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월드시리즈-뉴욕 양키스 10
조던 몽고메리는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연이은 에러에 브라이언 앤더슨이 친 느린 타구도 잡아내지 못한 내야진에 대한 원망이 컸다.
다른 팀도 아니고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팀에서 이런 경우가 생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양키스 투수 코치 로스차일드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포수인 게리 산체스와 내야진도 마운드에 모였다. 보통의 위기가 아니다. 좋은 찬스를 날려먹은 이닝 뒤의 위기이기에 더 불안하다.
“자자, 생각해 보자. 내야진이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조던의 땅볼 유도는 매우 좋았는데 운이 없었을 뿐이야. 이건 구위의 문제가 아니라 팀워크의 문제야.”
“맞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글레이버 토레스가 선선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무언가를 심기일전해서 다시 시작할 경우, 이런 식으로 털고 가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감정의 찌끼를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앞으로 잘해보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조던 몽고메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위기에도 팀으로 대응하면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일 수 있어. 힘내자.”
투수 코치 로스차일드가 마지막 말을 하고 돌아섰다. 아직 1점도 내주지 않은 상황에서 선발투수를 내리기엔 이르다. 더구나 구위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마운드를 내려가고 조던 몽고메리는 타자와의 싸움에 집중하려 애썼다.
타석에 선 타자를 바라본다.
성낙기라는 투수에게 좌익수 자리를 빼앗기며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의 양념거리로 떠올랐던 디카엘로다. 그래서인지 마운드를 바라보는 눈길이 유독 뜨겁다.
‘의욕이 넘치는 유형… 이번에도 같은 전략으로 가는 거다.’
조던 몽고메리는 초구로 몸 쪽 포심패스트볼을 높게 던졌다. 배트가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공을 풀어나가기 수월하게 하려는 볼 배합이다.
디카엘로가 움찔하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조던 몽고메리는 2구로 그동안 잘 쓰지 않던 몸 쪽 체인지업을 던졌다. 디카엘로의 배트가 반응했다.
‘디카엘로, 체인지업을 노려봐.’
‘체인지업을요?’
‘그래, 조던 몽고메리는 극한 상황이 되면 잘 던지지 않던 무기를 꺼내드는 습성이 있어.’
디카엘로가 더그아웃을 나올 때, 워마린 타격 코치가 했던 말이다.
디카엘로도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가끔 위기에서 그러는 걸 봤으니까.
결과는 좋았던 때도, 좋지 않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경기당, 3% 정도나 쓰는 체인지업이다. 비교적 선호하지 않는 공을 위기에 섞는다는 건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함, 또는 내야 땅볼이 필요할 경우로 한정된다.
이번 경우는 몸 쪽 높은 포심패스트볼을 던진 이후이므로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 가끔 위기에 던져 타자에게 의외성을 던져주며 재미를 봤던 코스와 볼 배합이기도 했다.
디카엘로는 체인지업을 던질 거라는 워마린 타격 코치의 말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딱히, 체인지업을 노린다기보다는 염두에 두는 정도로만 생각하며 타석에 임했다.
하지만, 아예 생각지도 않았던 구질이 들어오는 것과 조금이나마 염두에 뒀던 구질이 들어오는 것은 타격 타이밍과 준비로 보았을 때, 차원이 다르다.
디카엘로는 초구보다 현저히 느린 조던 몽고메리의 체인지업에 타격 타이밍을 맞추면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
“디카엘로의 배트가 날카롭게 돌아갑니다. 무릎께로 파고드는 체인지업을 걷어 올려 외야 높이 띄우는 다카엘로! 지안카를로 달려갑니다. 뒤로! 뒤로!”
그랬다. 디카엘로가 친 타구는 어퍼 스윙으로 인해 외야로 날았다. 타이밍은 정확했다. 타구가 지안카를로의 키를 넘기고도 계속 날았고, 외야석의 마이애미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반면, 양키스 관중들은 저 타구가 어디까지 날아갈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텅.
데구르르르-
“디카엘로의 타구가 펜스의 맨 윗부분을 맞고 뒤로 넘어가 버립니다. 지안카를로 끝까지 따라가 점프 캐치를 시도했지만 미치지 못했습니다. 홈-런! 자그마치 만루 홈런을 때려내는 디카엘로입니다!”
“어마어마하네요. 몸 쪽 체인지업을 그대로 넘겨서 만루 홈런을 만들다니요. 조던 몽고메리에게는 악몽 같은 순간이, 마이애미에게는 그야말로 행운이 여러 번 깃든 홈런이 아닐 수 없습니다.”
2번 타자 시크라멘부터 차례로 홈 플레이트를 밟으며 주인공인 디카엘로를 기다렸다. 디카엘로는 홈런을 치자마자 펄쩍 뛰어오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상대 투수를 자극한다기보다 그동안 자신의 안에 쌓였던 모든 것들이 일거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 때문이었다.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에서 투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뛰지 못했던 좌익수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남모르게 울분을 토했다.
그렇다고 성낙기에게 원망은 없었다. 단지, 자신의 경기력에 대한 한탄과 자조 섞인 웃음, 그리고 이어지는 의기소침이 그를 내내 괴롭혔을 뿐이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관중의 함성과 함께 그는 오늘 그 모든 것을 털어냈다. 기억해 줘, 나 디카엘로야. 디카엘로는 홈 플레이트로 들어오는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자신이 들어가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하이파이브를 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을 때, 헬멧을 여러 차례 얻어맞고서야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은 사라지고 현실감이 밀려왔다.
“잘했어, 디카엘로.”
성낙기가 자신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자, 디카엘로는 울컥했다. 모든 스트레스는 자신의 안에 있었던 수많은 감정의 결이었을 뿐이다.
***
경기는 졸지에 2:4로 마이애미가 앞서 나가고 있었다. 조던 몽고메리는 만루 홈런을 맞은 후, 마운드를 내려갔다. 아직 노아웃의 4회 말이 끝나지 않았다. 양키스의 불펜 투수 도밍고 저만이 마운드에 섰다.
필승조보다는 조금 쳐지는 성적을 내고 있지만 99마일의 강속구가 일품인 투수. 마이애미의 타석엔 시에라가 등장했다.
그리고 바뀐 투수 도밍고의 초구를 후려갈겨 우중간 담장을 넘겨 버렸다. 4회 초, 양키스와 같은 백투백 홈런. 중계 포털사이트엔 양키스 팬들의 댓글이 폭주했다.
-아, 뭐야. 또 얻어맞았어. 그냥 집어치워라!
-후. 답이 없다. 여기서 또 홈런이냐. 미쳤어.
-최강이라고 자랑하더니 마이애미 따위에 만루 홈런도 모자라 백투백까지? 나가 뒈져라.
-2:5면 따라갈 여지가 충분해. 아직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후우, 힘들어 보이는군. 성낙기가 여차하면 올라올 거야. 점수를 더 내주면 아예 포기하고 장기전으로 가야지.
-아니, 아직이야. 3점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지. 성낙기든 뭐든 올라오라 그래.
-일단은 여기서 막고 타선이 터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도밍고는 경험이 없어. 이 장면에선 A.J.콜을 올려야지.
시에라가 홈런을 친 후, 뒤이은 타자들은 범타로 물러났다. 경기는 5회 초로 넘어갔다. 3점의 리드를 안은 호세 우레나는 힘을 얻은 듯 6회까지 더 이상의 실점 없이 마운드를 지켰다. 그런 후, 맞은 7회 초에 데일 카론이 마운드를 이어 받았고 나오자마자 지안 카를로에게 또 한 차례의 솔로 홈런을 허용, 경기 스코어는 5:3으로 좁혀졌다.
“데일 카론, 포스트시즌 들어 홈런을 자주 허용합니다. 저 투수가 구위는 좋은데 커맨드가 흔들리는 경향을 보입니다.”
“아마도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해서겠죠. 월드시리즈는 오를 수 없는 나뭇가지와 같으니까요.”
“그렇겠습니다. 데일 카론은 월드시리즈 진출이 처음 있는 일입니다.”
데일 카론은 홈런 외엔 깔끔하게 7회를 틀어막았고, 8회에 올라온 패 파일러도 1안타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지켰다. 그런 후, 9회 초를 막아내기 위해 야를린 가르시아가 올라왔다. 양키스의 선두 타자는 아론 저지.
2점을 앞서고는 있지만 아론 저지, 지안카를로, 미구엘 안두하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는 누가 보더라도 메이저리그 최강의 타선이다. 야를린 가르시아는 아론 저지를 맞아 긴장했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로 바깥쪽 스트라이크가 꽂혔다. 야를린 가르시아는 2구 역시 바깥쪽 슬라이더를 택했다.
따악.
1루수 브라이언 앤더슨이 몸을 날렸고, 1루와 2루 사이로 날아가던 라이너성 타구가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브라이언 앤더슨의 엄청난 호수비에 양키스 팬들이 아쉬워했다.
평소에 발이 느리고 수비도 허술한 편인 브라이언 앤더슨의 수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마이애미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9회 초, 원 아웃에 스코어는 여전히 5:3.
붕붕.
배트를 힘 있게 휘두르며 지안카를로가 타석에 서는 게 야를린 가르시아의 눈에 보였다.
***
<마이애미의 극적인 승리,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의 주인은 어디로?>
<마이애미, 모두의 예상을 깬 정신의 승리>
<성낙기를 투입하지 않고도 이룬 값진 1승, 시리즈 전적 3:2로 앞섰다>
<내일의 선발은?>
애런 분 양키스 감독-
“이제 총력전입니다. 한 경기만 져도 내일이 없습니다. 1선발 루이스 시크릿도 불펜 대기입니다. 타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알렉스 비토 마이애미 감독-
“내일의 선발은 성낙기입니다. 오늘 경기에 투입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이 수확입니다. 그가 6차전에서 월드시리즈를 끝낼 겁니다.”
하루 휴식이 주어진 날, 양 팀 감독의 인터뷰였다. 내일이면 양키스타디움에서 마운드에 서야하는 성낙기는 생각보다 마음이 들떴다.
이제 자신이 마운드에 올라 기나긴 시즌의 끝을 맺는 때가 온 것이다. 단 한 경기로 2022년의 모든 일정이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곧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체력이 97입니다]
성낙기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상태창을 떠올렸다.
체력은 풀이다.
이제 끝내는 일만 남았다. 미국으로 온 지 2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첫 해가 메이저리그 타자들에 적응하는 시기였다면 올해는 나름의 성과를 거둔 한 해였다.
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성낙기라는 이름을 모두 알았고, 특히 어린이 팬들로부터 인기가 있는 선수로 성장했다.
그간 자신을 도와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성낙기는 비행기 트랙을 내려왔다. 뉴욕의 날씨는 추울 정도로 서늘했다. 며칠 전과는 또 다르다.
그리고 2022년 10월 30일의 날이 밝았고 양키스타디움은 엄청난 열기로 가득했다.
다소 쌀쌀한 날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흥분과 들뜸, 환호와 가슴을 뜨겁게 적시는 월드시리즈 6차전이 곧 열릴 예정이었다.
여가수의 애국가가 끝나고 관중들은 엄청난 함성으로 경기장에 모인 선수들을 격려했다.
양키스의 선발은 채드 그린.
3선발로 뛰던 투수로 로테이션이 맞아서 마운드에 설 뿐, 루이스 시크릿을 비롯한 모든 투수들이 대기 중이었다.
여차하면 투수 교체로 마이애미 공격의 맥을 끊겠다는 애런 분 감독의 전략. 결국 내일이 없는 총력전이다. 시리즈 스코어 2:3으로 몰린 감독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다.
1회 초, 마이애미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났다.
그러고 나서 맞은 1회 말, 성낙기는 글러브를 집어 들고 마운드에 올랐다. 마운드에 서서 이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고 그들의 기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기의 강속구가 96으로 오릅니다]
그 순간, 상태창이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