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뉴욕 양키스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십시오.]
[시리즈 내내 무실점을 달성하십시오.]
[두 가지 미션을 완수하면 모든 스탯이 끝까지 오릅니다.]
1회 초 마운드에 오르자 상태창이 떴다. 전에 없던 미션이다. 노히트노런과 월드시리즈 내내 무실점. 쉽지는 않겠지만 성낙기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야수들이 도와줘야 가능한 미션이다. 성낙기는 선두 타자를 맞아 초구부터 전력투구했다.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Shit!”
7회 초, 양키스의 2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성낙기는 3번 타자 아론 저지를 맞아 볼을 남발한 끝에 볼넷을 허용했다. 7회까지 무안타 무실점에 볼넷 하나. 노히트노런의 요건을 채웠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지안카를로를 상대로 성낙기는 3구 연속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진 끝에 삼진을 잡아냈다. 마이애미는 루이스 시크릿을 공략해 3:0으로 앞선 상황. 이제 2회만 던지면 노히트노런 완성이다. 한데 변수가 생겼다. 7회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돌아오자 알렉스 비토 감독이 다가왔다.
“성낙기, 잘 던졌어. 시리즈 기니까 푹 쉬어.”
느닷없는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 그러니까 8, 9회는 팬 파일러와 야를린 가르시아로 가겠다는 것이다.
“아악! 안 됩니다.”
“뭐가 안 돼. 너무 많이 던지면 좋지 않아. 감독이 쉬랄 때 쉬어.”
“오늘 안 던지면 절대 안 됩니다. 꼭 던지게 해주십시오.”
“아, 아니…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네. 그냥 쉬라니까?”
“네버! 절대 안 됩니다. 8회에도 9회에도 공을 던질 겁니다.”
“끄응, 거 참 이상한 놈일세. 알겠다, 니 맘대로 해봐라.”
간신히 알렉스 비토 감독을 설득했다. 모든 스탯의 정점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다시 저런 미션이 나올지 모른다. 성낙기는 7회 말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려 8회가 되자마자 부리나케 마운드로 올라갔다. 행여나 감독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하면 7회까지 던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8회에 마운드에 서자마자 공격적인 투구로 세 타자를 연속 삼진 시켜 버렸다.
“성낙기 투수, 오늘도 일을 냅니까? 퍼펙트를 달성한 경기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은 노히트노런의 여건을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딱 세 타자가 남았을 뿐입니다.”
“충분하겠네요. 9회 말은 8번 타자부터 타석이 돌아오거든요. 마지막 1번 타자 글레이버 토레스만 잘 정리하면 노히트노런이 완성되죠. 오늘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면 기록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겠어요.”
***
“휴우, 성낙기 쟤는 도대체 얼마나 변한 거냐. 월드시리즈에서 노히트노런을 눈앞에 두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삼호슈퍼스타즈에 있을 땐 140㎞나 던질까 말까한 햇병아리였는데 말입니다.”
“이 코치, 성낙기 한국에 오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아마, 마이애미와의 계약이 5년일 겁니다. 이전 월드시리즈가 끝나고도 2년이 더 남겠군요.”
“우린 번번이 세화스쿼럴스나 모연비퍼스에 발목을 잡히고 있어. 성낙기 같은 투수 하나만 있으면 한국시리즈 우승은 늘 우리 차지일 텐데 말이야.”
“그렇지만 감독님 부임 이후로 늘 상위권이지 않습니까. 꼬박꼬박 가을 야구에 나가는 것만 해도 삼호슈퍼스타즈로서는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저놈이 워낙 대단한 활약을 하니까 아쉬워서 하는 소리야.”
한국의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투수 코치는 월드시리즈 중계를 같이 보며 성낙기를 응원 중이다. 허봉호 감독은 한국에서 대충 던지다가 미국에서 포텐을 터뜨린 성낙기를 보고 불만 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한국에 있을 때 저렇게 던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봉호 감독이 쓰린 속을 달래는 동안, 마이애미의 8회 말 공격이 끝나고 성낙기가 다시 마운드에 섰다. 이어 연속 두 타자 삼진. 마지막 타자로 글레이버 토레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아, 젠장. 왜 나야. 내가 왜 기록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거냐.’
안타를 치겠다는 생각보다 먼저 자포자기 심정인 글레이버 토레스. 그만큼 성낙기의 구위는 철벽이다. 리얼무토는 글레이버 토레스를 힐끗 보면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성낙기를 상대로 마지막에 들어서다니. 자신이 봐도 불쌍하기 그지없다. 재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까.
팡.
“스윙 스트라이크.”
초구는 몸 쪽 하이볼이었는데 글레이버 토레스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어차피 게스히팅도 안 되는 투수의 공이니 마음껏 제 스윙이나 해보자는 것. 그걸 아는 것처럼 3구 역시 투심이 높게 들어온다. 글레이버 토레스는 연속 풀스윙. 어느덧 노볼 투 스트라이크다. 그리고 마지막 공이 성낙기의 손에 들려 있다.
“휴, 정말 안 맞는다. 리얼무토, 쟨 동업자 정신도 없냐? 기록 세우러 메이저리그에 온 거야?”
“글세… 볼에 마구 휘두르는 게 바보지.”
“뭐? 말 다했어? 너 지금 나 비웃은 거지. 한번 해보자는 거야?”
“…….”
리얼무토는 입을 다물었다. 가만 보니 자기가 말을 걸어놓고 흥분하고 있다. 뭐라고 대꾸하면 벤치클리어링이라도 할 기세. 만약 싸움이 일어나면 마운드로 달려가 성낙기를 노릴지도 모른다. 저런 수작에 놀아날 리얼무토가 아니다. 글레이버 토레스의 말에 침묵을 지키는 사이, 마지막 공이 들어왔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공엔 배트를 내밀지 않고 기다리다가 루킹 삼진. 3구도 볼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경기가 끝났고 성낙기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퍼펙트에 이은 두 번째 쾌거.
[체력이 99로 오릅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99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98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97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97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97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97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97로 오릅니다.]
공의 스피드가 무려 99까지 올랐다. 세기의 강속구를 던졌던 헤이드 존의 102.5마일에 거의 근접한 102마일. ㎞로 환산하면 164㎞가 된다. 물론, 170㎞를 던진 아롤디스 채프먼이나 조단 힉스 같은 강속구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엔 즐비하다. 마이너리그에도 160㎞를 던지는 투수들이 꽤 있다. 그런 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들겨 맞는 건 오로지 제구가 안 되기 때문. 한 가운데 공이 들어오면 170㎞도 우습게 쳐내는 곳이 메이저리그다. 성낙기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강속구에 반비례하는 공의 제구력. 그게 발군이기 때문에 0점대의 방어율과 오늘 같은 노히트노런도 나오는 것.
“아, 결국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내는군요. 성낙기 투수 월드시리즈 1차전을 노히트노런으로 장식합니다.”
“푸우… 역사를 쓰네요. 저 투수가 또다시 4차전과 7차전에 나온다고 보면 끔찍합니다. 양키스로서는 3승을 거저 주고 시작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습니다. 1점을 뽑아내기조차 힘든 투수이니 해설자 말씀이 당연해 보입니다. 1차전을 내준 뉴욕 양키스, 지난해에 이어 험난한 월드시리즈를 예고합니다.”
“저런 투수는 메이저리그보다 상위 리그가 있다면 그리로 보내고 싶군요. 뉴욕 양키스 타자들이 마치 마네킹처럼 보인 경기였어요.”
**
“낙기 씨, 승리를 축하드려요.”
“낙기 오빠!”
인터뷰를 끝내고 경기장을 빠져나오려는데 더그아웃 위의 관중석에서 성낙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김아경이다. 만면에 짓고 있는 환한 미소. 어라, 그런데 한 사람이 더 있다. 김아경과 3, 4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낙기 오빠를 외치는 여자. 그녀는 바로 장하연이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성낙기를 불렀고 성낙기는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했다. 김아경도 느꼈는지 장하연을 빤히 바라본다. 장하연도 마찬가지. 둘은 서로 몹시 놀란 눈치였다. 성낙기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낙기 씨, 혹은 낙기 오빠, 를 소리쳐 부르는 상황. 둘 모두 어이가 없는지 서로를 바라보다가 성낙기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두 여자의 눈길엔 그런 질문이 들어 있었다. 성낙기는 살짝 난감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밝게 하고 두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더그아웃으로 쏙 들어와 호흡을 가다듬었다. 떳떳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하다.
그 날 저녁, 성낙기는 마이애미 시내의 펍에서 두 여자를 만났다. 정진수도 함께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쌍의 연인처럼 보이는 분위기. 하나, 김아경과 장하연은 연신 서로를 견제하는 중이다.
“언니는 오빠랑 어떻게 되는 사이세요?”
“응, 호호. 낙기 씨와 전 이미 뗄 수가 없는 사이죠. 그러는 동생은요?”
“전 언니가 낙기 오빠를 알기 전부터 그런 사이였어요. 제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이유도 알고 보면 오빠가 외롭다고 해서였죠.”
“야아, 내가 언제…….”
“그런데 언니는 몇 살이세요? 오빠보다 나이가 많으신 것 같은데요.”
“요즘 남녀가 사귀는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죠? 그렇게 말하는 동생은 너무 어려 보이는군요. 낙기 씨에겐 지금 든든한 조력자가 필요해요.”
“아, 아니. 아경 씨도 그만해요.”
“낙기 오빠, 저예요, 저 아줌마예요?”
“뭐, 아, 아줌마? 보자보자 하니까 학생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코넬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낙기 씨, 말해봐요. 저예요, 저 철딱서니 없는 애송이에요?”
이럴 때가 가장 어렵다. 둘 중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다른 여자는 상처를 받는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됐지? 성낙기는 머리를 굴려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아니, 근데 두 여자가 언제부터 날 자신들의 남자로 생각했지? 가만 생각하니 더 어이가 없는 쪽은 성낙기다. 지들 맘대로 자신을 애인으로 찍어놓고 싸우는 꼴 아닌가. 성낙기가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두 여자는 말을 멈추고 서로를 째려보고 있다.
“아참, 분석관님 오늘 경기 어떻게 보셨어요? 결과는 좋았지만 지안카를로가 전 어려웠거든요.”
“…….”
성낙기가 말을 돌려도 정진수는 김아경의 눈치가 보이는지 묵묵부답. 무슨 남자가 저러냐. 성낙기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펍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숙소로 들어와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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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2차전은 호세 우레나가 일찌감치 무너지는 바람에 1:1.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진 3차전은 샌디 알칸타라의 호투로 5:2로 다시 마이매미의 승리. 성낙기가 나온 4차전은 7회까지 3:0으로 스코어가 벌어지자 양키스 팬들이 대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8, 9회 역시 볼 것도 없다는 팬들의 외면. 성낙기에게 2안타만을 뽑아낸 타선을 욕하면서 한 무리의 관중은 고함을 지르고 사라졌다.
“Yankee Go Home!”
9회 원아웃이 되자 양키스 팬 절반 이상이 경기장을 빠져나가 선수들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결국 완봉으로 경기가 끝났고 월드시리즈 전적 3:1로 마이애미의 절대적 우세. 5차전 결과에 월드시리즈 우승이 걸린 셈이 됐다. 5차전이 열리는 날, 성낙기는 알렉스 비토 감독에게 말했다.
“오늘 끝내야죠? 릴리프로 대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