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2.195㎞ 촬영을 시작하다
첫 촬영 바로 전날이었다. 현재 어린 유원 역할의 아역과 의진의 촬영은 모두 끝난 상황이었다. 평균적으로 영화의 촬영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사이이며, 길게 이어지는 영화의 경우 2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언급한 바가 있듯이 영화나 시나리오들은 스크린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나리오의 순서대로 촬영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32신이 있다고 가정한다. 눈이 오는 신이다. 그렇다면 이 신의 경우 41신을 환경에 따라 먼저 촬영하고 혹여 눈이 오게 되면 32신을 찍는 식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시나리오로 각 신이 나눠진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상 배우들은 우는 연기를 했다가 갑자기 웃는 신으로 전환되어도 그것에 잘 따라갈 줄 알아야 참된 배우였다.
촬영장은 변수가 많았다. 사람들이 자주 보는 무협지에서 갑작스럽게 대단한 절정고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촬영장에서도 갑작스러운 변수가 무척 많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대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배우의 준비성이었다.
갑자기 다른 신을 찍게 된다. 혹여 오늘 찍게 될 신만 외우고 준비해온 배우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그것을 외울 때까지 촬영을 지체시키게 되는 것이고, 숱한 NG를 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철저한 준비는 꼭 필요한 과제였다.
민후는 영화 촬영 전 6개월 동안 꼬박꼬박 각 신을 하루에 1시간씩 연습한 바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본인으로서는 이미 혼자서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혼자만의 영화 촬영은 오로지 연습을 위해서였고 이번 것은 실전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오늘 같은 경우도 이미 스스로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시나리오를 외우고 극 중 모든 인물의 심리를 깨우쳤으며 심지어 자신이 맡게 될 유원이의 모습조차도 자신이 정말 그 유원이가 된 것처럼 할 수 있는 만큼 되었지만, 그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가 눈을 감은 시간을 확인할 때는 새벽 3시였다. 내일 촬영이 10시부터 이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7시쯤에는 기상해야하였다. 4시간쯤의 수면뿐이었으나 영화 촬영의 경우 밤샘 촬영이 이어지면 쪽잠을 자게 되기 일쑤인지라 이건 양반인 셈이다.
‘잘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멋지게, 누구보다 열심히.’
그는 눈을 감기 전 내일 촬영에 대해서 굳은 다짐을 한다. 첫 촬영인 만큼 더욱 성공적인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7시에 일어나 어머니와 식사를 한 후 민후는 자신을 데리러 온 정수의 차량에 올랐다. 촬영 시간은 10시, 현재 시각은 7분 40분쯤 되었다. 당연하게도 민후는 역시나 촬영장에 어김없이 일찍 간다.
영화 촬영은 시트콤처럼 녹록하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일주일에 5편 방영되는 시트콤도 쉽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영화 촬영은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모든 동작 세심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으며 한 신을 10번 20번 반복 촬영할 수도 있었다.
특히나 문 감독이 맡은 영화인지라 한 신을 촬영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릴 수도 있었다.
곧이어 차량이 촬영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번에 문정흠 감독, 그리고 배우들과 함께 42.195㎞를 촬영하게 될 스태프들은 촬영 기간 동안 꼬박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 며칠 앞부분의 내용을 몇 번 촬영해보았지만 이제까지 자신들이 마주하였던 일반적인 감독들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그는 정말 완벽하다 싶은 컷이 아니면 OK사임을 보내지 않고 계속 반복된 촬영을 진행하였으며 그와 더불어서 만족한다 싶다 하더라도 더 좋은 장면, 더 멋진 장면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계속해서 반복 촬영을 하였다.
그 때문에 스태프들의 진이 빠지는 것이 당연하였고,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힘이 쭈욱 하고 빠진 상황이었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찍은 장면에 아역이 출연하여서 아이가 실수를 많이 해 더욱 그런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앞으로 한참은 남은 영화 촬영에 스태프들은 ‘에휴’ 하고 한숨을 짙게 뱉을 수밖에는 없었다.
“한숨 쉬지 마라. 먹고살라면 해야지. 또 영화 잘되면 우리도 좋은 거잖냐.”
한숨 쉬는 스태프들을 보면서 촬영감독인 김기태가 한 말이다. 그 말에 다른 스태프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보다 훨씬 연장자였으며 한 팀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한숨을 안 쉬는데 어린 스태프들이 한숨을 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촬영감독 김기태가 온순한 성격인지라 한 소리 안 들은 것이지, 다른 이들 같았으면 그들은 벌써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한창 촬영 트럭에 장비들을 싣고 있는데, 밴 한 대가 도착했다. 스태프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돌렸는데, 그곳에는 강민후가 매니저와 함께 내리고 있었다.
“끙!”
그리고 또 다르게 한편에서는 다른 스태프들이 돌아볼 새도 없이 무거운 장비를 옮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민후와 정수가 냅다 뛰었다.
민후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수의 경우는 민후와 함께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그의 행동 패턴에 자신도 물이 들어버려 그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니 스태프들이 좋아하고 친해질 수 있는 계기도 만들어지니 좋았다.
“하나, 두울, 세엣!”
무거운 촬영 장비를 힘을 합쳐서 들어 올려 트럭에 실었다.
“가,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은 짐짓 당황한 표정이다. 도와줄 때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주연 배우 강민후였던 것이다. 그나마 시트콤 당시의 경우 민후는 이렇게 한 영화의 완전한 주연을 맡은 인물도 아니었고 신인이었기에 빠르게 배우들과 친해질 수 있었지만, 주연을 맡은 인물의 경우 그만큼 몸값이 있다는 생각이 스태프들에게 스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에 있던 촬영장 때보다도 더욱 큰 경계 어린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어차피 그들도 민후의 방식대로 곧 있으면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민후는 첫 시작은 논스톱 5 촬영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이 시작했다. 스태프들에게 먼저 다가서 쩌렁쩌렁 인사하고 도울 건 돕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 첫 촬영을 하게 된 민후가 찍을 장면은 임의진 선생님과 함께 합을 맞출 예정이었다. 상당히 많은 뜻을 담고 있는 시나리오였다. 극 중의 유원이 김밥을 사러 나가 심부름을 갔다가 얼룩말 무늬의 핸드백을 들고 가는 여성을 보고는 핸드백에 관심을 가져 그녀를 쫓아간다.
그러나 결국 유원은 그녀와 함께 경찰서에 나란히 가게 되고, 경찰서에서 젊은 20대 여성이 유원의 어머니에게 ‘저런 아이는 정신병원이나 보호소 같은 데 보내든가.’라고 발언한다.
그에 경찰서를 나서고 택시를 기다리는 그녀를 발견한 유원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다가가 크게 한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었다.
오늘 평소처럼 일찍 온 민후는 다시 밴을 타고 촬영팀과 이동하였다. 문 감독은 일찍 온 민후를 보고는 큰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신인 배우로서 당연하다는 모습이랄까. 그러나 속으로는 내심 지켜보려는 생각이 강했다.
촬영장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의진 선생님께서 촬영장에 도착하셨다. 잠시 촬영 장비 세팅으로 인하여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임의진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몇 번 되뇌며 중얼거리시다가 가슴 한쪽에 손을 얹으셨다.
“너무 슬프지 않니? 자신의 아이한테 ‘정신병원이나 보호소’로 보내버리라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심정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난 눈물이 난다.”
그녀는 눈가가 촉촉이 젖으면서 하는 말이다. 민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이것을 보는 의진은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고, 민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되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경찰서 내부에서의 촬영은 거리의 통제가 이뤄지는 만큼 경찰서보다는 이쪽의 촬영을 더욱 빨리, 심혈을 기울여 촬영되어야 했기에 먼저 촬영되었다.
촬영팀 인원들은 신속하게 동선을 만들고, 배우들은 그 동선을 파악하기에 앞섰다. 민후는 이번 신의 경우 어머니의 조금 화난 음성에 당혹한 기색을 표출하여야 했으며,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와 자신의 아이를 그렇듯 말한 것에 대한 슬픔을 동시에 표현해야 했다.
“선생님께선 누구보다 억하심정으로 어머니로서 상처를 받으신 것처럼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네네.”
문 감독이 어느새 다가와 민후와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연기했으면 하는지 의견을 제시했다.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유원과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함께 나왔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듯 김밥 사 오는 일조차 쉽게 하지 못하는 유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조금 성난 목소리로 유원에게 묻는다.
“거스름돈 잘 받아왔어? 얼마야? 김밥 한 줄에 2천 원이니까, 3줄이면 얼마 남겨 와야 해?”
“어, 받아왔어. 어.”
유원은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꾸깃꾸깃 자신이 쥐고 있던 지폐를 펼쳐 보이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개수를 센다.
어머니는 갑갑했던 것인지 그의 팔뚝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계산하듯 한다.
“만 원에서 세 줄이면 6천 원이니까 4천 원이 남아 있어야 해. 맞나, 세어봐.”
“어, 어어, 4천 넌 4처 넌.”
유원이 돈을 세려고 하자 그녀가 건너편의 독설을 하였던 여성을 발견하고는 횡단보도를 무시한 채 무단 횡단한다.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간 어머니가 택시를 잡기 위해 흔드는 팔을 쳐낸다.
“보호소!? 정신병원!? 쟤네들이 범죄자야, 그런데 가두게? 우리 애가 무슨 정신병자인 줄 알아!? 명품이든 짝퉁이든 우리 애는 그런데 전혀 관심 없으니까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알았어!?”
그녀는 성난 표정으로 몸을 돌린다. 화가 치민다. 자신의 아이가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로, 자폐증을 앓았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정신병원’에 가야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몸을 돌려서 씩씩거리려던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는 것인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간다.
“애 듣는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야! 다 기억해, 우리 아들 너보다 기억력 100배 1천 1만 배는 더 좋아! 어디서 어린년이.”
그녀는 휙 하니 몸을 돌린다. 여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확실히 의진의 연기력은 뛰어났다. 이번 신의 경우는 민후보다는 그녀가 더욱 돋보이는 신이었는데, 그녀의 화와 슬픔이 함께 담긴 표정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도 문 감독은 수차례의 촬영을 제시하였는데, 민후나 임의진 선생님의 경우 군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나 민후나 좋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함이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들이 아무리 연기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을 갖는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민후는 스태프들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반복 촬영하여도 스태프들의 표정이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당연하다는 표정의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좋지 않은 표정의 이들도 분명히 적나라하게 그의 시선에 들어오고 있었다.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이다. 민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계속 반복 촬영된 것 때문에 지쳐서 그런 것까지는 하였지만 저렇게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불만스러운 표정의 스태프들은 대부분 젊은 스태프들이었다. 민후는 의아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뭔가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있겠거니 했다.
민후는 42.195㎞의 촬영을 평소처럼 행하였다. 누구보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했으며 누구보다 스태프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민후에게 스태프들은 점차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 감독의 그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중이었다. 문 감독은 커피믹스로 탄 커피를 마시면서 민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촬영을 시작한 지 2주 남짓이 흘렀다. 촬영 기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현저히 적은 분량밖에는 촬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 탓에 배우들도 스태프들도 상당히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 본인도 자신이 까다로운 성격임을 안다. 바꿔볼까 하였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이 쉽게 되지 않았다. 하물며, 고진감래라고 고생 끝에 결국 낙이 오기 마련이다.
수많은 배우도, 스태프들도 고생해서 촬영을 끝낸 후 작품이 흥행하면 고생했다는 인사를 하고는 하였다. 촬영이 끝났음에도 한 배우가 자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고 함께 밥을 먹으면서 그는 내심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실상 문 감독은 그를 무척이나 굴렸다. 아직 파릇파릇한 배우였었는데 생각보다 연기력이 좋은 배우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반복 촬영을 진행하였다.
그렇지만 작품은 성공적인 관객 수를 맞이했고, 그 배우는 서운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무척 고맙다는 말을 그에게 건넸다. 자신 덕분에 촬영의 고됨을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고 그 일이 있고 난 뒤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더욱 열심히 임하고 있는 문 감독이었다.
그리고 민후의 경우는 다른 배우들보다도 유독 돋보였다. 항상 일찍 오는 것은 감수하고, 밤샘 촬영에 지칠 만도 하건만 혼자 시나리오를 들고는 유원이처럼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남들이 잘 때도 그는 다른 무언가를 항시 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고, 피곤함을 모르는 녀석인가 싶었다. 문 감독은 내심 느끼는 중이었다.
자신의 이번 영화의 신인 배우인 강민후의 캐스팅은 자신이 살면서 잘한 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민후는 시나리오를 손에서 떼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는 문 감독이다. 그러다 임의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임의진은 빙긋 웃는다. 그녀는 문 감독의 시선이 민후에게 향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요, 아들 녀석 같아요?”
“아니, 뭐…… 제 아들이었으면 기특했겠죠.”
그녀의 말에 잠시 당황했던 문 감독은 둘러대는 듯하다 농담을 던졌다. 그 말에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양 팔짱을 끼고는 민후를 바라보았다.
“참 요즘 애들하고는 많이 다르죠.”
“그러네요.”
“요즘 잘 좀 나간다 싶은 애들은 왜 이렇게 촬영이 끝나면 차 안으로 들어가는지 정말 못 볼 꼴이다 싶어요. 또 자기 촬영만 끝나버리면 모니터고 뭐고 확 하니 가버리니, 인기가 좋아서 연기하는 건지 싶을 때도 많아요. 그에 비하면 민후는…….”
“배우가 좋아서 하는 녀석이죠.”
마지막 말은 문 감독이 받았다. 실제로 요즈음의 잘나간다 싶은 상당히 젊은 친구들의 경우 쉬는 시간이라고 하면 휙 하니 차량으로 들어가 잠을 자거나 노트북을 만지고는 하며, 끝나면 그대로 미련도 없이 촬영장을 빠져나가고는 한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실상 대부분의 중역 노역 배우들은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촬영이 끝나면 차량에 들어가기보다는 일단 감독의 옆에 서서 ‘잘 나왔어요?’ 하고 물으면서 함께 모니터하고 촬영이 끝나도 여운이 남았는지 촬영장에서 기웃거리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어쩌면 여유가 있어서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의 인기 좀 있다는 배우들은 무슨 예능이다, 개그 코너다 뭐다 이렇게 많고 배우로서 하는 연기를 오로지 인기를 위해서 하는 이들이 꽤 되었다.
그 때문에 스케줄은 빠듯하게 잡아놓고 촬영이 끝나면 인사도 안 하고 후다닥 달려나간다. 그 점이 무척 안타까웠다.
그에 반면, 민후라는 아이는 빠듯한 삶을 살면서도 이 촬영장에서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또한,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자신이 할 연기에 연연하는 녀석인지라 민후를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미소에는 웃음이 계속 맴도는 듯하였다.
한편, 시나리오를 확인하면서 다음 신을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던 민후는 배 쪽에서 신호가 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쉬는 시간은 15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변을 보고와도 되었다.
그는 시나리오를 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대변을 보면서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화장실로 온 그는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반바지 차림이었던지라 그대로 내려서 대변을 보기 시작했다.
푸드드득.
뿌웅.
그는 장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시원하게 변기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는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재주였다.
배에는 힘을 주고 머릿속으로는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창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던 민후는 화장실로 들어서는 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놔, 존나 짜증 나네.”
“왜 그래, 또.”
“아니, 도대체 무슨 촬영을 그렇게 반복하는 거야.”
“뭘 그런 거로 그러냐. 한두 번이냐.”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우리가 무슨 반복 촬영하면 월급을 더 많이 받아? 적당이란 걸 몰라요, 적당이라는 걸. 새끼들 진짜. 쯔즛, 문 감독님만 그러면 뭐라고 안 해, 배우들도 대체 얼마나 큰 대작을 만들겠다고 이러는 건지.”
아마도 민후가 화장실에 없다는 가정하에 하는 이야기 같았는데, 민후는 잠시 이미지 트레이닝을 중단하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음향팀 경력 5년 정도 되는 이일 것이다.
김완중이라는 남성이었는데, 스물 후반대의 나이로 알고 있었다. 평소 민후가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하고 해도 다른 이들처럼 살갑게 받아주지 않던 이였다.
지금 여기에서 확인하니 평소 성격이 투덜거리고 모든 일에 불평이 많은 자 같았다. 100여 명 가까이 되는 촬영팀이 있는 촬영장 내에서는 저러한 성격이 좋지 않다고 민후는 판단한다.
하물며 저렇듯 대놓고 욕을 해대면 다른 스태프들도 ‘하긴? 우리가 받는 돈이 더 늘어나나, 뭐?’ 하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추가 수당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스태프들은 전염병처럼 불만을 함께 느낄지도 몰랐다.
민후는 첫 촬영 때보다는 스태프들의 탐탁지 않았던 시선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몇몇이 남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김완중이라는 남성이 저렇듯 전염병처럼 옮기고 있다.
말 그대로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리는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곧 자동으로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그들이 밖으로 나서는 소리가 들린다.
민후도 대변을 마치고는 밖으로 나와서 손을 씻으면서 중얼거린다. ‘좀 볼일을 봤으면 손이라도 씻어라, 자식들아.’라고 말이다.
그는 실상 아주 작은 미꾸라지였기 때문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저 미꾸라지는 얼마 있지 않아 곧 사라질 것이라고 민후는 장담하기 때문이다.
뛰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극 중 코치인 김준노의 지도하에 유원은 지적 장애인 전문학교의 운동장에서 달리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뛰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소모가 예상되는 바가 있었으며 몇 주간의 촬영 중 처음으로 뛰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액션 영화처럼 미친 듯이 전속력으로 달리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액션 영화에서처럼 계속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문 감독님이나 민후의 성격상, 확실한 장면이 나올 때까지 달릴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민후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10월의 중순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날씨는 많이 선선해진 상황이었다. 습도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뛰기에도 상당히 적합하다고 할 수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민후는 운동장을 돌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네 바퀴. 그는 정말 쉬지 않고 내달리는 중이었다.
운동장 신은 꽤 있었다. 극 중 코치가 유원의 자두를 훔쳐 먹는 신이나, 혹은 찜질방에서 그에게 100바퀴 뛰어! 라고 말을 하여서 100바퀴를 뛴 장면이라던가.
그러나 유원이 달리는 장면의 경우 운동장을 제외하고도 많았다. 일단 문 감독은 이 운동장 신을 가을이 지나기 전 촬영을 한 후에, 그다음으로 봄이 되면 대회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일반인 마라토너들을 모집하여서 마라톤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제작사나 문 감독의 제작비 절감과 전국의 마라토너들을 모으자는 생각이기도 하였다.
마라토너들을 모아서 그들은 마라톤에 출전하게 되고, 한편 제작사의 경우는 그들을 촬영의 엑스트라로 사용할 것이었다. 물론 제작사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수많은 일반인이 벌써부터 42.195㎞라는 자폐증을 앓는 청년, 박형진 군의 이야기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밝히면서 촬영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하물며 이번 대회에서도 제작사 측도 그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한다는 점이 있어서 참가비는 받지 않을 것이었고, 촬영에 도움을 준 이들에게 사은품을 줄 예정이었다.
촬영을 시작하자 카메라들이 민후와 더불어서 코치를 잡기 시작하였다. 민후는 정말 쉴 새 없이 계속 뛰었다. 거의 30분 동안 내내 뛰고는 10분 숨을 돌리는 시간에는 문 감독의 옆에 바짝 붙어서는 모니터로 확인을 했다.
“한 번 더 뛰고 싶은데요,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그래?”
문 감독이 말하기 전에 민후는 자신이 직접 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촬영된 장면에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더욱더, 유원이스럽게 뛸 자신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그 장면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말 쉴 새 없이 뛰는 것을 반복했다. 실상 계속 달리는 것보다 멈추고 달리고 멈추고 달리고 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는 더욱 큰 충격을 가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민후는 자신이 만족하거나 혹은 문 감독이 만족하여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의 이제까지의 피나는 트레이닝과 노력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스태프들은 달리는 그를 보면서 ‘사람 맞아?’라는 표정으로 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정말 괴물 같은 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촬영장 내부의 그 어떤 인원도 강민후처럼 달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벌써 3시간을 넘게 달린 상황이었다.
대부분 스태프는 반복된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강민후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면서 투덜거리지 못했다. 그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배우가 저렇듯 미친 듯이 달리는데 자신들이 투덜거릴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민후를 ‘괴물 같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민후도 정작 사람이었던지라 당장 죽을 맛이었다. 애초에 달리는 것 자체가 힘든 운동이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다리는 지끈거리며 호흡은 거칠어져서 운동 중에서도 상당히 힘든 종목이지 않은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그가 달리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최고의 신을 위해서, 그리고 유원이처럼 달리는 것을 원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스태프들이 자신을 보고 ‘우와, 잘 달린다.’라고 말해주길 원해서 달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하지만 반복된 촬영에 다른 스태프들이 놀라 그를 보고 있을 때, 김완중과 그 무리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가보다. 그들은 몇 시간을 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모습이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몇 시간째 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그를 보고는 오히려 빨리 끝내주기를 바라는 모습이다.
“후우…….”
잠시 컷이라고 외쳐지고 무릎에 손을 짚은 민후가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 위로 흠뻑 젖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후는 빙긋 웃으면서 문 감독한테 다가갔다.
“감독님, 저 지금 이 정도 땀이면 38신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 민후, 너 괜찮겠냐.”
문정흠 감독이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38신의 경우 코치인 김준노가 유원에게 찜질방에서 흘리듯이 100바퀴를 뛰라는 말에 운동장에 와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유원이 순진하게 운동장에서 정말 100바퀴를 뛰고 있던 신이다.
38신의 경우 흠뻑 젖은 땀과 힘든 기색을 역력히 표출하여야 했다. 물론 땀이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힘든 기색이야 민후의 연기력에 따라 좌우되니 언제 찍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민후는 지금 딱 38신의 모습과 자신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생각에 문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뭐…….’
그는 감탄에 감탄을 너무 하여 당황하였다. 자신도 독한 감독이라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런 자신이 지금 민후를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는 서브쓰리를 달성한 상당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3시간을 꼬박 달렸다. 아무리 마라톤 영화라지만 이곳에서 그가 진짜로 마라톤을 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쉬엄쉬엄해도 되는 것을 민후는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위해서 멈추지 않고 있었다. 문 감독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으면서 정수로부터 물을 받아서 벌컥벌컥 들이켜는 민후를 볼 수 있었다.
정수는 민후를 살폈다. 정수가 민후의 운동화를 벗기는 순간이었다. 흠뻑 젖은 발과 함께 민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3시간을 달렸으니 발목이 아픈 것은 당연했다.
정수가 그곳에 스프레이형 파스를 뿌렸다.
민후는 발을 땅에 한 번 디뎌보더니 장난스레 놀란 표정이다.
“형, 이거 마법의 약인데요? 하나도 안 아파졌어요.”
“허풍은.”
문 감독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그 자신도 신중해야할 문제였다. 이제 한 신이 끝났다. 그래도 목표량은 채웠기에 돌아가서 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배우가, 저 앞의 배우가 다른 신을 찍어내고 싶다는 열정을 보인다. 또 한 번 그 신을 위해서 1시간 이상을 뛰어야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는데 말이다.
혹여 몸에 문제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치이익.
“후우…….”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어차피 민후가 38신을 오늘 찍어버리면 그나마 다른 날 촬영할 것을 오늘 하는 것이기에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나는 셈이었다.
지금 자신이 그만하라고 하면 녀석이 맥 빠진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가 걱정되면서도 그의 실망한 기색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모습의 촬영 장면의 경우 민후의 몸을 생각해서 촬영 중간중간에 할 것이었기 때문에 오늘 큰 무리를 한다고 해도 촬영의 재개에 관해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문 감독은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민후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 위로 손을 덥석 하고 올렸는데, 손으로 끈적끈적한 땀이 흥건히 느껴지고 뜨거운 몸의 열기가 전달될 정도였다.
그는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그의 열정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겠나?”
“예, 저 아직 쌩쌩해요. 에이, 이 정도 땀이야 뭐, 헬스클럽에서 한 20분 뛰면 나는 땀이잖아요. 그렇게 안 힘들어요.”
민후는 땀에 흠뻑 젖어버린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문 감독의 시선에서 걱정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38신을 꼭 찍고 싶었다. 현재 그도 사실 지쳐있었다. 그러나 38신은 지독히 지쳐있는 유원을 표현하는 신이었다. 때로는 배우의 몸 상태가 현실감을 더욱더 하기도 하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알았다. 물 충분히 마시고.”
“넵. 감사합니다!”
문 감독은 결국 그의 눈빛을 보고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서는 꼭 하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38신 촬영하겠습니다! 오늘 38신 촬영하면 내일모레 촬영 날에는 오전 촬영만 할 예정이었으니 그날 아예 쉬도록 하죠!”
“예!”
다른 스태프들도 민후의 그런 의지 있는 모습에 군말 없이 따라줬다. 그러나 김완중은 그에 확 하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이씨…… 이제 집에 가서 발 뻗고 잠 좀 자나 했더니…….’라고 그는 여긴다.
정말 부정적인 사람. 그것이 바로 김완중이었다. 다른 스태프들은 민후의 대단한 노력에 감탄하고, 그의 하고 싶다는 열정에 자신들도 그를 찍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김완중만큼은 그러지를 않는다. 또 자신만 그러면 이해가 되는데 옆에 있는 다른 스태프에게 구시렁거린다.
“에이 씨, 퇴근할 수 있었는데. 하여튼 강민후라는 저 배우, 뭘 저렇게 열심히 하겠다고. 쯔쯔, 혼자만 열정에 차 가지고.”
“응? 그, 그래도 되게 보기 좋은 것 같지 않아?”
“보기 좋기는 개뿔. 다 같이 개고생하자는 거지, 뭐.”
그는 여전히 툴툴거린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몇 사람이 생겼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 감독의 의지 하에 38신 촬영이 시작되었다.
유원에게 운동장 100바퀴 뛰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낸 김 코치는 찜질방에서 잠이 들었다가 황급히 운동장으로 들어오는 신이었다.
그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뛰고 있는 유원을 발견하는 신이었다.
<김 코치는 황급하게 운동장으로 왔다. 운동장에 들어선 그는 땀에 젖은 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참 바보 같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100바퀴를 뛰라고 했다고 정말로 100바퀴를 뛰는 녀석이라니. 그러나 그는 바보 같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정말 너무나도 순수한 녀석이라고도 생각하고, 한편으론 대단하기도 하였다.
그는 유원에게 다가가 그를 막는다.
“인마! 그만 뛰어!”
“이제 한 바퀴 남았다.”
“뭐? 너 지금 100바퀴를 뛰었어?”
김 코치의 만류에도 유원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속도는 이미 현저하게 느려져 있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김 코치는 걱정스러웠지만, 자폐증을 앓는 청년 유원이 100바퀴를 뛰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것을 알고는 그저 지켜본다.
곧 100바퀴를 뛴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앞으로 간 김 코치는 한숨을 쉰다. 자신이 흘리는 말 한마디에 한 아이가 미친 듯이 달렸다.
자신이 정말 이래도 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
“100바퀴 다 뛰니까 좋냐?”
“하아하아, 조, 아. 하아하아.”
그는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힘 안 들어?”
“힘들어요…….”
“왜, 가슴 아파?”
유원이 가슴을 부여잡자 그는 놀란 듯 묻는다, 유원이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간다. 김 코치는 너무나도 빠르게 쿵쾅쿵쾅 뛰는 그의 심장에,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OK!”
“크윽……!”
문 감독의 OK 사인이 떨어졌다. 한 시간 반이 넘는 촬영 시간이었다. 확실하게 촬영이 끝났다고 판단되자 민후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아무리 신체적 영단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말도 안 되는 신체는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다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수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민후야, 괜찮냐?”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에이,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정수는 발 쪽을 잡은 민후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운동화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퉁퉁 부어오른 양 발목이 보인다. 정수는 놀란 표정이다.
“야, 이 미련한 새끼야, 다리가 붓기 시작했으면 멈췄어야지.”
“무슨 일이야?”
정수는 얼굴이 붉어져서 처음으로 민후에게 화를 냈다. 민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다가온 문 감독이 자세를 낮춰 민후의 다리를 보고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무모하게 뛰는 거냐.”
문 감독은 그가 무척 대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너무 무모하기도 했던 그가 걱정이 되어서 묻는다. 민후는 정수가 뿌리는 파스가 시원하게 발목에 감기는 것을 느꼈다.
“유원이도 저처럼 무모하게 뛰었으니까요. 저는 그 역할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에 민후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파스를 뿌리자 다리가 한층 나아진 것을 느꼈다. 크게 붓지는 않아서 오늘 병원에 가서 약 좀 바르고 치료 좀 받으면 촬영에는 지장 없을 것이다.
자신도 바보는 아니었다. 혹여 촬영에 지장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면 자신이 알아서 멈췄을 것이다. 촬영에 지장을 줄 만큼 자신은 바보가 아니다.
문 감독은 머리에 둔탁한 것을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유원이처럼 무모하게 뛴 것일 뿐이다라…….’ 그 말은 결국 그 역할이 완전히 되어보고 싶었고, 그 심정을 가져보고 싶었다는 의미로 들린다.
다시 한번 문 감독은 민후를 돌아본다.
‘대단한 녀석…….’
그는 생각한다.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녀석이다. 그래도 무사히 촬영이 끝났다. 문 감독은 문득 녀석의 다리를 찜질해줄 것이 생각나 다른 스태프를 시켜서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이라도 좀 사 오라고 말하려고 했다.
한데 일순간 소란이 일었다.
“이리 나와, 이 자식들아!”
문 감독과 민후, 다른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평소 성격 좋고 온순하고 자신의 팀원들 잘 챙기기로 소문난 김기태 촬영감독이 젊은 스태프 세 사람을 모아놓고는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바닥으로 거칠게 던져버렸다.
터턱.
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 사람 중에는 김완중도 껴있었다. 촬영을 끝내고 나서 막 장비를 걷으려는데 김기태 감독에게로 이 일과 관련하여서 그들이 비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끝날 촬영 누구누구 때문에 망쳤다, 누구누구 때문에 오늘 쉬지 못했다 등의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렸다.
기태는 무척 온순한 사람이다. 문 감독이나, 다른 젊은 스태프들에게도 한 팀을 맡은 감독치고는 되게 좋은 성격의 소유자로 통했다. 그렇지만 이 소리만큼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대체 생각이 있는 것인가 하였다. 김기태도 그리고 다른 스태프들도 보았다. 강민후라는 배우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전속력으로 질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편하게 카메라 거치대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마이크 좀 가져다 대고 할 때 그는 쉴 새 없이 달렸다.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오늘 총 강민후가 달린 시간은 5시간은 넘는다. 그나마 쉬엄쉬엄했기에 망정이지, 하물며 촬영이 끝난 후의 그의 다리는 어떠하던가.
퉁퉁 부어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달렸다. 어째서? 이 영화를 위해서였다. 42.195㎞라는 영화를 위해서, 더 좋은 장면, 더 좋은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모하게 달렸다.
그리고 확실히 카메라 감독인 그는 이번 신에서 훌륭한 그의 장면을 잡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다 강민후라는 배우가 무모했지만, 영화를 위해서 뛰어준 덕분이었다.
스태프들로서는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반복 촬영에 기분이 좋아질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문 감독은 분명 하루를 쉴 수 있는 여력을 마련해주었으며, 혹여 쉴 수 있는 날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한들, 배우인 민후와 문 감독의 그런 의사를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스태프였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었다. 음향팀, 촬영팀, 의상팀, 편집과 등등 수많은, 제각기 베테랑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이었다. 그런 그들은 배우들과도 예술을 함께해야 했다.
그런데 이 망할 녀석들은 자신들이 쉬지 못했다고, 종일 달렸던 이를 앞에서 곱씹었다. 그것은 촬영 감독 김기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김기태뿐만이 아니라, 다른 감독들, 혹은 문 감독이 들었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이 새끼들아, 네 새끼들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 ‘짜증 나게 못 쉬게’? 너희들만 일했어!?”
“아니…… 저기…… 촬영 감독님…… 그래도 이건 너무 힘들잖아요. 6시간 동안 마이크만 들고 서 있었다고요…….”
역시나 김완중이 또 문제였다. 그는 눈치를 살피듯이 하면서 살짝 고개를 들어서 한 말이다. 확실히 완중의 말처럼 반복 촬영이 지속한 것은 스태프들이 지칠 만도 했고, 민후나 문 감독의 지시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영화는 변수가 많았으며, 더불어서 김기태가 화가 난 이유는 그들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고 싶다는 친구가 있다는데, 그 친구를 스태프들이 이해해주지 않는다.
참 황당한 상황이었다. 배우와 스태프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인데, 그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하물며 강민후라는 배우는 요즘 거만한 배우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것은 충분히 형평성을 벗어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기태는 씩씩거리면서 민후를 가리켰다.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새끼들아! 강민후 씨 다리 보여!? 응? 5시간을 넘게 달렸어. 누굴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야 알아!? 이 영화 다 잘되자고 하는 거라고! 나는 가슴이 아프더라, 응? 우리 위해서 영화 한번 잘해보자고 저렇게 뛰는 문 감독님, 강민후 씨, 다른 배우들만 보면 가슴이 아파서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은 ‘열심히 하자’라고 되새겨. 근데 니들이 무슨 짬이라도 되냐? 응!? 한참 배워야 할 녀석들이 투덜거리기나 하고!”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씩씩거리는 김기태 감독의 앞에서 다른 두 인원이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김완중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모습이다.
결국, 더 지켜보면 일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음향감독이 나섰다.
“김완중, 따라와, 새끼야.”
음향감독도 단단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실상 음향감독도 이제까지 김완중이 항상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에 있던 촬영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곳에서도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음향감독은 큰 불화를 빚은 그를 제적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물어도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면 아예 빼버릴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촬영장 분위기가 너무나도 흐트러졌다.
김기태는 숨을 고르게 뱉으면서 눈을 감고는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본의 아니게 자신도 평정심을 잃었다. 그런데 자신에게로 아픈 다리 때문에 절뚝거리면서 다가오는 강민후가 보였다.
그는 미안한 기색으로 꾸벅꾸벅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거 저 때문에 분위기가 말이 아니네요. 너무 고집을 부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기태 감독은 허탈해졌다. 강민후라는 배우는 화가 안 날까? 자신이 그만큼 노력했는데 어이없게도 그것을 비난한 이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민후도 화가 났다.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기보다는 비난하는 자가 좋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딱히 그에게 이제까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고, 촬영장 분위기를 흐려도 가만히 둔 이유는 언젠간 다른 스태프들에게 제지를 당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결국 더욱 강한 물고기에게 쫓겨나기 마련이었고, 평소 누구보다 침착한 성격의 민후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네가 뭐가 미안하나, 이거 스태프들 교육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지.”
김기태는 그를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양손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문 감독이 다가왔다.
“언제 한 번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알았지, 자네 탓은 아니야.”
문 감독의 말에 그나마 한결 민후는 표정이 나아졌다. 문 감독도 김완중이 반복되는 촬영과 고된 촬영 때문에 불평불만이 끊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가소로운 녀석이었다. 이제 겨우 음향팀 5년 차면 어디 가서 크게 알아주지도 않는 경력이다. 그런 녀석이 떠벌떠벌 혼자서 많은 물을 흐리려 했다.
서서히 스태프들이 하나둘 장비를 걷기 시작했다. 민후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밴으로 향하다가 스태프들을 불현듯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민후에게 향해 있었다.
그들은 민후와 눈을 마주치면 작게 웃었다.
그들은 정말 민후의 투혼에 놀란 것이 많았다. 괜찮은 친구인 것은 근래에 느끼고 있었지만 오늘 하루 몇몇 스태프들은 강민후라는 배우와 촬영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기도 하였다.
분명 신인 배우였고, 아직은 그 인기가 작은 배우였지만 스태프들도 점칠 수 있었다. 그는 계속 성장하고 다음에는 많은 이들보다 우위에 선 배우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꾸벅.
아까 전 김완중과 함께 서서 야단을 맞았던 이들도 민후와 눈을 마주치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민후는 고개를 젓고는 차량에 올랐다.
차량에 오른 그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주물럭거렸다.
“내가 아까 화낸 건 미안하다. 그래도 인마, 그렇게 무리하게 촬영하면 매니저인 내가 기분이 좋겠냐.”
“죄송해요.”
“됐다, 빨리 병원이나 가자.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간 뛰는 장면 없어서.”
정수는 화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대견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촬영장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한 번에 잡은 것이 실상 강민후였다.
정수는 며칠 전부터 민후가 완중이라는 이를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는데 오늘 일이 터졌다.
혹시 노리고 그런 건가 싶기도 한 정수다. 물론 그의 속내는 본인 스스로만이 알지 않을까 싶다.
결국, 김완중은 촬영팀에서 제적당하였다. 음향감독은 그가 반성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문정흠 감독에게 보고하였고, 문 감독은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그를 촬영팀에서 빼버렸다.
촬영팀의 모든 권한은 감독이 잡고 있었다. 스태프 한 사람을 빼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단지 한솥밥을 먹는 식구였기 때문에 그동안 가만히 두었고, 일단 지켜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촬영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이렇듯 문제를 일으킨 이가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불량한 태도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랬기에 문정흠은 가차 없이 그를 잘라버렸다. 그 이후, 민후의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 때문이었을까. 42.195㎞가 감동의 휴먼드라마였기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웃음으로 덮이기는 힘들었지만 문 감독은 문득, 스태프들이 평소보다도 열심히 한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가 느끼는 것처럼 42.195㎞의 촬영장 내의 스태프들은 새롭게 다시 한번 스태프라는 길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는 촬영은 분명 돈을 벌어먹기 위해 하는 것이다. 실상 수많은 이들이 촬영감독을 꿈꿨고, 음향감독, 조감독, 혹은 한 영화를 담당하는 감독까지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그 꿈은 이젠 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강민후라는 배우가 새롭게 다시 깨우쳐줬다. 강민후라는 배우는 돈 욕심도 없어 보였고, 오히려 그가 있는 욕심은 배우고자 하는 것과 사람을 얻으려는 것, 그리고 영화를 최선으로 찍겠다는 욕심이 보였다.
그 욕심은 스태프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였다. 하물며, 그의 부상 투혼과 더불어서 지치지 않는 체력은 보는 이들이 다시금 힘을 샘솟게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물며 김완중이 투덜거려서 그처럼 투덜거렸던 젊은 스태프들도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으며 그 일이 있고 난 뒤 바로 다음 날 민후에게 다가가 사과를 청하였다.
민후나 다른 감독들도 그런 그들이 죄를 뉘우치자 크게 죄를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민후는 촬영팀 인원들을 돈독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김완중, 그가 흐렸던 물이 오히려 더욱 깨끗하게 정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민후, 컨디션 괜찮냐?”
“옙!”
오늘도 운동장을 달리는 신이었다. 무리할지도 몰랐지만, 저번보다는 자제할 생각이었다. 그가 운동화 끈을 매면서 문 감독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촬영팀 인원들이 민후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곧이어 민후는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 * *
어느덧 계절이 봄에 접어들었다. 겨울에는 대부분 뛰는 장면은 촬영하지 않았다. 집 내부에서의 촬영이나 혹은 밖에서의 사소한 일상들을 찍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봄이 되었다. 봄이 되자 제작사 측은 영화 촬영을 위한 마라톤 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마라톤 대회에 벌써부터 많은 지원자가 생겨난 상황이었다.
거리는 10㎞를 웃도는 마라톤이었다. 영화의 촬영을 위해서 개최되는 마라톤이었기 때문에 긴 거리는 실상 무리였다.
마라톤에 대한 준비가 끝이 나자, 앞선 부분을 먼저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유원이 단거리 마라톤 대회에서 3등을 해서 메달을 받는 장면이나, 혹은 메달을 딴 유원을 기자가 어머니와 함께 찍는 장면 등등을 먼저 촬영한 것이다.
이 부분은 아직 마라토너들이 모인 자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엑스트라들을 고용하여서 촬영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을 위한 마라톤 개최 날. 민후의 밴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그는 촬영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인천 마라톤 대회 당시보다는 현저히 작은 숫자이기는 하였지만, 이 정도면 상당한 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경우 반가운 손님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바로 박형진 군이었다. 박형진 군도 이번에 열리는 마라톤에 함께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문 감독은 그에 흔쾌히 수긍하였다. 본래 42.195㎞의 주인공인 형진 군의 출연이라면 문 감독이든, 민후든 언제든 환영이었다.
현재 마라톤 준비가 한창이었고, 촬영팀들의 촬영 장비 세팅도 한참이었다. 스태프들은 평소보다도 훨씬 분주했다. 아무래도 마라토너들이 함께 뛰는 장면은 분주한 촬영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문 감독이 ‘다시 한번 갈게요.’ 한다고 해서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순수 마라톤을 즐기고 싶은 이들일 뿐이고, 혹은 장애인 마라토너 유원을 돕기 위해 나선 이들이었다.
그래서 일단 마라토너 지원자들이 출발선에서 튀어나가는 장면들이나 상을 받는 장면들을 최대한 빨리 찍고 유원이 달리는 장면의 경우 부족하다면 엑스트라들의 지원을 받아서 촬영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임의진과 문 감독, 민후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촬영할 방식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때 실제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형진 군과 그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배우들이든, 문 감독이든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인사해 보였다. 임의진의 경우 형진 군과 어머니를 처음 뵙는 것이었다. 그녀는 형진 군을 살펴보았다. 불안한 시선 처리와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 그것에서 의진은 민후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즉, 유원과 닮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민후의 연기가 수준급이라는 사실과 같았다.
“촬영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민망한 듯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욕심을 표출하였다. 충분히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문 감독이 그에 대해서 빙긋 웃었다.
“지금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일단 자폐증을 앓는 청년 이야기라는 부분이요.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을 소재로 해서는 이제까지 한 번도 관심을 받은 적이 없거든요. 그렇지만 마라톤과 자폐증을 결합함으로써 수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있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늘 참여한 마라토너 분들도 실상 그 부분에 응원하는 분들이 많다고 할 수도 있고요.”
“아…… 그렇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제가 어머님 역할,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 있습니다.”
임의진은 팔을 파이팅 자세로 하면서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곧이어 마라톤 개최 시간이 다가왔다. 방송이 퍼졌다.
- 10시에 마라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자분들은 모두 출발선에 서주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가 들리자 촬영팀 인원들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민후도 촬영을 위해서 출발선으로 다가섰다. 출발 장면은 배경 전체를 잡아내는 롱숏과 더불어서 버스트숏 기법으로 잡아낼 것이었다.
“우리 형진이 잘할 수 있지?”
“응응, 잘한다. 형진이 잘한다.”
형진 군도 어머니의 응원을 받으면서 출발선에 섰다. 사람들이 하나둘 출발선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형진 군의 경우 민후가 챙기기 위해 그의 옆자리로 갔다.
어차피 롱숏의 경우 배경 전체를 잡는 것인지라 마라토너 전체를 잡아내고, 클로즈업은 민후만 잡아내기 때문에 크게 자폐증을 앓는 형진이 돋보일 수도 있으나 카메라 기법을 생각하면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잘 뛸 수 있나요?”
“형진이 잘 뛴다, 형진이 잘 뛴다.”
민후의 물음에 형진은 반복적으로 대답한다. 민후는 빙긋 웃었다. 곧 출발선으로 모든 사람이 모였다.
-참가자분들은 일반적인 마라톤을 하듯이 뛰어주시면 됩니다. 혹여 촬영 장비들 때문에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더라도 양해의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방송이 또 한 번 들렸다. 시간이 10시가 되었다. 출발선에 선 이들이 자세를 갖추었다.
곧 따앙!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눈에 띄게 빠르게 뛰는 이들도, 페이스를 유지하는 이들도, 느리게 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형진 군은 민후와 마찬가지로 페이스를 유지하는 쪽에서 합류하였다. 어쩌면 놀라운 일이었다. 형진 군은 다섯 살짜리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페이스 조절이 쉽게 되지 않을 게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난히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 어쩌면 형진 군은 정말 마라톤에서는 천재인지도 몰랐다.
마라톤이 시작되고 민후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유원이처럼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카메라들이 알아서 그런 민후를 찍어낼 것이었다.
형진은 민후와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렸다. 그런데 달리는 중 민후는 키득키득 웃는 소리를 들었다.
“저 사람 되게 모자란 가 봐.”
“오늘 장애인 영화 찍는다던데 실제 장애인을 찍나? 내가 알기로는 강민후 나오는 영화로 아는데.”
학생들로 추정되는 목소리였다. 살짝 고개를 돌려 본 민후는 대학생들이 형진을 보면서 키득거리며 비웃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후는 한소리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촬영 중이었다. 하물며, 민후가 보았을 때 학생들은 마라토너도 아닌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참여한 이들이다. 10㎞는 그런 그들에게도 힘든 종목이다.
“어이, 장애인.”
“형진이 장애인 아니다. 아니다.”
“흐흐, 병신 같은 놈.”
욕설에 민후는 발끈할 뻔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참았다. 그는 곧 평정심을 유지했다. 민후는 형진을 믿었다. 다섯 살짜리 지능을 가졌지만, 그는 마라톤에서 서브쓰리를 완주한 경력이 있는 프로다.
그런 프로이기도 하였고, 하물며 다른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 저런 일이 분명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만큼 아직도 장애인들을 보는 비장애인인 사람들은 그들을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42.195㎞라는 영화에 수많은 사람이 혈안이 된 것이다. 수도 없이 이런 일이 있음에도 완주를 수도 없이 한 형진은 그만큼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소리와도 같았고, 민후는 내심 그 부분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 존나 힘들어.”
“야, 저 새끼 존나 잘 뛰는데?”
“닥쳐봐, 나 힘들어서 말이 안 나온다.”
형진은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다섯 살짜리 지능을 가졌으나 그는 그들의 도발에 무심했다. 민후는 또 한 번 형진이라는 마라토너에 대해서 되새겨본다.
어느새 학생들은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형진이 그들보다 지능은 떨어질지 몰라도 그들은 형진의 백만 불짜리 다리를 이길 수 없었다. 민후는 피식 웃었다.
괜스레 박형진이라는 마라토너에게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느낀다.
민후와 형진은 비슷하게 10㎞ 마라톤을 완주하였는데, 형진이 민후보다 조금 더 앞섰다. 그러나 민후는 그에게 졌다고 해서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에게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라톤이 끝이 났다. 각 위치에서 찍어낸 카메라들은 편집을 통해서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낼 것이고, 유원이 달리는 장면의 경우 엑스트라들과 함께 촬영될 것이다.
이번 마라톤의 경우 실상, 마라톤 장소에서 사람이 북적북적한 장면이나 혹은 출발 장면, 도착 장면 등등을 촬영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달리는 장면은 순전히 엑스트라들이 필요하였고, 한편에서는 작은 현수막을 걸고 ‘마라토너 엑스트라 구합니다.’라고 지원자들을 받고 있었다. 보수도 두둑이 주기로 되어 있어서 아마도 많은 지원자가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우리 형진이 잘 뛰었어?”
“응, 잘했다. 나 너무 잘했다.”
“진짜 잘 뛰었어요. 제가 따라가지를 못하겠더라고요. 하하.”
그의 어머니가 형진의 머리 위에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자 형진이 빙긋빙긋 웃어 보인다. 민후도 그를 극찬했다. 어머니는 그런 형진이 자랑스러우신 모습이다.
그러던 중, 민후는 구급차가 근처에 멈춰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0㎞의 단거리 마라톤이어도 구급차는 항시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곧 구급차에서 내린 이들을 보고는 민후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까 전 그 대학생 세 놈이었다. 아마도 도중에 힘드니까 꾀병을 부려서 구급차를 타고 온 것 같았는데, 한심의 극치였다.
“잠시만요.”
민후는 어머니에게 빙긋 웃고는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리를 두들기며 어른들도 많은 자리에서 ‘시발, 존나 힘들어.’ 등등의 욕을 뱉고 있었다.
민후는 전화를 받는 척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어? 강민후다.”
“오! 씨발, 진짜?”
“나 지금 촬영 거의 끝났지. 응, 이야, 형진 군 되게 대단하더라. 정말 잘 뛰어! 응, 그래. 아, 그런데 아까 어떤 개념 없는 대학생들이 형진 군 달리는데 뒤에서 욕하더라, 일단 내가 지켜봤거든? 근데 웃긴 건 자기들이 욕한 사람을 쫓아가지도 못하더라. 정작 형진 군보고 욕하고 비웃고 해놓고 아예 발끝도 못 따라가더라고. 뭐? 그 사람들? 내가 보니까 열정도 없고, 끈기도 없고, 겉멋만 들어서 ‘시발시발’거리기나 하고. 쯔쯔!”
그렇게 말하면서 민후는 슬쩍 그들을 보았다. 민후를 발견했었던 그들은 그의 통화 내용에 곧 그 대상이 자신들임을 알았다.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민후가 대놓고 자신들을 욕했다는 보장도 없었고, 하물며 자신들이 장애인이라고 놀려대며 뛰었던 것에 반면 정말 발끝도 못 따라갔다.
쪽팔려서라도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그 대학생들한테 할 거 없으면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하고 싶다. 그래, 끊어.”
민후는 능청스럽게 전화를 끊는 시늉을 하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구급차와 그들을 번갈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직 젊으신 분들이 무슨 구급차를…….”
그는 대놓고 웃어줬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뭐, 잘한 게 있어야 반박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재미 삼아 마라톤에 참여하였어도 그 기본적인 룰은 지켜야 맞는 것이었다.
민후는 휘파람을 불면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 벗어났다.
다시 형진이 있는 곳으로 온 민후다. 현재 오전에 찍을 신은 촬영이 끝난 상황이었으며 어느덧 2시가 되었다. 촬영팀 인원들도 식사해야 했고, 도시락이 배달됐다.
그러나 문 감독은 오늘 이곳에 와준 형진 군과 그 어머니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지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당연하게도 배우들도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였고 식사를 하였다.
일부러 문 감독은 형진이 좋아한다는 짜장면 때문에 중식집으로 가서 그들을 대접하였다. 민후는 식사를 하면서 연신 함께 달리며 그에게 느꼈던 점들을 속속들이 말해주었고, 형진이나 어머니의 얼굴로 기쁘다는 기색이 역력히 표현되었다.
두 사람은 당연히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하였다. 특히나, 형진의 경우 정말 대단한 청년이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