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강민후
1
박민규 장편소설
1장 당신을 위하여
따사로운 봄의 햇빛이 인덕 대학교 캠퍼스의 꽃잎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주위로는 수많은 대학생이 거닐고 있었고, 커플 혹은 자신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이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강의실에서는 최강호 교수가 강의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 넘는 대학생들의 시선은 오로지 그에게 향해 있었다.
쉰다섯의 나이를 맞이하게 된 그는, 방송 연예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며 그는 배우였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명품배우 중 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의 이름이 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연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였다.
안 해본 연기가 없었다. 주연 배우의 옆을 지나치는 단순한 엑스트라부터 시작하여서 현재는 많은 이들이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라고 칭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가진 천재성은 딱 한 가지 노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어떠한 이들보다 노력했다. 자신이 밑바닥의 엑스트라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감사하며 일했다.
주연 배우들의 발길질에 치여도 다른 누군가가 그를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 하나를 최선을 다해서 임했다.
그것이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촬영장으로 갔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자신의 촬영이 없어도 매일같이 촬영장에 들러서 촬영 진행 방식에 관해 공부했다.
많은 이들이 쉬고 있을 때, 그는 책을 읽었다. 책의 종류에는 한정이 없었다. 많은 책을 읽었고 종류도 너무나도 많았다. 배우로서의 공부였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배우로서의 공부이다.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면서 어떠한 배역을 맡게 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불시에 떨어지는 배역을 맡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깨우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그는 책을 읽었고, 불시에 잡히는 엑스트라 역할을 누구보다 많이 맡았다.
인정받기 시작한 그.
유명해진 그는 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빨랐고 누구보다 노력했으며, 누구보다 겸손했다. 그것이 ‘최강호’ 교수이자 배우가 살았던 방식이었다.
관계자들은 최강호 교수를 두고 그리 불렀다.
‘독종.’
어떤 배우가 봐도, 어떤 관계자가 보아도 그만큼 열심히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을 정도이다. 그에게 성공의 길이 열렸던 결정적인 이유는 운이 따라준 것도 심지어 재능이 있던 것도 아닌, 누구보다 악착같이 노력한 ‘독종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배우들뿐만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파다하였다. 지금 현재도 촬영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일찍 가는 배우가 그였다. 이젠 충분히 대접받을 나이였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았다.
“여러분은 대한민국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배우가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학생들은 답이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 어쩌면 수십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과 같이 피 끓는 청춘들도, 아이가 있는 중역 배우들도, 노년기에 접어드신 분 중에도 무명배우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는 그들의 꿈에 대한 공격을 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단순히 이 학과를 어쩔 수 없이 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예인, 배우를 꿈꾸고 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그 말은 치명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최강호 교수는 잠시 그런 학생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한 번 떴다고 해서 그 인기가 이어나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반짝 뜨고 반짝 사라지는 별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것 역시도 배우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배우, 연예인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학생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의 이들을 둘러보았다, 선배, 친구, 후배. 많은 이들이 앉아있었다.
“모두가 경쟁자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 벌써 이 안에만 50명이 되는 경쟁자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의 일침이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최강호 교수는 그런 그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런 그의 표정에 온화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 때문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만나봤던 대부분의 성공했던 배우들은 배우라는 것에 매진했습니다, 여러분 임범수 라는 배우를 잘 아십니까?”
그는 배우 임범수에 대해서 거론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인지도 높은 배우였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과 훈훈하게 생긴 얼굴에 꽤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중역 배우였다.
“그 임범수가 신인이던 시절 어땠는지 아십니까, 매일 촬영장마다 이상한 여행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왜일까요. 거기 졸고 있는 학생! 왜일 것 같아요!”
최강호는 그중 꾸벅꾸벅 자신의 강의에 졸고 있는 학생에게 큰 목소리로 불렀다. 그가 흠칫하면서 비몽사몽 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일 것 같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듣든지 나가든지 그건 학생 자유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단, 듣지 않으실 거면 나가십시오. 저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그리 너그럽지 못한 교수이니까요.”
학생은 그의 말에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는 나가지 않았다. 최강호가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학생들에게 말을 이어갔다.
“항상 대비한 것입니다. 신인이던 시절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것이 유일한 생계의 길이었거든요. 그런데 엑스트라도 그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1990년대의 배경. 과연 그 연도의 사람들이 여러분과 같은 차림에 헤어스타일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촬영에 준비하는 자세를 갖춘 것입니다. 여행 가방엔 갖은 촬영 소품, 가발, 의상이 다양했습니다. 그것이 열정이고, 노력입니다. 그렇게 노력해온 그는 이름 있는 배우가 되었죠. 그래서 노력하라 제 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교수님도 노력 많이 하셨죠?”
“하하하하.”
한 남학생의 말에 강의실 내가 잠시 웃음이 스쳤다. 그 학생의 말에 최강호도 빙긋 웃더니 웃음소리가 잦아지자 손사래를 쳤다.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배우라는 것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요? 믿지 마세요. 그들은 상위 1%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상위 1%에 드는 방법, 그 비결! 그 비결은 오로지 노력! 열정! 용기! 이것들입니다. 잘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는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았다. 처음 그가 가하는 일침에 두려웠던 학생들의 표정에는 이젠 그의 말에 귀담아듣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만족스러웠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강의시간이 끝날 시간이다.
“자, 오늘은 여기…….”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시선을 틀자 상당히 잘생긴 스물셋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이 있었다. 강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선 강호의 강의에 대한 반감의 빛이 보였다.
배우는 다른 누군가를 연기한다. 그 누군가가 되는 것이 배우였고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웃음, 슬픔, 분노,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 때문에 수십, 수백 번이 반복된 그 배우 생활은 어느덧 최강호에게 다른 사람의 표정을 더 잘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냈다.
“노력을 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흐음…… 노력을 하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 무슨 뜻이죠.”
최강호는 그의 질문에 의아했다. 노력하는데 잘 안 된다. 강호는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은 없다고 여긴다.
하다못해 머리가 나쁘다는 사람들도 자신이 머리가 나쁘다는 것을 인지하고 노력을 하면서 간혹 그 책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이들도 봤다.
그렇게 통째로 외웠던 이들은 언젠가는 꽤 훤칠한 인재가 되곤 했다. 그런데 노력을 하려 해도 안 된다라.
“사정 때문에 그 일에만 매진할 순 없습니다. 일단 학생이고…… 돈이 필요해서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죠.”
강호는 그의 질문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여느 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노력이라는 말을 포장한 것인가 싶었다.
자신 딴에는 노력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질문하는 남학생이 그런 건가, 하고 판단했다.
“하나만 선택하세요. 두 가지의 일은 힘듭니다.”
“그렇지만 사정이…….”
“그렇다면 배우의 길을 포기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강호는 이런 부분에서는 냉정했다. 천운을 바라고 배우가 되길 바라는가? 물론 그렇게 된 배우들도 간혹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오래가지 못해 어느새 스크린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진정 배우가 되고 싶다면 그것에 필사적이어야 한다. 돈도 벌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배우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척 힘들어지는 이야기였다.
“교수님은…… 좋은 집에서 태어나셨잖아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남학생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표정이었다. 꿈을 가진 이에게 강호의 독설은 충분히 화가 날 만하다. 그러나 그 학생을 위한 말이었다. 그 화를 학생은 강호의 집안에 대해 거론하였다.
그렇다, 강호가 배우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 있게 뒷받침해준 것. 그것은 그의 집안이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변호사로서 이름을 날리셨고, 어머니는 디자이너로 유명하신 분이셨다. 물론 현재는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없었다.
그러나 남보다는 넉넉한 형편이었다. 학생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그 학생이 지금 무척 힘든 상황이라면 강호 본인도 조금 전 독설은 꽤 잘못이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형편을 알지 못하고 한 독설이니 말이다. 하나둘 학생들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모든 학생이 나서고 그 남학생과 강호만이 남았다.
강호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학생, 배우라는 것은 정말 그것에만 매진하기에도 벅찬 것이어서 한 말이었네. 마음 상했다면 내 사과하지.”
강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었다.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강의가 100% 옳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단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어주리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좋은 눈을 가졌구나. 좋은 눈을 가졌어. 그렇지만 어둠이 너무 강압하고 있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남학생의 눈을 본 최강호는 다소 놀랐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것은 열정이고 용기이며, 원망이자 분노였다.
수많은 배우와 지내오면서 성공하는 배우 실패하는 배우들을 많이 본 적이 있는 강호였다. 대부분 성공했던 배우들은 항상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용기와 열정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실패하는 배우들의 경우, 욕망과 귀찮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이 앞의 남학생에게서는 그런데 두 개의 빛이 함께 공존했다.
그런데 후자에서 본 어두운 원망이자 분노는 그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 그리 만든 듯했다.
“저도 정말 죄송합니다, 교수님. 너무 무례했습니다.”
남학생은 몸을 일으켜서 꾸벅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쁜 학생 같지는 않았다. 일반 학생들과 다른 남다른 면모도 보였고, 자신의 꿈에 대한 집착적인 성격도 보였다. 또 자신의 실수를 알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강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없이 많은 학생을 만나는 자신이다. 그리고 그의 눈을 가진 사람도 몇 만났었다. 그랬기에 크게 그를 챙겨주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흥미로운 학생이란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괜찮네’ 하고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들겨 준 강호는 강의실을 나서기 위해 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교수님…… 저 밥 좀 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 그를 남학생이 붙잡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이 민망하다는 듯 바닥을 보고 있었다. ‘참…… 녀석’ 하며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는 강민후라는 학생이었다. 현재 일을 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다. 얼굴이 익숙하지가 않았던 사실을 여기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강호에게 털어놨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민후라는 학생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니 흥미가 생겨 어느새 두 사람은 함께 술까지 하면서 민후는 강호에게 자신의 힘든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지독한 생활고. 10살. 그가 무척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서는 식당에서 일하신다고 한다. 어머니는 근로 기준 시간을 초과한 12시간을 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봤자 손에 들어오는 돈은 한 달에 150 남짓이었다. 이런 어려운 형편을 모자가 꾸려나가고 있던 도중 민후에게 일이 터졌다. 민후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하였었다고 밝혔다.
그 당시의 나이 열여덟. 분명 교통사고 후 큰 수술을 진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쳤다면 가벼운 타박상과 더불어서 다리 쪽이 조금 찢어져서 열 바늘을 꿰맨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그는 의식불명에 빠졌었다고 한다. 의식불명의 기간이 반년. 그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원인도 모른 채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야 했다.
6개월 동안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평균적인 가정은 모아놓은 돈이 없다면 휘청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월 총수입이 150밖에 안 되는 가정에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전셋집이 날아가고 월세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가 만약 집으로 갔다가 집에서 갑작스러운 증세를 보이면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어머니의 판단이었고 그를 위해서 6개월 동안 강행군이 지속 되었다.
깨어났을 때 반듯했던 아파트가 아닌 투 룸의 월세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집안 형편은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가 꿈이었던 그는 그에 혼란에 빠졌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집안이 내려앉았다. 가뜩이나 없는 형편 더욱 큰 재앙에 빠진 것이다.
배우의 길을 걷고 싶으나,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돈을 벌어야 하나 배우가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그였다. 배우로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그를 막아섰다. 그렇게 하루 이틀 돈 때문에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는 강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민후의 친구 중 강호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이 있었던 모양이다. 배우를 꿈꾸는 그로서는 그 친구에게 어떤 것을 공부하는지 궁금했을 것이고 매일 그의 수업이 끝나면 ‘오늘은 뭐 배웠어?’ 하고 물었다고 한다.
결국 배우라는 끈을 놓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친구는 매일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면서 강호라는 배우이자 교수는 정말 감탄이 나오는 사람이다, 라고 표현했다 한다.
일품이다. 그라는 사람이 배우가 된 것은 당연했다. 그에게 강의를 듣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라고 표현되었다.
민후는 궁금해졌고, 그의 강의가 듣고 싶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한 달에 딱 세 번씩 쉬는 날이 있는 민후는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도둑 강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민후의 도둑 강의를 받았다는 말에 강호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듣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네. 아까도 말했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한테는 냉정하지만 배우려는 사람한테는 누구보다 열린 사람이거든.’
민후는 무척 고마워했다.
실상 그는 현재 배우라는 꿈을 위해 계속 달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일을 쉬는 날이 있다면 배우에 관한 각종 책을 찾아보고 유명 배우들이 쓴 자서전이나 배우가 되는 법이라고 적힌 책도 읽고 하면서 여전히 그 끈을 놓지는 않고 있었다.
그는 한 달에 쉬는 3일을 강호의 강의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강호는 다시 빙긋 웃으며 ‘내 자네의 소중한 3일을 위해 그 3일을 항상 눈감아주겠네.’라고 답해주었다.
두 사람은 꽤 가까워진 것 같았다. 민후라는 학생 참 좋은 녀석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면 그가 얼마만큼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한 형편에 그렇듯 할 수 있다는 것에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어느덧 술잔이 수십 번이 나누어졌다. 소주 여섯 병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민후라는 녀석 생각보다 주량이 강한 녀석이었다.
강호의 경우 내일 촬영이 있기에 자제한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에 심취해 두 병을 먹어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말 제가 아까 했던 말은 잊어주십시오, 교수님! 크흑! 그저 못난 제가 한심스러워, 교수님의 배경이 있었기에 교수님이 그렇게 클 수 있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이신데.”
급기야 민후라는 학생은 울기 시작했다. 강호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민후를 집에 바래다주고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대리 운전기사가 곧 도착하고 운전기사가 도와 민후를 부축하여 강호의 차량의 뒷좌석에 태웠다. 그의 옆에 함께 타고 곧 대리운전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얼굴이 익다 했더니, 최강호 씨였네요.”
대리운전 기사는 강호를 알아본 듯 말을 뱉었다. 강호는 그저 작게 웃고는 술에 취해 눈을 감고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하는 민후를 바르게 세워주었다.
“교수님…… 저 정말 배우 하고 싶습니다…….”
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작은 한숨이 나왔다.
무엇이든 노력하면 된다.
그가 강의에서 말한다. 그러나 민후는 배우를 통해 전속력으로 달리려고 해도 앞에 장애물들이 막고 있었다.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지 않을까!
만약 이 아이에게 그런 배경이 없었다면 큰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그는 자신으로서는 이 민후라는 아이에게 도움이 조금이나마 될 수 있는 방법은 이 아이의 도둑 강의를 허락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더 이상의 선의는 오히려 동정이 될 것을 나이가 들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된 그였으니까.
추적추적.
“이런, 비가 오네요.”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운전석 쪽을 보니 앞면의 창문이 거세게 내리는 비로 인해서 와이퍼가 힘겹게 빗방울을 걷어내고 있었다.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강호는 별일 없겠지, 라는 생각에 여전히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민후를 챙기고 있었다.
빠아아앙!
그러던 중 고막을 강타하는 클락션 소리가 퍼졌다. 흠칫하고 놀란 강호는 본인도 모르게 시선을 운전석 쪽으로 틀었다.
대리운전 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하게 핸들을 꺾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호의 눈앞으로는 눈부신 라이트 불빛이 덮쳐오고 있었고, 흐릿해진 시야 뒤로는 클락션을 울리는 5톤 트럭이 보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돌 소리와 함께 차가 뒤로 그대로 밀려나면서 몇 바퀴를 도로 위에서 굴렀다. 강호는 부딪치는 순간 본인도 모르게 민후의 몸으로 감싸려 했다. 그러나 차가 들이받은 충격은 그를 안을 수도 없을 만큼 강력했다.
쿵!
차는 결국 뒤집혔다. 그는 깨진 차창 너머로 힘겹게 기어 나왔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몸에는 깨진 유리에 베여 군데군데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특히나 팔 한쪽은 심하게 다친 것인지 감각이 없었다. 그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부여잡으면서 대리운전기사와 민후를 확인하였다.
운전기사는 즉사였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목이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그러나 민후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이보게, 강민후 군! 정신 차리게! 이보게!”
강호는 자신이 빠져나온 반대쪽 좌석 쪽 깨진 차창 쪽에서 몸을 엎드려 손을 뻗어 그를 흔들었다. 미약한 숨소리, 힘겨운 눈빛이 강호와 마주쳤다.
‘죽는다…… 버틸 수 없어.’
강호는 직감했다. 저승사자가 그를 데리러 오고 있었다.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호는 손으로 그의 피범벅이 된 손을 붙잡았다.
“살 수 있네! 살 수 있어! 배우, 배우가 된다고 하지 않았나!? 집에 어머니가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 곧 119가 올 거네! 그러니 눈 감지 말게!”
눈이 천천히 감기려는 그에게 강호는 소리쳤다. 그의 감기려던 눈이 힘없이 다시 떠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교…… 허억…… 수님…… 배,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하아하아, 어떡…… 하죠…… 이루고 싶…… 었…… 는데…….”
풀썩.
그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강호는 그를 흔들었다. 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는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지만, 평소의 침착한 성격 덕분에 꽤 빠르게 공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단 죽었다고 생각해도 119가 필요했다. 막 전화기를 들려는 순간이었다.
띠이이이이이-
머리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리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바닥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곧 그는 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시야로 죽어버린 강민후라는 열정 있던 아이가 보였다.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지금 이곳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미안하구나…….’
배우가 되려 했으나, 그 배경이 막은 아이. 그 아이에게 자신이 왜 미안해지는지는 몰랐다. 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곧 눈의 깜빡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코끝을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찌르고 있었다. 희미했던 정신은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최강호는 사고를 당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통증 따위는 없었다.
단지 있다면 찌뿌둥한 기분만이 들었다. ‘꿈이 아니었나…….’ 하고 그는 생각한다. 만약 ‘그 존재’와의 만남이 거짓이었고 자신이 트럭과의 충돌 후 깨어났다면 지독한 통증이 몸을 감쌌을 것이다.
그러나 통증이 없다는 것에 그는 어느 정도 단정 지었다. 자신이 만났던 ‘그 존재’는 꿈이 아닌 현실이었으며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었음을 말이다.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살짝 고개를 틀자 가습기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병실 내부가 보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탓인지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는 몸 곳곳을 만져보았다. 몸이 젊어졌다. 쉰다섯 살이던 자신이 열여덟 소년의 몸이 되어있었다. 부드러운 속 쌍꺼풀과 함께 오뚝하게 솟아오른 콧날, 훤칠한 182㎝ 정도의 키. 타고난 골격인 듯 어깨는 허리보다 훨씬 넓게 벌어져 있었다.
늙었던 몸이 아닌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니 힘이 불끈불끈 솟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소년의 기억 모두를 고스란히 자신이 가지게 되었다.
소년의 머릿속은 온통 배우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집에 대한 걱정과 배우로서 성공하여 어머니에게 효도를, 멋진 인생을 살아보리라는 다짐도 있었다.
‘차라리 다행인가’라고 중얼거렸다. 만약 이 소년의 기억을 깨어난 후 하루가 지난 상태에서 가졌다면 자신은 지금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병원에 있던 6개월간의 기간 동안 자신의 집이 피폐해진 꼴을 하루 사이에 알게 될 터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심각한 갈증이 일었다. 오랜 시간 수분이 목을 지나치지 못해서일까. 그는 간이용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따 입에 퍼부었다.
목구멍으로 시원한 물이 흘러 넘어갔다. ‘크-’ 하는 소리를 내면서 생수 뚜껑을 닫지도 않은 채 한켠에 올려놓은 그는 벌컥 소리 나며 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물에 적신 수건과 따뜻한 물이 담긴 바가지를 쟁반에 함께 올리고 들어오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놀란 듯 들고 있던 플라스틱 쟁반을 떨어뜨리면서 입을 막았다.
땡그랑!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었던 머리에 많은 휜 머리가 자랐다. 주름이 늘어난 것 같았다. 많이 야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양팔을 벌려 꽉 그를 껴안았다.
“민후야! 내 아들! 우리 민후! 깨, 깨어났구나! 깨어났어!”
그녀는 그를 대한민국의 명품배우이자 ‘독종’, 또한 교수로서 통했던 최강호를 ‘민후’ 그 두 글자로 부르고 있었다. 최강호는 강민후가 되어있었다.
* * *
푸쉬이이익!
최강호는 자신의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휘발유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차량 그랜저는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폭발 직전까지 간 차량이 보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면, 또 차가 폭발하려 한다면 민후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신이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차량의 바로 옆쪽으로 쓰러진 자신이 있었다.
미약한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육체가 있었다. 육체는 참담한 표정으로 차 안의 민후 쪽으로 시선을 튼 상태였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평소 침착했던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뒷걸음질을 치는 그의 등이 무언가에 부딪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헉!’
고개를 돌렸던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자신의 앞으로 2.5m는 충분히 될 듯한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덩치도 산만 하여 멧돼지와 같은 몸이라는 생각이 섰다. 그러나 얼굴은 흉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과 비슷했다. 세상에 이러한 키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였다.
‘으으으!’
그런데 갑자기 사내가 강호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등의 뒤쪽으로 뻗어져 몸을 지탱시키고 있던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뒤쪽으로 기어갔다. 사내는 그런 강호를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집게손가락 하나가 펴져 있었다. 그는 집게손가락을 구부리면서 마치 뭔가를 조종하듯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강호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들리더니 발을 안전하게 디딜 수 있도록 천천히 그를 내려놓았다.
사내의 손가락이 조종한 것은 다름 아닌 강호의 몸이었던 것이다.
‘사, 사람이냐, 귀신이냐!’
그는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소리쳤다. 머릿속은 그가 귀신임을 외치고 있었다. 자신의 식은 육체가 있었고, 본인은 자신의 육체를 볼 수 있다. 이미 자신 본인이 영혼 상태임을 인지했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 부정 때문인지 겁을 먹어 물었다. 차라리 사람이라고 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천히 입을 벌린 사내는 강호를 실망 시켰다.
‘귀신 쪽에 가깝소.’
그의 말에 허탈해졌다. 수십 년을 연기를 위해 살았던 자신이다.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았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어느덧 배우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교수가 되어 배우에 대해 가르친다는 것이. 사람들이 자신이 찍은 영화, 드라마 등을 보면서 좋아해 줬던 것이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교통사고. 그거 한 번으로 자신은 생이 끝났다.
‘미, 민후는 어디 있는 거요.’
강호는 그가 저승사자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민후와 자신이 죽은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의 영혼이 보여야 정상이지 않은가. 그의 물음에 저승사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먼저 보냈소.’
저승사자의 대답에 그는 잠시 그를 보았다. 정말 아무런 표정이 없는 자였다. 오랜 시간 연기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판단해낸다고 자신했던 본인이 그에게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저승사자이기 때문이겠지, 라고 여겼다. 그 같은 영혼에게서 오히려 감정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 우스운가 싶다.
강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어두웠다. 주위에 군데군데 솟은 나무가 보였고, 하늘을 보면 새까만 어둠이 보이고 별은 없었다. 그나마 그의 심신을 달래주는 것은 누렇게 뜬 달덩이였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는 세상은 이곳과 다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착잡한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었다. 그래도 기다려준 저승사자라는 존재에게 지금 이 순간 고마운 자신이 조금 황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 사내는 강호를 보면서 물었다.
‘다시 살고 싶지 않으시오? 이 땅을 다시 밟고, 하늘을 보고, 공기를 마시고, 걷고 웃고, 울고, 화내고, 놀라면서 그렇게 다시 살고 싶지 않소?’
당연한 것이었다. 원치 않던 죽음이었다. 자살이 아닌, 사고로 인한 죽음이었다. 어찌 생에 미련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어찌 이곳을 떠나고 싶겠는가.
계속 이곳에 남고 싶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강호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인간이 그러할 것이다.
강호는 답하지 않았다.
‘이곳에 남을 기회를 주겠소.’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아니면 환생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에 강호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게 저, 정말입니까.’
‘그러하오. 그러나 그대의 이름으로는 살 수 없을 것이오.’
‘그게 무슨…….’
환생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강민후라는 이의 삶을 살아야 하오. 당신은 강민후라는 가여운 영혼을 달래줘야 하오. 나는 그에게 죄를 지었고, 이렇게나마 그 영혼을 달래주고 싶소. 내 청을 들어주시오.’
강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민후의 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가여운 영혼을 달래줘야 한다, 그리고 저승사자가 그에게 죄를 지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는 무슨 청을 들어달라는 것인가 하며 그를 보기만 할 뿐 이번에도 입을 닫았다.
‘그대도 들었을 것이오, 강민후의 사고 이후 6개월간 깨어나지 않았던 기간. 다 내 탓이었기 때문이오.’
저승사자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는 듯하였다. 민후가 6개월간 깨어나지 못하였던 것이 그의 탓이었다?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하였다.
‘본래 그는 사고를 당하지 말아야 할 운명이었소. 사고를 당하고 죽어야 할 이가 살았소. 강민후는 그 당시 죽어야 할 이를 밀치고 자신이 그 사고와 직면한 것이오.’
운명이 바뀌었다. 그 소리였다. 강호가 듣지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민후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이유, 누군가를 구하고 그를 대신하여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음의 숫자가 정해져 있소. 누군가 죽어야 누군가 환생을 하지. 염라대왕은 차라리 운명은 바뀌었으나 민후라는 이를 죽이고,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을 결정하셨소. 나는 반대했소, 말도 안 된다 하였소. 그 죄를 내가 받겠다 하였소. 그 이야기가 결정되는 시간 동안 현대에서는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더군.’
민후가 6개월 동안 영문도 모른 채 깨어나지 못하였었던 이유, 그 이유가 여기에서 밝혀졌다. 가벼운 타박상과 다리를 꿰맨 것밖에 없었던 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살림으로써 죽음의 숫자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민후 역시도 가벼운 외상만을 입었다. 때문에 염라대왕은 죽이려 하고, 저승사자는 살리려 한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나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강민후를 살린 것은 안타까워서였소. 그는 당신과 같은 영혼을 지녔더군, 배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배우라는 것이 되더군. 세상을 누비는, 행복한 운명을 타고났더군. 그러나 사고는 불행한 운명으로 탈바꿈되었소. 그 사고 하나로. 그리고 결국 운명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더군. 그리하여 오늘 데려갔소. 그러나 너무 원통하오. 이제 죽음의 숫자는 맞춰줬소. 하나 나의 실수로 잘못된 이 영혼의 고통을 달래주고 싶구려. 그걸 강민후라는 영혼이 가졌던 운명과 비슷했던 운명을 가졌던 당신이 해주었으면 하오.’
‘저에게 그 아이의 삶을 대신 살라는 소리입니까?’
‘그렇소. 그가 사고를 당한 후에 깨어났을 때 그때의 과거로 돌아갈 것이요. 민후는 계속 보고 있을 것이요. 지금도 보고 있소. 들어주시오. 그 아이의 원통함을 알아주시오.’
저승사자의 얼굴로 표정 변화가 생겨났다. 강호는 그 표정 변화가 자신에 대한 한탄과 원망, 민후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임을 알았다.
민후라는 아이에 대해서 떠올렸다. 좋은 아이였다. 그러한 아이가 본래는 대단한 배우가 될 아이였단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이의 실수로 이리되었다.
강호는 저승사자를 보았다. 어차피 부정한다면 자신은 이 세상을 떠난다. 이 세상에는 미련이 있었고, 또한 민후 역시도 미련이 존재했다.
저승사자는 알 터! 어찌 되든 강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저승사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곧 깨어날 것이오. 강민후로서 깨어나면 그 아이의 삶을 사시오 당신에게 새로운 삶이 부여되었다고 생각하시오. 그 아이를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으시오. 그리하면 강민후가 그 생을 끝내고 온 당신에게…… 고마워할 것이오. 그리고 나 역시도.’
강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이 끝나고 다른 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강민후가 돼야 했다.
최강호는 강민후가 되었다. 3일 동안이나 병원에 있었다. 그는 병원에서도 알 수 없게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의식이 없었다. 3일간 병원에서는 그를 지켜보았다.
3일 동안 이상이 없었고, 또한 병원 측도 계속해서 축내기만 하는 병원비를 알았다. 또한, 더 이상 어머니의 형편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퇴원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시 곧바로 연락을 줄 당부를 하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가 본래 살았던 아파트가 아니었다. 18평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투 룸이었다. 보증금 500에 월세 35만 원을 내는 곳이었다. 투 룸은 당연하게도 18평 아파트보다 더욱 작았다. 방이 2개밖에는 되지 않는다.
주방과 연결되어 있는 거실, 그리고 작은 방. 작은 방은 민후의 방이 되어 있었다. 거실의 TV 앞쪽에는 어머니가 잘 수 있게 이부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도 그에게서는 집에 돌아온 후 내내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어머니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아들을 위해서였지만 형편이 너무나도 피폐해져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어 미안한 감정이 그녀에게서 지그시 드러났었다.
이젠 강호에서 민후가 된 그는 빈 집을 둘러보았다. 두 모자가 살기에는 역시나 턱없이 작은 집이었다. 하물며, 주위로는 가정집보다는 젊은 층의 대학생들, 혹은 동거를 하는 이들, 막노동을 하며 생활하는 이들 등 가정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집을 둘러보던 중 거실 방 한편에 걸려있는 교복을 발견하였다. 그는 교복으로 다가갔다. 교복은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다. 다려져 있는 교복이 괜스레 그녀가 이 교복을 얼마나 많이 보고 어루만지고 하였을지 생각된다.
울컥하고 눈물이 나려 했다.
‘민후의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자신은 현재 민후였지만, 강호이기도 하였다. 민후의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시급한 것은 어쩌면 강호라는 인식은 버리고 민후로서 완전히 살아가는 것이었다.
분명 강호로서의 기억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었다. 그는 분명 노력 하나로 배우의 자리에 굳건히 섰던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움을 주는 것일 뿐, 강호로 판단하고 살면 안 되었다. 자신이 민후라는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일단은 돈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나가셨다. 방 한편에 식탁보에 싸인 밥상이 있었다. 아들이 퇴원하고서도 오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던 그녀는 일을 나가기 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주었다.
강호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지긋지긋한 형편은 난관임이 사실이었다. 확실히 민후가 배우로서 걷지 못했던 결정적인 것은 형편 때문이었다.
6개월간의 병원에서의 입원으로 침체된 가정형편 때문에 배우로서 나서지 못하고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해답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쉰다섯의 교수였다. 많은 것을 꿰고 있었고 알고 있었으며 돈을 벌 방법도 그와 더불어 배우로서 공부하며 그 길을 걸을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최소한 그 과정들을 겪으면서 안정을 잡는 데만 2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하물며 그는 현재 학생의 신분이었다. 지금 그럴 여유는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집을 버리고 새로운 집에서 시작할 수 있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줄 수 있는 물건을 자신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자신의 방으로 온 그는 자신이 공부할 책상 위에 올려놓은 회색 손수건 같은 것에 감싸진 그것을 집어 들었다.
크기는 작았다. 한 손으로 다 들어올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을 풀었다. 그러자 4개의 영단이 나왔다. 빨, 주, 노, 초. ‘신호등이네?’ 하면서 그는 웃음을 지었다. 색깔과 크기가 신호등 사탕과 꽤 흡사했다.
이 영단은 저승사자가 준 것이었다. 4개의 영단. 이 안에는 각기 다른 힘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그 힘들을 되짚어보기 위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받으시오.’
저승사자는 강호에게 천에 둘러싸인 알 수 없는 물건을 건넸다. 그것을 받은 그는 천천히 펼쳐 보였다. 크기는 우황청심환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색깔은 형형색색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영단이오.’
‘……!’
그의 말에 다소 놀랐다. 영단이라는 것은 흔히 무협지에서나 나오던 것이 아니던가. 신비스러운 효염이 있는 영약. 그것을 사람들은 영단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도움이 될 것이요. 내 잘못에 대한 사죄이며 내 청을 들어준 당신에 대한 보답이요. 붉은색. 그것은 원하는 때의 시간으로 당신을 보내줄 수 있는 영단이오. 과거와 미래 모두 가능하나 미래의 경우,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소. 원하는 것이 있어 얻으러 가는 곳이 미래라면 그것은 도박이 될 것이오. 또 하나 시간은 5분에서 10분 남짓뿐이오.’
그는 영단의 효력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였다. 강호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말을 세세하게 들었다. 정말 강민후가 되어 다시 일어난다면 이 영단은 자신에게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 분명하였다.
‘주홍색. 당신의 신체에 새로운 힘을 부여할 것이오. 저승사자들이 흔히 받게 되는 영단이오. 그것들을 먹어 모두 힘이 장사이고 반항하는 영혼들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지.’
그의 말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영혼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존재했다.
‘이것을 먹으면 저도 당신처럼 거대해지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으나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의 거대한 크기는 그 질문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후!’ 하는 작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당신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노란색. 모든 것에 능통해질 것이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게 될 터이며, 무엇을 만지면 그것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오. 그리고 마지막 영단.’
마지막 영단이라는 말에 강호는 본인도 모르게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나뭇잎의 색을 띠는 영단이다. 다른 영단들보다도 특히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었다.
‘당신이 꼭 필요할 때 사용해야 하오. 당신을 도와줄 것이오.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 딱 하나. 그것을 들어줄 것이오. 그러나 이치에 어울리지 않는 것에 영단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오. 혹여 붉은색 영단이나 그 영단을 통하여 이치를 깨어 죽은 이를 산목숨으로 만드는 행위가 이뤄진다면…… 당신은 죽을 것이오.’
강호는 그의 엄중한 목소리에 마른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결국 본인이 행하였던 것처럼 사람의 운명을 거스르는 짓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붉은색의 경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사고를 당하려는 이를 5분에서 10분 전 찾아가 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영단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영단이라 한다.
그것은 즉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가장 소중한 영단이고 신비스럽고 알 수 없는 영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한다면 자신은 죽게 되리라.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소.’
저승사자의 말이었다. 그의 무미건조했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작은 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부디 그의 영혼의 한을 풀어주길 바라오.’
그 말과 함께 갑자기 공간의 한 부분이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일그러졌던 그 부분은 이내 새까만 알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잠시만…… 이리해도 당신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 없는 겁니까?’
영단을 사람에게 주고, 한 사람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이것도 저승사자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그의 물음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저승사자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내가 벌인 일이고, 내가 막지 못했던 일이오. 그렇기에 그 죄는 내가 달게 받아야겠지.’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물음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묻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그에 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호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말한다.
‘정말 고맙소.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당신은 강민후가 되어 있을 거요. 행복하시오.’
그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블랙홀을 연상시켰다. 일그러졌던 공간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각을 되짚었던 민후는 각각의 영단에 깃든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바로 이 영단을 먹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집어 든 것은 다름 아닌 주홍색 영단이었다. 이 영단의 실제 효력에 대해 궁금했고 당장에라도 그 효력을 크게 보여줄 영단이 이 영단일 것이다.
그는 단숨에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씹었다.
으적으적.
“토끼 똥을 먹는 기분이구나…….
그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맛은 좋지 않았다. 비린내가 나는 듯하고 씹히는 식감이 무척 기분 나빴다. 그러나 그것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잠시 눈을 감고 있자 몸에서 힘이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몸의 감각들 하나하나가 더욱더 발달하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환골탈태의 느낌인가 하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또렷해진 시야를 알 수 있었다. 본래도 좋았던 민후의 시력이 더욱 좋아졌다. 이 정도면 2.5 정도의 시력이지 않나 싶었다.
그는 불끈거리는 팔과 다리를 매만져보았다. 팔은 휘두르면 벽도 부술 수 있을 만큼 강해 보였고, 다리는 어디를 달려도 지치지 않을 것처럼 건실해진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것 역시도 배우로서의 삶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남자 배우의 경우 특히 그랬다. 여러 위험이 많은 것이 사실 배우이다. 남자 배우의 경우 소화해야 할 액션 연기도 빠질 수 없었다.
다치고 부러지고, 깨지는 이들이 허다했다. 하다못해 죽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한 배우의 인생에서 우월한 신체는 분명 한몫 톡톡히 하리라.
그다음으로 집어 든 것은 누런색의 영단이었다. 생김새를 봐서는 설사를 응축시켜 놓은 것 같았다. 이미 주홍색 영단의 맛을 느껴봤기에 벌려지는 그의 입의 근육이 거부하려고 꿈틀거렸다.
그러나 손은 이미 영단을 입속에 넣었다.
영단을 씹자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코를 막으면서 그것을 힘겹게 삼켰다. 코에서 손을 떼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입안으로 이물감과 더불어서 강한 향내가 코끝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래를 삼킨 것 같다…….”
그는 중얼거렸다. 정말 충격적인 맛이다. 어째서 저승사자는 이 맛을 통일시키지 않고 다르게 만들었단 말인가. 첫 번째 영단보다 두 번째로 먹은 영단은 정말 최악이지 싶었다.
그래도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 하였다. 그것을 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나 반응이 왔다. 단전 부분에서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박하사탕이 배 안에서 깊은 향내를 뿌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시원함은 곧 위로 솟구치기 시작하더니 머리로 양손으로 양발로 뻗어 나갔다. 어떠한 부위보다 머리 부분이 맑고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3분여간 지속되었고, 차츰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온 그는 몸을 살폈다. 머리가 맑아진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먹은 영단은 ‘능통함’의 영단이었다. 어떠한 것을 하든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하였다.
남은 영단은 두 개였다. 두 개의 영단은 모두 제약이 걸려 있는 영단이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영단, 미래도 과거도 갈 수 있다. 하나 인간의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면 자신은 죽는다.
그리고 다른 남은 하나의 영단.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준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면 죽는다.
두 영단 모두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민후는 강호의 명석한 두뇌로 머리를 굴렸다.
시간은 5분에서 10분 남짓이었다. 이미 생각해둔 바가 어느 정도 있었다. 분명 저승사자의 말처럼 미래로 간다면 공간과 장소, 어떠한 곳에서 무엇을 자신이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로 간다면. 과거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우스개 생각으로 500년 전으로 가서 도자기를 하나 훔쳐 올까 하는 헛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현재 생각하는 방법이 가장 옳았다. 일단 미래의 자신에게 휴대폰이 있으면 되었다. 휴대폰은 대한민국 누구든 항시 소지한다. 아주 가끔의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니 미래를 간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선 알 수 있으리라.
두 번째 토요일 저녁으로 가야 했다.
토요일 저녁 9시를 넘긴 시각으로 이동하여야 했다. 그 시간대만 넘기면 어떤 시간이든 상관은 크게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쉬었다. 미래로 간다.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었다. 먼 미래는 가지 않는다. 엄청난 액수를 자신은 필요로도 하지 않는다. 자신 본인이 배우로서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 형편을 만들어줄 금액이 필요했다.
어떻게 본다면 100억에서 1천억 원을 벌 수 있는 영단이었으나, 그런 돈을 번다면 위에서 보고 있을 민후가 어이없어하리라. 그는 돈으로 성공하는 자신 본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지 않겠는가.
그는 천천히 다시 손을 뻗었다. 붉은색의 영단을 집어 들었다. 집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숨통이 조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 영단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맛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오독!
이번에는 물컹했던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오독 하며 씹혔다. 마치 차갑게 얼린 초콜릿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맛은 역시나 끔찍하였다.
마치 입에서 이물질이 살살 녹는 기분이다. 그는 헛구역질을 할 뻔한 것을 입을 막으며 다시 집어넣었다. 영단을 이렇게 날릴 순 없었다.
그는 억지로 삼켰다. 눈물까지 나올 정도의 맛이었다. ‘빌어먹을 저승사자…… 먹을 것으로 장난을…….’라는 말이 평소 점잖던 그가 내뱉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집 안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의자도 제멋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던 그것들은 곧이어 눈으로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파앗!
그리고 어느 순간, 빠르게 움직이던 것들이 멈추었다. 모든 것이 멈춘 것을 확인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계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09시 52분을 시계의 추는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에 자신이 있던 때와는 다른 요일이 표기되어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시간대, 날짜로 정확하게 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자신이 있는 공간은 집이었다. 그렇다면 휴대폰의 사용 여부가 필요 없어졌다. 그는 자신의 방에 위치된 조립식 저가용 컴퓨터를 부팅하였다.
“빨리 켜져라, 빨리.”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나 괜스레 초조함이 느껴졌다. 컴퓨터가 부팅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접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딱 두 글자를 검색하였다.
‘로또.’
라고 치자 1시간 전쯤 추첨이 진행된 로또 당첨번호가 뜨고 있었다. 그는 보너스 번호를 제외한 번호들을 눈에 넣었다. 그러자 번호는 마치 입력되듯이 쏙 하니 들어갔다.
세 번만 입으로 중얼거렸음에도 머리에 확실히 번호가 외워졌다. 능통함의 영단의 효과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빠르게 움직이던 모든 사물이 다시 멈췄다. 그는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자신이 본래 있었던 시각과 날짜였다.
그는 수첩을 찾았다. 수첩 안에 로또 번호를 적었다. 혹시라도 능통함의 영단의 효력이 있기는 하나 잊어버릴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번호를 모두 적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피폐해진 민후의 가정은 없을 것이다. 넉넉하게 살게 될 것이었고 강민후가 성공한다면 여유로운 삶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나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더 이상 고생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빨리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32평의 아파트를 계약하였다. 본래 두 모자가 함께 살았던 투 룸이나, 24평짜리 아파트와 멀지 않았던 곳이다. 어머니는 항상 그 아파트 인근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보시고는 하였다.
그러면서 간혹 ‘저런 곳에서 살아야지……’라고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생전 꿈은 크지 않은 듯했다. 32평짜리 아파트에서 아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그녀의 꿈이었을 것이고 그 꿈이 이뤄졌다. 얼마 전 아들 강민후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흥분에 찬 목소리로 꿈에서 할아버지가 나와 이상한 번호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였다.
총 여섯 개의 숫자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었다. 또한 TV로도 숱하게 보지 않았는가. 그녀는 직감했다. 민후가 본 것이 로또 번호다. 때문에 평소 복권 따위는 손에도 대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복권을 샀고 1등이 당첨되었다.
추첨 장면을 두 사람은 함께 보았다. 그리고 얼싸안고 서로가 소리를 질렀다. 아들의 6개월간의 병원 생활. 힘들었다. 아이가 깨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도 컸다.
또 막상 깨어났을 때, 더 나은 형편을 위해 새벽에 요구르트 배달을 할까 하는 생각도 가졌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이런 행운이 따라온 것이다.
그녀는 당장 아파트를 계약하였고, 집에 새로운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당첨금은 10억 원이 넘는 돈이었으나, 세금 떼고 이리 떼고 저리 떼니 8억 원 가까이 되는 돈이 쥐어졌다. 그러나 그 액수 역시 평생을 일해도 벌기 힘든 돈임은 사실이었다.
아파트의 가구들이 정리되고 난 후 어머니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하였다. 민후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엄마, 왜 그래…… 응?”
며칠 사이 민후는 자신 또래의 나이에 익숙해져 있었다. 말하는 것, 행동 하나하나.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을 가하였으며 며칠 만에 정말 민후가 되어 있었다.
“너무 기뻐서 그러지. 하이구…… 집이 좋지, 아들?”
집은 두 사람이 살기에는 넓었다. 베란다도 있었고, 거실에는 소파와 소파의 바로 앞에는 40인치짜리 벽걸이 TV도 있었다.
주방은 또 어떠한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는 비싼 냉장고가 있었고, 집 안 내부에 환풍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참 좋은 집이었고, 어머니는 그 사실에 감사하였다. 그리고 민후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껴안아 주었다.
“엄마, 나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이 힘들었지?”
“힘들기는 무슨 네가 배우 하겠다, 배우 하겠다, 노래를 안 부르니까 편하기만 하더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내셨다. 민후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잘할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도 누구보다 효도할게. 우리 이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거 아냐?”
“공부? 너 이 녀석 배우는 안 하고?”
어머니는 다소 놀란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실상 민후의 학교 성적은 크게 좋지 않은 편이었다. 배우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것과 더불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일을 했던 것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배우를 하겠다고 졸졸 쫓아다니던 녀석이 공부를 하겠다니, 그녀가 돈이 생김으로써 가장 좋았던 이유가, 아들 민후 때문이었다.
배우. 스크린으로는 화려한 직업이나 그 과정이 무척 힘들었고, 없는 형편에 더욱 그랬다.
하다못해 연기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되지 못하는 판국에 자신의 아이가 배우가 되겠다고 할 때마다 학원에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에 혼자 눈물을 삼켰다.
그런데 이젠 금전적인 여유가 생겼다. 민후를 위해서 연기 학원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공부 좀 못하면 어떠랴, 이젠 자신의 자식이 건강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건만. 그런데 갑자기 공부한다는 소리에 배우는 포기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당연히 해야지, 배우. 공부도 하고.”
“아들 무리하면 병나. 하나만 해야지.”
어머니는 그의 열정에 찬 목소리에 울면서도 웃으셨다. 민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엄마, 근데 울다가 웃으니까 엄마 진짜 못생겼다.”
“뭐어? 이 녀석이 엄마를 놀려?”
이제 남은 것은 민후로서의 인생이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강민후의 새로운 인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