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2023 페넌트레이스 4
“뭘 더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알렉스 비토 감독 또한 대단합니다. 어제 퍼펙트를 기록한 투수를 5번 지명타자로 기용하는 라인업은 제 기억에 없습니다. 양키스는 어제의 패배 이후로 또다시 성낙기라는 선수와 싸우게 되는데요. 제임스 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키스로선 악몽의 연속이네요. 만약 오늘 경기에서 성낙기가 상당한 활약을 한다면 뼈를 긁는 아픔이 될 겁니다.”
“양키스의 선발은 채드 그린이군요. 개막 이후, 2.34의 방어율을 기록 중인 투수로 5승을 올리며 순항 중입니다. 마이애미는 예상대로 호세 우레나가 선발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3승에 3.46의 방어율을 기록 중이죠.”
“지금까지의 성적은 채드 그린이 낫지만, 호세 우레나는 경기 운영 능력이 있죠. 쉽게 무너지는 유형이 아녜요. 변수는 성낙기인데 채드 그린이 마이애미의 지명타자를 얼마나 잘 막아내는가가 경기 관전의 포인트가 되겠네요.”
양키스의 더그아웃은 어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침울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연패라도 하게 되면 팀을 추스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정도로 어제의 패배는 내상이 컸다.
이런 상태에서 마이애미는 성낙기를 지명타자로 내세웠고 어제에 이어 이중 폭격을 노린다. 양키스의 애런 분 감독은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도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골치 아프게 생각할 거 없어. 투수는 투수대로 공략하고 성낙기는 볼넷으로 내보내 버리는 거다.’
투수인 성낙기에게 큰 걸 허용하면 심리적 타격이 막심하다. 그럴 바엔 볼넷을 내주고 다음 타자를 잡으면 공격의 맥이 빠질 터. 호세 우레나를 두들겨 어제의 앙갚음을 하지 않으면 화병이라도 날 것 같다.
1회 초, 양키스의 채드 그린이 선발로 나섰다. 마이애미 말린스 타선은 까다로운 제구에 삼자범퇴를 당했다. 이어진 1회 말, 양키스의 공격.
따악.
애런 분 감독의 끓는 마음을 선수들이 알았는지 1회부터 적극적이다. 글레이버 토레스는 나오자마자 안타를 친 뒤, 2루 도루를 감행했고 퀵 모션 시간이 긴 편인 호세 우레나는 주자가 2루에서 웃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2번 타자는 착실하게 1루 쪽 땅볼로 주자를 3루에 보냈고 3번 타자 아론 저지는 볼넷으로 출루했다. 원 아웃 주자 1,3루.
‘슬라이더로 가는 수밖에.’
호세 우레나는 지안카를로 스탠튼을 맞아 병살타를 생각했다. 아론 저지를 볼넷으로 내보낼 때부터 의도된 선택. 바깥쪽 슬라이더가 낮게 먹히면 당겨 치는 성향의 지안카를로는 내야 땅볼을 칠 확률이 높다고 봤다.
팡.
볼.
하지만 순순히 따라 나오지 않는 지안카를로. 초구로 던진 슬라이더는 너무 낮았다. 호세 우레나가 던진 2구는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이것 역시 승부수의 일종이다.
지안 카를로는 뭔 일 있냐는 듯 낮게 제구된 체인지업이 볼 판정을 받는 걸 바라만 봤다. 호세 우레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강타자에게 투 볼로 몰리는 건 좋지 않다.
팡.
볼.
3구 역시 최대한 어렵게 바깥쪽 포심패스트볼로 갔으나 약간 벗어났다. 리얼무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던지며 두 팔을 펴고 내리 누르는 시늉을 했다. 긴장을 풀라는 뜻.
리얼무토의 그런 보람도 없이 4구 역시 볼이었다. 어제의 퍼펙트로 조급해 질만도 하건만, 양키스 타자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주자는 원아웃에 만루.
따악.
5번 타자로 나온 미구엘 안두하는 초구로 던진 슬라이더를 밀어쳐 2루수 키를 넘겼다. 그 안타로 3루 주자와 2루 주자가 모두 들어와 양키스가 2:0으로 앞서갔다. 지안카를로는 우익수의 홈 송구에 3루까지 내달리는 주루 센스를 보였다.
원아웃에 다시 주자 1, 3루의 찬스가 계속 이어졌다. 뒤이은 타자의 희생플라이 때, 3루 주자마저 홈인. 스코어 3:0으로 양키스가 앞선 채, 1회 초가 끝났다.
***
“좋아! 잘했어. 마이애미는 언제든 두들길 수 있는 팀이야. 양키스의 저력을 보여주자!”
타격 코치 벤스타민은 더그아웃에서 손뼉을 치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다소 과장된 제스처였지만 때로는 저런 파이팅도 필요한 법이다. 어제의 아픔을 빨리 잊기 위해서는 오늘의 대승이 중요하기 때문.
선발 투수 채드 그린 역시 경기를 최대한 빠른 템포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1구, 1구에 온 신경을 쏟으며 신중을 기하기보다는 맞춰 잡으면서 공격의 맥을 끊는 것이 필요하다.
수비 시간을 단축할수록 불붙은 양키스 타선이 식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따악.
마이애미 4번 타자 브라이언 앤더슨은 채드 그린의 의도대로 초구를 건드려 유격수 땅볼 아웃. 느낌이 좋다. 채드 그린은 선두 타자를 잡은 이상, 2회 역시 무실점을 자신했다. 타석엔 5번 타자 성낙기가 들어서고 있었다.
어제 퍼펙트의 수모를 안겨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출신의 투수. 그를 보자마자 채드 그린의 이마가 좁혀졌다. 이 타자는 가볍게 상대해서는 안 될 타자다.
무조건 돌려세워야 어제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터. 채드 그린이 마음을 다잡을 때, 더그아웃에서 사인이 왔다.
‘볼넷으로 내보내라고? 이런 미친…….’
채드 그린은 포수를 통해 들어온 더그아웃의 사인을 의심했다.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지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반면, 애런 분 감독은 성낙기에게 큰 것을 허용하고 실망스러워하는 투수를 바라보길 원치 않았다.
성낙기에게 홈런 한 방이라도 맞는다면 어제에 이은 심리적 결정타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성낙기처럼 물이 오른 선수는 타격 기회를 아예 없앰으로써 슬럼프로 몰아넣어야 한다.
저런 선수에겐 견제, 또 견제하는 길만이 답이다.
“볼넷! ”
주심이 1루를 가리켰고 성낙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이제 6, 7번의 하위 타순을 정리하면 1루로 나간 주자는 쓸모가 없다.
채드 그린의 구위라면 충분하다고 애런 분 감독은 믿었다. 다만, 그가 예상 못한 변수가 있었다.
‘[리키 헨더슨의 도주가 (5단계/5)로 오릅니다]’
어제의 활약으로 성낙기는 주루 능력 스탯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포심패스트볼 위주의 승부라면 발 빠른 성낙기도 잡을 수 있다는 애런 분 감독의 계획엔 없던 일이다.
채드 그린은 1루로 나간 성낙기에게 연달아 견제구를 던졌다. 견제도 견제지만 리드를 벌린 성낙기를 1루 베이스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채드 그린은 볼넷이 못마땅했다.
‘젠장, 저게 뭐 무섭다고 볼넷으로 내보내나. 키 작은 동양인에 불과한 놈을.’
팡.
“스윙 스트라이크.”
6번 타자, 마그뉴리스 시에라에게 포심패스트볼이 날아들었고 성낙기는 2루로 내달렸다. 반 박자 늦은 스윙으로 포수의 시야를 방해한 시에라는 2루로 가는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쩍 벌렸다.
어어……? 벌써 2루에 다 갔어……!
그랬다. 포수가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송구 동작을 취할 때, 성낙기는 2루에 가까워져 있었다.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동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늘 그랬듯 이 정도의 타이밍이라면 주자를 아웃시킬 확률이 높다. 빠른 공에 이은 물 흐르듯 매끄러운 송구 동작에 정확한 송구만 이루어진다면 주자의 아웃은 당연했다. 지금 이 순간의 상황도 게리 산체스의 경험으로는 분명한 아웃 타이밍이다.
슈욱!
퍽!
송구는 자연 태그에 가까울 정도로 2루 베이스로 붙어 날아갔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러나 양키스의 2루수는 허리를 구부려 공을 받은 뒤, 의미 없이 몸을 일으켰다. 2루수를 바라보던 눈들의 초점이 한순간 흐려졌다.
“게리 산체스, 정확하고 빠른 송구를 던졌습니다만, 성낙기 선수는 이미 베이스를 훔친 뒤입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빠릅니다!”
“저, 저런…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포심패스트볼 타이밍을 마치 슬로우 커브로 만들어 버리는 성낙기예요. 공을 던지는 순간, 2루에 다 갔거든요. 포수의 송구가 한참이나 늦었습니다. 허허… 참, 어이가 없네요.”
“본래 발이 빠른 선수지만 지금의 도루는 믿기 힘듭니다. 저토록 빠른 선수가 있었는가 싶습니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리키 헨더슨 같은 선수가 저런 역량을 보여줬었죠. 마치 그의 재림을 보는 듯하네요.”
마운드의 채드 그린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뭐란 말인가. 볼넷도 모자라 2루 도루를 내주다니. 가슴 저 아래 억눌린 무엇이 슬슬 올라왔다.
채드 그린이 흔들리는 걸 알아챈, 투수 코치 로스차일드가 한차례 마운드를 방문하고 내려갔다. 채드 그린은 시에라를 향해 초구와 같은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시에라는 이번에도 뒤늦게 배트를 휘둘렀고 게리 산체스는 공을 포구한 채, 급히 일어섰다. 그의 눈에 3루로 뛰는 성낙기가 보였다.
***
뉴욕 양키스는 어제 씻기 힘든 수모를 맛봤다.
2년 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었고 지난해 준우승 팀이었다. 비록 마이애미라는 다크호스를 만나 덜미를 잡혔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양키스가 최강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마이애미는 와일드카드를 따내기도 힘든 하위권 팀일 뿐이다. 한 선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렇고 그런 팀이 마이애미였다.
하지만, 그 한 선수가 문제였다. 월드시리즈를 쥐락펴락하며 모든 승리에 관여하더니 우승컵을 가져가 버렸고 이번 시즌 첫 대결이었던 어제는 막강한 양키스 타선을 지워 버렸다.
이에, 애런 분 감독은 지명타자로 나와 또다시 양키스의 덜미를 잡으려는 그 선수를 아예 배제하는 작전을 썼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승부를 피하고 김을 빼는 전술을 택했다. 1루에 묶어둔 뒤, 타자들만 범타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한데, 이 선수는, 아니, 성낙기라는 놈은 2루를 훔친 것도 모자라 3루까지 도루를 감행했다.
“악! 또 뛴다! 송구!”
물론, 잡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는 배터리를 농락하듯 뛰고 또 뛰었다. 그러고는 바로 지금, 2루에 이어 3루를 훔친 뒤, 더그아웃을 향해 주먹을 쥐고 있다.
이 정도는 거뜬하다는 듯 씽긋 웃으며 몸에 묻은 흙을 터는 행동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애런 분 감독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사람 좋은 그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흘러나왔다.
“mother fucker!!”
마운드의 채드 그린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포심패스트볼의 타이밍에 3루에서 버젓이 살아 쪼개고 있는 성낙기를 보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심지어는 눈앞이 흐릿해지고 어지러운 나머지 타자가 둘로 보이는 착시까지 일어났다. 볼 카운트 노볼 투 스트라이크.
채드 그린에게 남은 건 볼카운트가 불리해진 타자를 아웃시켜 두 번의 연속 도루를 무위로 돌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희망이 희망으로만 끝날 때, 인간은 절망한다.
따악.
3구로 던진 슬라이더가 배트에 맞는 소리는 채드 그린의 귀에 천둥처럼 울렸다.
채드 그린은 자신의 뒤를 돌아보는 대신 타자를 보았다. 타자의 표정이 3루의 성낙기처럼 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