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화 월드시리즈-뉴욕 양키스 2
양키스타디움은 4만 7천여 석의 좌석이 매진된 가운데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양키스타디움인 만큼 뉴욕 양키스 팬들이 관중석의 2/3 이상을 메우고 있었다.
성낙기의 챔피언십시리즈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낮은 기대치로 마이애미 관중의 숫자는 더 적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마이애미 팬들에 비해 양키스 팬들은 들떠 있는 경기장 분위기였다.
마치 축제의 현장에 온 양,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양키스 팬들. 마이애미쯤은 가볍게 셧아웃 시킬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다. 월드시리즈 2연패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SPN의 오스왈도입니다. 오늘 해설자로 제임스 씨와 레전드 투수죠. 랜 존슨 씨 모셨습니다. 드디어 월드시리즈가 열리는 날입니다. 날씨는 쾌청합니다. 월드시리즈 2연패를 노리는 뉴욕 양키스와 와일드카드를 손에 쥐고 올라온 마이애미의 월드시리즈 1차전이 시작됩니다.”
“네, 역사적인 날이네요. 이렇게 올해도 변함없이 월드시리즈가 열립니다. 누가 우승을 하든 월드 시리즈는 전 세계 야구인들의 축제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 이 시간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한 장면으로 월드시리즈 1차전이 각인되기를 바랍니다.”
“어, 제임스 씨가 시적인 표현을 하셨군요. 인생의 한 장면이라… 저에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랜 존슨씨도 한마디 하시죠. 사진 찍느라 여전히 바쁘시죠?”
“네, 사진은 그저 취미일 뿐이고요. 양키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이 경기에 해설을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팀 모두 후회 없는 경기를 치르길 바랍니다.”
캐스터와 해설자들도 곧 열리는 월드시리즈가 흥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시즌의 모든 것을 이 7차전에 쏟아부어야 한다. 프로의 세계에서 2등은 무의미한 들러리일 뿐이다.
어쩌면 시즌 162경기를 월드시리즈를 위해 치러냈는지도 모른다. 아니, 맞다. 시즌 성적도 기록에는 남지만 사람들은 그 해의 월드시리즈 우승팀만을 기억할 것이다.
성낙기는 리얼무토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관중석에 자리 잡은 허봉호 감독이 보였고 김아경이 보였다. 그들과 좀 떨어진 특별석에 성낙기의 부모와 서희와 장하연이 나란히 앉아 있다. 말하자면, 성낙기의 피와 살 같은 인맥이 총출동한 셈이다.
“플레이볼!”
주심의 경기 시작 선언과 동시에 양키스타디움에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축제의 시작이다. 마운드엔 루이스 시크릿이 서서 이 순간을 즐기는 듯 관중석을 한 차례 훑어본다. 그에게도 월드시리즈 개막전의 선발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에서는 2선발로 출전했지만, 올해는 팀의 에이스로 거듭남과 동시에 월드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끊는 중책을 맡았으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수많은 관중의 시선과 전 세계적으로 TV를 시청하고 있을 수억 명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은 일생을 통틀어 진귀한 경험일 터.
루이스 시크릿은 첫 타자를 맞아 초구부터 전력투구했다. 최고 구속 101마일의 강속구에 면도날 슬라이더를 주 무기로 삼는 그의 초구는 97마일이 찍혔다. 아직 몸이 덜 풀렸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컨디션이다.
딱-
“유격수 땅볼로 아웃 당하는 퀸튼입니다. 1회부터 스피드가 대단합니다.”
양키스 팬들의 바람대로 1회 초를 삼자범퇴로 끝낸 루이스 시크릿. 3번 타자 가렛 쿠퍼는 슬라이더에 타이밍을 빼앗긴 채 투수 땅볼 아웃을 당했다.
오늘 경기에서 득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징조가 보이고 있다. 1회 말, 수비를 하기 위해 마이애미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고, 성낙기는 마이애미 팬들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마운드에 섰다.
-야, 성낙기. 오랜만이지? 자식이 살아 있었네.
‘어어? 실바… 맞아요?’
-실바 아니다. 헤이드 존이야.
‘억, 존까지… 두 분이 함께 오셨네요.’
-월드시리즈에 올 거라고 했잖아. 이래봬도 우리가 약속 하나는 칼이지.
‘와, 얼굴 잊어 먹겠네. 그동안 도대체 어디서 뭘 하셨던 거예요?’
-어디서 뭐했을 것 같냐. 죽은 인간들이 저승에서 할 게 뭐겠냐고.
‘글쎄… 요.’
-야구 역사에 관한 서적을 집필하는 중이란다. 저승에도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귀신들이 직접 경기를 할 수는 없고… 대리 만족이나 하라고 시대별 월드시리즈를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응, 실바 말이 맞아. 난 얼마 전에 과로 때문에 코피까지 흘렸지.
-야, 그건 니가 콧구멍 쑤시다가 그리된 거고.
리얼무토가 일어서서 성낙기에게 뭐 하냐는 몸짓을 보냈다. 마운드에 올라왔으면 연습구를 던져야 하는데 엉뚱한 곳을 보면서 미적대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포수가 너 본다. 이제 경기에 집중해. 우린 전광판 위에서 응원할게. 잘할 수 있지?
‘두 분이 응원까지 오셨는데 잘해야죠.’
성낙기는 몇 차례의 연습구를 마치고 월드시리즈 첫 타자와 마주했다. 압도적인 아메리칸리그 1위 팀이자,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의 공격 첨병 글레이버 토레스(Gleyber Torres).
두말하면 입 아픈 선수다. 0.337의 엄청난 타율에 17홈런 33도루에 빛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1번 타자. 지난 시즌 수위타자였으며 월드시리즈에서 3할 후반대의 맹타를 휘두르며 워싱턴 내셔널스의 꿈을 좌절시킨 타자 중 한 명이다.
185cm의 키에 79kg의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몸이지만 강한 펀치력까지 갖춘 완성형 타자가 바로 그였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가 되자 마이애미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드디어 월드시리즈를 치른다는 감격과 부담이 큰 경기에서 초구부터 정면 승부를 펼치는 성낙기에 대한 경외도 함께였다. 전광판에 97마일(mile)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초구부터 대단합니다. 월드시리즈 개막전에 선 투수다운 스피드! 글레이버 토레스, 초구를 그냥 보냅니다.”
“성낙기 투수, 초구부터 강한 공을 뿌리네요. 다분히 글레이버 토레스를 의식한 투구일 테죠. 살아나가면 골치가 아파지는 타자입니다.”
팡.
볼.
성낙기의 2구는 타자 몸 쪽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 역시 타자의 선구안이 최상이다. 성낙기는 3구로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졌다.
딱-
유격수 앞으로 굴러가는 타구. 홀랜드가 역동작으로 잡아내며 1루로 송구했다. 무리 없이 이어지는 수비동작과 강한 송구가 1루로 날아갔다. 여유 있게 타자를 잡아낼 타이밍이다.
팡.
“아, 아웃!”
그런데 글레이버 토레스가 얼마나 빠른지 1루에서 거의 접전이었다. 1루심이 세이프인지 아웃인지 잠시 헷갈렸을 정도로 말이다. 괜히 33도루를 한 게 아니다. 첫 타석은 간신히 잡아냈지만 시리즈 내내 마이애미 내야를 흔들 만한 주력.
‘세상에, 라이징패스트볼을 땅볼로 만들었어.’
하지만 정작 성낙기를 긴장시킨 건 떠오르는 공을 땅볼 타구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방금 전의 그 타구는 라이징패스트볼의 떠오름을 예측하고 쳐낸, 그야말로 준비된 타구였다.
타자의 재능도 재능이지만 양키스 타선이 성낙기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연구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낙기가 첫 타자를 잡아내고도 인상을 찡그린 이유.
무려 9cm의 떠오름을 보이는 라이징패스트볼이 유격수 앞으로 굴러갔다는 건 성낙기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다. 라이징패스트볼을 상대하는 타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뜬 공을 때려냈었다. 아니면 헛스윙이거나.
성낙기는 2번 타자를 맞아 2구만에 좌익수 플라이로 솎아냈다. 성낙기는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타자들의 헛스윙이 아직 없다. 1이닝에 한두 개는 거뜬히 잡아내던 삼진 아닌가. 그러는 사이, 3번 타자가 타석에 섰다.
지구상 최고의 타자 중 하나인 그는 아론 저지. 올해 57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한 201cm에 127kg의 인간 같지 않은 타자다.
“후욱…….”
성낙기는 입으로 숨을 들이쉬었다. 시즌 때는 상대적 우위를 보였지만 1, 2번 타자들의 타구를 보고 나니 압박이 상당하다. 성낙기는 긴장하는 자신을 새삼스럽게 의식한 뒤, 씨익 웃었다.
‘뭐 하는 거냐, 성낙기답지 않게.’
성낙기는 타자의 압박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자신을 어이없어했다. 아무리 월드시리즈라 한들, 이렇게 떨다니. 타자가 아론 저지라지만 그도 인간이다. 그의 홈런은 만만한 투수들에게서 뽑아낸 것일 뿐, 성낙기가 허용한 홈런은 단 하나다. 그것도 스탯이 더 낮았던 때의 일이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세요]
[세기의 강속구가 95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95로 오릅니다]
***
난데없는 상태창의 반응에 성낙기는 잠시 주의를 환기했다. 처음엔 스탯 증가만 딱딱하게 알려주던 상태창이 진화했다. 성낙기의 긴장을 풀어줄 줄도 알고 중요한 순간, 스탯을 올려줌으로써 자신감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더구나 95까지 오른 포심패스트볼의 스탯을 km로 환산하면 160km다. 마일로는 99.5마일.
와일드카드부터 월드시리즈까지 오른 스탯이 정규 시즌 동안의 스탯 증가를 능가하고 있다. 마치 가을 야구를 하게 되면 시즌 때의 구위로는 부족하다는 걸 상태창 스스로 느끼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스탯이 오르는 상황이 절묘하다.
슈욱!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론 저지는 스윙을 한 후에 성낙기를 쳐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생각했던 스피드보다 더, 아니, 훨씬 빠르다.
“어아… 저 투수 뭐야. 99마일을 던졌어.”
“나도 놀랐어. 저 투수가 원래 제구력 투수 아니었니?”
“아론 저지의 배트 스피드가 공을 따라가지 못하다니.”
“루이스 시크릿이 던진 공보다 빨라. 저건 말이 안 돼. 누가 설명 좀 부탁한다.”
“휴즈, UCLA 수학과 다니는 네가 모르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성낙기는 아론 저지가 뜻밖의 스피드에 당황하는 틈을 타, 연속으로 99마일의 공을 뿌리며 삼 구 삼진을 잡아냈다. 3구로 던진 마지막 공은 몸 쪽 하이볼이었는데 아론 저지는 평소의 선구안을 잃어버린 듯 공과 큰 격차를 보이며 배트를 휘둘렀다.
믿었던 아론 저지가 간단히 처리되자 뉴욕 양키스 팬들은 일순 고요해졌다. 성낙기의 믿기 힘든 공 스피드와 살아 오르는 구위에 더하여 거물 타자를 잡고도 당연한 듯 공을 건네받는 모습의 투수. 그 무덤덤한 반응에 양키스 팬들은 오히려 불길한 징후를 느꼈다.
“잘했어, 성낙기!”
“아론 저지를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우다니, 네가 사람이야?”
“우린 성낙기 너만 믿는다아!”
더그아웃에 들어가자 성낙기의 투구에 다들 한마디씩 격려의 말을 던졌다. 양키스타디움에 들어서면서부터 위축되었던 선수들은 자기 팀 에이스의 강력한 투구를 보고 자신감을 찾은 모습이다.
와일드카드,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를 차례로 거치면서 던질수록 강해지는 언터처블(Untouchable)투수.
바로 그런 투수가 지키는 마운드가 있는 한, 거함 양키스를 상대로도 쉽게 지지는 않겠다는 믿음이 선수들의 가슴에 자리하는 중이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마이애미는 경기를 치를수록 원 팀으로 똘똘 뭉쳐 단단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