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184화 2023 페넌트레이스 6
올스타전은 아론 저지의 결승 홈런으로 8:7 아메리칸리그의 승리로 끝났다. 아론 저지는 올스타 MVP를 받으면서도 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어두운 편에 속했다. 성낙기에게 당한 홈런더비 패배가 못내 아쉬운 듯.
하긴, 투수를 결승에서 만나 홈런 레이스를 벌인 것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는데 패하기까지 하고 보니 타자로서 쌓아온 스펙들이 일거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론 저지는 프로였다. 그 상실감을 떨치고 끝내 올스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보면 대단한 멘탈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후반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낙기에 관한 한, 2023년의 후반기 레이스는 시작과 동시에 끝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언터처블 투수로서 여전한 위용을 선보였고 성낙기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는 타자도 없었다. 이젠 캐스터도 해설자도, 메이저리그를 즐기는 수많은 팬들도 성낙기의 압도적인 모습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KBO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에이 빌드런은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양키스의 포스트시즌을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전반기에 8승 5패, ERA 3.56을 기록하더니 후반기엔 9승 3패를 기록하며 ERA를 2.82까지 끌어내렸다. 17승 8패로 루이스 시크릿에 버금가는 성적을 올려 양키스 팬들의 큰 위안이 되었다. 마이애미의 연준후 역시 12승을 거두며 선발로 안착했다. 내셔널스리그에서는 마이애미가,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양키스가 넘보기 힘든 승률을 올리며 일찌감치 지구 우승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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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투나잇의 서소라입니다. 여러 해설자 모시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성낙기 투수에 관한 이야기 듣겠습니다. 우선, 타격 레전드시죠. 장종운 해설자 모셨습니다. 마이애미 말린스의 지구 우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월드시리즈 2연패를 향한 좋은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연준후까지 가세한 투수진이 지난해보다 더 탄탄해졌고 타격도 발전했어요. 양키스가 뛰어난 팀인 건 사실이지만, 성낙기가 버티는 마이애미 역시 좋은 팀워크를 자랑합니다.”
“월드시리즈 2연패가 가능할까요?”
“괴물 투수가 있는 한, 가능합니다. 지난 월드시리즈에서도 혼자 모든 걸 결정지어 버렸죠. 갑작스러운 부상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올해도 가공할 만한 공을 던질 겁니다.”
“임장용 해설자도 마찬가지 생각이세요?”
“전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의외네요.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지요?”
“올해 213이닝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25승 3패에 0.80의 방어율을 기록했죠. 2년 연속 20승을 넘었고 200이닝을 넘겼습니다. 작년엔 와일드카드전부터 월드시리즈까지 쉬지 않고 공을 던졌어요. 올해도 혹사에 가까운 공을 던졌고요.”
“아, 그럼 포스트시즌엔 구위가 떨어질 거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저의 현역 생활에 비춰보면 2년 연속 한계 투구수를 넘어섰습니다. 월드시리즈까지 간다면 절대 작년처럼 던지지 못합니다. 수많은 투수들이 그렇게 던지다가 실패를 맛봤죠. 2연패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임장용 해설자의 말을 들으니 위험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역 시절 누구보다 많은 공을 던져왔던 분의 말씀이니까요. 다음으로는 연준후 선수에 관한 질문인데요.”
한국의 TV에서는 연일 마이애미 말린스의 월드시리즈 2연패에 초점이 모아졌다. 미국에서는 와일드카드전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한국 내의 분위기는 이미 마이애미와 양키스의 월드시리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만큼 성낙기라는 투수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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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우승을 한 마이애미의 상대는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양키스의 반대쪽에선 양키스와 LA다저스가 맞붙었다. 챔피언십시리즈가 시작되었고 성낙기는 예상대로 1차전 선발로 나섰다. 포스트시즌은 타자들이 컨디션 조절을 하고 집중력 또한 최상인 상태로 나서기 때문에 투수가 어렵다. 타석에서의 전투력도 페넌트레이스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시즌 내내 에이스로 이름을 떨치다가도 포스트시즌에 5회도 넘기지 못하고 강판당하는 투수가 비일비재. 그러므로 단기전엔 확실한 승리를 보장해 주는 에이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2023 10월의 서늘한 날씨 속에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랐다. 마이애미의 홈구장엔 암표상이 들끓었다.
“ESPN의 브르노스입니다. 해설자 카바니 씨 모셨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마이애미 말린스의 1차전, 혹은 챔피언십시리즈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요.”
“마이애미엔 확실한 에이스가 있습니다. 지난 월드시리즈에서 검증된 투수죠. 바로 성낙기입니다. 보스턴은 드류 포머란츠를 내세웠는데 이 선수 역시 에이스입니다. 피해가지 않겠다는 코라 감독의 의지가 읽히는군요.”
“그렇습니다. 강한 상대 선발을 의식해서 1선발을 2차전에 투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코라 감독 정면 승부를 택했습니다. 팬들로서는 재미있는 경기가 되겠습니다. 카바니 씨, 성낙기의 투구를 예상하신다면요. 과연 보스턴 타자들이 성낙기의 공을 공략할 수 있을까요?”
“쉽지는 않습니다. 워낙 가지고 있는 무기가 많은 투수입니다. 결국엔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상대 포수의 볼 배합을 읽어내고 거기에 맞춰 스윙을 하는 거죠. 다음 공이 무엇일지를 알고 있다면 아무리 성낙기의 공이라도 쳐낼 수 있습니다.”
“결국 게스히팅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바로 그렇죠. 그 방법 외에는 성낙기를 상대로 안타를 뽑지 못합니다. 삼진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해설자는 성낙기의 공략법으로 게스히팅을 강조했다. 문제는 성낙기가 서너 개의 무기를 가진 일반적인 투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던질 수 있는 구종이 많으니 게스히팅으로 한 가지 구질을 노린다는 것도 확률은 꽤 떨어졌다.
하지만 보스턴 벤치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투수 보조 코치가 시즌 내내 성낙기의 구종을 데이터화하여 일정한 패턴을 읽어냈다. 정확히는 성낙기가 아닌, 리얼무토의 볼 배합이다. 아무리 많은 구종을 가진 투수라도 포수의 사인에 따라 던지게 마련, 리얼무토가 선호하는 볼 배합이 따로 있고 그걸 잘 이용하면 성낙기를 상대로 좋은 타격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오늘은 어떤 팀도 하지 못한 데이터 야구를 하는 거야. 데일이 연구한 걸 타자들이 잘 숙지하고 있지?”
“어제 시뮬레이션을 통해 볼 배합만큼은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좋아, 이게 들어맞는다면 그야말로 사건이 되겠군.”
성낙기는 가벼운 기분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페넌트레이스의 대장정을 치르고도 몸 상태는 좋았다. 이제 2023년도 월드시리즈 우승과 함께 끝날 거라는 자신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보스턴은 그 길을 향한 제물일 뿐이다. 포수는 리얼무토. 연습구를 던지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성낙기의 구위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1회 초, 타석엔 무기베츠가 들어섰다. 175㎝의 단신이면서 타격에 재능을 보이는 선수. 컨택 능력이 좋아 좀처럼 삼진이 없는 유형이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무기베츠는 초구인 포심패스트볼을 예상하고는 배트를 휘둘렀지만 생각보다 공이 빨랐다. 초구부터 무려 98마일의 강속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딱.
파울.
2구째의 포심패스트볼은 1루 파울 지역으로 굴러갔다. 강속구를 커트해 내는 수준이 상당하다. 리얼무토는 포심패스트볼에 익숙해진 타자를 상대로 3구는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무기베츠 또한 슬라이더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다. 삼진을 당하는 타자들이 보통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잡고 있다가 변화구에 속수무책인 반면, 무시베츠는 적절하게 반응했다.
따악.
타구는 2루수 정면으로 굴러갔고 무기베츠는 아웃. 슬라이더를 쉽게 쳐내는 걸 보고 리얼무토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무기베츠를 힐끗 쳐다봤다. 2번 타자 역시 1루수 땅볼 아웃, 타자들이 성낙기의 공을 배트에 맞추는 가운데 3번 타자 라파엘 디버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3할 30홈런에 빛나는 타자이며, 21개의 도루로 발도 빠른 전천후 타자였다.
팡.
“스트라이크.”
외곽을 찌르는 슬라이더에 반응하지 않는다. 리얼무토는 몸 쪽 하이볼을 성낙기에게 주문했다.
팡.
볼.
역시 미동도 하지 않는 타자. 리얼무토는 마스크를 고쳐 쓰며 다음 공을 생각했다. 리얼무토가 택한 구종은 전가의 보도, 포심패스트볼이었다. 잘 제구된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 코스로 날아들어 갔다.
따악.
“아, 1, 2루 사이를 꿰뚫는 안타입니다. 1, 2루수가 따라가 봤지만 코스가 좋았습니다, 잡지 못합니다.”
“오오, 보스턴 타자들의 집중력이 대단한데요? 삼진도 없고 오히려 1회 초에 안타를 쳐냈네요. 성낙기 투수가 1회에 주자를 내보내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의외군요.”
캐스터와 해설자가 놀랄 만큼 3번 타자 라파엘 디버스의 타구는 타이밍이 잘 맞은 질 좋은 타구였다. 성낙기를 상대로 안타가 터지자 보스턴 팬들이 웅성거렸다. 일단은 삼진이 없는 게 고무적이다. 성낙기는 포심패스트볼을 물 흐르듯 쳐내는 라피엘 디버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타자가 잘 쳤다고 생각했다. 4번 타자 미치 모어랜드가 타석에 섰다. 리얼무토의 사인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 성낙기는 1루에 주자가 있는 만큼 전력투구로 맞섰다.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100.5마일의 공이 바깥쪽을 통과했고 미치 모어랜드의 배트가 늦었다. 미치 모어랜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숨을 토해냈다. 몸의 반응이 공보다 느리다. 이어진 사인은 바깥쪽 커브. 강한 포심패스트볼을 본 뒤엔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운 구종이다.
딱.
미치 모어랜드가 친 공이 외야로 뻗었고 우익수가 워닝트랙에서 잡아냈다. 하마터면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2루타를 내줄 뻔했다. 1루 주자 라파엘 디버스라면 2루타로 홈까지 들어왔을 터. 의외로 자신의 공을 잘 맞추는 보스턴 타자들을 보고 성낙기는 간담이 서늘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리얼무토를 불러 세웠다.
“리얼무토, 보스턴 타자들이 너무 잘 치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애들이 연습을 많이 했나, 곧잘 치네. 걱정하지 마. 네 구위라면 절대 못 쳐. 라파엘의 안타도 코스가 좋았을 뿐이야.”
리얼무토는 성낙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100마일이 넘는 스피드를 가진 투수에게 당연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2회에도 한 타자는 2루타성 타구를 때려냈다.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우중간을 꿰뚫을 뻔했다.
그리고 타순이 한 바퀴 돈 4회에 성낙기는 선두 타자로 나선 앤드류 베닌텐디에게 내야안타를 허용했다. 바운드가 까다로운 공이 유격수 깊은 곳으로 갔고 1루 송구는 원 바운드가 되며 속도가 줄었다. 노아웃에 1루의 위기. 그러고 보니 오늘 잡은 삼진 개수는 1개뿐이다. 시즌 때 같았으면 거의 절반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을 것이다. 성낙기는 마운드에서 리얼무토를 불렀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내 공의 타이밍을 모두 아는 느낌이야.”
“그럴 리가. 네 공의 구종이 몇 갠데 게스히팅이 가능하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는 달리 설명이 안 되잖아.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두르고 있어.”
“좋아, 그럼 볼 배합을 달리해 보자.”
리얼무토가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성낙기는 이제까지의 패턴을 버리고 자신이 직접 사인을 냈다. 초구부터 라이징패스트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