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미션 달성하기 2
성낙기는 타석에 지나치게 붙어 선 보스턴의 타자들을 보고 나름 스트레스가 왔다.
아무리 제구력이 좋은 투수라도 가운데로 몰리는 공이 없을 수 없고 특히 몸 쪽은 조금만 삐끗하면 담장을 넘어가는 코스다.
보통 바깥쪽으로 타자를 공략하는 투수가 많고 성낙기도 그중 하나인데 지금 보스턴 타자들의 위치는 그 공을 공략하기 쉬운 위치다.
이런 경우, 투수와 포수는 몸 쪽 공으로 위협구를 던지며 타석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나서 원래의 패턴대로 바깥쪽을 던지게 된다.
슈욱.
따악.
파울.
그런데 지금 보스턴의 타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울을 때려내면서 버티고 있다.
2번 타자 앤드류에게만 6구째를 던지는 중이다.
그중 다섯 개가 파울.
리얼무토의 사인대로 몸 쪽을 계속 던졌지만 타자들은 요지부동이다.
“타임!”
성낙기는 타임을 부른 뒤, 리얼무토를 마운드로 소환했다.
리얼무토가 마스크를 벗고 인상을 찡그리면서 달려왔다.
성낙기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짜증이 밀려온 상태다.
“이대로 가면 투구 수만 늘어날 것 같은데요?”
“자식들이 무섭지도 않나. 타석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네. 이럴 땐 어쩔 수 없어. 두어 놈 옆구리를 맞추는 수밖에. 맞아 봐야 앗 뜨거 하겠지.”
“보스턴이 노리는 게 그거 같은데요? 벤치클리어링 말이죠.”
“어쭈, 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맞아, 바로 그거지. 내가 열 받아서 맞추라고는 했지만 그건 놈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거지. 너를 어떻게든 흔들어보겠다는 수작이야. 어차피 정면 대결로는 힘들 거 같거든.”
“문제는 초구 말고는 몸 쪽 꽉 찬 공을 주심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거죠. 지금까지 파울은 났지만 기교가 좋은 타자라면 페어 지역으로 보낼 수 있는 코스였어요.”
“그럼, 성낙기 어쩔 생각이야?”
“저들의 의도대로 하시죠. 맞추라고 사정을 하는데 못 맞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다음엔?”
“벤치클리어링 가겠습니다. 앤드류 말고 팀의 중심인 3번 라피엘 디버스와 붙을게요. 그래야 충격이 크겠죠. 뒤에 나올 타자들도 부상을 당하면 안 되니까 계획을 수정할 겁니다.”
“좋아, 성낙기. 아주 마음에 든다. 동양 속담에 이런 게 있었지. 한 번 잘못 든 길은 재빨리 돌아와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경우와 같은 말이지. 잘못 든 길이라는 걸 쟤들에게 가르쳐 줘.”
들어보지도 못한 동양 속담을 들먹이며 리얼무토가 홈 플레이트로 돌아갔다.
리얼무토는 포수 위치에 앉으면서 고개를 갸웃 했다.
‘가만, 내가 맞는 비유를 한 건가? 말을 해놓고도 헷갈리는 건 처음이군.’
***
성낙기는 보스턴의 2번 타자 앤드류를 파울 팁으로 잡아낸 다음, 강타자 라파엘 디버스를 맞았다.
기본적으로 3할의 타율에 30홈런을 쳐내는 타자다.
24세의 어린 나이에 타격 재능이 대단한 천재형 선수.
보스턴의 중심 타선에서 10년은 꾸준히 버텨줄 기대주이자 팀을 대표하는 스타로 발돋움할 준비를 끝냈다.
“루이스, 어떻게 생각해. 정말 맞추려는 걸까?”
채드 왈라치는 리얼무토의 사인을 받고서도 확신하지 못했다. 정말 성낙기가 라파엘을 맞출 것인지 아닌지를.
“넌 배터리이면서도 성낙기를 그렇게 모르냐. 쟤 한다면 하는 놈이야. 어디 한 군데 부서져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걸?”
“루이스 말이 맞아. 내가 본 성낙기는 포악성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힘도 엄청나고 운동 능력도 우리와는 상대도 안 돼. 난, 쟤가 한 번씩 쳐다볼 때 살기를 느끼곤 했어.”
케일럽 스미스가 끼어들었다.
“성낙기가 언제 그렇게 쳐다보던데?”
“샤워실에서 성낙기의 아랫도리를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죽일 듯이 노려보더라고.”
“그건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동양인하고 우리하고 그게 다르잖아.”
“다르긴 뭐가 달라?”
“아, 몰라. 모르면 관둬.”
라파엘 디버스도 타석에 바짝 붙어 섰다.
성낙기는 두 타자를 삼진 처리하긴 했지만 10구를 소비했다.
앤드류에게 7구를 던진 탓.
라파엘에게도 그런 식이라면 20구에 가까운 공을 1회에 던지게 되는 것이니, 6이닝도 장담할 수 없다.
“아, 라파엘 디버스 선수 역시 타석에 바짝 붙습니다.”
“실은 좀 위험한 작전입니다. 강속구에 잘못 맞으면 부상이 올 수 있거든요. 만약 그렇게 되면 팀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코라 감독의 생각을 알 것도 같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성낙기 투수 와인드업! 초구를 던졌습니다. 아아… 라파엘 선수 옆구리를 맞고 타석에서 쓰러집니다.”
퍽.
라파엘은 옆구리를 정통으로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뒹굴었다.
바짝 붙으라는 코치의 말에 사구를 각오하긴 했지만 내심 맞더라도 엉덩이 쪽이길 바랐다.
옆구리를 맞은 라피엘은 한동안 호흡곤란에 시달릴 만큼 충격이 컸다.
아픈 옆구리를 쥐면서 겨우 그가 일어났을 때, 리얼무토가 토닥였고 라피엘은 투수를 보았다. 손을 살짝 들어 미안함을 알리는 제스처를 하는 성낙기,
하지만 라파엘은 그대로 돌진했다.
“라파엘 선수, 마운드로 달려갑니다. 키는 183cm로 비슷합니다만, 라파엘은 107kg의 거구입니다.”
“성낙기 투수는 마치 남의 일처럼 그대로 서 있네요.”
라파엘은 마운드로 올라가자마자 주먹을 휘둘렀다.
성낙기는 가볍게 주먹을 피하고 라파엘의 뒤로 돌아갔다.
라파엘이 달려들어 성낙기를 덮쳤다.
하지만, 성낙기는 어느새 몸을 빼고 옆으로 스텝을 밟았다.
라파엘은 혼자 그라운드에 넘어졌다가 일어나 성낙기를 잡으려고 두 팔을 뻗었다.
성낙기는 그 팔을 잡아당겨 라피엘의 몸을 앞으로 쏠리게 했고, 자신은 마치 지네딘 지단이 마르세유 턴을 하듯 빙글 한 바퀴 돌았다.
라파엘은 또다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가! 보스턴보다 늦으면 안 돼!”
셜리번 투수 코치가 소리쳤고 마이애미 선수들은 우르르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보스턴의 선수들 역시 마이애미보다 먼저 그라운드로 달렸다.
여러 번의 시도에도 성낙기의 옷깃도 잡지 못한 라파엘은 몸을 일으키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이건 다람쥐 새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빨라.’
라피엘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학창 시절 일본 유학생들과 어울려 유도까지 배웠는데 옷깃도 잡지 못하다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싶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보니 성낙기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잡앗!”
그 틈에 보스턴 선수들이 마운드로 올라왔고 마이애미의 내야수들은 성낙기 주위를 철통 방어했다.
보스턴 선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선수들 몇이 경호원처럼 성낙기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처음, 길길이 날뛰던 라파엘도 한풀 죽었고 선수들끼리 밀고 당기는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별 소득이 없자 못 이기는 척 각자의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
“어떡하지. 퇴장 시킬까?”
“누구를?”
“라파엘과 성낙기 말이야.”
“가만, 그 전에 성낙기가 던진 공이 고의였는지부터 팩트 체크를 해야만 해.”
“내가 보기엔 좀 애매해. 워낙 보스턴 타자들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바짝 붙었거든.”
“글쎄, 내 생각은 달라. 평소 성낙기의 제구라면 몸에 맞는 공은 고의가 아닐까?”
“위협구는 야구의 일부분이야. 라파엘은 피할 여지가 있었는데도 소극적이었지. 벤치클리어링을 유도한 측면이 있어.”
“좋아, 그럼 고의 사구는 아니었다 치고 벤치클리어링은?”
“것도 좀 애매하지. 라피엘의 동작이 크긴 했지만 성낙기는 피하기만 했고 실제로 몸 접촉도 없었어.”
“…고의 사구가 아니라면 피하기만 한 투수에게 퇴장을 주기도 그래.”
“좋아, 이번만 특별히 경고를 주는 선에서 정리하자. 마이애미 홈이고 관중도 매진인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심판진이 모여 얘기한 결론은 퇴장 없이 간다, 였다.
성낙기가 라파엘과 뒹굴었다면 동반 퇴장을 주겠는데 피하기만 했다.
거기 대고 퇴장을 선언하면 성낙기를 보기 위해 모인 관중들의 항의가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라파엘만 퇴장을 줄 수도 없다.
행동은 거칠었지만 실제로 맞은 사람도 없고 혼자 뒹굴다가 끝난 벤치클리어링이다.
주심은 양 선수와 벤치에 경고를 주는 선에서 정리했다.
“플레이 볼!”
라파엘은 1루로 나갔고 성낙기는 다음 타자를 맞았다.
보스턴의 4번 타자 미치 모어랜드가 타석에 들어섰다.
1루 주자 라파엘은 여전히 옆구리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어이 라파엘이 손을 들면서 교체를 요구했고 코라 감독은 대주자를 내야만 했다.
“젠장, 이게 뭐야. 얻는 건 하나도 없이 라파엘만 병신이 되어버렸어.”
“내 생각도 같아. 작전이 글러 먹었어.”
“코라 감독은 생각이 있는 거야? 라파엘이 부상을 당하면 백업으로 커버가 안 돼.”
“저 감독은 머리에 자갈이 가득 차 있을 거야.”
보스턴 관중들은 어이없는 결과에 감독을 욕했다.
어쩐지 1번 타자부터 타석에 바짝 붙더니, 최악의 결과만 나았다.
상대 투수를 퇴장시키지도 못했고 도리어 팀의 중심 타자만 퇴장 당한 것과 같은 결과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부상이 길어지면 순위 싸움이 한창인 전반기 막바지에 치고 나갈 동력을 잃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작전이었고 마침내 보스턴 팬들은 대가리에 똥만 찬 감독이라고 원색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작전이 잘 안 먹히는데요.”
“나도 알아. 젠장… 벤치클리어링에서 피하기만 하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네. 작전 취소하고 원래대로 가.”
코라 감독은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기로 한 작전을 취소해야만 했다.
타자들의 반응도 별로인 데다가 몸 쪽으로 붙이는 공에 손가락이라도 골절되면 시즌 아웃이다. 미치 모어랜드는 타석에서 정상적인 위치에 섰다.
성낙기가 사인을 받으며 씩 웃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
“아하하, 결국엔 낙기 씨가 이겼네요. 아까 도망 다닐 땐 정말 다람쥐처럼 빨랐어요.”
“허허, 참 재미있는 놈이다. 벤치클리어링을 아주 희극으로 만들어 버리네.”
“보스턴은 득보다 실이 커요. 라파엘이 내일 경기에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요.”
“뼈에 금이라도 갔으면 그 원성은 모두 감독이 져야할 거야. 멀쩡한 팀의 3번 타자를 다치게 한 당사자니까.”
“야구는 정말 저런 작은 작전 미스 하나로 천당과 지옥이 갈려요.”
“왜 아니겠냐. 참, 성낙기 차는 구입했나?”
“아직요. 자기 말로는 올스타전에서 상금 받으면 그걸로 살까 한다던데요? 지금은 택시로 왔다 갔다 하나 봐요.”
“생각보다 고지식한 놈이군. 메이저리그 2년 차인데 아직 차도 없다니.”
“왜요. 한 대 사주시게요?”
“에이전트인 네가 사주는 걸로 해. 괜찮은 스포츠카 하나 알아 보거라.”
“고마워요, 아빠. 낙기 씨가 무척 좋아하겠는데요?”
한국의 삼호 그룹 회장실에서도 두 모녀는 mlb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1회의 벤치클리어링 결과를 보고 고무된 김현중 회장은 김아경과 함께 몹시 즐거워했다.
두 모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낙기는 미치 모어랜드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1회를 마쳤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보스턴 타자들은 홈 플레이트에서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3삼진입니다. 앞으로 7개 남았습니다.]
상태창이 마련한 이벤트도 잘 풀릴 조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