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스토브리그 3
단장이 성낙기를 따로 찾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금까지는 훈련장이나 경기 전에 더그아웃에 나타나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근엔 챔피언십시리즈 기간에 어깨가 걱정되어 따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단장실에 들어가자 오스틴 단장은 일어서서 서성거리는 중이었다.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생기면 가만있지 못하는 그의 버릇이다. 성낙기에게 의자를 권하며 자신은 커피를 내왔다. 그러면서 자신도 반대편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KBO 선수들이 mlb에 건너온 건 알고 있나?”
“잘 알죠. 여러 명이 오다 보니 무척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에겐 반가운 얼굴들이겠지. 같이 생활한 친구도 있나?”
“생활이라면 글쎄요, 필 서든은 같은 팀이었고 연준후나 이강천 선배는 WBC에서 합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요?”
“얼마나 잘 아는지 물어본 거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보게. 이건 가정인데 말이야, 만약 자네가 단장이라면 KBO에서 건너온 선수 중에서 누구를 영입하겠나.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줘.”
“하아, 제에겐 가슴 벅찬 소식인데요?”
“아, 아니. 가정일 뿐이라니까. 아직 관심만 두는 단계이니 큰 기대는 금물일세.”
“어쨌든요. KBO출신에 관심을 두시다니, 의외여서요.”
“아직 답을 하지 않았어.”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성낙기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뜸을 들였다. 풀리지 않는 숙제를 풀 듯 인상을 쓰기도 했고, 고개를 가로젓기도 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굳힌 듯 오스틴 단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말할 준비가 끝났나 보군.”
“에이빌드런과 연준후입니다.”
“오, 그래? 하지만 우리 팀은 둘을 한꺼번에 영입할 빅 마켓이 아니지. 자네가 단장이라면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연준후입니다.”
“…왜지? 그 선수는 현재 KBO에서 넘어온 선수 중에서 서너 번째로 정리되는 분위기인데 자넨 가장 앞자리에 놓는단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스틴 단장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알렉스 비토 감독과 셜리번 코치와 합을 맞춘 것 같지 않은가.
“혹, 이런 대화를 에이전트나 코칭스태프와 최근에 나눈 적이 있었나?”
“전혀요.”
“이상하군. 알렉스 비토 감독의 의중도 자네와 같았어.”
“아, 그런가요? 감독님이 연준후 선배를 생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자네 이야기를 들을 차례군. 어떤 점에서 그 선수가 마이애미에 필요한 거지?”
“첫째는 멘탈이 강하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유형입니다. 두 번째는 변화구가 일품입니다. 포크볼은 mlb에 최적화된 무기인 데다가 슬라이더 각이 무척 예리하죠. 기다리는 유형이 많은 KBO에선 다소 고전한 측면이 있지만 승부를 즐기는 mlb에선 오히려 좋은 무기가 될 겁니다. 포심패스트볼도 수준급 스피드를 지녔고요.”
“이거, 이거… 마치 한 사람에게 듣는 듯, 같은 의견이군. 만약 그렇다면 다른 팀도 연준후의 장점을 파악할 것이 틀림없어. 자넨, 참. 에이전트를 잘 뒀어. 특히 그 여자 말이야. 강한 설득력을 가졌어.”
“김아경 씨, 말씀이군요. 후후. 아마 그럴 겁니다.”
“가감 없이 속내를 말해줘서 고맙네. 참고할 만한 정보였어.”
‘이건 숫제 지들끼리 짠 것 같지 않은가. 에이전트, 감독, 성낙기의 의견이 모두 일치했어. 혹, 김아경의 농간은 아니겠지.’
오스틴 단장은 성낙기를 보내놓고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의견이 이렇게 일치하기도 드물 터, 오스틴 단장은 조만간 김아경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연준후에 대한 계약은 김아경이 최초 주장한 3,200만 불에서 다소 삭감된 2,800만 불에서 결정되었다. 숙소로 지낼 아파트와 통역에 옵션도 붙었는데 175이닝 300만 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이애미로서는 큰 계약. 성낙기에게 워낙 많은 돈을 써서 평소의 예산을 넘어선 데 이어, 연준후의 계약은 적지 않은 출혈이다.
하지만 입장 수입 등, 월드 시리즈 우승의 여파로 벌어들인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이로써 연준후는 마이애미 말린스의 선발로 영입이 결정됐고, 정진수와 김아경은 단 두 건의 계약만으로 에이전트 계에 이름을 알렸다.
상상 이상의 계약을 따내는 에이전트. 성낙기는 말할 것도 없고 연준후 역시 이름값에 비하면 대박 계약이었다. 계약이 성사되고 연준후는 마이애미 마린스의 훈련에 바로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다음 날 곧바로 마이애미의 훈련장에 나타났다.
코칭 스태프 및 선수들과 간단한 상견례를 마치고 성낙기와 오랜만에 해후했다.
“우아아, 선배님이 마이애미에 오실 줄은 몰랐네요. 잘 오셨습니다.”
“같은 팀이 되어서 반갑다. 월드 시리즈 엄청나던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 하하.”
“에이, 별말씀을요.”
연준후는 불펜으로 가서 몸을 풀다가 채드 왈라치를 앉혀두고 연습 투구를 하기 시작했다. 공을 던질 때마다 마이애미의 투수들이 추임새를 넣어준다. 한국 시리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구속은 93마일이나 나왔다.
특히 포크볼을 던질 땐, 뚝 떨어지는 각도에 모두가 감탄사를 흘렸다.
“연준후? 포크볼이 아주 좋아.”
“땡큐.”
채드 왈라치가 연준후에게 칭찬을 건네자 연준후가 화답했다. 훈련이 끝나고 성낙기는 연준후와 함께 코리안 바비큐 식당에 갔다. 정진수, 김아경과 함께하는 자리, 그러고 보면 넷은 졸지에 끈끈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연준후와는 같은 에이전트 소속이 되었고, 정진수와 김아경 역시 자신들이 관리하는 선수가 두 명으로 늘어난 것에 고무된 얼굴. 김아경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연준후 선수, 축하드려요. 자, 건배해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준후는 김아경이 어려운지 말을 깍듯하게 했다. 알고 보면 한두 살 위일 텐데, 그가 아는 김아경은 워낙 거물이다.
옵저버 형태로 자신의 계약에 관여했지만, 선수에 관한 지식이나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사실상 계약 조건을 한 단계 격상시켜 버렸다는 걸 안다.
루키 수준의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던 자신을 준척급으로 자리매김 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을 연준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넷이 모인 술자리는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하나였던 에이전트 소속 성낙기는 월드시리즈를 주무르다시피 했고 팀에 우승 반지를 선사했다. 거기에 연준후라는 잠재력이 풍부한 투수까지 얻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두 선수가 마이애미 말린스에 계시니 전 앞으로 더 자주 올게요.”
“하하, 그래 주세요. 팀장님.”
김아경의 말에 성낙기가 유쾌하게 웃었다. 호칭이 좀 애매했다. 둘이 있을 땐, 아경 씨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여럿이 있는 상황에선 개인적인 호칭은 삼가야 한다.
성낙기가 김아경에게 팀장님이라 부른 이유였다. 삼호슈파스타즈 2군에 있을 때 자주 불렀던 호칭이다. 성낙기의 웃음을 본 김아경이 따라 웃으며 눈을 찡긋 했다.
“이강천 선배는 어떻게 되는가요?”
“글쎄요, 에이스라는 에이전트사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양인데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는 모양이에요. 뭐, 에이빌드런이나 마크 트웰, 필 서든 같은 선수들은 여러 군데서 입질이 오는 것 같고요.”
성낙기의 물음에 김아경이 답했다. 두 사람이 친하다 보니 대화도 둘이 주도하는 모양새다. 그때, 정진수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외국인 선수들이 과연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통할까요?”
“어려운 질문이시네요. 정진수 에이전트께서 선수 출신이시니 더 잘 아실 텐데요.”
“솔직히 말하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KBO와 mlb는 엄연히 다른 리그니까요. 수준도 그렇고요.”
“그 선수들이 KBO에 처음 입성할 때와는 아주 달라진 건 사실이죠. 그땐 그 선수들 모두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왔다 갔다 하던 신세였고 실력이었지만, KBO에서 실력이 일취월장했어요. 전 자신들이 하기에 따라서 선발의 한 축을 맡을 거라고 봅니다. 에이 빌드런 정도면 3선발은 충분하지 않을까요? 필 서든도 비슷한 레벨이죠.”
“오, 아주 낙관적으로 보시는군요. 사실 연준후 선수를 마이애미에 입단시키고 나니 쓸데없는 걱정만 늘어나는군요.”
“걱정이 안 되도록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준후가 정진수의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정진수의 말은 자신을 입단시키고 나서도 믿지 못한다는 말로도 들렸다. 듣기에 따라 애매하다. 에이전트라는 사람이 확신도 없이 계약을 따내다니.
“아닙니다. 전 연준후 선수를 에이 빌드런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공은 에이빌드런이 빠르지만 연준후 선수는 메이저리그에 잘 맞을 겁니다. 여의치 않으면 2년 계약만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실력을 보여준 다음에 대박을 노리는 거죠. 그런데 의외로 오스틴 단장이 연준후 선수를 좋게 보더군요. 실력이 없는 선수에게 돈을 줄 만큼 mlb가 쉬운 곳은 아니죠. 그들은 이미 연준후 선수의 가능성을 본 거예요.”
“감사합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없던 용기도 생깁니다.”
“저희 팀의 선발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4, 5선발이 확정적이지 않거든요. 연준후 선배가 오셔서 아주 든든합니다.”
***
넷은 오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성낙기는 건너편에 앉은 여자들을 보았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들이었는데 한 여자가 낯이 익다. 가만, 저 여자?
“낙기 씨?”
건너편 여자의 눈과 성낙기의 눈이 마주쳤고 여자가 성낙기의 이름을 불렀다. 아, 그러고 보니 엘리나 샤먼이다. 젠장, 월드 시리즈 끝나고 국가 대표 선발전에 응원가기로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늦었을까? 늦었겠다.
엘리나 샤먼과 같이 앉아 있는 여자들을 보니 육상 선수들이 틀림없다. 술도 한 잔씩 앞에 두고 있는 걸 보니 대회가 끝나지 않고는 저럴 수 없을 것이다. 성낙기는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엘리나 샤먼은 그걸로 부족했던지 동료와 함께 성낙기가 있는 자리로 왔다.
“오랜만이에요. 낙기 씨.”
“엘리나 샤먼, 반가워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었어요. 경기는 어떻게 되었죠?”
“다행히 뽑히게 되었어요. 1등 같은 2위를 했거든요.”
“1등 같은 2위요?”
“하하, 스타트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간발의 차로 2등이니, 1등 같은 2등이죠. 실수만 안 했으면 무조건 1등이었을 테니.”
“아, 하하… 그렇군요. 하여튼 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조금 맥이 빠지긴 했지만 바쁠 걸 아니까요. 그때, 설마 월드 시리즈 우승할 줄 알고 한 약속이겠어요?”
“그렇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미국 국가 대표로 뽑혔다는 엘리나 샤먼은 그날따라 빛나 보였다. 운동 선수 같지 않은 미인형의 작은 얼굴에 탄탄한 몸매와 치렁치렁한 은발의 머리카락이 멋지다. 김아경은 은근히 신경 쓰이는 듯 힐끗 쳐다봤다.
두 여자가 서로를 의식하는지 서로를 바라보고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 엘리나 샤먼은 김아경의 미모에 조금 놀란 표정이다.
“훈련 없을 때 전화 줘요. 바닷가에서 서핑이라도 하게요. 알았죠?”
“아, 네. 그럴게요.”
“이번 주말이면 더 좋고요. 그럼, 굿나잇.”
엘리나 샤먼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자, 술자리가 다소 뒤숭숭해졌다. 김아경이 정색을 하고 성낙기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에이전트의 옵저버라는 역할을 넘어선 직설적인 말 때문이었다. 마치, 연인에게 따지는 듯한 표정과 몸짓이 김아경에게서 그대로 드러났다.
“저 여자, 도대체 누구죠? 나에겐 아무 말도 없이 둘이서 사귀고 있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