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177화 시범 경기 1
직설적인 김아경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말투나 반응이 에이전트가 선수를 관리하는 측면보다는 연인이 다른 여자를 보고 질투하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 따지듯 말하는 것도 그랬고 성낙기와 여자를 번갈아보며 흘기는 눈초리도 그랬다.
엘리나 샤먼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뒤였지만, 김아경의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 그게 아니고… 팬이에요, 팬. 알죠?”
“알긴 뭘 알아요. 일반적인 팬이 바닷가에서 서핑을 하자 그러나요?”
“하하, 자기 집에 초대하는 사람도 있고 데이트하자는 사람도 있는 걸요.”
“뭐, 뭐라구요? 휴우, 선수가 얼마나 쉬워 보였으면 그럴까. 그래서 좋던가요?”
“아, 아닙니다.”
그제야 성낙기는 김아경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당황했다. 그저 한눈파는 일 없도록 조언하려는 줄로만 알았는데 반응이 묘하다. 아까의 밝고 명랑한 모습은 어느새 쌈닭처럼 변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어서 더 당황스러웠던 성낙기가 말을 더듬었다. 고기를 굽던 연준후도 멈칫, 하고는 김아경과 성낙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아경도 좌중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굳은 표정을 풀고 아까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 말은 팬들에게 끌려다녀서 좋을 게 없다는 거예요. 성낙기 선수는 프로잖아요. 하하.”
“네… 하아, 그렇죠? 꼭 참고할게요.”
“고마워요. 역시 성낙기 선수가 이러니 팬들이 좋아하겠죠.”
은근슬쩍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는 김아경이었지만, 모두는 보았다. 엘리나 샤먼이 다가올 때부터 느꼈던 심상치 않던 김아경의 얼굴과 몸짓, 따지듯 달려드는 말투는 그들이 생각하는 에이전트와 선수의 관계를 넘어서 있었다. 김아경은 자신의 마음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과장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
KBO에서 넘어온 선수들의 갈 길이 정해졌다. 최대어를 평가받던 에이 빌드런은 뉴욕 양키스에 둥지를 틀었고 필 서든은 워싱턴 내셔널스로 이적했다. 마크 트웰은 LA다저스였다. 마이애미도 연준후를 잡았지만, 에이 빌드런이나 필 서든이 라이벌 팀으로 갔다는 점으로 보면 전력 보강은 비슷했다.
연준후는 에이 빌드런과 비슷한 액수였고 마크 트웰이나 필 서든은 그 아래였다. 한국에서 건너갈 때, 연준후를 4, 5번째로 보던 전문가들의 예상은 확실히 빗나갔다.
연준후의 계약이 이례적이고 의외라며 놀랍다는 반응이 주였다. 어쨌든 마크 트웰을 제외하고는 경쟁 팀인 워싱턴과 뉴욕 양키스에 터를 잡았기 때문에 마이애미 말린스만 전력 보강이 된 것은 아니다.
물론, 실전에서 어떤 선수가 가장 나은 활약을 할지도 미지수였다. 뉴욕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준우승이 뼈아팠는지 에이 빌드런 이외에도 여러 유망주들을 긁어모았다. 벌써부터 내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모양새. 그에 비해 마이애미는 연준후를 영입하고는 더 이상 계획이 없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마이너리그의 유망주를 키우겠다는 뜻을 구단에 밝혔다.
성낙기는 몇몇 광고에 출연하며 바쁜 날들을 보냈다. 작년에 채드 왈라치와 많은 훈련을 했던 성낙기는 이제 거의 모든 구종이 맥시멈에 가까울 만큼 단계가 올랐다. 채드 왈라치는 성낙기 대신 연준후와 함께 훈련을 하며 포스트시즌에 주전으로 나서지 못한 기량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시즌 중에 성낙기가 마운드에 설 때는 자주 포수 자리를 지키기도 했던 채드 왈라치. 리얼무토와 함께할 때보다 성적이 괜찮았기 때문에 자신이 중용되었다고 믿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성낙기와 함께한 동계 훈련이 큰 도움이 된 터였다. 성낙기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같이 훈련할 사람이 없어진 채드 왈라치는,
“이봐, 연준후? 나랑 훈련하지 않을래? 지난해엔 성낙기와 함께했었거든.”
“고마워. 그럼, 잘 부탁해.”
채드 왈라치는 연준후가 만만찮은 연봉 계약으로 입단한 사실을 알았고, 그건 곧 다음 시즌에 선발 후보라는 것도 알았다. 일찌감치 호흡을 맞춰서 내년 시즌엔 연준후 전담포수로 뛰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성낙기에 연준후, 두 사람의 선발 때 자신이 포수로 나선다면 라인업에 포함되는 날들이 월등히 많아질 것이다.
***
오늘은 성낙기가 채드 왈라치, 연준후와 함께 훈련하기로 한 날이다. 연준후는 거의 한 달 정도를 채드 왈라치와 손을 맞췄다. 아직 유망주 티를 벗지 못한 딕 에일도 거기에 가세했다. 그러니까 이건, 팀 훈련 외에 자발적으로 하는 거였다.
KBO와 다른 점은 합동 훈련 기간은 짧은 반면, 자율적인 훈련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주전에 비해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들은 이런 시간을 통해 실력을 쌓아야만 한다.
팡.
“오우, 공 좋은데요?”
“하하, 성낙기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100마일 투수 앞에서 부끄러워 못 던지겠네.”
연준후에게 성낙기가 나타나 말을 걸었고 연준후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딕 에일은 도밍게스라는 멕시코 출신의 사설코치와 훈련 중이었다. 이번엔 풀타임 선발이 되기 위해 땀을 흘리며 투구에 몰두했다.
“딕 에일, 많이 좋아졌는데? 구위가 상당해 보여.”
“후욱, 아직 성낙기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참, 낙기야. 너 한번 던져봐라. 월드시리즈에서 던지는 모습만 봤지, 직접 본 적은 거의 없어서 말이야.”
“그럴까요?”
성낙기는 연준후의 제의에 선선히 응했다. 몇 구를 천천히 던지더니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 채드 왈라치의 미트에서 팡,팡 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마다 연준후는 입을 벌리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성낙기가 가볍게 던지는 공은 연준후가 보기에도 150㎞가 넘어 보였다. 비시즌에, 그것도 몸도 제대로 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정도의 스피드를 내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도 거의 없다. 그런데 성낙기는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 손쉽게 그런 스피드에 도달했다. 성낙기는 연준후에게 다시 마운드를 넘겨준 뒤 투구를 관찰했다.
“낙기야, 내 공 좀 봐줘. 네가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한다. 메이저리그에서 통하지 않는 구종을 미리 가다듬어야 선발을 맡을 수 있겠지.”
“제가 선배 공을요?”
“그래, 이제 넌 내 후배가 아니야. 여기선 네가 선배고 하늘이다. 냉정한 평가를 해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름대로 말씀드릴게요.”
팡.
팡.
“포심패스트볼의 구위는 괜찮네요. 다만, 볼 끝이 밋밋한 감이 있어요. 날이 풀리면서 스피드가 살아나면 해결될 거라고 봅니다.”
“응, 그럼 다음 공도 부탁한다.”
팡.
팡.
“슬라이더네요. 제구가 되는 편인데 날카롭지는 않습니다. 바깥쪽으로 휘면서 상하로 움직임이 더 많으면 좋겠어요.”
“고맙다. 슬라이더 그립을 더 연구해야겠어. 나도 슬라이더에 고민이 많았거든.”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는데 성낙기가 연준후에게 엄지를 치켜든 구종은 포크볼이었다. 직구 구위나 슬라이더, 커브 등은 예리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포크볼만은 특별했다. 포심패스트볼처럼 오다가 급격히 꺾이기 때문에 타자 입장에선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헷갈려 할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KBO에서도 포크볼 하나로 이름을 떨친 투수다. 다만, 포심패스트볼의 구위와 제구가 되는 느린 변화구 하나쯤은 있어야 마운드에서 위력적일 것이다. 성낙기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전달했고 연준후는 성낙기의 생각을 잘 받아들였다.
‘월드시리즈 우승 투수가 하는 말이니 무조건 맞다고 봐야 해.’
연준후의 성낙기에 대한 생각은 월드시리즈 전과 후로 나뉠 만큼 극명했다. 월드시리즈 전엔 곧잘 던지는 후배, 또는 자신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투수였는데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걸 의외로 생각했다면 월드시리즈에서의 환상투를 보고 난 후엔 감히 견주기조차 힘든 투수라는 인식이 머리에 박혔다. 그런 성낙기가 자신의 투구를 보고 조언을 해주는 것을 연준후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
2023년의 새해가 밝았고 시범 경기 일정은 3월 2일부터 시작이었다. 마이애미 말린스는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그레이프 푸르츠리그에 속해 워싱턴 내셔널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등과 서서히 개막전을 향한 예열에 돌입한다. 성낙기는 겨울 내내 이어진 동계 훈련을 통해 몇몇 구종의 단계를 끌어올렸다.
[포심의 제구력이 97으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96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98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96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94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94로 오릅니다]
공의 스피드는 그대로였지만 특히 제구력 부분이 향상됐다. 포심패스트볼의 제구력은 6분할을 넘어설 만큼 정교해졌고 상대적으로 약했던 투심패스트볼과 포크볼의 제구력도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다.
연준후 역시 처음 메이저리그에 발을 디딜 때보다 슬라이더의 각이 예리해졌고 포심패스트볼의 볼 끝 또한 투심을 가미한 뒤로 변화가 심해졌다. 연준후는 프로에 데뷔한 후, 이토록 열심히 던진 적은 없었다면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동계훈련의 성과를 만족해했다.
팡.
“선배, 공에 힘이 넘치는데요? 시범 경기 앞두고 아주 좋은 징조예요.”
“고맙다. 너랑 훈련한 게 큰 도움이 되었어. KBO에서도 투심성 포심패스트볼을 던지긴 했는데 동계 훈련으로 제구력이 많이 좋아진 걸 느껴.”
“그렇죠. 결국은 제구력이라고 봐요. 제구 안 된 100마일보다는 제구 된 90마일이 타자에게는 더 까다롭죠.”
“시범 경기에서 성적이 좀 나야 선발을 맡게 될 것 같아. 사실 무척 궁금하다. 내 공이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얼마나 통할지 말이야.”
“저도 처음엔 그랬죠. 공도 빠르지 않았었거든요. 하지만 첫 해에 어느 정도 먹히는 걸 알고는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선배도 이제 시작입니다.”
“시범 경기가 빨리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붙어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거든.”
2월 15일, 알렉스 비토 감독은 선수단을 소집했다. 겨우내 자율적으로 훈련한 선수들의 기량도 점검하고 시범 경기 일정에 맞춰 팀워크를 다져야 할 시기다. 자율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몸을 만들어오지 않는 선수들은 도태된다. 프로 선수라면 당연히 스스로 해야 할 몫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다. 한 해 잘한 루키가 2년차 징크스에 시달리는 이유도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했다간 투수들의 견제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약점에 그대로 노출된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던지던 구종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지 않으면 자신의 공에 익숙해진 타자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자, 오늘부터 전체 훈련이다. 작년에 거둔 좋은 성과는 작년의 일일 뿐이다. 올해는 또 다른 시작이야. 모두들 부상 조심하고 몸을 만든다는 기분으로 훈련에 임해주면 좋겠다. 건강한 여러분이 있는 한, 올해 역시 마이애미 말린스의 해가 될 것이다. 파이팅.”
“파이팅!”
선수들은 더그아웃 앞에 모여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을 들으면서 2023년 페넌트레이스의 대장정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