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챔피언십시리즈-워싱턴 내셔널스 3
4회 초, 성낙기는 투아웃에 브라이스 하퍼를 만났다. 1회 말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2루수 땅볼로 불러났던 브라이스 하퍼.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자신이 경기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투아웃인 만큼 큰 것을 노리는 타격을 할 셈이었다. 배트를 붕붕 휘두르면서 타석에 들어서는 브라이스 하퍼에게 리얼무토가 아는 척했다.
“1회엔 어수선해서 인사를 못 했네. 오랜만이야, 브라이스.”
“어, 리얼무토. 잘 지냈나?”
“나야 뭐, 늘 그렇지. 성낙기 공이 더 빨라졌어. 미리 알려주려고.”
“아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좋은 타자는 감으로 변화를 알아내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
“어차피 성낙기에게 득점하기는 난망한데 꼭 배트를 휘둘러야 하느냐는 거야. 괜히 힘만 빠지잖아.”
“어쩐지, 좋은 소리 하나 했다. 이젠 그런 식으로 약 올리는 말투는 나에게 통하지 않아. 넌 어떻게 레파토리가 항상 같냐. 기억력이 제로야?”
“오, 받아칠 줄도 아네. 이거 내가 너무 자네를 몰라봤군. 하여튼 잘해봐.”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브라이스 하퍼도 성낙기의 공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빨라졌다는 걸 안다. 거기에 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이 이렇게 또 맞부딪쳐야 하는 운명이다. 성낙기에게 홈런을 언제 쳐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작년에 하나 친 거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브라이스 하퍼는 온 몸의 힘을 분산시키며 배트를 쥐고 있는 손과 팔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면서 집중력만은 배트에 모으길 원했다.
팡.
볼.
몸 쪽으로 꽉 찬 공이 들어왔다. 브라이스 하퍼는 뒤로 물러나면서 방금 공의 타이밍을 쟀다. 생각보다 더 빠른 포심패스트볼이었다. 전광판엔 96마일이 찍혔다. 볼 끝이 거의 가라앉지 않는 포심패스트볼이다.
팡.
“스트라이크.”
이번엔 바깥쪽이다. 브라이스 하퍼는 배트를 낼까 하다가 참았다. 2구처럼 바깥쪽 낮은 코스로 S존의 끝에 걸치는 공은 쳐봐야 힘이 실리기 어렵다. 후욱,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역시, 제구력이 대단한 투수라는 걸 깨닫는다.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이번 공은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떨어지는 슬라이더였다. 그냥 뒀으면 볼이었을 정도로 많이 꺾여 나간다. 브라이스 하퍼는 잠시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성낙기가 던지는 슬라이더가 시즌 때의 슬라이더가 아니다.
적어도 몇 달 전엔 집중력을 유지하면 쳐낼 수는 있는 공이었다. 한데, 방금의 그 공은 스트라이트 존으로 들어오면서 타자를 현혹하다가 바깥쪽으로 급하게 휘어진다.
타이밍이 맞는다 해도 배트 끝에 걸리는 궤적인데, 거기에 더해 상당한 낙차를 보이며 아래로 떨어진다. 타자에게 날아오기 전, 멀리서 꺾이지 않고 눈앞에 도달해서야 꺾이는 공이어서 대응이 쉽지 않다.
‘성낙기, 더 좋아졌어. 도대체 정체가 뭐냐.’
따악.
성낙기는 다음 공으로 브라이스가 배트를 내지 않을 수 없는 퀘이크볼을 던졌다. 역시 바깥쪽이지만 지금까지 던진 공보다 공 한 개 반 정도는 안쪽이어서 놔두면 무조건 스트라이크다. 브라이스 하퍼가 친 공은 그의 예측과 달리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
배트와 공이 만나는 순간, 공은 타자의 생각보다 위쪽이었고 배트의 윗부분에 맞은 공은 2루수가 낙하지점을 찾을 만큼 멀리 뻗지 못했다.
“플라이 아웃!”
그러고는 공수 교대.
브라이스 하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힐끗, 성낙기를 바라보았다. 성낙기 역시 브라이스 하퍼를 보고 있었는데 지극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올 초만 해도 자신이 아웃을 당하면 씨익 웃으면서 부아를 지르던 투수가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브라이스 하퍼는 그런 성낙기의 표정에 더 절망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자신을 잡고도 저토록 무심하다는 건, 그만큼 성낙기를 상대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브라이스 하퍼는 성낙기가 한 단계 더 위로 올라섰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피를 끓게 하는군. 다음 타석을 기다리겠다.’
그럼에도 다음 타석을 기약하는 타자.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는 브라이스 역시 좋은 타자였다.
마이애미의 타자들 또한 브라이스 하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가렛 쿠퍼를 비롯, 브라이언 앤더슨과 마이애미 최고의 교타자인 퀸튼조차 워싱턴 투수의 공을 때려내지 못했다.
파울플라이와 내야 땅볼 등이 그들이 쳐낸 전부였다. 그만큼 워싱턴의 투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역시 성낙기처럼 언터처블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
그러한 투수전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은 바로 성낙기였다. 6회 초, 첫 타자로 나섰다. 스트라스버그는 단 2안타만을 허용하고 있다.
성낙기의 첫 타석은 우익수 플라이 아웃. 잘 맞았으나 수비가 워낙 좋았다. 성낙기는 타석에 들어서서 자신이 가진 스탯을 떠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글귀가 새겨졌다.
[행크아론의 타격(4단계/5단계)이 활성화됩니다]
그동안 내재된 상태로 있던 행크아론의 타격이 눈앞에 떠오른 것 처음이었다. 타석에 서서 타격을 하면 저절로 행크아론의 타격이 나온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므로 지금 떠오른 글귀는 성낙기로서는 의아했다.
‘뭐지? 갑자기 행크아론의 타격이 활성화된다니.’
[그동안은 몸에 갈무리된 원초적인 능력으로 타격을 하신 겁니다. 지금 그 재능이 발화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게 있었어? 그동안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뭐야.’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반말 치냐?’
[요]
‘행크아론의 타격 활성화라… 그래 봐야 시대가 다른데 저런 강속구에 대응이 되나?’
[됩니다. 행트아론의 재능 역시 시대를 넘어 현재적이니까요]
‘끙,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패스. 한번 해보자.’
성낙기는 배트를 쥐고 심호흡을 했다. 스트라스버그와 붙을 수 있는 오늘의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완투를 하지 않는다면 불펜 투수가 올라올 테니까. 워싱턴의 에이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그는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강한 공을 뿌린다.
나이가 무색하도록 100마일에 가까운 공을 던지는 것에 의아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여러 차례 검사를 실시했으나, 약물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팡.
“스트라이크.”
스트라스버그가 던진 공이 성낙기의 몸 쪽에 꽂혔다. 포수의 미트가 뒤로 밀릴 만큼 힘 있는 공. 몸 쪽으로 꽉 차게 들어와서 이런 공은 쳐봐야 외야 뜬공이거나, 파울플라이다. 성낙기는 나가려던 배트를 거둬들였다.
이런 공에 날카로운 타격을 해서 투수의 경각심을 올려줄 이유가 없다.
스트라스버그는 초구가 제대로 먹히자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포수가 던진 공을 받았다. 그러고는 제 2구를 위해 와인드업. 예의 강속구가 바깥쪽을 향하여 날아왔고 성낙기는 호흡을 멈춘 채, 배트를 돌렸다.
따악.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경기장은 일순 고요해졌다. 성낙기가 친 공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폭발하듯 일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로 마이애미 팬들이 있는 1루 쪽이었다.
마이애미 팬들과 워싱턴 팬들을 구분할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는데 성낙기의 타구가 생각보다 길게 뻗어갈 때, 마이애미 팬들은 모두 일어섰다. 1루 측에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담장 너머 외야석이었다.
“뭡니까! 성낙기가 친 공이 높게 날아갑니다. 맞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스티븐! 공이 계속 날아갑니다. 넘어갑니까. 넘어갑니다! 홈-런! 성낙기의 솔로 홈런입니다.”
“스티븐이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했네요. 전광판을 보십시오. 자그마치 99마일의 공이었습니다. 그것도 투심이 가미된 포심패스트볼이었는데요. 여지없이 밀어 쳐서 담장을 넘기는 성낙기입니다. 와우, 엄청난데요. 저 공을 기다렸다는 듯 넘겨 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스티븐 스트라스버그의 실투가 아니었습니다. 바깥쪽으로 제구가 된 공이었어요. 130m가 넘어 보입니다. 대단한 힘입니다.”
“음, 성낙기 투수의 방어율이 챔피언십시리즈에도 유효하다면 이건 결정타가 될 수도 있어요. ERA가 무려 1.14인 투수입니다. 9회에 한 점을 겨우 뽑아내는 정도인데 평균이 그렇다는 거고요. 간혹, 2, 3점을 내줄 때도 있었지만 나머지 경기에선 완봉을 밥 먹듯이 해냈었거든요. 워싱턴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뼈아픈 한 방을 허용했습니다.”
마이애미 팬들은 1회에 있었던 찝찝한 기분을 성낙기의 홈런으로 날려 보냈다. 모두가 일어서서 춤을 추듯 제자리에서 뛰었고 목청이 다하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들이 생각할 때 성낙기는 정말 스타의 기질이 있었다. 가만 돌이켜 보면 지난 시즌부터 성낙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제 역할을 해줬다. 아니, 투수가 타격으로 팀의 승리를 이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제 역할을 훨씬 뛰어넘었다.
팬들이 공에 대한 판정에 경기장 난입까지 한 이유도 거기 있다. 팀의 보물인 선수가 편파 판정을 당하는 꼴을 두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
성낙기만은 지켜야 한다는 절박감 같은 것도 있었다. 성낙기가 무너지면 챔피언십시리즈는 물 건너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성낙기는 홈런을 치고 나서 감정의 변화 없이 베이스를 돌았다. 많은 선수들이 더그아웃 밖으로 나와 홈런을 축하했다.
언제나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선수.
도무지 인간 같지 않아서 공을 던질 때나 타격을 할 때, 눈을 뗄 수 없는 선수가 성낙기였다. 오늘 같은 놀라움이 그의 곁에 늘 함께했으므로.
“80구가 넘어갔어.”
그리고 7회가 끝났을 때 성낙기는 82구를 기록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의 예정대로라면 여기서 투수를 바꿔야 한다. 불펜에서는 데일 카론과 팬 파일러가 몸을 풀고 있었고 야를린 가르시아 역시 대기 중이었다. 셜리번 투수 코치가 성낙기의 의향을 물었다.
“오늘 잘 던졌다. 챔피언십시리즈 길게 봐야 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불펜 투수 준비할게.”
“그래서가 아닙니다. 제가 이 경기 마무리 짓겠습니다.”
“응? 내가 잘못 들었나? 설마 완투하겠다는 소리야?”
“그렇습니다.”
셜리번 투수 코치는 성낙기의 의견을 알렉스 비토 감독에게 전달했고 감독은 곧바로 성낙기를 찾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성낙기가 의욕에 들떠서 뒷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성낙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이 경기를 끝내고 3차전에 선발로 나서겠습니다. 이틀이 넘는 휴식이면 충분합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성낙기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오늘 경기를 완투하고 3차전에 나서겠다는 투수. 투수의 어깨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수긍하기 힘든 의견이다.
하지만, 그는 성낙기였다.
스트라스버그의 강속구를 후려쳐 홈런을 만들고, 디비전시리즈에서 짧은 등판 간격에도 오히려 싱싱한 공을 던졌던 투수. 그런 그가 완투뿐만이 아니라 3차전 등판까지 염두에 둔 채 말하고 있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1점 차 승부다. 여기서 불펜 투입으로 무실점이면 모르되 반대의 경우라면 성낙기의 등판 경기에서 패배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선수의 말대로 하기에도 어딘지 꺼림칙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마지막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스리아웃을 당하고 들어오는 타자를 보며 알렉스 비토 감독은 마음을 정한 듯 성낙기의 눈을 가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