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37화 (137/188)

# 137

137화 올스타전 3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탠튼은 삼진을 당하고 나서 배트를 바닥에 후려쳤다.

배트 부러지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똑똑히 들렸다.

배트를 부러뜨리고도 스탠튼은 성낙기를 노려보았다.

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기서 체인지업을 던져 삼진을 잡아내는 성낙기 투수입니다. 몸 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오다가 예리하게 가라앉습니다.”

“의외의 볼 배합이네요. 초구로 던진 강속구나 라이징패스트볼 정도를 예상했었는데요. 예상치 못한 체인지업에 스탠튼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습니다. 몹시 분해하는군요. 올스타전에서 저토록 전의를 불태우는 선수, 글쎄요. 전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만큼 진지하게 임한다는 얘기거든요.”

개막 초기, 양키스는 성낙기에게 완봉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론 저지와 스탠튼은 나란히 삼진 아웃을 당했다.

팀의 클린업트리오이자 리그를 주름잡는 홈런 타자들이 연이어 삼진을 당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었는데, 오늘 그 모습이 재현된 것이다.

아론 저지와 스탠튼은 두 번 다시는 그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타석에 임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도대체 뭐야. 아론 저지와 스탠튼 모두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했어.

-양키스 3, 4번을 치는 타자들인데 성낙기에게는 쥐약이네.

-어처구니없…….

-저 투수는 도대체 100마일을 어떻게 던지지? 몸도 크지 않은데 말이야.

-아직 트라웃이 남았어. 여기서 하나라도 치겠지.

-크크, 아메리칸 리그 아무것도 아니네. 우리 성낙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너 뭐야.

-나? 난 마이애미 팬이다. 성낙기랑 친구 먹는 사이이기도 하고.

-지랄.

앞의 두 타자가 속절없이 물러나는 것을 본 마이크 트라웃은 굳은 얼굴로 타석에 들어섰다.

아메리카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들이 내셔널리그 2년차 투수에게 모두 삼진으로 발린다면 이건 창피를 넘어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아메리칸 리그를 떠나 메이저리그를 상징하는 타자들이 동양에서 온 자그마한 투수에게 농락당하는 그림은 아마도 mlb의 역사에 남을지 모른다.

“오랜만이야, 마이크.”

“어, 리얼무토.”

“올스타전에서 만나니 더 반갑군. 같이 축제를 즐기자구.”

“글쎄, 난 그럴 기분이 아닌데. 아론과 지안카를로가 연달아 자빠졌잖아. 나까지 그런 꼴을 당할 순 없지.”

“진정해. 이건 정신 경기도 아니고 그저 이벤트일 뿐이야.”

“하고픈 말이 뭔데.”

“…대충 휘두르고 들어가 줘. 계속 쪼그리고 있었더니 다리가 저려서 그래.”

“쉣! 시답잖은 소리 그만해.”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초구는 포크볼이었는데 평소의 성낙기가 거의 쓰지 않는 구질이었다.

트라웃은 지레짐작으로 포심패스트볼을 상상했다.

결과는 헛스윙.

앞선 두 타자에게 정면 승부를 했던 것과는 또 다르다.

트라웃이 호흡을 가다듬을 때 2구가 들어왔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젠장! 올스타전이니 즐기자면서 더럽게 유인구를 던지는 거냐?”

“그러게 말야. 쟤는 동양에서 와 가지고 올스타전이 뭔지 모르나봐. 스트라이크 던지라고 할게.”

“지랄. 지가 사인 내면서 아닌 척하기는.”

“아니야. 오해하지 마. 1, 2구 모두 성낙기가 사인 내고 던진 거야. 3구는 내 사인으로 간다.”

“그걸 믿으라고…….”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트라웃은 3구째도 헛스윙을 했다.

이번 공은 바깥쪽으로 오다가 뚝 떨어지는 커브였다.

말하자면 또다시 유인구였던 셈. 휘두르고 보니 어이가 없다.

정면 승부 운운하더니 커브라니.

“미안, 쟤는 나도 컨트롤이 안 되는 놈이야. 다시 말하면 청개구리…….”

“변명할 필요 없어. 애초에 네 말을 믿지도 않았으니까.”

“아, 그래? 그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공수 교대니까 어서 글러브 끼고 나와.”

“염병… 욕 나올라 그러네. 잡새끼들.”

“뭐라고?”

“…….”

마이크 트라웃이 입을 다물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동안 머리에서 뜨거운 증기 같은 것이 올라왔다.

완벽하게 당한 4회였다.

***

성낙기는 5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와 두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6회엔 브라이스 하퍼가 투아웃에 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투런 홈런을 때려 스코어를 3:1로 만들었다.

성낙기는 하이파이브를 하기 위해 더그아웃 입구까지 나와 손을 들었다.

브라이스 하퍼가 성낙기를 보더니 흠칫했다.

‘얘 뭐야, 왜 갑자기 친한 척이지?’

속으로 뚱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손을 슬쩍 들어 손바닥을 갖다 댔다.

성낙기가 탁, 하고 손바닥을 마주쳐왔다.

만면에 하얀 웃음을 지으면서.

그 표정을 보면 그동안의 악연 같은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휴, 손해 본 적이 없으니까 앙금이 아예 없는가보군.’

브라이스 하퍼는 축하를 받고도 떨떠름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뭔가 개운치가 않다. 그때 성낙기가 다가왔다.

“브라이스. 그땐 내가 좀 심했지?”

“뭘?”

“감정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그날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더라고. 미안하다.”

“…알면 됐어.”

그러고는 한동안 말이 끊겼다. 성낙기는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고 브라이스는 삐진 표정으로 딴청을 부렸다.

침묵이 이어지다가 생각난 듯 브라이스 하퍼가 입을 뗐다.

“넌… 좀 살살 던지면 안 되냐? 나한테 원수졌어?”

“어? 하하. 네가 어지간한 타자라야 말이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담장 밖으로 넘길 거잖아.”

“…최선을 다한다니까 할 말은 없지만…그나저나 넌 마운드에서 공포영화 찍냐? 니가 던질 때마다 살 떨려서 미치겠더라. 또 삼진 먹는 거 아닌가 하고.”

“그랬어? 브라이스가 나올 때마다 나도 얼마나 떠는지 몰라. 삐끗하면 홈런이니까 늘 긴장돼.”

“…너도 사람이었다는 거?”

“앞으론 잘 지내자. 난 KBO에 있을 때부터 브라이스를 동경했어. 엄청난 파워에 놀라면서 저런 타자와 승부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늘 생각했지.”

“뭐, 못 지낼 이유는 없지만…적당히 좀 하자.”

“그래, 알겠다. 브라이스 나오면 내가 빠르고 좋은 공으로 던져줄게.”

“빠르고 좋은 공… 100마일…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

7회 초엔 커쇼가 나왔으나 솔로 홈런을 얻어맞고 3:2로 쫓겼다.

내셔널리그는 7회 말에 2점을 추가, 5:2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8회에 올라온 쥬리스 파밀리아가 연속 안타를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갔고 뒤이어 올라온 세자르 바르가스는 스리런을 얻어맞았다.

게임 스코어 5:5.

“이토록 팽팽한 올스타전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대단한 긴장감이 다저스타디움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팀이 승리하게 될지 매우 궁금합니다.”

“좋은 경기네요. 올스타전이 마치 월드 시리즈처럼 한 치의 양보 없이 흘러가는군요. 오늘 오신 관중들도 몹시 행복할 겁니다.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 아니겠어요?”

내셔널리그는 9회 초에 두 명의 마무리를 투입한 끝에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9회 말 내셔널리그의 마지막 공격은 브라이스 하퍼부터였다.

아메리칸리그의 투수는 갈매기 포즈로 유명한 마무리 크레이그 킴브렐이었다.

“이봐, 브라이스. 너클 커브일 텐데 나라면 초구를 휘두르겠어.”

“웃기지 마. 투수가 뭘 안다고.”

“몰라도 좋으니까 하나 부탁해.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여간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넌.”

성낙기는 더그아웃에서 나가는 선두 타자 브라이스에게 나름 조언을 한다고 했지만, 왠지 역효과다.

브라이스가 발끈했고, 열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타석에 들어섰다.

그의 눈에 킴브렐이 보였다.

오늘따라 사인을 받는 모습이 짜증난다.

지가 뭐라고 갈매기 모양으로 양팔을 구부리고 저러는지.

폼도 더럽게 잰다. 초구가 날아왔다.

그의 유일한 변화구인 너클 커브.

에라.

따악.

크레이그 킴브렐이 던진 공은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왔다.

크레이그의 주 무기는 무브먼트가 좋은 빠른 공이었는데, 타자는 당연히 그 공을 노릴 것이다.

크레이그는 단순하게 그걸 역이용한 볼 배합으로 너클 커브를 택했다.

하지만, 성낙기의 말에 영향을 받은 브라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너클 커브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다.

“브라이스 하퍼가 친 타구! 쭉쭉 날아갑니다. 좌익수가 달려갑니다만, 타구는 담장을 넘습니다! 홈-런!”

“크레이그의 초구를 후려갈겼어요. 엄청난 퍼포먼스입니다! 브라이스 하퍼!”

“브라이스 하퍼가 베이스를 돌고 있고 내셔널리그 선수들이 모두 더그아웃에서 뛰어나옵니다. 굿바이 홈런!”

“참으로 극적이네요. 9회 말 결승 홈런으로 6:5 승리하는 내셔널리그!! 오늘 MVP는 두말할 필요도 없겠어요.”

“브라이스 하퍼,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동료들이 홈 플레이트 앞에 도열해 있습니다. 무자비한 헬멧 공격과 물세례를 퍼붓는 내셔널리그 선수들! 아, 흠뻑 젖은 채로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브라이스 하퍼를 성낙기 투수가 구출해 옵니다.”

“푸하하, 정말 웃기는군요. 성낙기 투수가 저런 면이 있었나요. 브라이스 하퍼를 피신시키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수건까지 챙겨서 얼굴을 닦아주는데요.”

결승 홈런을 치고 득점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홈 플레이트로 나온 선수들의 물세례와 과격한 동작에 브라이스 하퍼는 정신을 못 차렸다.

선수들에 둘러싸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당하고 있던 브라이스 앞에 성낙기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브라이스! 날 따라와.”

성낙기가 길을 텄고 브라이스는 성낙기를 뒤따르면서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성낙기는 앞을 가로막는 선수들을 힘으로 밀어젖히고 브라이스의 손을 잡았다. 브라이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 성낙기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고.

“브라이스를 헹가래 치자!”

누군가 그렇게 외쳤고 선수들이 브라이스에게 더 촘촘한 포위망을 짰다. 성낙기는 브라이스를 이끌고 냅다 마운드 쪽으로 뛰었다.

“야, 어디 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브라이스가 성낙기에게 물었다. 누군가 브라이스의 목덜미를 잡았다.

브라이스는 허리를 숙이며 간신히 뿌리쳤다. 성낙기는 어느새 2루에 다다랐다. 여전히 브라이스의 손을 잡은 채였고 그 뒤를 선수들이 뒤따랐다.

“와하하,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브라이스가 축하를 받는 와중에 성낙기가 브라이스를 빼돌리는 모습을 여러분은 보고 계십니다.”

“허허, 저도 처음 보는 광경이네요. 지금 뭐 하는 거지요? 성낙기가 브라이스를 데리고 2루를 넘어 외야로 달리는군요. 선수들이 뒤따르고요. 웃긴 건 브라이스가 성낙기가 가자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푸하하, 저게 뭐냐. 완전 코미디를 하고 있어.”

“외야까지 도망가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럴 수 있나.”

“홈에서 선수들이 브라이스를 너무 괴롭혔어. 그대로 뒀으면 부상 위험도 있었지. 저건 성낙기가 배트맨처럼 나선 거라고 봐야 해.”

관중들도 무척 즐거워했다.

2루를 넘어 외야로 도망가는 선수들이나 그 뒤를 우르르 쫓아가는 선수들이나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관중들의 환호와 웃음에 뒤따르던 선수들도 외야까지 쫓아가긴 뭐했던지 2루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브라이스 하퍼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관중석과 내야에 모인 선수들을 번갈아 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아직도 자신을 잡아끄는 성낙기를 보고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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