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챔피언십시리즈-워싱턴 내셔널스 10
따악.
“좌익수 앞 안타입니다. 3회 초, 노아웃에 주자를 내보내는 워싱턴 내셔널스!”
“성낙기 선수가 공을 안정적으로 잡아내네요. 바운드가 조금 불규칙해 보였는데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볼거리를 선사하는 성낙기 선수입니다.”
“2회 초엔 2루타를 치고도 후속타 불발로 홈에 들어오지 못했죠. 지금까지는 타격과 수비에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호세 우레나는 노아웃에 안타를 맞고 흔들렸다. 다음 타자에게 볼넷. 노아웃 1, 2루의 위기를 맞았다. 다음 타자는 투수인 트레버 고트. 투수지만 타격도 곧잘 하는 선수다.
따악.
9번으로 나온 투수가 친 공은 3루수의 키를 넘어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안타였다. 성낙기는 파울라인 쪽으로 질주했다. 2루 주자가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올 타구였다. 3루 코치는 볼 것도 없다는 듯 홈을 가리켰고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파고들었다.
그즈음, 성낙기는 공을 잡았다. 2루 주자는 벌써 3루와 홈 플레이트 중간까지 다다라 있다. 던져봐야 아웃시키기도 힘들고 주자가 3루를 노릴지도 모를 상황.
하지만 성낙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짧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아니, 그건 투구를 할 때 쓰라고…….]
‘시끄러.’
“성낙기, 홈에 공을 던집니다. 먼 거리입니다!”
캐스터의 말대로 거리가 멀었다. 파울 라인 근처에서 공을 잡았기에 몸의 중심은 파울 존으로 쏠려 있었고 공을 잡을 때의 위치는 발이 빠른 타자라면 2루타를 노려봄 직한 좌익수 깊은 곳이었다.
그런 위치에서 2루 주자를 잡겠다고 홈에 공을 뿌리는 것은 누가 보아도 미친 짓. 하나, 성낙기가 던진 공은 상상을 벗어났다. 보통 빨랫줄 송구라고 하는 그런 공이 홈으로 날아갔다. 마치 어깨 좋은 유격수가 공을 잡아 1루에 빨랫줄 송구를 하는 듯한 그런 송구가 홈으로 파고드는 주자 뒤에서 날아오고 있다.
“어어……!”
일어서서 주자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리얼무토는 이미 홈을 포기했고 주자가 3루까지 가지 못하게 하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외야에서 곧장 날아오는 공을 보았을 때, 당황했다. 설마 홈 승부를 하리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고 엄청난 속도로 공이 날아오리라는 것도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 홈으로 직격하는 성낙기의 송구! 엄청나게 빠릅니다. 리얼무토가 잡아서 주자에게 몸을 날립니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맷 레이놀드! 세이프입니까!”
주심의 오른팔이 번쩍 들렸고 워싱턴 관중들은 탄식했다. 저 안타로 홈에서 아웃을 당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성낙기가 던진 송구는 리얼무토의 손바닥이 아릴 만큼의 스피드로 날아갔고 2루 주자를 잡아냈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스킬을 사용한 송구의 속도는 최소 100마일이 넘었고 리얼무토가 받는 순간까지 힘 있게 들어왔다.
보고도 믿기 힘든, 그야말로 올해의 수비라 할 만한 장면을 연출한 성낙기는 아웃을 잡아내고도 태연했다.
‘저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워싱턴의 데이브 감독은 경악한 채, 그라운드를 응시할 뿐이었다. 호세 우레나는 성낙기에게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했고 워싱턴의 1번 타자 트레아 터너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초구로 들어온 슬라이더를 휘둘러 몸의 중심이 흐트러진 상태로 2루 땅볼을 때렸다.
“아웃.”
“아웃.”
1루 주자는 2루에서 포스 아웃, 타자 주자 역시 1루에서 아웃 당했다. 노아웃 1, 2루의 찬스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좌익수의 호수비 하나가 호세 우레나의 투구에 영향을 미쳤고 타자에게도 성급한 승부를 유도하게 만든 측면이 있었다. 그 좌익수는 성낙기였다.
***
3회 말 위기를 극적으로 벗어난 뒤, 더그아웃에 들어온 선수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마치 용궁에 갔다 온 듯한 표정들은 그들이 이 경기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까지 와서 좌절하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더구나 7차전까지 와서 말이다.
4회 초, 마이애미의 공격은 가렛 쿠퍼부터였다. 타선이 최상이다. 가렛 쿠퍼와 브라이언 앤더슨, 그리고 디카엘로 대신 5번을 맡은 성낙기의 타순이다. 성낙기의 좌익수 투입에 반신반의하던 선수들은 3회의 송구 하나로 의심을 거뒀다.
“성낙기, 내가 프로 생활하면서 그런 송구는 처음 봤다.”
“정말 기막힌 송구였어.”
“넌 도대체가 사람 같지 않아. 그 먼 거리에서 다이렉트 송구라니.”
성낙기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표정들이었다. 칭찬을 하는 선수들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빛난다. 성낙기에게는 뭔가 해볼 만한 힘이 생기고 있다는 징후로 여겨졌다.
약팀이 강팀에게 이기는 방법은 집념뿐, 그 집념이 선수들에게서 보였다.
가렛 쿠퍼가 들어서자 트레버 고트는 연달아 볼을 던졌다. 이후, 두 번의 커트 후에 볼넷. 위기 뒤의 찬스라더니 그 말이 맞아 들어간다.
“타임!”
워싱턴의 데이브 감독은 투수 교체를 요청했고 마운드엔 코다 글로버가 올라왔다.
늘 제몫을 해주는 선수. 4번 타자로 나선 브라이언 앤더슨은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드디어 성낙기 투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아, 오늘만큼은 투수라고 불러선 안 되겠군요. 좌익수를 맡으면서 2루타를 때려낸 바 있는 성낙기 선수. 코다 글로버 신중합니다.”
따악.
성낙기가 친 공은 2회와 마찬가지고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 코스였다. 1루 주자는 3루에 멈췄고 성낙기는 2루까지 여유 있게 안착했다. 다음 타자는 중견수를 맡고 있는 시에라였다.
타율은 일반 외야수보다 떨어지는 2할 중반이지만 수비력이 발군이고 시즌 22홈런을 때려냈다. 득점권에 강한 타자라는 인식도 제법 있는 편.
볼.
볼.
“스트라이크.”
볼.
그래서인지 코다 글로버가 지나치게 신중하다. 1루가 비었으니 좋은 공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인데 뒤에 대기 중인 유격수 홀랜드는 시에라보다 나은 타율을 기록 중인 교타자다. 발이 빨라서 병살타도 거의 없다.
볼 카운트 스리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코다 글로버와 페드로 세베리노 배터리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만루 작전으로 갈 것인가, 승부를 할 것인가. 두렵긴 시에라가 더 두렵다. 하지만 만루 작전은 대량 실점의 위험도 늘 상존한다. 페드로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포심에 강한 타자니까 바깥쪽 슬라이더를 하나 던져보자. 볼이면 하는 수 없고.”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페드로는 원했다. 타자가 잡아당기는 유형인 것도 참작했다. 그립을 쥐는 코다 글로버의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헛스윙하는 타자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전력투구.
따악.
시에라는 눈치가 빠른 선수였다.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갈 때부터 승부구를 짐작했고 포심패스트볼 대신 변화구를 예상했다. 시에라가 친 공이 우익수 앞에 떨어졌다.
다소 얕은 공. 어깨가 좋은 우익수라면 충분히 홈에서 2루 주자를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가렛 쿠퍼는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온 뒤, 뒤이어 따라올 성낙기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엇!”
가렛 쿠퍼는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성낙기는 3루를 거쳐 홈 플레이트에 거의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발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데, 2루 주자가 3루 주자를 곧바로 따라오다니.
3루 주자라고 여유를 부렸으면 추월당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빠른 성낙기의 엄청난 주루 플레이. 리키 헨더슨의 도주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중이다.
우익수는 성낙기의 엄청난 주력에 공을 던져보지도 못했다. 시에라가 1루에서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고 마이애미 팬들은 시에라를 연호하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2:0으로 마이애미의 선취 득점 성공.
***
경기는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7회에 워싱턴의 반격으로 다시 뜨거워졌다. 데일 카론은 투아웃 주자 1, 2에 스리런을 얻어맞았다. 잘 던지다가도 가끔 큰 것 한 방을 허용하는 데일 카론. 3:2로 경기 역전.
경기는 7회의 스코어 그대로 9회까지 흘러갔다. 이제 9회 초 공격만 남은 상황. 이번에도 타순은 괜찮다. 4번 브라이언 앤더슨부터니까. 브라이언은 시리즈 내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워싱턴의 마무리 조 로스는 1점을 지키기 위해 마운드에 섰다. 그의 두 어깨엔 워싱턴 야구팬들의 염원과 구단주와 단장, 감독의 기대와 시즌이 끝난 후의 연봉 계약 등의 엄청난 무게가 얹혀 있다.
따악.
브라이언이 친 공이 3루수 앞에서 바운드되며 글러브를 맞고 흘렀다. 브라이언은 죽을힘을 다해 1루로 달렸고 공은 1루로 날아왔다. 다른 타자라면 쉽게 살 텐데 브라이언의 발은 워낙 느리다.
“세이프!”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판정을 받은 브라이언은 ‘헤’, 웃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다음 타자 성낙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조 로스는 좋은 공을 줄 생각이 없는지 초구부터 바깥쪽 높은 공을 찔러왔다.
볼.
볼.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성낙기와는 최대한 어렵게 갈 생각이었다. 노아웃에 주자를 쌓는다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성낙기는 이미 상식을 벗어난 선수. 볼 질을 하다가 딸려오지 않으면 하는 수 없다.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그런데 바깥쪽으로 한참 벗어난 슬라이더에 성낙기의 배트가 나왔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조 로스는 몸 쪽 하이패스트볼을 던졌다.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이건… 이야기가 더 달라진다.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면 아웃 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
볼넷을 내주면 노아웃 1, 2루로 득점권이지만, 성낙기를 잘 처리하면 다음 타자와의 승부는 병살로 경기를 끝내는 것도 가능하다.
조 로스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 벗어나는 슬라이더를 다시 던졌다. 3구로 던져 스윙을 얻어낸 구종인데 이번엔 확실한 헛스윙을 위해 바깥쪽에서 공 두어 개 빠지는 지점을 노렸다. 그러니까 아까보다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운 위치였고 타자에 따라 배트가 닿는 코스였다.
따악.
성낙기가 슬라이더를 따라가면서 몸의 중심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쏠렸다. 배트에 맞추기 위해 엉덩이를 빼고 칠 수밖에 없는 코스의 공이다. 성낙기는 그렇게라도 치려는 의지가 강했다. 조 로스의 평소 구위를 생각하면 볼넷으로 나간들 득점을 한다는 보장이 없고 오늘 타자로 경기에 출전한 이상,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고 싶었다.
성낙기가 친 공이 우익수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갑니다. 우익수 뒤로! 뒤로! 가볍게 친 공이… 어어… 넘어갔습니다……! 오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성낙기의 투런 홈런!”
“…한마디로 미쳤습니다. 엉덩이를 빼고 친 타구가 담장을 넘기네요. 외계인도 저런 외계인이 없습니다… 괴물의 출현입니다……!”
경기장은 난장판.
마이애미 팬들의 고함에 다른 소리들은 모두 묻혔다. 그들은 옆 사람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고, 처음 보는 젊은 남녀는 서로를 껴안고 춤을 췄다. 조 로스는 나머지 타자들을 삼자범퇴로 잡아내고 씁쓸한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들어갔다.
모두가 흥분된 상황에서 맞은 9회 말, 야를린 가르시아는 조 로스와 마찬가지의 엄청난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고 마운드에 섰다.
경기 스코어 4:3의 아슬아슬한 리드.
월드시리즈 진출과 챔피언십시리즈 패배의 양 갈래 길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