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월드시리즈-뉴욕 양키스 3
“아경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네가 성낙기를 가장 잘 알 테니 아빠의 궁금증을 풀어주렴.”
“무얼 말씀이세요?”
“저 미친 듯한 공 스피드 말이다. 마치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온 것만 같구나.”
“저도 나름 낙기 씨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구위에 대한 것만은 전혀 몰라요. 낙기 씨가 말해주지도 않고요.”
“마 단장도 마찬가진가?”
“그, 그렇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성낙기의 공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를테면 퀘이크볼이라든지, 라이징패스트볼이 실제로 떠오른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데?”
“결론이 나지 않은 걸로 압니다. 그냥 불가사의하다고들…….”
“그래? 그렇담, KBO나 mlb나 성낙기에 대해 모르는 건 매한가지군. 그렇죠? 허 감독님.”
“아… 네. 전설이 되어가는 투수가 삼호슈퍼스타즈 출신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회장님.”
“허허, 허 감독이 산뜻하게 정리를 해주시는구만. 역시, 그러니 삼호를 준우승까지 끌어올렸겠지. 저런 터프함을 마 단장도 좀 배울 필요가 있을 거야. 얼마나 명쾌한가. 성낙기가 어떤 공을 던지든 삼호슈퍼스타즈 출신, 즉 떡잎을 키운 배경은 결국 우리라는 말 아니겠나.”
“아,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김현중 회장은 성낙기의 공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건, 회장 일행과는 조금 떨어진 좌석에 앉아 있는 성용구, 양연숙과 서희와 장하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오빠가 저렇게 잘 던질 줄은 몰랐어. 아론 저지라는 사람은 거인이던데, 삼진을 잡았어.”
“응, 낙기 오빠 정말 신기해. 내가 경기장에 올 때마다 이겼지.”
“그래? 넌 몇 번이나 왔는데?”
“세 번 왔어. 시즌 끝나고는 놀이공원도 같이 갔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
“오, 대박. 너 그러다가 우리 오빠 사귀는 거 아니야?”
“헐, 서희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국에 같이 올 때부터 낙기 오빠랑 나는 사귀고 있었다고.”
“엥? 오빠는 그런 얘기 안 하던데? 괜히 너 혼자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넌 사귀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데이트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그러면 사귀는 거지. 뭐, 서로 아는 사이에 부끄럽게 우리 이제부터 사귀자, 해서 사귀겠니?”
“아항, 넌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한국에 있을 때랑은 다르네. 역시 미국 물이 좋긴 좋은가 봐.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잖아.”
“어휴, 서희 너 내 친구 맞아? 왜 훼방질이야?”
“아니… 난 팩트만 얘기하는…….”
“그만해. 넌 내가 낙기 오빠랑 잘되는 게 싫어?”
“싫다는 게 아니라 사실만 이야기하라는 거야.”
서희와 장하연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루이스 시크릿은 2회 초도 역시 삼진을 곁들이며 무실점으로 끝냈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있다가 얼마 쉬지도 못하고 마운드에 나가야만 했다.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성낙기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채드 왈라치조차 경기의 중요성을 감안했는지 조용했다.
양키스의 4번 타자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아론 저지는 강속구로 윽박질러 삼진을 잡았지만 지안카를로 스탠튼은 유독 강속구에 강한 기질을 보인다. 공의 스피드만 믿고 던지다가 큰 코를 다친 투수가 한둘이 아니다.
이번 시즌 아론 저지에게 홈런왕 자리를 내줬지만 51홈런에 빛나는 타점왕이다. 그의 타점은 약팀에게서 몰아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어쩌면 아론저지보다 까다로운 타자.
‘지안카를로에게는 브레이킹 볼을 적절하게 구사해 보자.’
마운드에 오르는 성낙기에게 리얼무토가 건넨 말. 한 타자를 따로 언급해서 볼 배합을 신경 써야 할 만큼 지안카를로는 슬러거 중의 슬러거다.
양키스의 상위 타선을 상대로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시리즈 전체의 윤곽이 드러난다. 만약 첫 경기에서 약점을 보이면 시리즈 내내 강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타선을 견뎌야만 한다.
타석에서의 자신감은 컨디션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 3할을 치던 타자도 특정 투수에게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면 1할대의 빈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1할 타자도 어떤 투수를 상대로는 3할을 치기도 한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징크스로 이어진다.
일단은 월드시리즈 같은 경기에서 그런 징크스의 첫 출발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낙기는 지안카를로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택했다.
헤이드 존이 전해준 구질 중, (95/100)라는 가장 높은 스탯을 자랑하는 구질. 타자의 몸 쪽 치기 좋은 높이로 들어오는 듯하다가 외곽으로 휘면서 떨어지는 각이 예술이다.
헤이드 존이 살아 있을 땐, 슬라이더 구사율을 30%까지 던진 적도 있다. 그 당시의 타자들은 예리하게 꺾이는 슬라이더에 속수무책이었다.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일단은 성공이다. 치기 좋은 코스로 날아오자 가차 없이 배트를 휘두르는 지안카를로. 마지막엔 슬라이더임을 눈치채고 배트를 내려 어퍼스윙으로 변화했다.
포심패스트볼 궤적을 노렸던 레벨스윙에서 배트 컨트롤을 통해 어퍼스윙으로 변환하는 어려운 작업을 지안카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공과의 차이는 5~6cm 남짓. 그가 얼마나 공을 따라가는 능력이 탁월한지를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보여준다. 성낙기는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2구를 뿌렸다.
딱-
파울.
2구로 던진 공은 바깥쪽의 낮은 투심패스트볼이었다. 지안카를로는 97마일로 들어오는 그 공을 어렵지 않게 쳐냈다.
타구는 1루 측 관중석 하단에 맞고 튀겼다. 배트 스피드가 굉장한 수준이다. 혹시나 들어올지 모를 브레이킹 볼에 대비하면서도 날카로운 스윙을 한다.
성낙기는 포크볼을 요구하는 리얼무토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 던진 제 3구.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 몸 쪽 체인지업이었습니다. 타자 앞까지 포심패스트볼처럼 오다가 절묘하게 떨어집니다. 85마일이 나온 체인지업에 지안카를로 속절없이 당합니다.”
“정말 대단한 승부였네요. 아론 저지와 지안카를로를 상대로 전혀 피해가지 않는 정면 승부에서 모두 이겨내는군요. 성낙기 투수가 두 명의 홈런 타자에게 연속으로 삼구 삼진을 빼앗았어요. 한마디로 경이적입니다. 두 타자의 홈런 합이 100을 넘어가는데 두려움 없이 던지네요.”
“그렇습니다. 엄청난 강심장입니다. 보통 월드시리즈에 들어오면 긴장을 한다거나 부담을 가져서 제구력이 흔들리기도 하는데요. 이 투수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겨우 두 타자지만 이 두 타자가 메이저리그를 이끄는 타자들입니다. 그런 타자를 상대로… 후우, 저 같으면 살 떨려서 못 던질 것 같은데 말이죠.”
랜 존슨은 마지막에 엄살을 부렸다. 자신이 월드시리즈에 섰던 그 무대를 회상하는 듯 눈가가 촉촉이 젖은 랜 존슨.
두 명의 해설자가 극찬을 할 만큼 월드시리즈에서 강타자 둘을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운다는 건 만화 같은 이야기다.
뉴욕 양키스 팬들도 어이없어 할 만큼 충격적인 삼진 퍼레이드. 경기장 분위기가 마이애미로 넘어오고 있었다. 성낙기는 5번 타자 미구엘 안두자(Miguel Andujar)와 6번 타일러 오스틴 (Tyler Austin)을 각각 삼구 삼진과 내야 땅볼로 잡아내고 2회를 마쳤다.
결과적으로 3, 4, 5 클린업트리오를 모두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운 셈이었다.
***
루이스 시트릿은 역시 만만찮은 투수였다. 포스트시즌 경험도 많다보니 다소 서두르는 마이애미 타자들을 상대로 5회까지 4안타 2볼넷, 무실점 행진 중이다. 성낙기 역시 2안타 무실점. 그 2안타 중 제대로 맞은 타구는 하나도 없었다.
“야아… 어떻게 저 투수는 볼넷 하나가 없냐. 사람이라면 제구력도 가끔 흔들리고 이러는 것 아니야?”
“쟨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있어.”
“말이 되는 소리야? 피를 뽑은 적도 여러 번인데.”
“그야 DNA 검사나 혈액형 검사하는 피 뽑기가 아니잖아. 단순히 약물 복용 여부겠지.”
“그래서 뭐, 외계인이라는 말이라도 하려고?”
“외계인은 아니라도 쟤 팔에 뭔가 심어진 게 틀림없어. 추측하면 기계장치 같은 거지. 터미네이터처럼 사람의 가죽으로 그런 시스템을 덮고 있을 거야.”
“헨드릭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좋겠어. 네 말대로라면 우린 인간과 인조인간의 싸움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런 승부를 보려고 5만 명이 줄을 서서 표를 끊은 거고 말이야.”
이젠 별 걸로 갑론을박을 할 정도로 성낙기가 양키스를 상대로 던진 무실점 투구는 양키스 팬들에게 혼란을 가져왔다. 5회까지 9삼진이나 당한 자기 팀 타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흘러가던 6회 초에 마이애미는 기회를 잡았다.
3번 타자 가렛 쿠퍼가 루이스 시크릿의 초구를 휘둘러 깨끗한 중견수 앞 안타를 뽑아냈다. 노아웃에 1루의 찬스. 다음 타자는 브라이언 앤더슨으로 디비전시리즈 0.214, 챔피언십시리즈 0.222의 타율로 제 몫을 해주지 못했다.
앞선 두 타석 역시 범타로 물러났다. 그런 브라이언이니 어느 때보다 긴장했고 어느 때보다 안타를 향한 열망이 강했다. 계속 이런 식의 빈타라면 월드시리즈에서 하위 타선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알렉스 비토 감독의 스타일이 본래 이름값보다는 현재의 컨디션 위주니까.
딱.
파울.
가렛 쿠퍼가 그랬던 것처럼 브라이언도 초구를 노렸으나, 바깥쪽 높은 공이었다. 포스트시즌 들어 볼이 스트라이크로 보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볼에 배트를 휘두르고 나면 투수가 좋은 공을 줄 확률은 더 떨어진다. 유인구로도 충분한데 스트라이크를 굳이 던진 이유가 없다.
팡.
볼.
이번 역시 높은 패스트볼이었는데 참아냈다.
팡.
볼.
이번엔 바깥쪽 커브로 브라이언을 유인했다. 높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오다가 원 바운드에 가깝게 아래로 꺾이는 파워 커브. 브라이언의 배트가 마중 나가다가 가까스로 당겨졌다.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가 고개를 갸웃,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신중해진 거야? 브라이언은 원래 호쾌한 스윙의 대명사잖아.”
“공을 치게 줘야 말이지.”
“후훗, 어지간하면 타자가 만들어서 치는 게 안타지. 한 가운데로 던지는 볼을 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끙, 알았다. 만들어 쳐볼게.”
“아, 그렇다고 안 되는 걸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고.”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루이스 시크릿의 공이 몸 쪽으로 들어왔다. 아니, 몸 쪽으로 들어오다가 바깥쪽으로 꺾이는 슬라이더다. 브라이언의 눈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왔다.’
브라이언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부터 루이스 시크릿의 슬라이더를 노렸다. 어퍼 스윙을 하는 자신의 스윙으로 볼 때, 아래로 꺼지는 슬라이더를 노리는 것이 맞다. 지금까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배팅을 해왔지만, 워낙 안 맞으니 하나만 노리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브라이언의 생각은 적중했다.
따악-
브라이언이 친 공이 투수를 지나고 2루 베이스를 지나 중견수 쪽으로 날아갔다. 중견수가 타구를 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고 또 물러나다가 펜스에 다다르자 공에서 눈을 떼고 멍한 모습으로 마운드 쪽을 바라보았다.
포수는 일어섰고 투수는 땅을 바라보고 있다. 마이애미 관중석에서 일제히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 귀가 울렸다.
브라이언 앤더슨의 부진을 일거에 만회하는 투런 홈런. 팀의 4번 타자는 부진하다가도 중요한 경기에서 이처럼 해줘야 한다.
알렉스 비토 감독이 다소 부진했던 브라이언을 그대로 안고 간 것도 그의 영양가 있는 타점 생산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라이언 앤더슨은 감독의 믿음에 그대로 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