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시범 경기 2
3월 2일 시범 경기가 열리는 날. 플로리다 연습 구장엔 마이애미 말린스의 팬들이 대거 몰렸다. 시범 경기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일정이 잡혔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마이너리그 선수들을 비롯, 66명이라는 대규모 시범 경기 팀을 꾸렸다. 그야말로 모든 자원을 총동원시켜 시범 경기를 치를 예정인데 기량이 출중한 신예들을 테스트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성낙기나, 호세 우레나 같은 완전 검증된 주전 선수들은 느긋하게 일정을 소화하면 된다. 시범 경기에서 잘 던지지 못하더라도 25인 로스터에서 빠질 일은 없으므로.
그에 비해,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유망주나 주전의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선수, 새로 가세한 연준후 같은 선수들은 시범 경기가 곧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단장이나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시범 경기라도 실전처럼 임해야 하는 이유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연준후의 기량을 궁금해했고 그런 궁금증은 시범 경기 첫 경기 선발이라는 이례적인 라인업을 만들어냈다. 시범 경기를 중계하는 중계진들도 의외로 여길만한 투수 로테이션.
“알렉스 비토 감독이 의외의 선발 라인업을 꾸렸군요. 시범 경기 첫 경기라는 상징성 때문에 보통은 1, 2 선발을 내는 것인데요. 알렉스 비토 감독은 KBO 출신의 연준후 투수를 바로 투입하네요.”
“하하, 역시 독특한 감독입니다. 상징성 따위는 틀에 얽매인 구태라는 거겠죠. 거기에 연준후라는 투수에 대한 의문도 작용했을 겁니다. 상당한 지출을 감수하면서 데려온 KBO 출신 투수거든요.”
“맞습니다. 금액이 상당하죠?”
“그렇죠. 4년 2,800만 불이면 적은 돈이 아니죠. 그만큼 이 투수의 기량을 확신한다는 말도 됩니다. 더구나 메이저리그에서 검증된 선수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모험이기도 한데 성낙기 투수의 성공이 계약에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중계진의 지적대로 연준후의 시범 경기 첫 선발은 의외였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만 연준후가 첫 경기의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보고 싶은 알렉스 비토 감독. 연준후는 모두의 예상대로 긴장했다. 투수진은 별로지만 타선만큼은 막강하다는 평을 받는 휴스턴을 상대로 얼마나 통할지 감이 잡히지 않기에 더 그랬다.
“선배, 동계 훈련을 하는 내내 이 순간을 기다려 왔죠? 자신 있게 던지세요.”
“후우, 관중이 많이 왔네. 좋아 까지껏 최선을 다해 던져봐야지.”
연준후는 마운드에 올라 첫 타자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초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에 홈런을 허용했다. 시범 경기라지만 첫 경기에서 초구를 얻어맞은 연준후는 로진백을 만지며 무너지려는 멘탈을 다잡았다.
‘제기랄,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괴물이라더니 정말이었네.’
초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은 92마일의 상당한 스피드였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쳐낸다. KBO였다면 148㎞나 되는 공에 타자의 배트 스피드가 밀렸을 것이다. 보통은 파울이 되는 공이었는데 첫 타자는 마치 배팅 볼을 치는 듯 가볍게 담장을 넘겼다.
“초구에 홈런을 맞는 연준후입니다. 구속은 나쁘지 않았는데 제구가 살짝 가운데로 몰린 공이었습니다.”
“저 정도의 공 스피드로 제구가 되지 않으면 타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죠.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는 길은 빨리, 더 빨리, 공을 던지거나 정확한 코너 샷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선수의 포크볼이 일품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써보기도 전에 일격을 당했습니다. 멘탈이 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흔들리겠죠. 아시아에서 넘어온 투수들은 메이저리그의 힘에 놀라게 되거든요. 맞으면 넘어가니까요. 특히나 포심패스트볼이 먹히지 않으면 포크볼도 위력을 잃게 되죠.”
“아, 그런가요?”
“조금 뒤에 다시 말씀드리죠.”
연준후는 다음 타자를 맞아 전력 투구를 한 결과 모두 범타로 처리하면서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았다. 2, 3, 4로 이어지는 휴스턴의 타선을 잘 막아낸 결과는 연준후가 결코 만만한 투수가 아니라는 점을 상대 타선에 각인시켰다.
연준후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역시 메이저리그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4번 타자가 친 타구는 커브볼이었는데 허리가 빠진 채로 걷어 올린 바깥쪽 공이 워닝트랙까지 날아갈 만큼 KBO와는 타구의 질이 달랐다.
“연준후 투수, 실점 없이 무사히 1회를 마쳤습니다. 홈런을 허용했지만 가능성을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음… 더 두고 봐야겠지만 포크볼로 스윙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군요. 포심패스트볼은 94마일까지 나왔고 약간 투심성으로 꺾여 들어오는 궤적을 보였어요. 직구가 먹히면서 포크볼도 먹혀 들어갔죠.”
“포심패스트볼 말이죠?”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포심패스트볼이 밋밋하면 포크볼도 쓸모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력적이지 않은 포심패스트볼을 투수는 함부로 던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결국 포크볼 위주로 타자를 유인해야 하는데 타자들이 속지 않아요. 즉, 포심패스트볼이 위력적이어야 타자 역시 포크 볼을 골라내지 못합니다.”
“좀 어렵게 들립니다만,”
“그래요? 포심패스트볼이 느리고 밋밋하면 타자들은 변화구에 타이밍을 잡고도 포심패스트볼의 공략이 가능하죠. 변화구와 포심을 모두 때려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투수가 견디기 힘들다는 얘깁니다.”
“아, 역시 야구는 생각보다 힘든 스포츠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연준후는 4회까지 68구를 던지며 2실점, 좋은 투구 내용을 보이며 첫 등판을 마쳤다. 어떻게 보면 퀄리티스타트에 가까운 성적인데 연준후는 못내 아쉬운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1회에 느닷없는 홈런은 그렇다 쳐도 4회에 연속 2루타로 허용한 점수가 못내 아쉬웠다. 4이닝 5안타, 1볼넷, 2실점이 연준후의 첫 등판 성적이었다.
“연준후, 첫 등판 치곤 잘한 거야.”
셜리번 투수코치가 연준후의 어깨를 툭, 치며 격려를 한 뒤에도 좀처럼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연준후 다음으로 나온 마이애미 투수들은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불펜 조 투수들이었는데 5회부터 1점씩을 내주더니 7회에 대거 5실점을 하며 무너졌다.
1.5군으로 구성된 마이애미 타선도 터지지 않아 9회까지 3점을 내는데 그쳤다. 3 대 10, 마이애미의 패배. 불펜 투수들이 털리는 것을 본 연준후는 그나마 자신이 잘 던졌다고 느꼈는지 경기 후엔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경우인데 경쟁을 하는 선수들은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고 비교 우위에 서면 위안을 얻는다.
다음 날의 선발은 딕 에일이었는데 5이닝 무실점으로 기대 이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그리고 그 경기엔 필승조 불펜들이 모두 투입되어 7 대 0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셧아웃시켰다. 타자들은 전원 안타를 터뜨리며 타격 컨디션을 조절했고 투수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강속구가 주무기인 딕 에일은 시범 경기임에도 97마일을 던져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부터 100마일을 던지던 딕 에일이었지만 들쭉날쭉한 제구가 약점이었다. 작년에도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긴 했지만 안정된 피칭이라고 하기엔 미흡했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선 코너르 찌르는 포심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조합이 위력적이었다. 휴스턴의 타선이 단 2안타로 묶일 만큼 딕 에일의 공은 까다롭고 비범했다.
성낙기의 등판은 시범 경기가 시작된 지 5일째에 이루어졌는데 상대 투수는 공교롭게도 워싱턴 내셔널스의 필 서든이었다.
“필, 오랜만이야. 나 알겠어?”
“오, 성낙기. 당연히 알지. 우리 삼호슈퍼스타즈에 같이 있었잖아.”
“메이저리그에 돌아온 걸 환영해.”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내가 잘 던져야 살아남는 거지.”
“그 정도 연봉이면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쓰겠다는 거니까 긴장하지 말고 실력을 보여줘.”
“그래, 고마워.”
필 서든은 95마일의 포심패스트볼을 뿌리며 5회까지 1실점으로 선방했다. 4회 가렛 쿠퍼의 솔로 홈런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마이애미가 체면을 구길 만큼 잘 던졌다. 처음 KBO에 입단할 때보다 제구력이 많이 좋아졌고 주무기로 쓰는 슬라이더의 각도 날카로워졌다. 5이닝 동안 맞은 안타도 산발 4안타로 첫 시범 경기 등판 치고는 아주 좋은 성적이다.
성낙기 역시 투수코치의 배려로 5이닝만을 던졌는데 워싱턴 타자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빗맞은 안타가 2개 있었을 뿐이다. 삼진은 무려 8개에 달했다. 전력 피칭 없이 최고 구속 96마일을 던졌는데도 팔색조 변화구의 조합에 워싱턴 타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1회에 운 좋게 텍사스 성 안타를 만들어낸 브라이스 하퍼는 4회에 삼구 삼진을 당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후우, 또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건가? 저런 공을 던지면 열에 한 번도 안타를 생산하기 힘들어.’
전 같으면 전의를 불태울 브라이스 하퍼마저 성낙기의 공을 상대해 보고는 낙담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월드시리즈의 미친 모습을 본 뒤라서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투수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타석에 설 때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투수, 그게 바로 성낙기였다.
***
어느덧 시범 경기 막바지였다. 성낙기의 등판은 더 이상 없었다. 더 던져봐야 무의미하기도 했다. 시범 경기 내내 15이닝을 던지며 6안타 무실점으로 상대 타자들을 농락한 투수에게 실전 연습은 무의미했다. 실전만이 그에게 맞는 옵션이었다.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와 해설자는 2023년의 성적을 예측했다.
“시범 경기가 끝나가는데요. 시범 경기지만 양키스는 작년보다 업그레이드된 전력을 뽐냈습니다. 특히 트리플에서 뛰던 유망주들이 시범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죠?”
“맞아요. 도밍고 저만이나 스트럭스 같은 투수들은 100마일에 가까운 강속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마운드 운영 능력이 출중했죠. 지금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올해 좋은 성적이 기대됩니다.”
“25인 로스터에 들어야겠죠.”
“그건 감독의 권한이죠. 제 생각으로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작년과 같은 전력이라면 마이애미에게 또 당할 수 있죠.”
“성낙기 투수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올해는 성낙기 투수도 고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메이저리그 팀들이 그 투수를 연구할 것이기 때문이죠. 컨택 위주의 배팅을 하면서 성낙기 투수를 지치게 만들 공산이 큽니다. 만약, 모든 팀들이 그런 전략을 들고 나온다면 성낙기 투수로서도 힘든 시즌을 보낼 수밖에 없는 거죠.”
“듣고 보니 그렇겠습니다. 모든 타자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9회는커녕 7회를 채우기도 벅찰 테니까요. 최대한 일찍 성낙기 투수를 마운드에서 내리고 불펜을 공략하는 방식을 말씀하시는 거죠?”
“바로 그거죠. 불펜은 어차피 무적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승부를 걸 팀들이 많아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낙기 투수가 고전하게 될 거라는 거네요.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2023년의 페넌트레이스가 기대됩니다.”
그리고 시범 경기가 끝났다. 성낙기는 3월 30일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나서고 되었고 상대 팀은 뉴욕 메츠였다. 상대 투수 또한 에이스 중의 에이스인 제이콥 디그롬. 개막전 승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 등판에 1승을 챙기고 시작하는 시즌과 그렇지 않은 시즌은 투수의 사기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개막전 장소는 말린스 파크로 마이애미의 홈구장이다. 1회 초, 성낙기는 매진을 기록한 홈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