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챔피언십시리즈-워싱턴 내셔널스 8
4차전 역시 말린스파크에서 열렸고 마이애미는 어제의 승리가 무색하게 2:9로 경기를 내줬다. 워싱턴의 선발 혹시나 했던 마이애미 팬들은 예상대로 경기를 내주자 의기소침해졌다. 전문가들의 예상은 5차전 역시 마이애미가 밀린다는 거였고 6차전에 등판할 성낙기가 승을 거두더라도 7차전의 승리는 워싱턴이 가져갈 것으로 판단했다.
객관적인 전력상, 당연한 예상이기도 했다.
한편 성낙기는 가족들의 뜻밖의 방문에 조금 놀랐다. 챔피언십시리즈 중 미국에 온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서희와 장하연까지 함께 왔다. 경기가 끝나고 성낙기는 자신의 차에 모두를 태우고 코리안바베큐 식당으로 갔다. 낮 경기가 끝난 뒤, 초저녁의 마이애미는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어째 우리가 오자마자 마이애미가 지는 거냐.”
“원래 졌다 이겼다, 하는 거죠. 그보다 장사는 어떻게 하시고 여기까지 오셨어요?”
“장사가 문제냐. 아들이 큰 경기를 하는데 와서 응원해야지.”
“요즘도 막걸리 많이 드세요?”
“아니다. 이젠 몸도 안 따라줘서 많이 못 마신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아버진 술을 줄이셔야 해요.”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동안, 삼겹살이 나왔다. 성낙기는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웠다. 불판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이 집 사장이 종돈 농가와 계약을 맺고 관리하는 최고급 삼겹살이어서 연기에 올라오는 돼지 냄새가 군침을 돌게 만든다. 양용구 씨는 삼겹살이 익어가자 소주를 시켰고 성낙기의 어머니 양연숙이 핀잔을 줬다.
“아이, 엄마. 아빠 드시라고 하세요. 여기까지 와서 부부 싸움 할라 그래.”
여동생 성서희가 아빠 편을 든다. 성용구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역시 내가 딸을 낳길 잘했다는 내심이 읽힐 만큼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
삼겹살을 상추쌈에 싸서 서희의 입에 갖다 대자 서희가 냉큼 받아먹는다.
“하이고,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 작작 좀 해.”
양연숙이 둘을 꼬나봤고 장하연이 환하게 웃었다. 웃는 볼에 작은 보조개가 쏙 들어간다. 귀엽다.
“자, 너도 한잔해. 요즘 고생이 많은 거 알고 있다. 힘들 때는 한잔하고 회포를 푸는 게 최고야.”
“아니, 이 양반이 미쳤어. 내일 경기하는 애한테 별짓을 다하네.”
“허, 뭘 모르누만. 낙기는 어제 던졌는데 내일 어떻게 경기에 나가나. 더그아웃에서 그냥 쉬는 거지.”
“저 내일 던질 건데요?”
“엉? 내일 던질 거라고? 낙기 네가 아빠를 무시하는구나. 야구 선수 아빠가 투수 로테이션도 모르겠냐. 감독은 아마 6차전에 선발로 내세울 거야. 맞지?”
“아니라니까요. 내일 저 나갑니다.”
“너 그러다가 팔이 견디질 못할 건데? 아서라, 팀을 위한 마음도 좋지만 팔이 고장 나면 투수는 선수 생명 끝나는 거야. 80년대 최동원 투수가 그렇게 던지다가 몇 년 반짝하고 끝났지. 넌 그런 전철을 밟으면 안 돼.”
성용구 씨가 정색을 하고 성낙기에게 말했다. 방금 전의 가볍고 성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막걸리만 마시고 시장바닥 사람들과 농담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야구에 대한 지식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야구는 던지고 치는 정도로만 알 거라고 생각했던 성낙기는 아버지에게 왠지 미안했다. 그동안 아버지 나름대로 야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앎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내일 던지실 겁니까?]
숙소에 돌아와 잠을 청할 때 느닷없는 상태창의 질문. 처음 있는 일이다. 늘 수동적이었고 무언가를 물을 때만 반응하던 상태창이다. 왜 갑자기 적극적이 되었지?
‘뭐, 뭐야.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내일 경기 전까지 체력이 87이 됩니다. 참고하세요]
‘어, 그 정도면 상당하군. 잘하면 완투도 하겠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내일 말해줘도 될 텐데 이 밤중에 굳이 말하는 이유가 뭐지?’
[이유 없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너도 외로움 타나 보지? 하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가만있을 필요는 없겠지.’
날이 밝았다. 5차전이 열리는 말린스파크는 오전부터 표를 구하려는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마이애미의 오늘 선발은 딕 에일로 정해졌다.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와 첫 시즌을 보내게 된 그는 트리플A를 거의 씹어 먹던 과거와 달리 7승 8패에 ERA 5.35의 차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시즌 중에 마이너리그에 내려가지 않고 메이저리그에서 버텨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만한 성적. 공은 빠르지만 여전히 제구력이 문제다. 다만, 후반기 몇 경기에선 제구가 잡힌 모습을 보였고 그런 날은 꽤 어려운 투수가 된다.
‘성낙기… 딕 에일이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지만 뒤를 부탁한다.’
선발로도 나갈 수 있다는 성낙기의 성화에 셜리번 코치는 절충을 택했다. 3차전과 마찬가지로 선발에 위기가 닥치면 바로 마운드를 이어받기로.
***
큰 경기 경험이 없는 딕 에일은 초반부터 흔들렸고 1회 1실점, 2회 2실점을 한 뒤, 3회에 주자를 1, 3루에 모아두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바통을 이어받은 성낙기는 내야 땅볼 때 비자책 1실점으로 스코어는 4:0으로 벌어졌다.
4회에 마이애미도 시에라의 투런 홈런으로 2점을 따라갔고, 6회에 연속 안타로 3득점, 기어이 경기를 뒤집었다. 6회까지 5:4로 1점을 앞선 상태로 성낙기는 마운드를 내려갔고, 데일 카론, 팬 파일러, 야를린 가르시아로 이어지는 필승조가 가동됐다.
“오, 이러다가 이기는 거 아니야?”
“3이닝만 막으면 이기는 거지. 난 필승조를 믿어.”
“마크 말이 맞아. 필승조 ERA가 2.87이거든. 충분히 막아낼 거야.”
팬들의 기대대로 데일 카론과 팬 파일러는 7, 8회를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9회 초엔 야를린 가르시아가 마무리로 나섰다. 야를린은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쉬었는지 첫 타자를 상대로 제구가 잡히지 않았다.
볼넷. 이어 내야 땅볼로 다음 타자를 잡아냈으나 그사이 주자는 2루로 진출했다.
주자를 득점권에 두고 등장한 타자는 공교롭게 브라이스 하퍼였다. 야를린 가르시아를 상대로 0.278의 만만찮은 타율을 기록했고 끝내기 홈런을 터뜨린 적도 있다. 마이애미의 벤치는 하는 수 없이 만루 작전에 들어갔다. 차라리 4번 타자 라파엘이 시즌 타율 0.235로 야를린 가르시아에게 약했다.
“볼넷!”
주심이 브라이스 하퍼를 보며 1루를 가리켰고 브라이스 하퍼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아웃 주자 1, 2루. 타석엔 라파엘 바티스타. 타율은 2할대지만 많은 홈런으로 타점을 생산하는 슬러거다.
야를린 가르시아에게 신중히 승부하라는 셜리번 투수 코치의 의중이 전달되었다. 여차하면 라파엘마저 거르고 브라이언 굿윈으로 가자는 작전이다. 문제는 브라이언 굿윈도 팀의 5번을 맡을 만큼의 펀치력이 있다는 것인데 라파엘 바티스타보다는 위압감이 덜한 편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최대한 유인을 해보고 안 되면 거를 수밖에.
볼.
볼.
파울.
3구는 슬라이더가 낮았는데 배트가 따라온다. 이로 보아 자신의 타석에서 뭔가를 이루겠다는 의욕이 충만하다. 다음 공도 야를린 가르시아는 바깥쪽 유인구를 던졌다.
이번 역시 볼. 볼 카운트 스리 볼 원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가 몰렸으니 굳이 승부할 필요가 없겠군. 스트라이크 잡으러 가다가 큰 걸 허용하겠어.”
알렉스 비토 감독의 말이 끝나자 셜리번 투수 코치가 리얼무토에게 사인을 냈다. 볼넷으로 내보내라는 사인이다.
‘몸 쪽 하이볼로 타자의 속내를 알아보는 건 어떨까.’
리얼무토는 완전히 빠진 공을 던져 볼넷을 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볼을 투수에게 요구했다. 야를린 가르시아는 사인을 받고 그럴듯하다 여겼다. 타자가 휘둘러 주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손해는 없는 코스의 공이다. 잘하면 플라이 볼로 강타자를 잡는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 사인을 받은 야를린 가르시아가 공을 뿌렸다.
따악.
셜리번 투수 코치의 볼넷 사인을 절반만 수용한 대가는 컸다. 리얼무토와 야를린 가르시아가 간과한 것은 의외로 몸 쪽 하이볼의 제구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타자를 속이기 위해서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지나치게 높지 않은 볼이면서 타자의 배트에는 걸리지 않는 높이여야 한다. 스트라이크 같은 볼이어야 한다는 말.
그 같은 유인구가 통하려면 상당한 제구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야를린 가르시아는 브라이스 하퍼를 볼넷으로 내보낸 마당에 라피엘 바티스타까지 내보내는 건 한 팀 마무리의 치욕이라 여겼다.
자신은 적어도 2점대의 ERA로 시즌을 마친 수준급 마무리다. 2.68의 방어율에 4승 5패 28세이브로 32세이브 포인트를 올린 마이애미의 수호신인 것이다.
그런 자존심의 발로로 이어진 투구는 스트라이크존보다 다소 높은 몸 쪽 코스로 들어갔지만, 라피엘 바티스타는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으로 냅다 배트를 돌렸다.
“어어? 라파엘 바티스타가 친 공이 높이 떠서 외야로 날아갑니다. 다소 빗맞은 듯한… 아우, 저게 넘어갑니다. 라파엘 바티스타의 괴력입니다.”
리얼무토와 야를린 가르시아가 걸었던 승부는 스리런 홈런으로 빛이 바랬다. 바티스타는 몸 쪽 높은 공을 펜스 너머로 넘길 만큼 몸의 무게 중심을 평소보다 위에 두고 있었고 예감은 적중했다. 시즌 중에 가끔 몸 쪽 하이볼에 속았던 그 패턴을 리얼무토가 기억할 거라고 봤다. 워싱턴 팬들이 모두 일어서서 펄쩍펄쩍 뛰었다.
4:5에서 단숨에 7:5를 만드는 스리런 홈런이라니.
“저 공으로 승부가 갈렸군. 상대 타자와의 수 싸움에서 말렸어.”
“하… 5차전을 이렇게 내주다니. 성낙기가 던져준 경기에서 지는군요.”
마이애미 구단주 데릭과 오스틴 단장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씁쓸하기 그지없다. 2승 3패면 나머지 6, 7차전을 모두 이겨야만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게다가 성낙기는 내일 하루를 쉬고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해도 6차전엔 나서기 힘들다.
오늘 만만찮은 이닝을 소화했기 때문.
야를린 가르시아는 주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나머지 타자를 잡아내며 그나마 추가 실점을 막았다. 9회 말은 3번 타자 가렛 쿠퍼부터이니 마이애미의 타순은 좋다.
“야, 우리도 칠 수 있어.”
“좋아, 가렛 쿠퍼만 나가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가렛! 가렛!”
매사에 긍정적인 마이애미 팬 몇이 분위기를 돋워봤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즌 중에도 딱히 타선의 응집력으로 역전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뽀록으로 홈런 정도는 치겠지만 지금은 연속 안타가 필요한 상황.
워싱턴의 마무리 조 로스는 연속 안타를 허용할 만큼 한가한 투수가 아니다.
언터처블이라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리그에서 알아주는 마무리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가렛 쿠퍼, 브라이언 앤더슨, 디카엘로는, 차례대로 워싱턴의 내야 수비연습을 시켜주며 삼자 범퇴로 물러났다.
5차전 7:5로 워싱턴 내셔널스의 승리. 챔피언십시리즈 스코어 2:3으로 마이애미의 열세.
모두 풀이 죽어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성낙기는 알렉스 비토 감독에게 다가갔다. 다짜고짜 감독에게 말했다.
“모레 선발로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