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2023 페넌트레이스 2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십시오. 오늘 경기의 미션입니다.]
‘노히트 노런? 그게 뭐 말처럼 쉬운 줄 아나.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걸 오늘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하라고? 웃기네.’
[그 정도의 역량이면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미션을 끝내면 뭐가 남지?’
[당연히 스탯 증가가 있습니다.]
‘무슨 스탯인지 알려줘야 의욕을 갖고 기록을 세우지.’
[이미 스탯은 오를 만큼 올랐기 때문에 쉽게 오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미션을 통해서만 스탯 증가가 가능합니다.]
‘쳇, 이제 완전 짠돌이 행세군. 지난해 포스트 시즌엔 잘도 주더니 말이야.’
[이미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스탯입니다. 갈수록 오르기 힘이 들죠.]
‘무슨 뜻인지 알았어. 하지만 이번 미션은 너무 어려워. 빗맞아도 안타가 되거든.’
성낙기는 미션이 주어지자 약간의 긴장감이 몸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보았다. 지난 시즌 늘 최선을 다해 던져야 했던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톱타자 글레이버 토레스였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나고는 처음이다. 리그 교류전인 인터리그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타자. 4월 한 달 동안 3할 4푼에 7홈런을 때려내며 리딩히터와 슬러거의 양면을 고루 보여준 타자가 그였다. 한마디로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라고 보면 정확하다.
‘글레이버 토레스라면 1회부터 전력투구를 해야겠군. 빗맞아도 워낙 발이 빨라서 내야 안타가 많은 타자.’
성낙기는 글레이버 토레스를 보며 지난해의 월드시리즈를 떠올렸다. 양키스 공격의 첨병인 그를 루상에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 어쩌면 승리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타석의 글레이버 토레스는 월드시리즈의 상대적 빈타를 만회하겠다는 의욕에 차 있는 모습. 알맞은 긴장과 더불어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지 두어 번의 스윙에도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리얼무토를 대신해 성낙기의 전담포수로 나온 채드 왈라치는 초구로 커브를 요구했다.
팡.
“스트라이크.”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글레이버 토레스는 의외의 볼 배합에 멈칫, 하다가 공을 흘려보냈다. 2구 역시 슬라이더를 던져 볼 카운트 0-2를 잡았다. 드랙 실바의 전매특허였던 슬라이더는 타자의 몸 쪽으로 다소 높게 날아오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지면서 뚝 떨어졌다. 바깥쪽에 꽉 찬 데다가 가장 낮은 코스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서는 멀게 느껴지는 공. 사실상, 어렵게 친다고 해도 정타가 나올 수 없는 제구력이었다.
‘연속 변화구를 던지다니. 정면 승부를 즐기던 투수 아니었나?’
그런 생각과 함께 글레이버 토레스가 포수를 슬쩍 본다. 아마도 포수의 볼 배합 때문이라 여긴 듯. 채드 왈라치도 타자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그러고는 성낙기에게 사인을 냈다. 확실히 리얼무토와는 다른 볼 배합. 성낙기는 온전히 채드 왈라치의 사인대로 던질 생각이었다. 리얼무토와 다른 패턴의 볼 배합이 양키스 타자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 지난 월드시리즈는 강 대 강으로 맞서 양키스 타자들을 돌려 세웠기에 굳이 변화구 승부를 할 이유는 없었다. 양키스 타자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 틀림없다. 글레이버 토레스 역시 그런 생각으로 타석에 임했지만 연속으로 느린 변화구를 택한 성낙기였다. 2구만에 머리가 복잡해진 글레이버 토레스에게 3구가 날아들었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향하는 포심패스트볼.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느낌에 글레이버 토레스는 자신 있게 배트를 내밀었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젠장, 이게 뭐야.’
글레이버 토레스는 스윙을 한 후, 미트에 들어간 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했던 탄착점에서 20㎝는 아래에 위치한 공. 성낙기가 던진 구종은 포크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높이로 날아오다가 뚝 떨어져서 포수의 발목 부근에 꽂히는 코스.
“오, 성낙기 투수 3연속 변화구를 던져 글레이버 토레스를 삼진으로 잡아냅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볼 배합입니다.”
“그렇네요. 성낙기 투수가 저처럼 연속으로 변화구를 던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어요. 어쨌든 글레이버 토레스가 허무하게 물러나고 마네요.”
성낙기의 변화구는 2번 타자에게도, 3번 타자로 나온 아론 저지에게도 비슷했다. 2번 타자 역시 삼진으로 잡아낸 성낙기는, 아론 저지에게는 초구로 몸 쪽 높은 볼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한 뒤, 커브와 체인지업을 연속으로 던져 이닝을 끝냈다.
“이제 알 것 같네요. 성낙기 투수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채드 왈라치의 볼 배합이네요. 성낙기 투수는 포수에게 사인을 맡기고 있는 걸로 보이고요.”
“아, 그렇습니까. 뉴욕 양키스 타자들이 강한 승부를 예상했다가 변화구에 대응하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최대한 짧은 궤적의 스윙을 보이는 양키스 타자들인데요. 아마도 100마일에 가까운 포심패스트볼 맞춤형 스윙일 겁니다만, 저런 변화구를 던지니 속수무책이죠. 저런 투수에게는 하나만 노리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다면 1회 초는 양키스 벤치의 미스라고 봐도 될까요?”
“아니죠. 이게 야구입니다. 계속 변화구로 승부한다면 다른 전략을 들고 나오겠죠.”
***
1회 초의 쾌조의 스타트를 발판으로 성낙기는 3회까지는 변화구 위주의 볼 배합으로 가다가 4회부터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강하게 던지기 시작한 것. 포심패스트볼은 100마일이 찍혔고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을 적절하게 구사했다. 성낙기는 볼넷을 모르는 사람처럼 타자와의 승부를 피하지 않았고 타자가 빠른 공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느린 변화구로 타이밍을 뺏었다. 상대 투수 루이스 시크릿 역시 무실점 호투를 이어가는 팽팽한 투수전.
-근래 들어서 이런 경기는 처음 본다. 양 팀 타자들이 전혀 감을 못 잡네.
-후, 오늘 같은 날 성낙기를 상대로 하나 날려줘야 루이스가 승리투수가 될 텐데.
-도저히 안 돼. 올해도 양키스는 성낙기의 밥이야. 7회까지 안타 하나를 못 친다는 게 말이 돼?
-스크릿은?
-시크릿은 3안타를 허용했지. 이대로 가면 퍼펙트야. 누군가는 해줘야 해. 번트라도 대든지.
-번트? 될까? 성낙기 수비력이 장난 아닌데.
-죽더라도 할 건 해야지. 무기력하게 당할 순 없어.
-저 투수를 공략 못 하면 올해 월드시리즈에서도 가망 없어.
-이봐, 시즌은 길어. 성낙기도 사람이지.
-쟤는 무쇠팔이니까 하는 얘기야. 도무지 지치는 법도 없고 괴물도 저런 괴물이 없어.
8회 초에 선두타자로 나온 지안카를로 스탠튼. 그 역시 3할이 넘는 타율에 4월 한 달 동안 9홈런을 몰아치는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거포이면서 5도루까지 기록 중인 선수. 슬러거이면서 도루 능력까지 갖춘 드문 유형의 선수가 바로 그였다. 앞선 두 타석에선 삼진과 투수 땅볼을 쳤을 뿐이다. 빗맞은 채로 3루로 굴러가는 것을 성낙기가 가까스로 낚아채어 2루로 송구했고 간발의 차로 아웃, 성낙기로서는 하마터면 미션이 깨질 뻔한 장면이었다. 채드 왈라치의 사인은 커브. 성낙기는 고개를 젓고 자신이 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탁.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에 번트를 대는 지안카를로. 양키스의 4번 타자치고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노히트 노런이나 퍼펙트의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한 나름의 선택이었다. 타구는 까다로웠다. 강속구에 제대로 번트를 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지안카를로는 그걸 해냈고 코스마저 정확했다. 마운드와 파울 선상 사이를 가르는 타구. 이런 경우, 1루수가 전진하여 공을 잡고 투수가 1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루수는 전진수비를 하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뒤로 물러나 있었다. 강타자의 강한 타구에 대비한 위치 선정이었는데 지안카를로는 투수가 잡기엔 타구가 빠르고 1루수가 잡기엔 소모 시간이 긴 절묘한 번트 타구를 굴렸다.
“앗, 지안카를로 번트를 시도합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세이프티 번트! 공이 2루수가 서 있는 방향으로 굴러갑니다.”
“아, 저런 번트라니.”
“1루수가 전진합니다. 1루로 전력질주를 하는 지안카를로, 아, 성낙기 투수가 1루수를 향해 손을 뻗으며 타구를 빠르게 쫒아갑니다. 전진하다가 1루 베이스로 들어가는 브라이언 앤더슨!”
성낙기는 캐스터의 말대로 공을 던진 후, 타구를 좆았다. 1루수 브라이언 앤더슨이 타구를 잡고 자신이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는 그림으로는 무조건 세이프다.
[리키 헨더슨의 도주 능력이 활성화 됩니다.]
[짐 캇의 수비력이 활성화됩니다.]
성낙기는 굴러가는 공을 뒤쪽으로 비스듬히 좆으며 지안카를로를 보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전력을 다하여 달려오는 모습에 마음이 급해졌다. 짧고 얕은 바운드를 만들어내며 달아나는 타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라이너 성 타구나 바운드가 튼 타구는 상대적으로 거리와 타이밍이 맞으면 잡을 수 있지만 이건 달랐다.
촤아아아-
거의 글러브로 땅을 긁으며 슬라이딩을 하는데다가 땅을 구르다시피하는 타구가 정확하게 글러브에 들어간다는 보장도 없다. 글러브에 이어 팔꿈치와 겨드랑이와 골반이 땅에 닿아 끌리는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언가 기분이 좋지는 않은,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랄까. 지금은 기분 따위 제쳐두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타자를 잡아야 할 때였다.
“아, 글러브에 들어갔나요!”
성낙기는 글러브를 최대한 뻗어 타구를 캐치한 뒤, 누운 채로 글러브에서 공을 빼냈다. 지안카를로는 거의 1루에 도달하고 있었다. 엎드린 채로 공을 잡은 성낙기가 1루수의 글러브를 향해 송구했다. 퍽, 하고 글러브에 공이 들어가 박히는 소리, 그와 동시에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발도 1루 베이스를 밟고 지나갔다.
“세잎입니까, 아웃입니까!”
캐스터와 해설자도 헷갈려 하는 사이, 관중들은 웅성거렸고 1루심은 머뭇거리다가 양팔을 옆으로 폈다. 양키스 팬들의 함성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알렉스 비토 감독이 더그아웃에서 나와 챌린지를 신청했다. 비디오 판독이 계속되는 도중에 경기장 전광판엔 슬로비디오로 1루에서의 접전을 중계했다. 관중들은 세이프와 아웃도 궁금해했지만, 성낙기의 슬라이딩 캐치와 송구를 보며 입을 벌렸다. 빠른 타구를 따라가 슬라이딩으로 잡아낸 수비 동작은 진기명기에나 나올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저건 세이프야, 원래 같은 타이밍이면 세이프를 주게 되어 있어.”
“친구, 넌 양키스 팬이니 그렇게 말하겠지. 난 아무 편도 아니지만 공이 더 빨랐어.”
“입장료 내준 게 누군데 그딴 소릴 하고 있어. 내 친구 맞아?”
“아니, 난 있는 그대로를…….”
“이런 식이면 야구장에 같이 못 와. 있는 그대로면 누가 야구를 봐, 안 그래? 그것도 모르고 경기장에 온 거야? 여긴 양키스의 홈이라구.”
“아, 알았어. 미안.”
누군가는 친구의 우정이 금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양키스에겐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껏 무실점을 하고 있는 루이스 시크릿과 성낙기의 대결도 그렇지만, 이 주자가 나가지 못하면 9회까지 무조건 던질 것이고 하위타선에서 성낙기를 공략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러다 퍼펙트당하겠어.’
몇몇 양키스 선수들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8회였고 가장 기대되는 타자인 지안카를로 타순이었다. 여기서 아웃이면 양키스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이윽고 4심이 모여 의논을 마친 뒤, 주심이 배터박스로 돌아오며 판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