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56화 (156/188)

# 156

156화 챔피언십시리즈-워싱턴 내셔널스 4

[체력이 25 남았습니다.]

성낙기가 8회 말, 마운드에 올랐을 때 체격을 알려주는 글귀가 떴다. 저 정도의 체력이라면 2이닝은 무난하다. 느린 변화구를 섞으면 체력이 0.5밖에 줄지 않으므로. 적절한 강약으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체력을 아끼는 요령이다.

“8회에도 성낙기 투수가 등판하는군요. 좀 의왼데요?”

“저 역시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늘 경기 이후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내리고 불펜을 가동하는 게 맞거든요 음, 알렉스 비토 감독의 생각을 모르겠네요. 제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투수 로테이션입니다.”

“그만큼 불펜 투수를 불안하게 보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물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가겠다는 건데, 시리즈는 깁니다. 불펜 투수를 믿지 못하고는 시리즈를 치를 수가 없죠. 만약 성낙기 투수가 실점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판단 미스가 되는 겁니다.”

“그렇군요. 과연 결과는 어떨지 지켜보겠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걱정은 원아웃 이후, 성낙기가 연속 안타를 맞았을 때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듯싶었다. 1루수 브라이언의 어설픈 수비와 유격수 깊은 내야 안타가 어우러진 것이었지만 위기라면 위기였다. 해설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몸짓을 캐스터와 나눴다. 마이애미의 팬들도 혹시 이러다가 실점하는 것 아닌가 싶어 인상이 구겨졌다.

딱-

“유격수 땅볼입니다. 평범한 공을 홀랜드가 전진하면서 캐치합니다. 2루로 송구하는 홀랜드! 포스 아웃(force-out)과 동시에 1루로 공을 던집니다. 아, 이렇게 타자 주자까지 아웃되면서 스리아웃입니다. 공수 교대.”

“워싱턴의 좋은 찬스였는데 싱겁게 끝나 버리고 말았네요. 방금 성낙기 투수가 던진 공은 퀘이크볼로 보입니다. 내야 땅볼을 유도하는 데 안성맞춤인 구질이죠.”

워싱턴은 8회의 찬스를 날렸고 마이애미는 9회 초에 세 타자가 모두 빠른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다. 그 결과 더그아웃에 들어간 지 십여 분 만에 성낙기는 다시 마운드에 서야만 했다.

오늘 성낙기가 허용한 안타는 단, 3안타로 9회를 무사히 마친다면 무사사구 완봉의 승리를 거두게 된다.

성낙기는 9회 말, 마이애미 팬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팬들의 기대대로 1, 2번 타자를 범타로 돌려세웠다.

9회 말, 투아웃. 이제 한 타자만 잡으면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 승리는 마이애미의 것이었다.

워싱턴 팬들도 질세라 마지막 타자를 향해 격려의 박수와 휘파람을 불어댔다. 워싱턴의 마지막 타자는 리그를 대표하는 브라이스 하퍼였다.

***

브라이스 하퍼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이례적으로 대여섯 번의 배트를 돌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 9회 말 투아웃. 0:1로 뒤진 상황에서 브라이스 하퍼는 자신이 마지막 타자로 나서는 것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순간, 눈은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맑은 가을 하늘엔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처럼 여백을 수놓고 있다. 고개를 내려 마운드에 선 투수를 바라본다.

23승 5패, 1.14의 경이적인 성적을 올린 투수가 거기 있다.

천적, 아니, 타자인 자신이 일방적으로 당한 시즌이었다. 3할에 근접한 타율을 리그 정상급이지만 유독 성낙기에겐 1할 8푼의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쯤에서 그 사슬을 끊어내고 싶다.

‘후우, 집중해, 브라이스.’

브라이스는 온몸의 모든 기운을 배트 끝에 모았다. 모아둔 힘을 공의 정중앙에 터뜨리듯 폭발시키는 거다.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그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던지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기 직전엔 오로지 투수와 자신만이 그라운드에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관중과 내 외야에 서 있는 선수들과 심판들과 워싱턴의 더그아웃과 심지어는 그라운드의 모습마저 사라지고 오로지 성낙기와 자신만이 존재한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에 몰입했다.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브라이스 하퍼는 반사적으로 타이밍을 쟀다.

투수가 던진 공이 하얀 점으로 변해 자신에게 날아들어 왔다. 브라이스 하퍼는 내쉬던 숨을 멈추며 배트를 움직였다.

따악.

파울.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노렸고 타이밍이 맞았다고 생각했으나, 투수가 던진 공은 마지막에 지저분한 흔들림을 보였다. 배트에 맞은 공은 3루 파울라인 밖으로 굴러갔다. 성낙기는 브라이스 하퍼의 예리한 타격에 움찔했다.

비록 파울이지만 타이밍이 거의 맞았고 타구는 빠르게 굴러 관중석 하단의 벽에서 텅, 하는 소리를 냈다. 전력으로 던진 초구였는데 역시 브라이스 하퍼다. 투아웃이긴 하지만 좌타자이기 때문에 내야 땅볼에도 1루 진출이 용이하다. 굳이 1루로 내보내서 경기를 길게 끌고 갈 이유가 없다.

리얼무토의 다음 사인은 투심패스트볼. 좌타자인 브라이스가 볼 때는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구질이다.

팡.

볼.

중앙 쪽에서 휘어져 나가는데도 속지 않는다. 집중력이 최고라는 뜻. 어쩔 수 없다.

성낙기는 힘차게 와인드업을 한 뒤, 커브를 던졌다. 빠른 공에 타이밍을 잡고 있던 브라이스가 나오던 배트를 한 템포 늦추는 모습이 들어왔다.

따악.

파울.

이번엔 공이 외야로 날아갔다. 빗맞았지만 좌익수 쪽 관중석 상단을 맞고 튀는 공.

관중석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서로 공을 먼저 잡으려고 남자 몇이 엉켰다.

볼 카운트 투 스트라이크 원 볼. 투수에게 유리한 볼 카운트다. 브라이스 하퍼는 뜻대로 되지 않는 타격에 긴 숨을 내뱉었다.

‘역시, 볼이 좋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브라이스 하퍼는 성낙기를 인정하고 짐짓 겸손한 마음으로 공을 기다렸다.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면서 상대 투수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프로다운 자세라 할 때, 브라이스 하퍼는 그걸 실천하는 중이다.

“이번 공은 뭘 줄까. 커브 하나 더? 아니면 포심패스트볼?”

그런데 지금껏 가만있던 리얼무토가 멘탈 흔들기를 시도한다. 브라이스 하퍼는 대꾸 없이 다음 공을 기다렸다. 괜히 말을 섞어봐야 손해인 것은 타자다. 자그마한 마음의 흔들림으로도 생과 사가 결정되는 것이 타격이다.

반면에 포수는 사인을 내고 공만 잘 받으면 된다. 마음의 동요가 있더라도 마스트에 가려진 얼굴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서로를 건드리는 트래쉬 토크는 애초에 포수에게 유리한 게임일 뿐이다.

“말이 없네? 얼었어?”

리얼무토는 브라이스 하퍼를 건드린 후, 4구째 사인을 냈다. 리얼무토의 사인은 라이징패스트볼이었는데 성낙기는 고개를 저었다.

성낙기의 기억엔 브라이스 하퍼가 라이징패스트볼을 걷어 올려 워닝트랙까지 도달하는 타구를 날렸었다. 조금만 더 힘이 실렸더라면 담장을 넘어갔을 타구였다.

성낙기의 사인을 받고 리얼무토는 긴장했다. 오랫동안 던지지 않았던 공이다.

‘젠장, 두 눈을 부릅떠야겠군.’

리얼무토가 속으로 되뇌자마자 성낙기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그리고 미친 듯한 속도로 홈 플레이트를 향해 날아왔다. 공은 정확히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으로 날아왔고 브라이스 하퍼는 온힘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다.

파앙!

휭!

공이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의 간격을 두었다가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어느 전쟁 영화에서처럼 저격수의 총알이 먼저 사람의 몸에 박히고 탕, 하는 소리는 2초 후에 들린다는 설정과 비슷했다. 그만큼 공이 내리꽂히는 소리와 브라이스의 배트 소리엔 시간 차가 존재했다.

***

“이거… 뭐죠? 무슨 공이 들어온 건지 확인을 좀…….”

“저 공은 몇 달 전에 간혹 던지던 그 공입니다. 아… 주심이 스트라이크 선언을 하지 않고 있네요. 브라이스 하퍼도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포수의 미트를 바라보고 있고요… 도무지…….”

캐스터와 해설자가 말을 제대로 못할 만큼 빠른 공에 브라이스 하퍼는 충격에 휩싸였다. 배트가 한참이나 늦었다. 포심패스트볼의 구속에 맞춘 배트 스피드였고 타이밍이었다. 그의 상식으로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스,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이 뒤늦게 아웃을 선언했다. 관중들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거기 선명하게 찍힌 공의 스피드.

101.5마일.

분명 전광판엔 101.5이라는 숫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102마일로 올해 가장 빠른 공을 던진 조단 힉스에 버금가는, 한마디로 미친 공이었다.

‘어, 어떻게……?’

브라이스 하퍼가 미트에 박힌 공을 보고 리얼무토에게 물었으나, 리얼무토라고 온전할 리 없다. 리얼무토가 예상한 속도보다 더 엄청난 공이 들어왔고 내심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던지려나보다 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어떻게 공을 잡았는지조차 모른다.

리얼무토는 얼얼한 손목을 느끼고는 마지막 공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야말로 비밀 병기. 몇 차례 받아본 게 전부지만 던질 때마다 빨라졌다.

“나도… 몰라. 자세한 건 성낙기에게 물어봐.”

“게임 셋(game set)!”

주심이 경기 끝을 알렸다. 경기장은 마지막 공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곳곳에 남았다. 마지막 공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를 던진 성낙기는 모두의 놀란 눈을 뒤로 하고 더그아웃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뒤늦게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유격수 홀랜드가 뛰어왔고 3루수 가렛 쿠퍼와 리얼무토까지 마운드로 왔다. 리얼무토는 마운드로 오자마자 두 팔을 벌렸다.

승리의 기쁨을 나누자는 의미인데 이럴 땐 대부분 투수가 포수에게 안긴다. 성낙기가 머뭇거리며 마운드에 서 있을 때, 리얼무토가 먼저 다가와 성낙기를 안았다.

가렛 쿠퍼는 성낙기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들의 눈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 도대체 무슨 공을 던진 거야?”

‘내가 너무… 빠른 공을 던졌나?’

가렛 쿠퍼의 물음에 대답 대신 속말을 삼켰다. 경기장 안은 아직, 성낙기가 던진 공이 남긴 여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나의 공으로 인한 반향이 크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뛰쳐나왔고 마운드에 있는 성낙기를 에워싸고 어깨동무를 하며 뛰었다.

몇몇은 아직도 워싱턴을 이긴 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어리벙벙한 모습.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자기 팀 투수가 3안타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둘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을 바라보는 알렉스 비토 감독과 셜리번 코치 역시 성낙기의 마지막 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봐, 셜리번… 자넨 알고 있었어?”

“…전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믿기지 않는 공이었어요.”

“작년에 마이애미에 처음 왔었지? 그땐 90마일 정도의 스피드였다고 알고 있어. 구단은 제구력과 WBC의 성적을 믿고 입단을 추진한 거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작년엔 93마일 정도가 최고였죠. 그러니 더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좋아, 과정이야 어쨌든 우리도 이제 강속구 투수를 갖게 됐어. 그것도 제구력까지 특급인 투수지. 다른 건 잊고 그 사실만 기억하면 돼.”

“알겠습니다. 이제 성낙기로 인해 메이저리그 투수의 역사가 다시 쓰여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두 사람의 말처럼 성낙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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