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화 스토브리그 2
다음 날, 성낙기는 반가운 얼굴들과 해후했다. 허봉호 감독을 비롯, 이계현 투수 코치와 박종태 타격 코치, 마영진 단장과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들과 얼싸안으며 정을 나눴다.
“여어, 월드시리즈 히어로가 여길 찾아오나?”
“반갑습니다, 감독님.”
“잘 왔다. 그러잖아도 네 얘길 하던 중이다.”
“감독님이 절 받아주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어쭈. 이제 제법 프로 선수 같은데? 겸손한 멘트도 날릴 줄 알고 말이야.”
허봉호 감독이 특유의 너스레로 성낙기를 반겼고, 이계현 투수 코치와는 예전에 같이 마셨던 술 이야기며 삼호슈퍼스타즈 2군에서 함께할 당시의 추억을 되새겼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성낙기가 존재하는 것, 그걸 잘 아는 성낙기 또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특히 반가워하는 건 투수조였다.
공성진과 안민기, 마크 트웰과 필 서든도 그대로였다. 모두들 마무리 훈련을 하는 중인 듯 유니폼에 땀이 배어 있다.
“낙기야, 너도 한번 던져볼래?”
“응? 내가?”
“그래, 오랜만에 던져봐. 내가 받아줄게.”
이두열이 성낙기에게 말했다. 성낙기가 불펜으로 가서 마운드에 섰다. 불펜에 들어오지 못한 선수들은 철망 사이로 성낙기를 주시했다. 이두열이 포수 자리에 가 앉고 성낙기는 가볍게 몸을 풀면서 몇 차례 공을 뿌렸다. 이계현 투수 코치가 스피드건을 들고 성낙기 뒤에 섰다.
“크, 151㎞! 전력 피칭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151㎞요? 그럼 더 강하게 던져볼게요.”
팡-
이두열은 공을 받으면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에서 그만한 공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팡!
“158㎞!”
“와아!! 위력이 장난 아니야.”
성낙기는 괜히 머쓱해져서 공 던지기를 멈췄다. 성낙기가 20구를 던지는 동안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들은 감탄의 연속. 자신들이 알던 성낙기의 구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성낙기의 퍼포먼스를 끝으로 선수들은 각자 훈련에 들어갔고 성낙기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코칭 스태프와 함께 훈련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미국엔 언제 다시 갈 예정이냐?”
“아마, 한국 스케줄이 끝나면 바로 갈 것 같습니다. 2주 후일 거예요.”
“근데 너, 월드 시리즈 우승하면 삼호로 온다고 하지 않았나?”
“제가요?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는걸요?”
“그으래? 흠,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시겠죠. 이제 겨우 메이저리그에서 2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성낙기는 허봉호 감독의 난데없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나저나, 이번 스토브리그엔 한국에서 넘어갈 선수들이 좀 될 거다.”
“아, 그렇습니까.”
“저기 보이는 마크 트웰과 필 서든은 거의… 휴우, 성적이 너무 좋아도 문제야, 문제.”
“스카우트들이 왔다 갔나요?”
“말도 마라, 니가 미국에서 잘하는 바람에 KBO를 바라보는 눈이 확 달라졌지 뭐겠냐. 그렇다고 선수들을 탓할 수도 없지. 거기서도 늘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선수들이었으니까.”
이계현 투수 코치가 성낙기의 말을 받았다.
“여기 와서 기량이 좋아졌나 보군요.”
“그렇지. 여기선 어떻게든 성적을 내려고 거의 코치들이 곁에 붙다시피 하지. 마크 트웰이나 필 서든은 투구 폼은 물론, 제구력이 좋아져서 메이저리그에 가도 통할 거다. 우리 팀뿐이 아니야. 연준후 알지?”
“연준후 선배요?”
“그래, 걔도 눈독 들이는 구단도 제법 많아.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단년 계약을 이어온 선수지. 거기에 에이 빌드런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모르긴 몰라도 여럿 건너갈 거다. 네가 잘해줘.”
“제가 뭐, 그럴 깜이나 되나요. 다 선배들인데.”
“그래도 넌 입지가 튼튼하잖아. 네가 조언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다.”
***
이계현 투수 코치의 말은 사실이었다. 성낙기가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스포츠 채널에선 KBO의 선수들에 대해 다뤘고, 각 구단의 책임자급들이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12월이 되자 각 구단의 대어급들이 정리되었고, 대부분은 자신의 팀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나자, KBO에 몸담았던 선수들이 계약을 위해 미국으로 속속 입국했다.
“ESPN의 오스왈도입니다. 야구 해설가 카바니 씨 모셨습니다. 스토브리그인데요. 여느 때와는 좀 다르죠?”
“그렇습니다. 다르죠. 메이저리그 FA는 거의 정리가 되었지만, 새로운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입성을 준비 중입니다. 바로 KBO에서 온 선수들이죠. 제가 알기론 다섯 명이 넘는 선수들이 각 구단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일부 선수는 계약 직전이라는 얘기도 있죠.”
“아주 의외인데요. 메이저리그에서 KBO리그 선수들에 관심을 쏟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낙기 선수 때문이죠. 그가 KBO에서 건너왔거든요. 메이저리그에 오자마자 투타에 걸쳐 대단한 활약을 보였고요. KBO의 특급이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각 구단의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카바니 씨가 볼 때 특히 눈에 띄는 선수가 있습니까?”
“음… 있습니다. 바로 에이빌드런과 필 서든이죠. 두 선수 모두 강속구를 지녔습니다. KBO에서 경기를 뛰면서부터는 제구력이 향상됐고, 변화구 구종도 추가되었죠. 이 선수들은 충분히 메이저리그에 안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 선수 중엔 연준후와 이강천이 메이저리그 계약을 타진하고 있는데요. 이 선수들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뭐라 말하기 어렵군요. 사실 생소한 투수들입니다. 영상으로 봤을 때 좋은 투수들인 건 분명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일 것이냐는 다른 문제죠. 우선은 적응 문제가 있으니까요.”
***
“셜리번, 이번에 한국에서 넘어오는 선수들, 어떻게 생각하나?”
“KBO말입니까? 여론은 에이빌드런, 필 서든, 마크 트웰 순입니다만, 저는 연준후라는 투수에 관심이 가더군요.”
“연준후? 흠, 어떤 점에서 끌리는 거지?”
“일단은 KBO 성적이 좋습니다. 17승 7패에 ERA 2.64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에이빌드런 같은 친구는 훨씬 우월한데?”
“성적만 놓고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미국 출신 투수들이 낫겠죠. 하지만 연준후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구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뭐지? 포크볼이라도 되나?”
“바로 그렇습니다. 공을 오래 보는 데다가 컨택 위주의 KBO에선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지만, 여기선 다를 겁니다. 이미 노모 히데오라든지 사사키, 구로다 히로키 등의 활약으로 검증이 끝난 구종이죠.”
“한국 선수가 그걸 던진다는 거지? 그렇다면 생각해 볼 여지는 있겠군.”
뉴욕 양키스는 KBO 성적이 단연 뛰어난 에이빌드런에 대한 계약에 착수했고, 나머지 선수들도 가성비 높은 선수들로 인식되어 관심도가 높았다. 최고 구속 156㎞를 던진 바 있는 연준후에게도 몇몇 구단의 입질이 있었다.
마이애미는 애초에 월슨 스카우트의 보고서를 참고로 여러 선수를 검토했으나, 셜리번 투수 코치와 알렉스 비토 감독의 의중을 받아들여 연준후 한 명으로 좁혀갔다.
공교롭게 연준후 역시 정진수를 에이전트로 두고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성낙기와 같은 에이전트 소속이 셈인데, 김아경의 능력이 배경에 깔린 에이전트 선택이었다. 김아경이 정진수와 같은 정식 에이전트는 아니지만, 정진수는 김아경이 삼호슈퍼스타즈 스카우트 팀장으로 있을 때부터 곁을 지키던 사람이었다.
“마이애미에서 관심을 보이나요?”
“그렇습니다. 3일 후에 미팅을 제의해 왔습니다. 같이 가시렵니까?”
“글쎄요. 제가 가야 할까요? 큰 건이 되기는 힘든 계약이에요.”
“성낙기 건도 좋은 조건에 성사를 시키셨잖습니까. 팀장님 능력이면 연준후도 제법 준척급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준척… 마이애미는 아마 그 이하로 보겠지요?”
“그럴 겁니다. 저희는 연준후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어필해서 좋은 계약을 따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말하자면, 보기 드문 포크볼을 가진 투수라든지… 멘탈에 관한 부분도 있겠고요.”
“좋아요, 그럼 같이 가죠.”
김아경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계약에 가겠다고 나섰다. 에이전트는 어디까진 정진수이니 사실상, 계약을 하더라도 자신의 몫은 없다. 재벌인 자신이 굳이 에이전트의 몫을 나눈다는 것도 탐탁지 않았고, 순전히 한국 야구를 위한 선택일 뿐이다.
정진수는 성낙기의 계약으로 이미 대박을 터뜨렸다. 김아경과 같이 가자는 건 어쩌면 무리한 부탁이었으나, 실은 김아경이 마이애미에 가는 것을 즐긴다는 걸 정진수는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성낙기의 큰 계약 건은 김아경이 따낸 거나 다름없었다. 같이 가주기만 한다면 탁월한 사업 수완으로 연주후의 계약 역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정진수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김아경에게 깍듯이 대하는 이유라면 이유다. 아니, 김아경은 그런 도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도 존경받을 만한 사업가였고, 야구단의 팀장이었으며 깨끗한 이미지를 가진 여장부였다.
***
“연준후 쪽에서 4년 3,200만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웃기는군. KBO에서 잘나갔다고 메이저리그에서도 똑같을 줄 아나 보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는 애초에 3, 4백 정도로 생각했던 투순데 연 평균 800만이라니.”
“성낙기하고 그 친구는 기본적인 역량이 달라. 그렇게는 주기 힘들지.”
“문제는 워싱턴 쪽에서 군침을 흘리는 모양입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잡겠다는 의지가 있는 모양입니다.”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그 투수는 내가 볼 때 10승 정도만 해줘도 감지덕지할 수준인데?”
“성낙기의 낙수 효과겠죠. 워낙 강한 인상을 심어놨지 않습니까.”
“자네는 어떤 입장인가.”
“저보다는 감독과 코치가 꼭 잡아달라는 요청을 한 상태입니다.”
“감독과 코치가? 의외로군.”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는 투수라서 먹힌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은 그 때문에 고민입니다. 김아경은 워낙 세게 나오는 상태고, 감독은 잡아달라니 진퇴양난이랄까요.”
“김아경… 그 여자는 도무지 겁이 없군. 성낙기 계약 때도 마구 지르더니 아주 습관적이야.”
“그런데 가만 대화를 하다 보면 선수의 장점을 어찌나 잘 어필하는지, 저도 모르게 설득을 당하게 되더군요.”
“자네가……? 후훗, 우습군. 천하의 오스틴 단장이 동양 여자에게 절절매다니. 이거 누가 들으면 잠꼬대로 듣겠어.”
“하하, 성낙기를 계약할 때 구단주님도 계셨잖습니까. 우리 둘 모두 설득 당했지요.”
“쩝… 생각나는군. 엄청난 옵션을 넣을 때만해도 그걸 달성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지. 영리한 여자야. 하여튼 이번엔 쉽게 넘어가선 안 되네. 최대한 밀고 당겨봐.”
“알겠습니다. 저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겠습니다.”
데릭 구단주와 오스틴 단장은 김아경이 제시한 액수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원하는 대로 주더라도 선수가 잘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반대라면 쏟아부은 달러는 공중에 날리는 셈이 된다.
감독이 연준후를 높이 평가하고 있더라도 자신은 최후의 보루로 남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Who are you?
“성낙기? 나 오스틴일세. 지금 단장실로 와줄 수 있겠나?”
오스틴 단장은 성낙기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같은 KBO라서 연준후의 장점 위주로 이야기하겠지만, 걸러서 들으면 된다.
공의 구위나 변화구 등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난 터, 그가 메이저리그에 안착할 만한 성격인지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미처 몰랐던 부분이 있는지 성낙기를 통해 확인할 참이었다.
다른 팀의 제시가 있기 전에 최대한 서두르면서도 리드미컬하게 계약을 끝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