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화 팸피언십시리즈-워싱턴 내셔널스 7
“아, 성낙기가 나가는 겁니까? 그럼, 우린 언제 나가죠?”
데일 카론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셜리번 투수 코치에게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이런 투수 운용은 이해가 안 갔다. 필승조 불펜을 놔두고 선발 투수를 불펜으로 투입하다니.
변칙도 이런 변칙이 없다. 돌이켜 보자. 1차전 성낙기의 완봉승으로 불펜 투수들은 마냥 놀았다. 그러고 나서 맞이한 2차전은 샌디 알칸타라가 너무 일찍 무너지는 바람에 등판 시기를 놓쳤다. 워낙 점수 차가 커서 추격조를 냈던 감독의 결정을 이해한다.
한데, 3차전마저 6회 3:2 리드한 시점에 필승조 불펜을 외면하고 1차전의 선발 투수를 구원으로 쓰고 있다. 누가 봐도 상식 밖의 야구다.
자신을 비롯, 팬 파일러와 마무리 야를린 가르시아는 몸도 풀어보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내일은 당연히 나갈 거야. 오늘은 성낙기가 자원한 등판이고.”
“선수가 자원만 하면 등판을 시켜주나요? 그럼, 저도 내보내 주십시오.”
“1점 차 승부야. 이 경기를 놓치면 시리즈가 넘어간다는 걸 몰라?”
“시리즈는 깁니다.”
“어떤 시리즈건 승부처가 있지. 우리에겐 오늘이 그날이야. 네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팀을 위해 때를 기다리길 부탁한다.”
“…….”
셜리번 투수 코치의 말에 실린 진정성 때문에 데일 카론은 더 이상의 대꾸를 삼갔다. 평소 좋은 코치이기 때문에 말 못 할 고충이 있을 거라는 느낌도 있었다.
데일 카론은 푸우, 숨을 내쉰 후에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감독과 투수 코치의 예상대로 성낙기는 나머지 세 타자를 가볍게 아웃시키고 6회를 끝냈다.
‘괴물 같은 놈이야… 저러니 등판을 강하게 주장할 수도 없고.’
데일 카론은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성낙기를 보고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마이애미 타자들은 엔니 로메로가 내려간 뒤, 불펜 투수들의 공을 공략하지 못했고 성낙기 역시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경기는 어느덧 9회로 치달았다.
“9회 초 워싱턴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됩니다. 3:2로 1점 차로 앞서는 가운데 마이애미 말린스의 투수는 성낙기입니다. 9회 말에도 마무리 투수 대신 성낙기가 마운드에 서는군요. 알렉스 비토 감독 대단한 성낙기에 대한 믿음입니다.”
“공교롭게 선두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입니다. 그 다음 라파엘 바티스타, 브라이언 굿윈으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죠. 큰 거 한 방이면 바로 동점이 되는 만큼 성낙기 투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회에 마운드를 물려받은 후, 단 1안타만을 허용한 성낙기 투수입니다. 그것도 3루수 앞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일어났던 타구였는데 아슬아슬하게 1루에 세이프가 되었죠. 오늘은 거의 포심패스트볼 위주의 공을 던지고 있는 성낙기 투수. 타자들은 포심패스트볼을 예상하면서도 쉽게 공략하지 못합니다.”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부터였던가요. 포심패스트볼의 움직임이 시즌 때보다 심해졌죠. 공의 회전수가 많은 선수라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오늘 던지는 공들은 더 강력합니다. 엄청난 악력으로 공을 찍어 눌러야만 저런 움직임이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악력입니까.”
“릴리스포인트에서 공이 손을 떠나는 순간, 공엔 원심력이 작용합니다. 그 원심력을 잘 제어하지 못하면 볼 끝이 밋밋해집니다. 보통의 투수들은 원심력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전에 공을 누르면서 뿌리게 되죠. 하지만, 성낙기 투수는 공이 손을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의 원심력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좀 아리송한 개념이군요.”
“투수의 팔 스윙은 원을 그리게 되죠. 그리고 가장 높은 타점에서 조금 내려온 지점에서 공을 놓습니다.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을 놓는 거죠. 하지만 성낙기 투수는 그게 아닙니다. 가장 높은 위치에서 공을 던지죠. 그러고도 제어가 됩니다. 그 비결은 바로 엄청난 악력이죠. 그러니 회전수가 많고 볼 끝이 춤을 추는 거예요.”
“어려운 말씀인데…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 브라이스 하퍼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브라이스 하퍼는 오늘 3타석 1볼넷, 2안타를 때려냈다. 그중 하나는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였다. 그 안타가 점수와 연결되진 않았지만 타격감만큼은 최고조다. 성낙기는 원하는 스탯을 떠올렸다. 눈앞에 글귀가 보인다.
[라이징패스트볼이 (9cm/10cm)입니다]
[퀘이크볼이 (5cm/5cm)입니다]
오랫동안 오르지 않던 라이징패스트볼의 스탯이 1차전 승리와 함께 올랐다. 9cm면 이제 맥시멈에 1cm가 모자랄 뿐이다. 타자에게는 엄청난 공으로 보일 것이다. 일반적인 라이징패스트볼처럼 가라앉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9cm가 떠오르는 것이니 아마 홈플레이트에서는 20cm쯤 솟아오르는 걸로 보일 것이다.
직접 체감하는 상승폭이 어마어마한 공. 가라앉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략이 어려운 볼인데 타자에게는 미친 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퀘이크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성낙기는 마운드에서 던질 초구를 선택했다.
브라이스 하퍼 같은 힘 있는 타자에게는 최고의 무기를 아낌없이 던져야 한다. 삐끗하면 담장을 넘기는 파워를 갖춘 슬러거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로 던진 라이징패스트볼이 브라이스 하퍼의 무릎 쪽을 파고들다가 홈플레이트 앞에서 떠올라 허리 높이에서 탄착군을 형성했다. 타자가 보기엔 아래로 죽 깔리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는 공. 흡사 수풀을 기어가던 뱀이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몸을 날리는 것 같은 라이징패스트볼.
‘와, 이런 공을 던지나.’
브라이스 하퍼는 초구를 보면서 어이없어 했다. 시즌 때 상대했던 라이징패스트볼과는 또 다르다. 솟아오름이 더 심해졌고 스피드도 훨씬 빠르다. 다년간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군림하며 숱한 공들을 쳐왔지만, 이 라이징패스트볼처럼 변화가 심한 공은 처음이다.
가만 보면 스플리터의 궤적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다. 투수 판단 시점에서 아래로 꺾이는 스플리터를 쳐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이건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공이다.
생소하다 못해 두려움을 안겨주는 공, 그게 성낙기가 던지는 라이징패스트볼이었다.
“성낙기는… 어떻게 상대할 때마다 공이 달라지냐.”
초구 스트라이크를 먹은 브라이스 하퍼가 푸념하듯 리얼무토를 본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공을 받는 나도 죽을 맛이다.”
리얼무토는 브라이스 하퍼의 속내를 안다는 듯 동조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달랬다. 대화 내용만 보면 같은 팀이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방금 성낙기가 던진 라이징패스트볼만 해도 겨우 받아냈기에 리얼무토의 말은 사실에 가까웠다. 그리고 제 2구.
틱.
파울.
이번엔 강속구 일변도일거라는 예상을 깨고 슬라이더가 들어왔고 브라이스 하퍼는 겨우 공을 건드렸다. 공은 뒷그물 쪽으로 굴러갔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 또 볼 카운트가 몰린다.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좋은 결과를 낳은 적이 없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정면 승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유인할 것인가.
워낙 정면 승부를 즐기는 투수이기 때문에 여기서 스트라이크를 넣을 가능성도 많다. KBO 같으면 무조건 유인구 두어 개로 타자의 간을 보는 타이밍인데 메이저리그는 곧바로 승부하는 문화가 있다.
질질 끄는 투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중과 미디어는 항상 힘 대 힘의 부추긴다. 적어도 성낙기 정도 되는 투수라면 타자를 피해갈 이유가 없다는 게 마이애미 팬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자, 던져라.’
브라이스 하퍼도 내심 마지막 공을 기다렸다. 죽든 살든 배트를 휘두를 거라는 다짐도 함께였다.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사인을 받고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심호흡을 했다. 브라이스 하퍼는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홈 플레이트로 날아오자 망설임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3구로 던진 성낙기의 3구는 모두의 예상을 깬 포크볼. 배팅 포인트 앞에서 뚝 떨어지며 타자를 농락했다. 브라이스 하퍼는 헬멧이 벗겨지며 중심을 잃었고 이내 마운드의 성낙기를 쳐다봤다. 하여튼 비겁한 새끼다.
거기서 정면 승부 대신 포크볼이라니……. 정면 승부였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좋은 승부였을 것이다. 브라이스 하퍼의 눈초리에 어떤 원망 같은 강점이 담겨 있었다.
‘거기서 승부를 피하다니.’
성낙기는 브라이스 하퍼와 실랑이를 할 생각이 없다. 오로지 어서 끝내고 샤워나 했으면 싶다. 워싱턴 팬들의 한탄 속에 브라이스 하퍼가 덧없이 물러나고 기대는 반으로 떨어졌다.
브라이스 하퍼가 삼구 삼진을 당한 마당에 점수를 뽑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 워싱턴 팬들의 불길한 예감대로 성낙기는 나머지 두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경기를 끝냈다.
1차전과 같은 1점 차 승부에서 마이애미의 승리를 지킨 성낙기가 더욱 돋보인 경기였다.
***
[포크의 제구력이 93으로 오릅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포크볼의 스탯이 올랐다. 포스트시즌에 유독 스탯의 증가가 많다. 그만큼 시즌 중의 경기와 포스트시즌의 경기를 달리 평가한다는 의미.
성낙기는 1차전에 이어 3차전까지 승리를 일궈냄으로써 팀의 완벽한 수호신 역할을 했다.
오로지 성낙기에 의한 승리. 팬들의 관심은 성낙기가 언제 또 등판하느냐로 모아졌다.
성낙기의 등판에 따라 월드시리즈 진출 팀이 갈릴 거라는 믿음이 이런 논쟁을 불러왔다.
-3차전에 등판해서 43구를 던졌는데, 과연 성낙기는 몇 차전에 또 등판할거라고 생각해?
-잘 던지긴 했지만 오늘도 무리수였어. 6차전 정도에 나오겠지. 아님, 7차전이나.
-포스트시즌엔 시즌 때랑 똑같을 수 없어. 난 5차전도 이런 식으로는 가능하다고 봐.
-오늘은 운이 좋았지.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나왔으니까. 앞으론 그건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야.
-아, 좀 아쉬운데. 선발로 6차전에나 나선다니.
-오늘 던지지 않았으면 4차전과 7차전 선발로 나서는 거 아냐?
마이애미 팬들은 1차전과 3차전의 승리로 이젠 시리즈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챔피언십시리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면 된다는 팬들이 많았지만, 시리즈 전적을 2:1로 앞서나가다 보니 욕심이 생긴 것.
그렇기 때문에 성낙기의 이후 등판은 아주 중요한 이슈다.
반면 3차전에 패한 워싱턴 내셔널스 팬들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경기를 지다니 어이가 없군. 도대체 성낙기라는 투수는 뭐야. 타자들을 가지고 놀고 있어. 이건 치욕이야…….
-내 생각도 같아. 이런 타자들로 월드시리즈를 노렸다니…….
-아효, 야구고 지랄이고 술이나 진탕 마셔야겠어.
-달리 생각해 봐. 이제 성낙기는 한 차례밖에 나오지 못해. 나머지 경기를 우리가 이기면 되는 거지.
-후우, 7차전까지 가서 겨우 이기면 양키스는 놀고 있냐? 체력 방전되어서 올라가봐야 제물이 될 뿐이지.
-어쨌든 올라가고 볼 일이야. 급한 불을 먼저 꺼야지.
시리즈는 무조건 이기다고 보는 워싱턴의 팬들. 성낙기라는 암초가 있지만 나머지 경기를 스윕하면 최소 4:3으로 올라갈 수 있다.
막강한 선발인 성낙기를 상대로 승리할 거라는 기대는 접은 모습.
그들에게도 성낙기는 넘보지도 못할 벽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3차전을 승리로 이끈 성낙기는 느닷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기, 마이애미다. 오늘 경기 전에 온다는 게 그만 늦어졌네. 우리 아들 얼굴 좀 보자.
아버지 성용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