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퀘이크볼 5
성낙기는 눈앞에 떠오른 스탯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상태창의 말대로 포크 등의 변화구가 상대적으로 낮다. 체력은 꽤 보강이 되어서 이제는 완투에 큰 어려움이 없고 포심패스트볼의 스피드도 155km까지 올라 있어서 든든하다.
더구나 퀘이크볼은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오늘 그 위력을 알았다.
LA에인절스 타자들은 퀘이크볼의 변화에 공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했다. 물론, 모든 것은 적응에 달린 문제다.
아무리 마구라도 같은 구질을 계속 상대하다 보면 타자들이 적응하는 시점이 올 것이다. 다양한 구질의 사용은 그래서 필수적이다.
상태창은 그동안 잘 쓰지 않던 구질 위주의 볼 배합을 원하고 있다. 가만 생각하면 할수록 상태창의 진단이 맞는 듯했다.
‘좋아, 공 9개로 이닝을 끝내라는 거지? 하라면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니.’
성낙기는 7회 말, 마운드에 올라가며 삼구 삼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LA에인절스의 선두 타자는 1번 타자인 마이클이다.
앞선 두 타석을 삼진으로 물러난 후라서 잔뜩 약이 올라 있었다. 팀의 리딩히터인 자신이 허무하게 물러나면 뒤 타자들에게 비치는 영향이 크다.
‘세 번째 타서마저 삼진을 당해서는 안 돼.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마이클은 굳은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의 머릿속엔 간결한 스윙과 선구안 같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팀의 1번 타자라면 볼과 스트라이크의 구분 정도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도 있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앞선 두 타석에서 당한 퀘이크볼을 노렸던 마이클은 홈 플레이트 앞에서 공이 꺼지자 당황했다. 잘 먹혔던 구질을 안 던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투수가 던진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2구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기다렸는데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체인지업이 들어왔다.
다소 높은가 싶었지만 아래로 꺼지면서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먹은 마이클은 초조해졌다.
앞선 두 타석에서 무기력하게 물러나고 보니 투수가 마음대로 공을 던지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타석에 선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부담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젠장, 나를 깔보고 있어.’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속에서 열이 확 뻗쳐왔다.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섰다.
그와 더불어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의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아마 다른 말로 대체한다면 투쟁심 정도이리라. 마음이 달라지자 눈빛도 흉흉하게 변했다. 마치 투수를 잡아먹을 듯이.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마이클은 있는 힘껏 3구에 풀스윙을 했지만 공은 1, 2구보다 더 가라앉았다.
‘크윽. 포크볼이었어. 퀘이크볼이 아니라 포크볼을 던지다니.’
마이클은 가슴속에 가득 들어찼던 화가 스르르 없어지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투쟁도 스스로의 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투수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의지를 북돋워봐야 허무한 결말이 있을 뿐이었다.
***
[두 타자 남았습니다.]
말이 두 타자지 2번과 3번은 저스틴 업튼과 마이크 트라웃이라는 슬러거다.
특히 마이크 트라웃은 두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
경기 초반의 커트 작전에 트라웃은 포함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두 번째 타석에서 날린 중견수 플라이는 성낙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정도다. 워낙 펀치력이 좋은 친구여서 외야로 공이 뜨면 괜히 심장이 쫄깃해진다고 할까.
‘나도 알아. 문제는 두 타자 모두 팀의 중심이라는 거지.’
저스틴 업튼이 타석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성낙기의 체인지업에 배트가 휘둘렀다.
따악.
파울.
공은 3루 쪽 파울라인을 벗어나 담장을 맞췄다.
타이밍이 조금 빨랐을 뿐, 체인지업엔 어느 정도 적응을 한다는 얘기.
80마일 중반의 체인지업을 던졌던 성낙기는 속으로 뜨끔했다. 스피드를 더 낮췄다.
팡.
“스윙-스트라이크!”
81마일의 체인지업이 2구로 들어갔고 좀 더 빠른 타이밍에 배트를 휘두른 저스틴 업튼의 헛스윙이 이어졌다.
볼 카운트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이제 첫 타자 승부와 마찬가지로 포크볼을 던질 차례. 그때였다.
“억, 뭐야. 와하하.”
“잡아! 저놈들 미쳤다.”
“꼭 저런 놈들이 있다니까. 아니, 관종이야 뭐야. 집에서 TV를 시청하든가 하지 왜 경기를 방해하고 지랄이야.”
3루 쪽 관중석에서 튀어나온 남자 둘이 성낙기의 눈에 보였다. 위아래 흰색 상의에 가슴팍에 ‘Angels’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상당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냅다 저스틴 업튼이 서 있는 홈 플레이트 쪽으로 달려왔다.
뜻밖의 사태에 보안 요원들의 대응이 늦었고 남자들은 저스틴 업튼에게 순식간에 다다랐다. 둘은 멍하게 서 있는 저스틴 업튼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저스틴 업튼이 손을 들어 그들과 손바닥을 마주쳤다.
“어서 잡아!”
심판이 보안 요원들에게 소리쳤고 그들은 더그아웃 옆에서 우르르 달려 나왔다. 남자들은 보안 요원들을 보고 홈 플레이트에서 마운드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에는 좋아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Justin Upton.
Mike Trout.
이라는 글자가 등 뒤에 선명했다. 저스틴 업튼과 마이크 트라웃의 팬인 모양이다.
아마, 성낙기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뛰어든 듯했다.
마운드로 달려오는 그들을 보고 성낙기는 어떡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만에 하나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 때문.
“이야호! 우아아아아아!!”
성낙기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그들 둘은 마운드를 중심으로 갈라지더니 한 남자는 좌익수 쪽으로, 한 남자는 우익수 쪽으로 뛰어갔다.
보안 요원들을 따돌리기 위한 작전 같았다.
그들은 결국 잡혀서 덩치 큰 보안 요원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그렇게 어수선한 순간, 또 일이 터졌다.
***
Sung Nakgi.
이번엔 성낙기였다. 1루 쪽 관중석에서 여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성낙기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치켜들고 경기장에 난입했다.
두 남자가 제압당하고 이제 경기를 볼까 했던 관중들은 난데없는 여성 팬의 등장에 짜증 반, 호기심 반의 반응이었다.
“햐, 저 여자 각선미 좀 봐. 죽인다.”
“그러게. 반바지 아래로 다리 근육이 예술인데? 운동 좀 한 여자 같아.”
“아잉, 짜증 나게 저 여자는 뭐람? 지가 뭔데 마이애미 팬들을 욕 먹이는 거야.”
남자들의 반응과 여자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남자들은 휘파람을 불기도 했고 심이 난 표정이었으나 여자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욕했다.
여자는 곧장 성낙기에게 다가왔다.
아직까지 두 남자를 제압하고 있던 보안 요원들은 여자 팬의 등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LA에인절스 직원 두엇이 마운드로 뛰어왔다.
여자는 이미 마운드에 도달했다. 관중석에서 마운드까지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로 달려와서 성낙기 앞에 딱 섰다.
“나, 엘리나예요. 미스 마이애미에도 나갔던 미모의 재원이죠. 성낙기 선수의 팬이에요.”
“아, 그러세요.”
“어때요. 나 용기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 번만 안아주세요.”
“…….”
그때 직원들이 마운드에 도달했고 급해진 엘리나는 성낙기를 확 껴안았다.
성낙기가 멍해 있는 사이, 팔을 푼 엘리나라는 여자는 외야로 뛰어갔다.
직원들이 따라붙었고 엘리나는 마치 육상 선수처럼 빠르게 외야를 돌았다.
“아, 이게 웬일인가요. 양쪽 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는 건 또 처음 봅니다. 처음엔 남성 두 분이 들어왔다가 저스틴 업튼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잡혀가더니 두 번째는 금발의 여성분이 성낙기를 껴안고는 외야로 도망 다닙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전개네요. 보안 요원들이 몸을 빼지 못하는 사이에 미모의 여성이 경기장에 들어왔는데요. 아직까지 잡지를 못합니다. 휴, 이러다가 경기에 지장이 있지나 않을지 걱정되는군요.”
“저 여성 팬이 워낙 빠릅니다. 거의 잡을 뻔 했다가 놓치고 헉헉거리는 구단 직원들이 안쓰럽군요. 꼭 육상 선수 같은 포스를 풍기는 여성입니다.”
“경기장에 난입해서 저렇게 안 잡히는 경우도 처음 보네요. 미꾸라지가 따로 없습니다.”
“어… 방금 제보가 들어왔는데 저 여성 팬이 전미 대학 선수권 100m 우승자 ‘엘리나 샤먼’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뉴스에서 본 얼굴입니다.”
“아… 하하. 맞네요. 엘리나입니다. 금발의 스프린터로 이름을 알렸던 선수죠. 올림픽에 나갈 유망주로 알고 있는데 여긴 웬일인가요. 저러니 잡을 수가 없죠. 직원 몇 명으로는 도저히 잡기 힘듭니다. 여럿이서 포위망을 구축해야 잡을까 말까 할 겁니다.”
성낙기는 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여성 팬이 자기 좋다고 껴안더니 다람쥐처럼 도망을 다닌다.
워낙 빨라서 구단 직원들도 기진맥진한 상태다.
조금 있으면 보안 요원들이 남자들을 퇴장시키고 여자를 잡으러 갈 것이다.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성낙기는 자신이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성낙기가 외야로 뛰어가고 있어. 이거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아.”
“와, 정말 흥미진진하다. 잡히지 않는 여자와 여자를 추격하는 요원들. 거기에 투수 성낙기까지 가세했어.”
“이런 건 동영상으로 찍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해. 근데 저 여자 예쁘다. 그리고 엄청나게 빨라.”
“내 말이. 그렇게 뛰어다니고 지치지도 않는군.”
“어, 성낙기가 여자에게 뛰어간다. 여자는 직원들을 피해 다니는 와중에 성낙기와 만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어.”
“잡았다. 성낙기가 잡았어. 어어… 잡자마자 관중석으로 뛰어가는데?”
“둘 다 무지하게 빠르다. 직원들이 못 따라 가. 여자가 처음 있었던 자리로 데려다주려나 봐.”
성낙기는 더 이상 경기가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여자를 잡으러 나섰고, 성낙기에게 손을 잡힌 엘리나는 순순히 따랐다.
구단 직원들을 피해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관중석을 앞에 두고 엘리나가 돌아서서 성낙기를 바라봤다.
“성낙기 투수, 나랑 데이트 할래요?”
“무슨 말이에요. 경기 중 그라운드에 난입…….”
“홀 사이드 호텔 맞은편에 오래곤이라는 커피숍이 있어요. 거기서 사인해 주세요.”
“안 돼요. 나 바빠요.”
“안 그럼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갈 거예요. 아무도 날 잡을 수 없을 걸?”
“휴… 알았어요.”
“좋아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말을 마친 엘리나 샤먼은 허리까지 오는 펜스를 훌쩍 넘어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인 듯한 여자 몇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온 영웅을 맞이하는 분위기.
그녀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경기장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고 성낙기는 마운드로 가자마자 포크볼을 던져 저스틴 업튼의 삼진을 완성했다.
이어 나온 마이크 트라웃마저 삼구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젠장, 기껏 맞춰 놓은 타격 사이클이 저 여자 때문에 헝클어졌어.’
트라웃은 포크볼로 아웃을 당하고 나서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닌 여자를 탓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7회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