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화 와일드카드 결정전 2
‘또 너냐.’
타석에 들어선 아메드 로사리오는 성낙기를 바라보며 눈에 힘을 줬다. 3할에 빛나는 뉴욕 메츠의 대표적인 타자이건만, 성낙기에겐 유독 약했다.
1할 9푼. 이게 성낙기에게 아메드가 기록한 타율이었다. 어디 가서 자신이 뉴욕 메츠의 톱타자라고 말하기도 쪽팔린 수준이다. 그런 아메드였기에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각별했다.
팡.
“스트라이크.”
초구는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이었다. 전광판에 95마일이 찍혔다. 리얼무토가 공을 넘겨주고 나서 미트를 팡팡 두드렸다. 2구는 파울. 같은 코스의 투심패스트볼을 휘둘렀으나 뒤 그물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뭐야. 또 볼카운트가 불리해졌다.’
아메드가 익히 당해온 패턴.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후에 브레이킹 볼을 던져 삼진을 노리거나 내야 땅볼을 유도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시즌 내내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초구를 그대로 보낸 것을 아메드는 후회했다. 성낙기가 와인드업을 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이런 젠장. 브레이킹 볼이 아니었어.’
그랬다. 성낙기는 1구처럼 바깥쪽 포심패스트볼로 승부했다. 오다가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한 아메드는 공이 그대로 들어오자 홈플레이트에 침을 퉤 뱉었다. 중요한 경기에 첫 타자로 나와 삼구 삼진을 당한 자신이 한심하다. 고개를 숙이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아메드에게 야유가 쏟아졌다.
“아메드 저거 왜 저런 거야. 성낙기한테 완전 쥐약이네.”
“저건 테러를 당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만나기만 하면 삼진이니. 차라리 동네 야구 하는 내가 낫겠다.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잖아.”
“저 투수를 공략하지 못하면 오늘도 완봉이야. 번트를 대서라도 찬스를 잡아야지.”
“빌, 말이 맞아. 감독이 너무 타자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어. 저런 투수는 초반부터 흔들어줘야 승산이 있는데 말이지.”
뉴욕 메츠 관중들은 속이 터지는지 각자의 의견을 쏟아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성낙기를 가만두면 삼진 퍼레이드를 펼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흔들어야 한다는 팬의 안목이 괜찮다. 잭 스나이프 감독은 나름 생각이 있었다. 2회까지만 지켜보고 뭔가 답이 나오지 않으면 작전 야구로 전환할 생각이었다.
“아메드가 덧없이 물러났군. 이런 단기전은 타자들이 알아서 해결해 주는 게 가장 좋은데.”
“긴장해서 그럴 겁니다. 타격감들이 좋으니 기다려 보시지요.”
타격 코치가 감독의 언짢은 표정을 읽고 희망 섞인 말을 건넸다. 하지만 말을 건넨 자신도 확신은 없었다. 워낙, 마운드에 선 동양인 투수가 철벽이기 때문이다.
***
뉴욕 메츠의 마이클 콘포토가 타석에 들어섰다. 앞 타자와 마찬가지로 약간 긴장한 모습. 성낙기가 초구를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96마일의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듯 들어왔다. 타자 입장에서는 좀체 치기 힘든 그야말로 정교한 제구력.
“이게 들어왔다고요?”
마이클이 주심에게 항의했다.
“들어왔으니까 스트라이크를 잡아줬지. 안 들어오는데 잡아주나?”
“아니, 이렇게 먼 곳으로 들어오는 걸 잡아주면 누가 칩니까. 배트가 닿지도 않겠어요.”
“들어왔다니까 그래. 자꾸 따질 거야?”
“후우, 알았어요. 아무리 봐도 볼이었는데…….”
마이클은 주심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자 살짝 꼬리를 내렸다. 여기서 더 따지고 들다가 퇴장이라도 당하면 자신만 손해다. 일단, 이렇게 항의를 해놓으면 바깥쪽 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게 원하는 바다.
스트라이크 존을 걸고 넘어졌다가 보복을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은 와일드카드 결정전이다. 중요한 경기에서 주심이라도 제 기분대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팡.
볼.
이번에도 비슷한 볼이었는데 주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마이클은 항의의 효과가 나타나는 듯 보이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주심은 항의와는 별개로 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볼 선언을 한 것뿐이었다.
팡.
볼.
공교롭게도 바깥쪽으로 던진 공이 볼 판정을 계속 받았다. 리얼무토는 미트를 공을 받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무언의 항의를 했다. 이게 왜 스트라이크가 아니냐는 뜻.
리얼무토가 생각하기에 마이클의 항의를 받은 주심의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이 달라졌다.
‘어이가 없네. 타자가 항의 한 번 했다고 존이 달라져?’
주심은 리얼무토의 생각과는 달리 초구보다 2, 3구의 공이 바깥쪽으로 더 치우쳤다고 판단했다. 우연처럼 타자가 항의하자 볼 판정이 연속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디 상대 팀도 그런가. 리얼무토는 물론이고 성낙기도 고개를 갸웃했다. 충분히 스트라이크가 나올 코스이기 때문이다.
‘바깥쪽 존이 시즌 때보다 훨씬 좁다.’
성낙기의 생각도 리얼무토와 같았다. 성낙기가 보기엔 초구와 2, 3구가 모두 같은 위치였다. 항의했다고 스트라이크 존이 달라져 버리다니. 안 되겠다고 생각한 성낙기가 마운드에서 앞으로 걸어오며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문제 삼았다.
“바깥쪽 홈 플레이트 위로 분명히 지나갔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뭐라고?”
주심은 성낙기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지 마스크를 벗고 마운드 쪽으로 걸어왔다.
“3구가 스트라이크 아니냐고 물었어요.”
“너 퇴장 당할래? 주심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거면 마운드에서 내려와. 이것들이 경기 초반부터 게임 방해 공작하나. 성낙기 경고!”
타자의 항의가 있는 뒤로 성낙기의 항의가 이어지자 경기장 분위기는 어수선해졌다. 셜리번 코치가 더그아웃에서 나와 주심과 이야기를 나누다 들어갔고, 관중들은 웅성거렸다. 간혹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경기 분위기가 왜 이러냐. 주심이 뉴욕 메츠 편이네. 감자기 존이 이상해졌어.”
“성낙기도 너무 민감했어. 안 잡아주면 잡아주는 코스에 던지면 되지.”
“저러면 투수 어깨가 다 식어버릴 텐데… 결국 시간이 지체될수록 성낙기만 손해지.”
마이애미 팬들은 잠시의 소란이 경기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1회 초, 2번 타자에 볼 카운트 원 스트라이크 투 볼. 무언가 맥이 빠지는 느낌이 경기장 전체를 지배했다.
***
타자의 항의와 성낙기의 항의가 겹친 결과로 경기는 15분이나 지연되었다. 양 팀 코치들이 홈 플레이트를 방문했고 주심은 상황을 명쾌하게 정리하는 대신 붉으락푸르락하며 되레 시간을 끌었다. 장내가 정리되고 주심이 다시 플레이볼을 선언했다.
팡.
볼.
이번엔 슬라이더였는데 바깥쪽에 걸친 공을 잡아주지 않는다. 갑자기 바깥쪽에 인색해진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가 5구는 몸 쪽을 공략했다. 몸 쪽으로 꽉 찬 포심패스트볼이 다시 들어갔다.
팡.
볼.
“베이스온볼스.”
결국 마이클은 볼넷으로 1루를 밟았다. 바깥쪽이거나 몸 쪽의 꽉 찬 볼을 잡아주지 않으면 투수는 던질 게 없다.
좀 더 가운데 쪽으로 던져야 한다는 계산인데 가운데로 몰리면 몰릴수록 타자에게 유리하다. 아무리 100마일에 이르는 강속구라도 가운데로 몰리면 받쳐 놓고 때리는 곳이 메이저리그.
성낙기엔 다른 선택이 필요했다.
“내야 땅볼을 유도해야겠어.”
“뭐 던질래?”
“퀘이크볼. 포심패스트볼은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할 거야.”
리얼무토가 홈 플레이트로 돌아갔고 3번 타자가 나오자 성낙기는 초구부터 퀘이크볼을 던졌다. 바깥쪽이지만 아무리 인색한 주심이라도 안 잡아줄 수 없는 위치.
즉 가운데로 약간 몰린 공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팡.
“스트라이크.”
주심의 인색한 존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도미닉스미스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 당황했다. 1회부터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난조에 빠지기 쉬운 게 투수인데 마운드의 성낙기는 그런 것도 없다.
‘하, 저건 괴물인가?’
딱!
“유격수 땅볼입니다. 홀랜드 투 바운드로 공을 잡자마자 2루로 던집니다. 2루 포스 아웃, 다시 1루로! 아웃! 병살타를 치고 마는 도미닉 스미스입니다. 아, 아깝네요. 좋은 찬스를 날려 버리는 뉴욕 메츠의 타선, 스리 아웃으로 공수 교대입니다.”
“방금 공도 성낙기 투수가 자랑하는 퀘이크볼이었네요. 변화가 많은 데다가 마지막에 살짝 가라앉는 바람에 정타가 나오기 힘든 구질이죠. 미리 예측하지 않는 한, 내야 땅볼을 피해가기 힘든 구질입니다. 도미닉 선수가 완벽하게 당했네요.”
성낙기는 홀랜드를 기다렸다가 손을 마주친 후에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신경전이 있었지만 깔끔하게 1회를 끝냈다.
***
디그롬 역시 1회에 나와 실점 없이 이닝을 마쳤고 두 에이스는 3회까지 무실점으로 팽팽한 전개를 이어갔다. 그러고 맞은 4회 초, 뉴욕 메츠의 1번 타자 아메드 로사리오는 선두 타자로 나오자마자 드랙 번트를 시도했다.
브라이언 앤더슨의 1루 수비가 다소 헐거운 것을 이용한 번트였는데 예상대로 브라이언 앤더슨의 스타트가 늦었다. 성낙기는 1루로 커버를 들어갔다.
“앗, 갑자기 세이트티 번트를 대는 아메드입니다. 브라이언 전진합니다. 공을 잡아서 성낙기 투수에게! 세이프! 간발의 차로 1루에서 세잎을 얻어내는 아메드!”
“오, 역시 아메드가 뭔가를 하네요. 기습적인 번트였고 코스가 아주 좋았어요. 투수와 1루수 사이로 굴렸는데 투수가 수비하기에는 공이 빨랐고요. 브라이언 앤더슨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나는군요.”
“노아웃에 1루의 찬스를 맞는 뉴욕 메츠의 타선입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답게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마 또 번트를 댈 겁니다. 성낙기 투수를 상대로 연속 안타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정규 시즌 때와 다르게 뉴요 메츠의 타자들이 끈질기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려고 하는 마음이 눈에 보일 정도다. 아메드는 1루를 밟고 주먹을 불끈 쥐며 세리머니를 했다.
성낙기를 자극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했는데 반응이 없자 이번엔 베이스와의 간격을 길게 벌리며 도루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포털 사이트도 슬슬 달아올랐다.
-저거 한 번 살아나갔다고 디게 깝치네.
-내 말이. 겨우 번트로 살아나가서 세리머니 하는 꼴은 또 처음 본다.
-어쨌든 위기야. 성낙기가 큰 경기를 치러본 적이 없어서 좀 걱정이다.
-무슨 말. 지난 시즌에도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던졌는데.
-그때보다 분위기가 더 흥분되어 있어. 뉴욕 메츠 애들 소리 지르는 거 봐.
-뭐, 뭐! 너희들 뭐야. 해변에서 온 거지들이야? 좀 조용히 해줄래?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맞나 봐. 촌놈들하고 무슨 말을 섞으려고 그래.
-좋아, 아메드가 기회 봐서 도루를 할 거야. 올해 21도루를 기록했어. 성공률은 81%나 돼.
-아냐. 성낙기의 퀵 모션이 워낙 빨라서 도루를 내준 적이 거의 없어. 마운드에 있을 때 도루 성공률이 25%면 말 다한 거지.
-훗, 뉴욕 메츠 애새끼들 왔네. 도루고 지랄이고 병살타가 이어질 거다. 중계 그만 보고 동네 펍에 가서 술이나 미리 마셔 둬. 승리는 마이애미가 할 테니까.
올라오는 글들마다 가시가 서 있을 만큼 와일드카드를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마이애미와 뉴욕 메츠의 팬들은 서로 엉겨서 비아냥과 상대를 깔아뭉개는 적절한 멘트들을 날려댔다. 경기장은 아메드가 1루 베이스를 밟자 뉴욕 메츠의 응원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성낙기는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병살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