늘 수후에게 필사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면 되었다.

가르쳐야 할 대사는 짧았다.

‘도둑놈이다!’

‘쟤가 뭔가를 훔치고 있었어요!’

이 정도만 가르치면 되었다. 그러나 설정 자체가 쉐도우가 한국인이었다는 설정이었다. 실제로 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과 같은 발음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를 외국인들처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저렇게 짧은 말들도 자연스러워지려면 며칠을 꼬박 연습해야 할 수도 있었다.

“자, 도둑.”

“더둑!!”

“으음으음, 도둑!”

“더독?”

확실히 짧은 단어여도 가르치기는 쉽지가 않았다. 민후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오늘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수후에게서 만족스러운 발음을 그나마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후는 자신이 잘 못 따라가는 것 같자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귀여운 녀석이다. 머리를 한 번 흩뜨려주었다.

다섯 시간이 되어서야 그나마 정확한 발음은 아니더라도 흉내 내기 식으로 단어를 구사할 수는 있게 되었다. 시간을 확인한 민후는 아이들을 위해서 피자를 주문했다.

피자를 먹는 두 아이는 영락없는 꼬마들이었다. 그러나 민후는 이 아이들이 결코 철부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스네이크와 쉐도우의 첫 만남에서는 주방에 숨어들어와서 음식을 훔쳐 먹는 스네이크에게 쉐도우가 공격을 가하고 그럼으로써 두 사람이 싸움하는 장면이 있었다.

실상 애초에 두 사람은 아직 열둘, 열세 살 어린 나이들이었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익힌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연습실에서도 몇 개월을 꼬박 두 아이가 동작을 맞추는 것을 보고 민후도 적잖이 놀란 적이 있었다.

두 아이는 엉성하였으나 나이와 걸맞지 않게 철이 든 모습으로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열세 살짜리 소년이 백 덤블링을 하고 벽을 차면서 무릎으로 사람을 찍는 형식의 공격을 한다면 믿겠는가?

두 아이는 그것이 가능했다. 화려한 동작을 갖춘 어린 액션 친구들, 두 아이는 필히 나중에는 멋진 액션 배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민후는 가지고 있었다.

툭!

“아! 아까워. 흐룹.”

테이블 위로 떨어진 토핑을 입을 가져가서 쪽 하고 핥아먹는 수후다. 그 모습에 민후는 헛웃음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철부지인데.’ 속으로 생각한다.

하루를 꼬박하고 촬영장의 세팅이 계속되면서도 민후는 계속해서 수후를 가르쳤다. 레이 감독도 꽤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분명 수후가 며칠을 연습한다고 해서 나온 발음으로 제대로 된 대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임이 분명하다.

하물며 발음이 정확해진다고 해도 되레 연기할 때는 어색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최대한 잡아보고 싶은 마음의 레이였다.

촬영장 세팅이 끝이 났다. 주방이었다.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가 처음 만나는 주방이다. 바깥의 쓰레기통을 뒤지던 스네이크는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자 쫓아서 들어오고 도복을 입고 있는 쉐도우에게 걸림으로써 싸움을 하게 될 것이었다.

민후는 일단 자신이 가르쳐줄 수 있는 한도는 끝이 났다고 여겼다. 이곳 촬영이 끝이 나면 또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야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더욱더 섬세하게 가르치기에는 힘들었다.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민후는 미래에 어쩌면 할리우드를 이끌어갈 액션 배우가 될지도 모르는 두 소년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도둑놈이다!”

뭔가를 훔쳐 먹는 이를 발견한 수후가 소리쳤다. 민후가 듣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 감독이나 다른 이들은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다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레이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듣기에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강민후가 재촬영을 원한다면 그게 맞는다는 것을 레이 감독도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대사를 치는 장면만 열 차례 정도를 반복하였다. 그리고서야 민후는 그나마 만족하고 액션 신으로 넘어갔다.

수후는 도둑을 발견했다고 가정하고 레오에게 다가서 그의 멱살을 움켜쥐면서 힘으로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잘 안 되었고, 레오가 냉장고 문을 열어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나 반대로 수후가 냉장고의 문을 팍! 하니 걷어차자 레오의 머리를 가격했다. 머리를 움켜잡은 레오에게 수후는 거침없이 프라이팬으로 밑에서 위로 쳐올리면서 후렸다.

레오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뜨면서 저절로 백덤블링을 했다가 단숨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수후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레오는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수후가 육도를 집어 들었다. 레오의 눈이 커졌다.

“흐익!”

어린아이가 육도를 집어 들고 덤빌 것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수후가 휘두른 육도가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에 다행히도 박혔다. 두 사람의 접전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레오는 계속해서 맞기만 하다가 머리로 그의 안면을 들이받으면서 처음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수후에 의해서 온몸이 속박된 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진행되는 촬영을 보면서 민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 아이의 몸놀림은 화려하고 멋있었다. 어제의 그 철부지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촬영은 7시간 정도 지속하였는데 두 아이에게서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힘들어요.”

민후가 옆에 앉자 레오와 수후가 한 말이다. 민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 무척 좋았다. 영화 속에서는 앙숙같이 싸우더니 촬영이 멈추면 이렇게 친한 모습을 보인다.

말 그대로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 역할과 현실을 확실시 구분하는 능력 또한 두 아이가 갖추 있는 셈이었다.

민후는 힘들다는 두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 감독이 다시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두 아이가 울상이 된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민후는 세세하게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촬영에 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끽해야 3개월에 한 번 정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존재했다.

그만큼 지아이오 팀의 촬영은 강행군으로 지속된 셈이었다. 그런데도 촬영하는 기간이 1년 4개월가량이 소요되었다. 즉 강민후의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아이오 팀과 2년 가까이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가족같이 정이 들어버린 상황이었다. 특히나, 유독 친한 채닝 테이나 함께 생활하는 레이 파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듯하다.

추정된 남은 촬영 기간은 3주 남짓이었다.

이번의 경우는 민후의 마지막 촬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쉐도우와 스네이크의 접전이 펼쳐진다. 물론 시즌1의 촬영의 마지막이었다. 시즌2와 시즌3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된다면 민후가 촬영하게 될 것이었다.

어찌보면 생각보다 지아이오에서 민후와 파크의 비중이 상당한 편이었다. 실상 채닝 테이는 다음 회에는 초반에 죽는 것으로 촬영하게 되고 전체적인 주연들이 뒤바뀌게 된다.

그중 민후와 파크는 제외되고 시즌3까지도 계속 지아이오 팀과 움직일 예정이었다. 촬영이 끝이 나면 세계를 돌면서 홍보 활동에 나서게 된다.

홍보 활동 기간은 2개월이다. 2개월 동안 각 나라를 돌 것이고, 그중에는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촬영이라는 기분이 어때?”

파크가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두 사람은 어느덧 접전을 벌이는 부분의 앞부분을 촬영하고 뒷부분만을 촬영하면 되었다. 스네이크의 분장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반면 쉐도우 역인 민후는 상체를 탈의하고 다리 쪽과 얼굴 쪽이 베인 것으로 설정이 잡혔다. 그는 결국 스네이크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깊은 수중 속으로 빠지게 될 예정이었다.

“저만 몇 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좋은데요?”

민후는 장난스레 웃었다. 이번 컷이 끝나고도 더 촬영해야 할 분량이 남아있었다. 물론 쉐도우의 분량은 끝인지라 민후에게는 더 넉넉한 휴식 시간이 생기는 셈이었다.

“얄미운 녀석.”

파크가 코를 찡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접전이자 민후의 마지막 촬영을 다시 진행해야 했다.

자세를 잡고 선 민후의 몸에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깊게 팬 복근과 울긋불긋 알맞게 솟아오른 근육은 쉐도우의 전형적인 날렵하고 강인한 신체를 보여주는 듯하였다.

그곳에 분무기를 이용하여서 물을 뿌렸다. 물을 머금은 근육은 더욱더 선명해진 상황이었다.

“큐!!”

<앙숙으로 만났지만 한 스승 밑에서 함께 검을 배운 쉐도우와 스네이크. 결국 완전한 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뺏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네이크는 쉐도우가 스승을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쉐도우는 스승이 죽으면서 침묵의 서약을 맹세한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때 스네이크 네 녀석은 침묵의 서약을 했지. 그리고 넌 이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죽게 될 거야.”

쉐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쌍검술의 손잡이를 맞붙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검 두 개가 맞물리며 위아래로 날카로운 날이 달린 창이 되었다.

휘리릭!

탱!

쉐도우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위에서 아래로 스네이크를 공격하고 들어갔다. 스네이크는 너무나도 가볍게 공격을 막아내 버린다. 스네이크는 현재 검이 아닌 크로우를 착용한 상황이었다. 팔 쪽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갈퀴는 매우 위협적이다.

찌르고 휘두르며 스네이크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쉐도우는 승산을 잡은 듯하였다. 온 힘을 담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나 양팔의 크로우로 막아낸 스네이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쉐도우의 팔뚝으로 거센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꿈틀거렸다. 스네이크가 검을 튕겨냈다. 몸을 돌리면서 창으로 허리 쪽을 노렸던 쉐도우는 다리를 흩고 지나가는 그의 날카로운 크로우에 비틀거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승산은 이제 스네이크에게로 넘어갔다. 더 이상 쉐도우는 스네이크를 몰아붙일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사리판단 능력이 흐려졌다.

그의 속도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느려진 상황이었다. 스네이크의 크로우가 위에서 아래로 힘껏 내리쳐졌다.

와직!

창이 두 동강이 나며 다시 쌍검술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 스네이크의 팔뚝이 그의 양쪽 얼굴을 가격하고 발이 턱을 후렸다.

비틀거리는 그의 가슴팍으로 크로우가 꽂혔다.

“꺽!”

쉐도우는 자신의 갈비뼈에 멈춰선 크로우를 움켜잡았다. 힘겨운 눈빛으로 그는 스네이크를 본다.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자신의 친구. 그러나 바보 같게도 항상 착했던 녀석이다.

녀석의 칼에 죽는다. 수만 가지 표정이 그의 얼굴로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나 스네이크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녀석은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스네이크가 망설이고 있는 것을 쉐도우는 똑똑히 목격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그라면 단숨에 크로우를 뽑아내었을 것이다. 그의 망설임을 쉐도우가 대신해주었다.

양손으로 크로우를 빼내었다. 그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뒤쪽으로는 곧바로 50m 높이로 떨어지는 나락이 존재했다. 그곳으로 떨어지면 깊은 수중으로 그는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의 몸의 중심이 뒤쪽으로 향했다. 곧 추락하기 시작했다. 스네이크의 손이 뻗어왔다. 그러나 잡지 않았다. 스네이크는 친구의 죽음에 무릎을 꿇고 그가 떨어진 곳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ok!”

첨벙!

“푸하!”

레이 감독의 OK 신호가 들리자마자 카메라를 피해서 교묘하게 대기하고 있었던 무술팀 인원들이 물속으로 들어와 민후를 끄집어 올려주었다.

여섯 번째 촬영했을 때만 하여도 수월하게 물속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민후도 진이 빠질 대로 빠져버린 상황이었다. 물속에서 벗어난 민후는 헉헉거리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총 여덟 번 반복 촬영되었으며 파크와 자신의 마지막 신만 이틀가량을 찍었다. 스네이크도 민후도 충분히 지칠 만했다.

“괜찮나?”

파크도 걱정이 되었던지 후다닥 내려왔다. 숨을 헐떡이는 그를 보면서 안쓰러운 표정이다. 대역을 쓸 법도 하건만 민후는 이 부분을 자신이 하고 싶었다. 마지막인 만큼 더욱더 실감 나는 장면을 스스로가 원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숙소 가서 쉬면 되니까. 하하!”

민후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낄낄거리며 웃어젖혔다. 다른 이들도 그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허탈한 모습이다. 파크가 곧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고 일어선 민후는 자신에게 둘리는 샤워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전 세계 25개 지역에서 168개에 이르는 세트의 로케이션 중 노르웨이에서의 촬영을 끝으로 지아이오 팀의 시즌1이 끝이 난 상황이었다.

이 중에서 하차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계속 그 연을 이어갈 이들 역시도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는 추후의 2편 시나리오에 대해서 언급이 나왔고 채닝 테이는 다음 화부터는 짧게 출연한다는 말만 나왔을 뿐, 시즌2에 대해서 캐스팅되거나 한 배우는 실질적으로 없었다.

단지, 기존의 멤버들 중 계속 출연할 이들은 추후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는 CG 처리와 편집 등에 의한 시간이 다소 걸렸다.

때문에 민후는 2개월간 국내에 들어와 있다가 프로모션을 시작할 때쯤에 다시 지아이오의 배우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프로모션은 수많은 국가를 돌면서 진행될 예정으로 앞서 팬들에게 관심을 주기 위한 작은 이벤트 형식이었다. 일단은 미국과 유럽 일대를 돌았으며 그때마다 민후는 작은 한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배우들은 수많은 찬사를 받고는 하였다. 그러나 민후의 경우 이쪽에서는 거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배우와도 같았기 때문에 항시 소외되고는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용 비행기가 처음으로 아시아 국가인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1시간 후면 하네다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후! 안색이 안 좋아. 멀미라도 하는 거야?”

“아뇨, 괜찮아요.”

파크의 걱정스러운 어조에 민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실상 그는 항시 연기가 좋아서 배우를 하는 것이지, 인기가 좋아서 배우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이였다.

그러나 유럽 일대를 돌면서 다른 멤버들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특히나 그는 아시아 국가도 여념 없다고 여겼다. 채닝 테이나, 혹은 다른 배우들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끄는 세계적인 스타들이었다.

민후의 경우 아시아 국가에 얼굴을 크게 알린 적이 있기는 한 편이나 그들과 같은 세계적인 스타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싶었다.

아시아 국가에서마저도 소외를 당한다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왠지 오늘따라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더욱 빠르게만 느껴진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민후와 지아이오 일행이 함께 탑승하였던 경호원들과 함께 입국절차를 밟았다. 공항 측에도 이미 사전에 이야기되어 있는 경호원과 더불어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었다.

세계적인 스타들의 방문인 만큼 혹여 일본 시민이 다칠까 하는 염려도 되는 상황인지라 경찰들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을 것이었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면서 민후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에 대한 환대가 이어질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말자고 생각했다. 영화가 세계적으로 개봉을 하지 못해서일 뿐, 그들에게 자신의 연기력이 뒤처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을 수 있었다. 파파팍! 하고 터지는 플래시의 틈에서 파크가 민후의 옆구리를 툭 쳤다.

“후! 오늘 너의 날인데?”

파크의 말에 민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부셔서 아직 얼마만큼의 사람이 공항에 나와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는 몰려든 사람들을 확인했다.

하네다 공항이 사람들로 인하여 꽉 찬 상황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족히 1천여 명은 될 정도로 많아 보였으며 기자들과 일본팬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민후는 그들의 대부분이 다른 스타들을 보기 위해 들른 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곧 걸린 플래카드들과 팬들이 외치는 이름이 채닝 테이나 밀너, 니콜스 등이 아닌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꽉 메인 인파의 90%가 강민후를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으며 강민후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강민후! 사랑합니다!”

“강민후!! 멋있어요!”

“민후 씨! 보고 싶었어요!!”

민후는 그들을 보는 순간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다른 스타들의 이름이 오히려 강민후의 이름에 묻히고 있었다.

그를 부르는 이들 중에는 일본인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적잖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지아이오의 다른 팀원들도 크게 놀란 듯싶었다.

대부분 이들이 강민후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자마자 민후의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소외되었던 자신이 일본에서는 다른 스타들보다 더욱더 높은 인기를 얻어내고 있었다. 그 힘이 찬란한 재산과 42.195㎞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국내의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레이 감독도 혀를 내둘렀다.

“후가 아시아에서는 이렇게 대단한 스타였구나.”

“후, 멋진데?”

“너의 날이야.”

그들이 작은 감탄을 흘렸다. 민후는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본 도쿄의 오다이바 토호 씨네마 극장에서 열린 지아이오1의 일본 프로모션 행사에서도 공항에서와 마찬가지의 일이 빚어졌다. 사람들은 다른 배우들보다 강민후라는 배우를 더욱더 환대하고 있었으며 환호하고 있었다.

다른 배우들은 기가 질린다는 모습이었다. 실상, 이곳에서의 강민후의 인기는 자신들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것임을 그들도 깨달은 상황이었다.

“아휴, 이거 사람들이 절 너무 환대해주네요. 하하”

민후는 장난스레 웃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다른 이들도 순전히 장난임을 알았다. 평소의 민후는 예의 바르고 겸손한 이였으니 말이다.

“근데 정말 놀라워, 후. 대부분의 이들이 후를 보러 온 것 같아.”

밀너의 말에 민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5시간 전만 하여도 그는 자신이 소외될 것이라는 생각에 본의 아니게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다른 이들의 예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일본에서 환대받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 가면 이거 난리 나겠는데…….”

일본에서의 프로모션 후에는 곧바로 우리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틀 후였다. 다른 배우들은 그의 모국에 가면 정말 강민후의 인기를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가 질린다는 모습들이었다.

일본에서의 프로모션이 종료된 후 일행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인 파크 하얏트 호텔에서 머물기로 되어있었다. 자신의 객실로 들어온 민후의 얼굴로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침대를 양팔로 감싸 안듯이 몸을 파묻었다.

행복했다. 이렇게 배우 생활을 하면서 기분 좋은 적은 또 처음이었다. 자신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세계적인 스타들을 제치고 그들을 되레 소외시키는 일을 해냈다.

그만큼 자신이 아시아에서는 얼굴이 알려진 배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좋냐?”

“안 좋겠어요.”

“하긴 나 같아도 좋겠다. 세계적인 스타들을 인기로 눌러버리다니.”

정수는 기가 질린다는 듯이 웃다가 휴대폰이 울리자 베란다로 나섰다.

민후는 이 기쁨을 윤하에게 전하고 싶어서 카톡을 보냈다.

-정말? 그렇게도 많이 왔어?

-그렇다니까. 전부 내 이름을 건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어.

-역시 멋있는 내 남자. 보고 싶다-

-내일모레면 입국하니까 잠깐은 볼 수 있을 거야.

-난 지금 보고픈 데?

-지금은 좀…….

민후는 카톡을 보내다가 더 이상 그녀에게서 답장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1은 사라졌다. 갈 수 없다는 말에 삐친 것인가 싶었다.

어느덧 베란다에서 나온 정수가 문 쪽으로 향하더니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짜잔!’ 하면서 윤하가 들어왔다.

“뭐야?”

윤하가 들어오자 민후로서는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수가 능글맞게 웃음을 흘리는 것을 보자 두 사람이 짜고 친 고스톱임을 알 수 있었다.

“시부야에서 첫 팬 미팅 했지롱.”

그녀가 손가락 두 개를 브이 자로 만들어 보이면서 빙긋 웃었다. 우리나라의 배우가 이곳으로 넘어와 팬 미팅을 열었다면 웬만해선 민후의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정수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정수와 윤하가 짜고 쳤던 고스톱이었기 때문에 민후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민후는 잘 몰랐지만, 오늘 윤하가 참석했던 시부야의 팬 미팅은 2천여 석이 전부 매진되는 경이로운 윤하효과를 보였다.

우리나라의 남성 배우들이 2천여 석을 가볍게 매진시키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여성 배우들의 경우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도 계속해서 아시아권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레이 감독님한테는 내가 미리 양해 구했어. 환영한다던데? 내일 아침에 식사나 같이했음 좋겠대.”

정수는 민후가 난처하지 않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던 듯싶다. 그는 윤하를 보았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가 밖으로 나서기 전 돌아봤다.

“참! 채닝 테이가 뜨거운 밤 보내라는 말 전해주라던데?”

“킁, 테이도 참.”

민후는 헛웃음 지었다. 정수가 두 사람을 위해서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는 윤하가 마련해준 객실에서 잠을 자게 될 것이었다. 윤하는 정수가 나가자마자 대뜸 민후의 상체로 대롱대롱 나무늘보처럼 매달렸다.

“나 안 보고 싶었져!?”

연애 초반에는 쑥스러움도 서로가 많았고 손을 잡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젠 연수로만 손가락 열 개를 채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낯을 가릴 것도 없었기에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곤 했다.

“보고 싶었지.”

민후는 자신의 몸에 매달린 윤하의 입에 쪽 입을 맞춰주었다. 그는 그대로 침대로 그녀를 이끌었다.

“어허!”

두 사람도 이젠 숱하게 잠자리를 가지는 관계가 되었다. 윤하가 자신에게 폴싹 안기자 그 뜻이라고 여기고 침대로 데려갔던 민후는 손가락으로 막는 그녀에 의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어떻게 여자 친구가 오자마자 몹쓸 짓부터 할 생각을 하시나? 난 무드 좀 느끼고 싶은데.”

그녀는 황당하다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민후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2개월 동안 못 봤더니 자신이 굶주리긴 했었나 보다. 윤하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괴고는 그를 보았다.

“오늘 일본 팬들이 그렇게 많았다며? 어때, 기분 좋았어?”

“흐음, 째졌지.”

그녀의 물음에 민후는 입이 찢어져라 웃어 보였다. 정말이지 그때의 그 전율은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짜릿했다. 아마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고 하더라도 평생 기억에 남을 전율을 간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 들어왔을 때는?”

“더 째졌지이.”

민후는 앙탈을 부리는 아기곰처럼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귀엽다는 듯 양 볼을 잡고는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잘생겼을까.”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그럼 우릴 닮은 아이는 되게 예쁘고 잘생겼겠다.”

“그럼 지금 바로 만들까?”

“나 아직 무드를 덜 느꼈는…….”

윤하는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굶주린 민후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리모컨을 이용해서 취침등만을 켜고는 모든 불을 소등시켰다.

그러고는 윤하의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두 사람의 밤은 뜨거웠고, 민후의 2개월간의 지친 심신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레이 감독이 머물렀던 객실에서 함께 모이기로 했다. 본래 호텔 식당에서 먹는 맛도 좋지만, 엄연히 그들은 전부 세계적으로 얼굴을 알린 이들이었다.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윤하는 씻은 후 화장을 했다. 다른 이들에게 민후의 여자 친구로서 꿀리고 싶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그녀와 함께 레이 감독이 있는 객실의 문을 노크를 했다. 곧이어 들어가자 레이 감독과 밀너, 니콜스, 파크, 고든 등이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윤하는 자연스럽게 영어로 인사했다. 그들은 몸을 일으켜서 그녀를 반겨주었다. 레이 감독은 유심히 윤하를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동양인다운 느낌이 물씬 풍기기는 했으나 가냘픈 턱선과 오뚝 솟은 콧날. 조화로운 눈과 갈색 눈동자는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니콜스가 식탁 앞으로 다가온 그녀에게 칭찬하듯 한 말에 윤하는 빙긋 웃었다. 그녀에게도 조금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민후도 처음 그들과 대면할 때는 꽤 긴장했었다.

“‘후’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습니다.”

“후…… 요?”

후라는 호칭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민후가 그녀의 귀에 ‘내 애칭이야.’라고 말해주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빙긋 웃었다.

그들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에는 전혀 사심이나 거짓이 없었다. 니콜스나 밀너 같은 세계적인 미녀 배우인 두 사람이 보기에도 한윤하라는 여자는 무척 아름다웠고 매력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하였다.

이미 식사는 모두 준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파크는 윤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이다가 웃었다.

“아, 생각났어요. ‘동아’라는 사극 드라마에 나왔던 사람이죠?”

“예, 맞아요.”

파크의 말에 윤하는 다소 놀란 표정이다. 그녀는 실상 레이 파크를 잘 알지는 못했으나 함께 착석하고 있는 이였기에 출연배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자신이 과거 출연했던 작품이 나오자 다소 놀랐다.

“파크 씨가 우리나라의 열혈 팬이셔. 한국 드라마도 꿰고 계시지.”

민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도 가끔 그가 보는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기도 한 적이 있었다.

“정말 잘 봤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연기였어요.”

“감사합니다.”

윤하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쁜 듯싶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다 레이 감독이 한숨을 쉬면서 뭐라 말하려는 것을 니콜스가 가로챘다.

“‘지각쟁이 테이 같으니라고.’라고 하시려고 했죠?”

“그래.”

항시 늦는 테이. 그리고 항시 그가 늦으면 내뱉는 레이의 말. 식탁 위로 잠시 웃음이 스쳐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테이가 들어왔다.

테이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문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교차시키며 콧대에 엄지와 검지를 얹으면서 폼을 잡았다.

“좋은 하루입니다, 여러분.”

“후, 이럴 때 한국에서는 뭐라고 해?”

“쌩쑈를 하네. 라고 합니다, 감독님.”

레이 감독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민후가 말했다. 레이 감독과 곧 식탁 앞의 다른 이들이 한입 모아 ‘쌩쑈를 하네!!’라고 말하자 그가 당혹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윤하에게 다가갔다. 느끼한 말투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분께서 저희 후와 연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전 세계적인 배우 채닝 테이라고 합니다.”

“바, 반가워요.”

“후가 저한테 참 신세 진 게 많아요. 그렇지만 이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주고 있죠.”

채닝 테이의 모습에 윤하도 적잖이 당혹한 모습이다. 평소에 이렇게 장난기가 많은 이다. 하물며 윤하에게 이성으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장난을 치고 있는 것임을 2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알게 된 민후였기에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테이, 비행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쫄쫄 굶고 갈 거야? 빨리 앉아.”

“예.”

레이 감독이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테이다. 윤하는 그들과 식사를 하며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세계적인 스타들과의 만찬이라는 것이 그녀도 생소할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자신의 남자친구인 민후도 껴있었기에 꽤 자랑스러웠다.

식사를 끝마치고 윤하가 먼저 호텔을 나섰다. 아직 일본에서의 스케줄이 남아있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뿐이다. 지아이오 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을 나섰다. 오늘도 어제의 그 극장에서 같이 프로모션을 진행 후 한국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지아이오 팀이 바삐 움직였다.

세계적으로 개봉한 지아이오는 한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극장가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손익분기점은 단숨에 넘어선 상황이었으며 당연하게도 시즌2가 촬영될 것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촬영은 내년 말부터 진행이 될 예정으로 민후는 국내에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생긴 셈과도 같았다.

지아이오가 세계적으로 흥행을 성공시킴으로써 배우인 민후가 거둬들이는 수익과 인지도 역시도 한층 뛰어나게 올라섰다.

오늘이면 민후는 다시 자신의 본국인 대한민국으로 출국을 하게 된다. 다른 배우들 역시도 자신들의 집 혹은 다음 작품을 준비하게 될 것이었다.

이중 다음 촬영 때 만날 수 있는 이는 민후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채닝 테이와 파크뿐이었다. 애석하게도 다음 화부터는 감독이 교체된다. 레이 감독의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니콜스와 밀너, 고든도 다음 회에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이 난 상황이었다. 준비 기간 동안 배우들의 캐스팅이 진행될 전망으로 보였다.

“감독님.”

민후는 레이 감독을 꽉 껴안아 주었다. 긴 시간 동안 동고동락을 하면서 정말 정이 많이 들었던 분이다. 다음 작품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자리 잡는다.

밀너와 니콜스, 고든에게도 그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민후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음에 보자고, 후.”

고든의 말이었다. 실상 지아이오의 제외하고서 민후가 다음 할리우드 작품을 따낼지는 언제일지 미지수였고 그들과 만날 수 있을지 역시도 미지수였다.

아쉬운 마음이 강했다. 물론 지아이오의 촬영이 끝난 것은 아니나 오랜 시간 함께했던 만큼 정들었던 것도 큰 편이었다.

“후, 자넨 내가 바라보던 아시아인의 관점을 확 바꿔준 친구야. 아시아인도 무한한 잠재력이 있고 그 실현이 가능하다. 그 모습 항상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해.”

레이 감독이 진심으로 강민후라는 한국의 배우에게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와 함께하면서 레이 감독은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든 누구보다 가장 앞에 서려고 했으며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그만한 배우를 또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간혹 레이 감독은 이런 생각도 스쳤다.

만약 강민후라는 배우가 한국이라는, 영화판이 좁은 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출생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채닝 테이와 어깨를 견줄 만한 스타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만큼 그는 무엇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훌륭한 보석이었다.

“후!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는 거 잊지 마!”

채닝 테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민후가 팔을 들어 올려 보이면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주로 채닝 테이가 자주 하는 인사법이었다. 뒤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안내 가이드를 해주었던 내쉬도 함께 차량에 탑승했다.

그와도 함께 생활하면서 꽤 정이 들었다. 물론 그보다 정수와 함께 더 있었지만 말이다.

어느덧 그가 탄 차량이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의 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1년 6개월 후에나 다시 밟게 될 곳이었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기로 했다. 몇 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국내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이 다시 많아졌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배우 강민후에게 아쉬움으로 인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할리우드의 첫 데뷔이자 첫 출발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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