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화 마지막 월드시리즈
5차전 선발은 연준후. 시즌 12승을 거두며 선발로 안착했지만 월드시리즈라는 엄청난 중압감을 이겨낼지는 미지수다. KBO에선 큰 경기를 많이 치러본 선수임에도 메이저리그에선 아직 검증되지 않았기에 알렉스 비토 감독과 오스틴 단장은 5차전 선발을 놓고 밤새 고민했을 정도.
강속구 투수 딕 에일이 있었지만 연준후의 메이저리그 적응을 높게 샀다. 또한 KBO에서 보여준 포스트시즌의 활약도 기대를 걸 만한 요소였다.
양키스의 선발 투수는 에이빌드런. 올해 13승 8패에 3.56의 ERA로 구종은 다양하지 않지만 평균 이상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다. 90마일 중반대의 포심패스트볼 평균 구속을 가지고 있고 투심성 궤적을 구사하는 투수.
KBO에서 활약하다가 메이저리그로 유턴한 케이스인데 지난 시즌 20승에 2점 초반의 ERA를 기록하면서 스카우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연준후와 더불어 메이저리그에 제대로 적응,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되는 투수다.
그에 비해, 연준후는 슬라이더, 체인지업 외에 커브를 곧잘 구사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다. 특히 커브의 제구력이 좋아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에 능하다. 5차전은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렸다.
1회 초에 마운드에 오른 에이빌드런은 삼자범퇴로 출발, 산뜻한 스타트를 끊었다. 연준후 역시 1회 말에 안타 하나를 맞았지만 나머지 타자들을 잡으면서 좋은 출발을 알렸다. 두 투수는 비록 한국에서의 경험이지만 큰 경기를 많이 치러봐서인지 페넌트레이스 때보다 강하고 좋은 공을 던졌다. 3회까지 나란히 무실점 투구.
그러다가 4회에 마운드에 오른 에이 빌드런은 가렛 쿠퍼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한 뒤, 브라이언 앤더슨의 백투백 홈런을 맞으면서 경기장이 들썩였다. 4회 말에 올라온 연준후도 연속 2루타를 맞고 1실점, 경기는 5회로 넘어갔다.
“아, 애런 분 감독 투수를 바꿉니다. 아무래도 백투백 홈런을 맞은 게 컸습니다.”
“4회에 던진 볼들이 좀 밋밋했거든요. 에이 빌드런 투수, 잘 던졌는데 아쉽네요. 4이닝 2실점이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성적인데 애런 분 감독은 마음이 급하겠죠. 더 이상 실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할 거예요.”
“아마도 성낙기 투수를 의식해서일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알렉스 비토 감독은 오늘 월드시리즈를 끝내려 할 겁니다. 그러려면 성낙기의 불펜 투입이 필수겠죠. 다만, 오래 던지지는 못할 겁니다. 아직 체력 회복이 안 되었을 거예요.”
양키스는 불펜 투수로 조던 몽고메리가 나왔다. 2차전에 호세 우레나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투수. 호세 우레나가 7실점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몽고메리 역시 5이닝 3실점으로 제 몫을 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2이닝 정도가 애런 분 감독이 생각하는 몽고메리의 역할이다. 몽고메리가 마운드에 올라 연습구를 던지는 동안, 성낙기는 불펜으로 나가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마이애미 팬들이 함성을 질렀다. 몽고메리는 마운드에서 힐끗, 마이애미의 불펜을 바라보았다. 무적 투수 성낙기가 공을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쟤는 왜 벌써부터……?’
몽고메리가 의아해하는 동안, 타자가 들어섰고 내야 땅볼을 유도하면서 첫 타자를 잘 잡아내는가 싶었다. 평범한 유격수 땅볼이었는데 디디 그레고리우스는 맨손으로 캐치를 시도하다가 공을 놓쳤다. 노아웃에 주자가 나간 마이애미의 더그아웃이 환해졌다. 경기가 잘 풀리려는지 투수가 바뀌자마자 에러를 저지르는 유격수. 알렉스 비토 감독은 번트를 택했다. 하위 타선이기에 강공보다는 1점을 내는 확률을 택했다. 타석에 나온 7번 홀랜드는 착실하게 보내기 번트 성공. 리얼무토의 한 방에 기대를 거는 마이애미 벤치.
“타임.”
여기서 양키스의 투수 코치 로스차일드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포수 게리 산체스도 마운드로 뛰어왔다.
“1루 비었으니까 리얼무토에게 좋은 공 주지 마. 최대한 어렵게 가서 투수 타석에서 병살을 노리자.”
로스차일드의 말에 조던 몽고메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얼무토가 월드시리즈에서 3할에 가까운 타격 상승세이지만 자신을 상대로는 2할에 불과하다. 굳이 승부를 피할 이유가 있을까. 연준후를 병살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마이애미의 1번 타자 퀸튼은 기다린다.
“퀸튼은요?”
“퀸튼은 요즘 슬럼프야. 타격 폼이 무너진 상태인데 저쪽 감독이 그대로 밀고 가는 것뿐이지. 이번 회는 리얼무토가 가장 위험한 타자라고.”
“…알겠습니다.”
양키스가 견제할 만큼 리얼무토는 월드시리즈에서 좋은 타율을 기록 중이다. 거기에 득점권 타율은 3할을 훌쩍 넘겼다. 양키스 벤치의 결정에 선뜻 이의를 달기 어렵다. 조전 몽고메리는 다소 찜찜한 상태에서 리얼무토를 상대했다. 스리볼을 연달아 던지면서 벤치의 생각에 부응했다. 볼이 세 개나 들어오는 동안, 리얼무토는 두 번이나 배트를 냈다가 거둬들였다.
‘의욕이 넘쳐 보이는데…….’
조던 몽고메리는 뭔가 아쉬웠다. 이대로 1루를 채우고 나서 결과가 나쁘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나. 무엇보다 역전 주자를 내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슬라이더에 리얼무토가 헛스윙했다. 조던 몽고메리는 다시 한번 외곽에 체인지업을 던졌고 리얼무토의 헛스윙. 타이밍을 보니 포심패스트볼을 노리고 있다. 볼 카운트는 어느덧 스리볼 투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가 이렇게 되고 보니 잘하면 삼진으로 돌려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놀라왔다.
“아까, 말 제대로 전달 안 했어?”
“했는데… 사인을 내겠습니다.”
게리 산체스는 벤치의 사인을 받아 조던 몽고메리에게 전달했다. 거르라는 사인. 자신에게 겨우 2할을 치던 타자를 거르라니. 더욱이 투 스트라이크다. 조던 몽고메리는 벤치의 사인과 자신의 승부욕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걸 거르자니 자존심 상하고 벤치의 사인을 무시하자니 후폭풍이 두렵다. 물론, 그 후폭풍은 자신이 얻어맞았을 때에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포수의 사인은 바깥쪽 높은 공이다. 몸 쪽이라면 헛스윙을 유도할 수도 있는데 바깥쪽으로 빠지는 높은 공에 반응하는 타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지금 리얼무토의 타격 자세는 조던 몽고메리의 연이은 바깥쪽 승부로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 즉, 이럴 때 의표를 찌르듯 몸 쪽으로 가면 당황한 타자는 반응하지 못할 것이다. 조던 몽고메리의 눈에 리얼무토의 몸 쪽이 확 들어왔다.
‘투심성 패스트볼로 승부하자.’
리얼무토는 지금 계속된 변화구 승부에 패스트볼 타이밍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상대로 투수가 어렵게 가는 걸 눈치채고 바깥쪽 변화구를 노릴 공산이 크다고 판단했다.
‘좋아, 나는 조던 몽고메리야.’
슈욱.
조던 몽고메리의 공이 빠르게 홈 플레이트로 날아갔다. 리얼무토의 배트가 돌아갔다.
따악.
몸 쪽으로 오는 공을 잡아당겨 3루수 키를 넘기는 안타. 2루 주자 시에라는 빠른 스타트를 끊고 3루를 돌아 홈으로 질주했다. 양키스의 좌익수가 타구를 잡아 홈으로 송구했다.
촤아아악!
시에라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감행했고 게리 산체스는 공을 잡자마자 몸을 날렸다. 홈 플레이트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주심은 접전이 펼쳐진 후에도 한동안 눈만 끔벅거리며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주심조차 헷갈릴 만큼 타이밍은 거의 동시였고 리얼무토와 게리 산체스는 주심을 바라보았다.
“세이프!”
주심의 손이 좌우로 펼쳐졌다. 2:1로 앞선 상황에서 1점을 추가한 천금 같은 적시타였고 주루플레이였다. 경기 스코어 3:1로 마이애미의 리드.
***
경기는 5회 말로 넘어갔고 성낙기가 불펜으로 나왔다. 마이애미 팬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이 떠나갈 듯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등판이다. 어제 4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투수가 5차전 릴리프로 나오다니. 그나마 88구로 끝을 낸 4차전이었기에 여력이 있다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판단이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무리한 일정이다.
“오, 5회에 성낙기 투수가 등장합니다.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 투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양키스를 잡기 위해 마운드에 섰습니다.”
“이해가 안 되죠? 저도 그렇습니다. 어제 완봉승을 거둔 투수가 연이어 던지는 건 정말 보기 드문 로테이션이에요. 알렉스 비토 감독은 무리를 해서라도 오늘 월드시리즈를 끝내겠다는 생각이겠죠. 다소 모험적인 기용이네요. 구위가 여전할지도 의문이고요. 만약 여기서 성낙기 투수가 얻어맞으면 월드시리즈 일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성낙기 투수의 구위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팡.
“스트라이크.”
“흠, 초구로 던진 공이 97마일이네요. 포심패스트볼이었죠? 공을 더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힘이 남아 있는 걸로 보이는군요. 초인 같은 어깨를 지닌 투수입니다.”
성낙기는 5회에 나와 타자를 삼자범퇴시켰다. 던진 공의 개수는 9구. 더그아웃으로 내려오는 도중 상태창이 떴다.
[체력이 31남았습니다. 적극 관리하십시오.]
아직 4회가 남은 상태. 이 정도의 체력이라면 간당간당하다. 아니, 전력투구라면 8회가 맥시멈일 것이다. 어떻게든 9회까지 버티려면 느린 변화구 위주의 승부여야만 체력을 9회까지 끌고 갈 수 있다. 더그아웃에서 리얼무토에게 구질 변화를 이야기했다. 리얼무토는 성낙기의 어깨가 한계 상황에 왔다고 판단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낙기도 힘에 부칠 때가 있나 보군. 왠지 인간적인 걸?’
그리고 성낙기는 변화구 위주의 승부로 8회를 넘겼다. 6, 7, 8 3회 동안 안타를 세 개나 허용하는 의외의 모습도 보였지만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으로 집중타는 터지지 않았다. 여전히 3:1로 경기를 리드한 가운데 9회 말이 다가올 때, 알렉스 비토 감독이 성낙기에게 다가왔다.
[체력이 9 남았습니다.]
“어때, 성낙기. 지쳤으면 마무리는 야를린 가르시아로 가도록 하자.”
“1회는 가능합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하길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문제 있으면 마운드에서 사인 보내. 바로 바꿔줄 테니까.”
알렉스 비토 감독은 무리인 걸 알면서도 성낙기가 계속 던지길 원했다. 투수 코치로부터 야를린의 컨디션이 별로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데, 3차전에서도 안타를 두 개나 허용하는 등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였기도 했다. 성낙기는 9회 말이 되자 꿋꿋이 마운드에 올라 마이애미 관중들의 함성에 모자를 벗어 보이며 화답했다. 첫 타자에게 빗맞은 내야안타를 맞은 뒤, 다음 타자를 병살로 솎아냈고 마지막 타자를 맞아 전력투구로 맞섰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 드디어 마지막 타자를 잡아내는 괴물 투수 성낙기!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합니다. 믿기 힘든 순간입니다.”
마지막 타자를 잡는 순간, 체력은 1이 남았고 성낙기는 마운드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홈 플레이트에서 리얼무토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경기장 안의 모든 야수들이 마운드로 모여드는 드론 영상이 TV로 송출되었고 그것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2023년의 메이저리그를 기록하는 사진으로 남아 마이애미 말린스의 야구 역사관으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