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월드시리즈-뉴욕 양키스 7
모든 스포츠는 멘탈이 중요하지만, 야구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타 스포츠보다 그런 부분이 강할 것이다. 외견상으론 9:9지만 타자와 투수의 1:1 승부가 9회까지 내내 이어지기에 더 그렇다.
뉴욕 양키스의 채드 그린은 75구를 기록 중이었다. 5회 초에 점수를 더 벌릴 수 있었는데 상대 팀 투수의 호투로 무산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채드 그린은 자신이 6회까지는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5회에 내려가면, 철벽 불펜에 삐걱거림이 생긴다.
알버트 아브레유-루이스 세사-아롤디스 호프먼으로 이어지는 불펜은 모두 1이닝에 익숙해져 있다. 6회가 빈다.
물론, 도밍고 저만 같은 투수도 대기 중이지만 좋은 그림은 아니다.
선발 투수가 6회까지 깔끔하게 막고 7회를 넘겨주는 패턴이 가장 물 흐르듯 승리를 향한 지름길인 것. 그러므로 5회에 많은 투구 수를 소모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맞춰 잡는 피칭으로 마이애미의 하위 타선을 정리하는 그림이 가장 좋은 기록화다.
채드 그린의 눈에 마이애미의 7번 시에라가 들어왔다. 채드 그린이 알기로는 수비로 먹고 사는 친구다. 2할 중반의 타율로 중견수에서 버티는 걸 보면 팀을 잘 만났다는 생각부터 든다. 가끔 쳐주는 홈런으로 시즌당 20홈런 언저리는 치는 타자지만 다른 팀의 외야수에 비하면 조족지혈 같은 느낌마저 든다.
‘후우 방심은 금물이다.’
채드 그린은 시에라를 깔보는 자신을 느끼고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를 얕보다가 스스로 구렁텅이로 들어간 투수들이 좀 많은가.
팡.
볼.
팡.
볼.
이것 봐라. 유인구에 따라오지 않는다. 채드 그린은 포수로부터 공을 넘겨받으며 시에라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의 얼굴. 혹시 볼넷을 기대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타격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니 은근히 약이 오르는 채드 그린.
3구로 몸 쪽 포심패스트볼을 선택했다.
팡.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치는 걸 까먹었나 싶을 정도로 이번 공 역시 타자의 반응은 전무했다. 채드 그린은 공을 받고 최대한 인터벌을 짧게 한 후, 자신의 주 무기인 슬라이더를 던졌다. 그제까지 가만있던 타자의 배트가 움직였다.
따악.
바깥쪽 슬라이더를 가볍게 쳐서 우익수 앞에 떨구는 안타. 안타를 맞고 나서 살짝 어이가 없었다. 슬라이더를 무리 없이 밀어치는 기교가 저 타자에게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메이저리그에서 평균 이상의 평가를 받는 자신의 슬라이더를.
‘젠장, 채드. 도대체 뭘 던진 거야.’
채드 그린은 자신을 책망하며 슬라이더가 밋밋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타자는 8번 리얼무토. 역시 타율은 낮지만 한 방은 있는 타자다.
채드 그린은 그 한 방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초구를 던졌다.
몸 쪽 체인지업. 스윙이 아니면 땅볼을 유도하기 좋은 타이밍이자 로테이션이다.
따악.
그리고 리얼무토는 채드 그린의 예상대로 내야 땅볼을 굴렸다.
“리얼무토가 친 공이 유격수 깊은 곳으로 바운드됩니다. 역동작으로 공을 캐치하는 디디 그레고리우스! 리얼무토가 전력 질주 합니다.”
“아, 세이프네요. 공이 1루수에게 원 바운드로 오면서 시간이 지체됐어요. 리얼무토가 친 타구의 코스가 행운의 코스였네요. 정면으로 갔다면 더블 플레이를 노려볼 만한 바운드였거든요.”
“다음 타자는 성낙기야. 몸 쪽으로 윽박지른 다음 바깥쪽으로 가자. 채드, 자신의 공을 믿어.”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가 마운드로 올라와 몇 마디를 건네고 내려갔다. 채드 그린은 단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리얼무토의 경우, 코스가 워낙 좋았을 뿐이라고.
‘투수이면서도 제법 친다는 거지?’
채드 그린은 심호흡을 한 뒤, 몸 쪽 높은 공을 뿌렸다. 96마일의 강속구. 공은 타자에게 맞을 듯이 날아갔고 성낙기는 뒤로 물러나며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바라던 바다. 그러고 나서 던진 2구는 바깥쪽으로 휘어지는 슬라이더. 손에서 공이 떠날 때 챔질이 괜찮았다는 느낌이 왔다. 이 정도의 감각이면 휘어짐과 동시에 낮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뚝 떨어질 것이다.
따악-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아니면 감각 이상인가?
***
성낙기가 친 타구는 우익수 아론 저지 쪽으로 쭉쭉 뻗더니 그의 키를 넘기고 펜스 쪽으로 굴러갔다. 애초에 안타가 나올 시, 홈 승부를 위해 다소 전진 수비를 한 게 화근이었다.
아론 저지는 자신의 키를 넘기며 바운드 된 공을 잡기 위해 뒤돌아 달려갔다. 그러는 사이,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고 1루 주자마저 3루를 돌고 있었다.
“아론 저지! 어서 던져!”
“아, 젠장. 동점타야.”
“어휴, 키만 크면 뭐 하나. 제대로 달리지를 못하네.”
외야의 관중들이 허겁지겁 펜스 플레이를 하는 아론 저지를 보면서 한 마디씩 쏟아냈다. 아론 저지는 어깨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우익수였다. 그는 펜스를 튀기고 나오는 공을 바로 잡아 2루수에게 빠르게 던지면 홈 승부가 가능할 거라 판단했다.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1루 주자는 자신이 하기에 따라 접전이 될 거라는 생각이다. 어떻게든 동점이 되는 상황을 막으려는 아론 저지. 다른 때와 달리 펜스 플레이를 다소 서두는 이유였다.
“아론 저지가 공을 쫓아 달립니다. 성낙기가 친 타구가 펜스에 맞고 튕겨 나갑니다. 아, 그러나 펜스에 맞고 파울 라인을 넘어서 구르는 타구! 아론 저지의 플레이 미스가 나옵니다.”
그랬다.
아론 저지는 펜스에 맞는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면서 최단 시간 안에 송구하기를 원했고 그때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 타구가 펜스에 맞기 전까지는.
타구는 아론 저지의 예상과 달리 펜스를 맞은 후, 엉뚱한 곳으로 굴절됐고 펜스 앞에 다다랐던 그는 굴절된 공을 따라 방향을 되짚어 나와야만 했다.
사실, 아론 저지는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발이 빠른 주자라면 2루타에 1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겠으나 마이애미의 1루 주자는 리얼무토였다.
발이 빠르지 않은, 야수들에 비하면 느린 축에 속하는 주루 능력을 가진 상대 팀의 포수다. 펜스 플레이만 원활하게 하면 홈에 들어오기 어려운 주자. 아론 저지가 허둥대는 사이, 리얼무토는 홈으로 내달렸다.
“아아아, 뭐야. 아론 저지 홈 송구를 해!”
“늦었어. 저런 느림보 같으니라고”
“어어, 타자가 3루로 간다! 아론 저지 어서 공을 잡아!”
“정신 차려!”
1루 주자는 거의 홈에 들어온 상황, 굴절된 타구를 잡은 아론 저지의 눈에 3루로 달리는 주자가 보였다. 세이프 타이밍이었지만 자신의 어깨를 믿었고 주자의 오버 런(over run)이 있을 수 있다. 아론 저지는 우익수 파울 라인의 먼 거리에서 3루 송구를 시도했다.
커트 맨을 배제한 다이렉트 송구. 실제로 그는 시즌 중 많은 3루 보살을 기록했다. 이제 곧 3루에서 접전이 벌어지리라. 아론 저지는 3루를 향해 슬라이딩을 하는 타자와 자신의 공을 받은 3루수의 태그(tag)를 상상했다.
“성낙기 선수 빠른 속도로 3루를 향해 내달립니다. 아론 저지, 먼 거리에서 3루에 송구! 아!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성낙기 선수, 3루를 돌아 홈으로 내쳐 달립니다.”
3루 코치는 성낙기의 주루를 막았다. 3루에서만 살아도 후속 타자의 타구에 충분히 추가점을 뽑을 수 있다 여겼고 그러므로 무리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성낙기는 다음 회에 마운드에 설 귀중한 에이스.
성낙기는 코치의 만류에도 홈으로 내달렸다. 이미 2루에 도달했을 때, 아론 저지의 실책을 본 후였다. 성낙기는 이 정도라면 홈 승부가 된다고 봤고 그 이면엔 (4단계/5단계)에 다다른 리키 헨더슨의 주루 능력이 있음은 물론이다.
[리키 헨더슨의 도주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1루를 향하여 달릴 때 주루 능력 강화에 관한 글귀가 떴고, 성낙기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3루로 달렸다. 3루에 다다를 즈음 뒤를 돌아본 성낙기의 눈에 송구를 하는 아론 저지가 들어왔다.
‘좋아, 승부다.’
리키 헨더슨의 주루 능력이라면 3루로 공이 오는 동안, 3루 베이스를 넘어 홈으로 갈 수 있다고 봤고 공을 잡은 3루수가 공을 잡아 홈으로 송구의 정확도에 따라 접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론 저지가 다이렉트로 던지는 3루 송구가 3루에 못 미치는 지점에서 바운드가 될 거라는 계산도 작용한 판단. 실제로 아론 저지가 던진 3루 송구는 투 바운드로 3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얼핏, 무모해 보이는 베이스러닝입니다. 미구엘 안두하, 홈으로 공을 뿌립니다!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 공을 잡자마자 몸을 날립니다. 성낙기 선수 슬라이딩으로 홈 쇄도! 과연 누가 더 빠릅니까!”
***
홈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주심으로 나선 프레스 주심은 마스크를 벗은 채, 허리를 굽히고 홈 플레이트를 주시했다. 포수는 홈 플레이트 앞에 서서 타자 주자의 슬라이딩을 방해하고 있다. 성낙기의 발이 홈 플레이트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공이 들어 있는 미트가 타자 주자의 발 쪽으로 향했다. 발이 먼저인지 미트가 먼저인지 애매한 상황, 주심은 타이밍 상 아웃으로 판단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아웃 선언.
“노노, 세이프야!”
더그아웃에 있던 알렉스 비토 감독이 득달같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즉시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다. 4심이 모여 비디오 판독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TV에서는 홈에서의 상황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슬로우 비디오로 보니 확연해졌다.
마이애미 관중들은 휴대폰을 높이 든 채로 세이프를 연호했다. 휴대폰에 연결된 TV를 보며 그들은 세이프라고 확신했다. 드디어 판독관의 의견을 듣던 주심이 홈 플레이트로 걸어오면서 양팔을 옆으로 펼쳤다.
“세이프!”
마이애미 팬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주심의 눈엔 아웃 타이밍이었으나, 성낙기의 슬라이딩이 파울라인 쪽에서 곡선으로 휘면서 홈 플레이트를 먼저 터치했다.
영상으로 보면 성낙기의 발이 홈 플레이트에 닿을 때, 포수의 미트는 주자의 다리에 미치지 못했다. 얼핏, 터치를 한 것으로 보였을 뿐이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inside-the-park home run)이라는 치욕적인 상황에 양키스 팬들은 탄식했다. 그라운드의 선수들도 망연자실한 표정.
특히 아론 저지는 넋이 나간 얼굴로 홈 플레이트 쪽을 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한 차례 에러를 범하긴 했지만 그 에러의 여파가 그라운드 홈런일 줄이야.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그는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무릎에 받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속으로 되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경기는 성낙기의 타구 하나로 역전되어 버렸다.
경기 스코어 3:2. 지금 마운드를 지키는 투수가 성낙기 본인인 걸 감안하면 1점의 리드조차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경기의 분위기는 마이애미 말린스 쪽으로 순식간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