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66화 (166/188)

# 166

166화 월드시리즈-뉴욕 양키스 4

루이스 시크릿은 7회 초까지 2실점으로 호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미 94개의 투구 수로 8회부터는 불펜 투입이 예상되는 상황. 월드시리즈에서 7이닝 2실점이면 퀄리티스타트플러스를 떠나 선발로서 훌륭한 경기 운영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상대 팀 투수가 무실점으로 역투를 거듭하고 있어서 빛이 바랬다고 할까.

“저 투수 몇 구나 던졌지?”

“6회까지 68구입니다.”

“완투 각이군. 타자들이 좀처럼 활로를 못 찾고 있어.”

“다른 팀들은 시즌 중에 투구 개수를 늘리는 작전도 몇 차례 썼었습니다.”

“결과는?”

“투구 수는 조금 늘어났지만 자기 타격을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결국, 성낙기를 공략하지 못했죠.”

“그럴 줄 알았어. 저런 투수에게 그런 작전은 안 통해. 타자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뉴욕 양키스의 감독 애런 분과 타격 코치 프레이드의 대화였다. 감독은 애가 끓었다. 6회까지 2안타로 완전히 눌렸다. 시즌 중에 성낙기를 상대한 적이 있지만,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애런 분이 오늘 본 성낙기의 공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변화구는 예리하기 그지없고 포심패스트볼조차도 볼 끝이 변화무쌍하다. 저런 공은 제대로 맞히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양키스의 타선이라면 영봉패는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다. 7, 8, 9 무려 3이닝 동안 누군가는 해줄 걸로 봤다.

한낱, 동양의 작은 투수에게 무기력하게 질 타선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는 타자가 타석에 섰다.

201cm의 거구가 타석에 자리 잡자 홈플레이트가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세 번째 대결이다. 앞선 두 타석에서는 1회에 삼구 삼진, 4회엔 빗맞은 타구가 우익수 뒤쪽까지 날아갔었다. 빗맞아도 담장을 넘길 수 있는 선수 중에 펀치력은 거의 톱이다

“7회 말만 잘 막으면 경기는 낙기의 완봉승으로 끝날 거야.”

“네? 아빠, 왜요?”

“서희 너도 오빠 경기를 보려면 어느 정도는 알아둬야 해.”

“힝, 난 오빠가 이기기만 하면 되거든요. 너도 그렇지? 하연아.”

“뭐… 그래도 알고 보면 더 좋겠지.”

“아빠, 하연이 미국 오더니 변했어요. 내 말에 자꾸 반대 의견을 내세우고 그래.”

“잘 들어봐. 지금 타석에 선 저 타자가 올해 홈런왕이다. 이름은 아론 저지. 무서운 타자지.”

“아, 아버님 아론 저지는 괴물로도 통하죠.”

“하연이가 잘 아는구나. 7회에 나오는 타자들이 실질적으로 양키스의 타선을 이끌고 있거든. 저 타자들만 잘 잡으면 기세가 확 꺾일 거다.”

“아버님, 혹시 8회엔 불펜이 나오지 않을까요?”

“음, 하연이가 야구에 관심이 많구나. 역시, 명문대 다니는 애들은 달라.”

“치, 아주 두 분이 죽이 잘 맞으시네요. 며느리처럼 아버님이라고 하지를 않나.”

성서희의 말을 듣고 장하연이 얼굴을 붉혔다. 성용구 씨는 술을 줄이고 나서 틈만 나면 메이저리그 경기를 시청했고, 야구 지식이 저절로 쌓였다. 술에 절어 있던 지난날과 결별하자 말투부터 달라졌다. 전엔 시장 바닥에서 쓰는 언어가 주였다면 이젠 평범한 교양인이 쓰는 언어와 가까워졌다.

물론, 아직 술과 완전히 벽을 쌓은 건 아니므로 언제 또다시 멍청이 순댓집에서 사람들과 어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관중석의 식구들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동안,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사인을 접수했다.

팡.

“스트라이크.”

퀘이크볼(5cm/5cm).

95마일의 퀘이크볼이 아론 저지의 몸 쪽에 들어갔다. 아론 저지는 흠칫했지만 나가려던 배트를 거둬들였다. 스트라이크인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쳐봐야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는 몸 쪽의 꽉 찬 볼이었다.

마운드의 성낙기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치지 않는 타자, 그렇기에 좋은 타자라는 것을.

리얼무토의 2구 사인은 바깥쪽 높은 라이징패스트볼. 볼로 유인하면서 집중력을 흩뜨려놓자는 일리 있는 사인이다. 성낙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초구와 똑같은 코스에 똑같은 구질을 던졌다.

따악.

이번엔 참을 수 없었는지 팔꿈치를 몸통에 최대한 붙이면서 타격하는 아론 저지. 타구는 3루 강습 타구였다. 빠르고 강한 공이 가렛 쿠퍼에게 바운드되며 굴렀다. 놓치면 3루 선상을 따라가는 2루타 코스가 될 확률이 높다.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살짝 역동작에 걸렸던 가렛쿠퍼는 조금 늦게 타구를 파악하고 다이빙캐치를 시도했다. 아론 저지는 타구를 날리고는 전속력으로 1루에 내달렸다. 거구라고는 하나, 6도루가 있을 만큼 발이 느린 타자는 아니다.

외견상, 느려 보이는 타자일 뿐이다.

“가렛, 1루!”

가렛 쿠퍼가 다이빙으로 공을 잡자 포수인 리얼무토가 1루의 상황을 일깨웠다. 간혹, 느긋하게 송구하다가 1루에서 살려주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가렛 쿠퍼 역시 빠른 타구를 잡았고 타자가 아론 저지이니 급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렛 쿠퍼에게 리얼무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차아아악-

그라운드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역동작에 걸린 몸의 방향을 급히 트느라 다리와 스파이크에 엄청난 힘이 실렸다. 스파이크를 지탱하던 땅의 흙이 주르륵 밀리면서 가렛 쿠퍼는 겨우 송구할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글러브에서 공을 빼면서 1루로 고개를 돌렸다.

리얼무토의 다급한 외침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아론 저지가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과 브라이언 앤더슨이 다리를 최대한 벌리며 3루에 가깝게 글러브를 위치시키고 있다. 가렛 쿠퍼는 힘차게 공을 뿌렸다.

슈욱!

아마도 선수 생활 내내 가장 힘이 들어간 송구였는지 모른다. 공은 1루수의 글러브로 날아갔고, 아론 저지는 달리고 있었다.

공과 사람의 경주. 누가 빠른가. 답은 심판만이 내리는 것.

“아웃!”

심판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했다. 아론 저지가 살아 나갔다면 다음 타자들의 집중력은 더 높아질 것이고 야구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성낙기는 다음 타자, 지안카를로 스탠튼을 맞아 라이징패스트볼과 변화구를 적절히 섞은 끝에 우익수 플라이볼로 아웃을 잡았다.

이로써 양키스의 얼굴 같은 두 강타자를 모두 잠재웠다. 적어도 오늘 경기엔 더 이상 나오지 못할 터. 둘 모두 3타수 무안타의 어울리지 않는 성적표를 집어 들었다.

***

어느덧 9회였다.

“아, 드디어 뉴욕 양키스의 마지막 타자입니다. 성낙기 투수 오늘 95구를 던지며 2피안타 13삼진의 무시무시한 투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타석엔 디디 그레고리우스 선수가 들어섭니다. 9회 말 투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성낙기 투수 사인을 받습니다.”

“양키스로서는 악몽이네요. 저 역시도 성낙기 투수가 이토록 잘 던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워싱턴 내셔널스와 뉴욕 양키스의 타선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뉴욕 양키스마저 단 2안타로 묶어버렸습니다.”

“랜 존슨 씨도 한 말씀 해주시죠.”

“그저 놀랍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한국에 저런 투수가 있었다니… 오늘 보여준 공이라면 시리즈 내내 양키스의 고전이 예상됩니다. 이 투수를 공략하지 못하면 글쎄요… 최소한 2승은 지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요.”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팀의 4승에 모두 관여한 바가 있죠. 아, 아… 말씀드리는 사이 디디 그레고리우스 선수 삼진 아웃을 당하고 맙니다! 14삼진으로 2022년 월드시리즈 개막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는 성낙기 투수입니다!”

“마지막에 던진 공의 스피드가 98마일 나왔네요. 정말… 괴물입니다. 마치 23세기에서 건너온 선수 같군요.”

2피안타 무실점 노 볼넷, 14삼진을 당하며 뉴욕 양키스는 허물어졌다.

마지막 타자가 아웃되는 순간, 양키스 더그아웃에 있던 타자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하더니 이윽고 각자의 짐을 챙겼다.

타석에 나가 직접 상대해 보고도 믿기 힘든 구위였다. 구위와 스피드뿐이라면 그나마 괜찮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낙기가 던지는 변화구의 구종이 많아서 과연 어떤 코스에 어떤 공이 들어올지 예측을 불허한다.

타격을 하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맞아야 하고, 어떤 종류의 공이 올 것인지 짐작이라도 가능해야 한다. 가령, 빠른 공 위주의 볼이 올 것인지 느린 변화구 위주의 볼이 들어올 것인지에 대한 예측력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작동해야만 엇비슷한 타이밍에 배트를 낼 수가 있다.

하나, 성낙기가 던지는 구종은 느린 커브부터 체인지업 슬라이더 포크 투심 외에도 100마일이 넘는 수수께끼 같은 볼까지 타이밍 타격을 할 여건이 안 된다.

양키스의 타자들은 타석에 서면, 막막했고 안개가 낀 듯 감각도 흐려졌다. 몸의 균형도 흐트러졌고 집중력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 방향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병사처럼 양키스의 타자들은 어떤 공이 들어올지에 대한 정보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흔히 감각적인 타격을 한다고들 하는 그런 컨택마저 성낙기에게는 불가능했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무언엔가 홀린 기분이야…….”

한 선수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이 말은 성낙기를 상대한 타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들도 역시 칠흑의 진창을 건너듯 앞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성낙기의 투구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중까지 조용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숨을 몰아쉬면서 괴물 투수의 출현에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마이애미의 관중들은 성낙기의 경기 MVP 인터뷰가 이어질 때 잠시 이름을 연호했지만, 그마저도 어딘지 미흡한 느낌이었다.

성낙기는 한낱 이름을 연호해서 칭찬을 하기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경외의 대상에 가까웠으므로.

솔직히 오늘 양키스는 노히트 노런 혹은 퍼펙트를 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성낙기, 14삼진 완봉승으로 뉴욕 양키스를 충격에 빠뜨리다>

<그는 어떤 존재인가? 그 어떤 투수도 이처럼 완벽하지 못했다>

<1차전을 내준 뉴욕 양키스의 반격이 시작된다>

양 팀 감독의 말.

애런 분-

“성낙기가 잘 던졌고 타자들의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 2차전부터 악의 제국의 저력을 보여주겠다. 이 말을 하고 싶다. 투수는 날마다 나올 수 없다.”

알렉스 비토-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다. 성낙기의 호투가 좋았다. 그는 거의 믿기 힘든 로테이션을 선보였다. 성낙기의 이후 기용에 대해서는 선수 본인과 상의할 예정이다. 그의 뜻을 최대한 존중하겠다.”

루이스 시크릿-

“6회에 맞은 홈런이 뼈아팠다. 실투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잘 쳤다.”

성낙기-

“(등판에 대해 아나운서가 묻자) 3차전 선발을 준비하겠습니다. 현재는 챔피언십시리즈와 같은 역할이 저의 목표입니다. 불펜이든 타격이든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성낙기의 인터뷰는 메이저리그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1차전 완봉에 이은 3차전 선발이라니! 그가 보여준 것이 없었다면 지나친 의욕으로 평가절하 했겠으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보여준 성낙기의 영향력은 혼자서 팀을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4승을 책임졌었고 이제 월드시리즈에서도 그 같은, 어찌 보면 미친 등판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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