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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투수 성낙기-131화 (131/188)

# 131

131화 비 오는 날의 풍경화

6월 20일, 샌디 알칸타라의 선발일이었다.

상대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낮 경기였는데 필라델피아의 홈구장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조금씩 굵어지는 빗줄기가 일회성 소나기가 아님을 짐작케 했다.

경기장에 도착했을 땐 빗발이 휘몰아치다시피 했다.

관중들은 비를 피하는 사람, 미리 우산을 준비해 온 사람, 에라 모르겠다, 홀딱 젖으면서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절반 이상이 들어찼네.”

채드 왈라치의 말처럼 필라델피아 관중들은 궂은 날씨에도 출근 도장을 찍은 이들이 많다.

동부지구 4, 5위를 오가는 팀 성적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팬들인데, 몸에서 사리가 나올 만한 야구광들이다.

필라델피아 직원들이 방수포를 내야에 씌우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저리그는 일정이 늦춰지면 더블헤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경기를 진행하고 본다.

시즌 162경기이니 정규리그를 끝내고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 그리고 대망의 월드시리즈까지 치르려면 하는 수 없다.

오늘 같은 날, 비가 온다고 쉬었다간 나중엔 눈을 맞으며 경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허, 무슨 비가 이렇게 오나. 아무래도 경기 접어야겠는데?”

퀸튼이 배트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성낙기에겐 매우 고마운 친구다.

한때 수비요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루이스 브린슨을 대신해 우익수를 맡았는데 성낙기의 우려와 달리 수준급 수비에 어깨가 강해서 홈 송구로 실점을 두 번이나 막아낸 선수다.

1루 주자가 안타 하나에 3루까지 달리는 꼴을 못 보는 선수이기도 하다.

우익수 자리에서 3루까지 곧장 레이저 송구를 던지기 때문에 주자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에 더해, 타격은 3할을 넘길 만큼 수비와 공격에 모두 재능을 보이고 있다.

다만, 28세의 나이에 겉늙어 보여서 40대 아저씨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렇더라도 사람이 겉늙으면 말은 젊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하는 말마다 세월이 흔적이 묻어나는 선수여서 팀을 분위기를 한층 노쇠화 시키는 주범이다.

“그나저나 날 빠르군. 벌써 시즌 중반이라니. 내가 젊었을 적엔 늙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요즘은 뼈가 삐걱거린단 말이야.”

이런 식의 말투를 쓴다. 그럴 땐, 늘 리얼무토가 나타나곤 한다.

“하아, 늙는 것을 한탄만 하고 있으면 세상은 가치가 없는 거야. 퀸튼, 내 말 잘 들어. 오늘은 죽었던 누군가가 그리워한 내일이야. 그러니 푸념 말고 열심히 살아.”

“그 말,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방금 들었겠지. 왜냐하면 내가 만들어낸 말이니까.”

“그건 그렇고 리얼무토. 오늘 우리가 경기를 하게 될까?”

“한다고도 할 수 있고 안 한다고도 할 수 있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면서 결코 알 수 없는 불가사의로 가득 차 있거든.”

“쳇,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퀸튼도 리얼무토가 나타나면 한풀 죽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는 말들로 대화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리얼무토의 저런 말투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괜히 심각해지거나 외면하는 걸로 자신의 말을 대신한다.

퀸튼은 그래도 철학적인 말에 휩쓸리지 않고 대화를 받아주는 편이다.

***

빗방울이 조금 가늘어졌다.

주심을 맡은 잭 콜먼은 심판진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경기 시작을 알렸다.

예정 시간보다 4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구단 직원들이 방수포를 걷었고 시구자로 나선 필라델피아 시장은 자기 앞에 공을 패대기치고 들어갔다.

“결국 내가 몸을 써야한다는 건가? 그다지 내키지 않는군. 이런 날엔 피자 한 판 먹으면서 공포 영화나 때리는 게 딱인데 말이야.”

퀸튼은 거치대에서 배트를 꺼내 더그아웃 밖으로 나갔다.

오늘 필라델피아의 투수는 아론 놀라였다.

노장 제이크 아리에타와 함께 필라델피아의 투수진을 이끌고 있는 우완 투수.

싱킹성 직구와 체인지업이 일품이다.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는 로케이션으로 이번 시즌 6승 2패에 2.57의 방어율로 사실상 필라델피아의 에이스나 다름없다.

샌디 알칸타라로서는 난적을 만난 셈. 퀸튼은 잭 콜먼 주심에게 살짝 웃어주고는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경기 쉽지 않을 거야. 잭 콜먼은 홈팀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주심이거든.”

성낙기 옆에 있던 호세 우레나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호세 우레나가 경기를 망쳤던 애틀랜타 전이 생각났다.

쾌조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지만, 잭 콜먼은 호세 우레나에게 스트라이크 존을 최대한 좁혔고, 상대 팀 투수에겐 관대했다.

그날, 호세 우레나가 준 볼넷이 여섯 개였지 아마?

“아, 생각났다. 샌디가 걱정이네.”

성낙기가 거들었다. 윌프레드 주심과 더불어 메이저리그의 악의 축으로 군림하는 심판이 바로 잭 콜먼이었다.

***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선수들을 응원하는 중이다.

성낙기의 우려는 곧바로 현실이 되어버렸다.

퀸튼은 타석에 서자마자 삼구 삼진으로 아웃 당했다.

아웃이 된 게 아니고 당했다는 표현이 맞는 이유는 일반적인 삼진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런 걸 스트라이크로 잡아주면 어떤 공을 치라는 거야.”

중견수 시에라가 어이없다는 듯 두 팔을 쳐들었다.

비가 와서 눈이 흐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낙기가 보기에도 심했다.

초구는 몸 쪽 포심패스트볼이었는데 꽉 차게 들어와서 퀸튼이 뒤로 물러나야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주심 잭 콜먼은 퀸튼의 반응은 아랑곳 않고 큰 소리로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2구도 이상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였는데 타자가 치기 힘든, 바깥쪽 낮은 코스였다.

“우우우!”

마이애미 관중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잭 콜먼이 아니었다.

아니, 야유에 열이 받았는지 3구로 던진 공은 누가 보아도 볼이었는데도 손을 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3구는 바깥쪽 높은 공이었고 도저히 배트가 닿지 않는 곳에 공이 들어왔다.

높기도 높았다. 거의 타자의 어깨 높이였으니까.

필라델피아의 포수는 외곽 빠지는 공이 미트에 들어오자마자 위치를 옮기며 프레이밍을 시도했다.

“와, 저걸 프레이밍이라고 할 수 있나?”

채드 왈라치의 말이 아니라도 마이애미 더그아웃의 선수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빠지는 공을 억지로 잡아당긴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

사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본래, 프레이밍이란 약간 빠지는 공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다.

공의 변화에 따라 포수는 최대한 팔을 뻗어 받기도 하고, 최대한 몸 가까이 붙여 받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미트의 여러 부위를 이용해서 눈속임을 시도한다.

물론, 받으면서 미트를 스트라이크 존으로 살짝 움직이는 것도 이 기술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아니, 이게 스트라이크라고요?”

퀸튼이 헬멧을 벗고 따질 만큼 마지막 3구는 스트라이크 존과는 거리가 먼 확실한 볼이었다. 다만, 프레이밍이랍시고 빠지는 공을 확 안쪽으로 당기면서 잡아 내리는 포수의 어이없는 미트질이 있었을 뿐이다.

“스트라이크 맞아. 내가 괜히 주심으로 있는 줄 알아?”

“비슷하지도 않을 걸 스트라이크로 잡아주면 어쩌라는 겁니까. 비도 오는데 너무하시는 거 아녀요?”

“경기 시작하자마자 따지나? 비도 오는데 빨리빨리 하자. 어서 들어가.”

“쉣!”

“너 방금 뭐라 했어.”

“아무 말도 안했어요.”

대화를 하는 중에 빗줄기가 굵어져 퀸튼의 욕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잭 콜먼은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정확히 들었다면 퇴장도 불사할 주심이다.

어쨌든 퀸튼은 어이없이 삼진을 당하고 들어와 샌디 알칸타라에게 말했다.

“봤지? 너도 방금 그 코스를 이용하면 투구에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퀸튼.”

“아니야, 난 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모르모트가 될 용의가 있어. 왜냐하면 난 희생정신이 강한 사나이거든.”

“…….”

샌디 알칸타라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어제 주자를 2루에 두고 안타를 쳤던 퀸튼이었다.

하지만, 2루 주자가 스타트를 빨리 끊지 못하는 바람에 홈에 들어오지 못했고 퀸튼은 그 길로 삐져서 경기 내내 울상이었다.

반면, 홈으로 들어오지 못한 홀랜드는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그런 퀸튼이었기에 믿음이 안 간다.

굳이 자신의 삼구 삼진을 투수를 위한 희생으로 둔갑시키는 저의가 뭘까, 의심할 뿐이다.

***

경기는 1회를 넘기지 못하고 가렛 쿠퍼 타석에서 중단되었다.

빗방울이 흙에 떨어져 왕관 모양을 만들 만큼 굵어졌기 때문이다.

필리스 직원들이 다시 방수포를 가지고 와 내야에 씌웠다.

“경기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비가 쏟아집니다. 관중들은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오히려 오랜만의 비에 신이 난 모습입니다.”

“날이 더웠는데 시원한 비가 내리니 좋아하시네요. 응원가를 부르는 필리스 팬들, 참 대단합니다. 마치 축제에 온 것처럼 즐거워하는군요.”

관중들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났다.

비록 원하는 경기가 중단되었지만 하루쯤은 승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팬들에게도 있는 모양이다.

경기가 중단되고도 비는 계속 내렸다. 외야는 물바다로 변했고 그라운드에 그려 놓은 파울라인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잭 콜먼 주심은 비가 멈추길 기다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심판들을 불러 모았다.

“이봐,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

“일기 예보가 하나도 안 맞아. 오늘 10㎜쯤 올 거라고 했거든.”

“자넨 일기 예보를 믿어? 기상청 애들은 그날 자기 기분에 따라서 날씨를 예측하는 놈들이야.”

“그건 그래. 얼마나 한심했으면 하늘이 노했겠어.”

“우리 조카가 이번에 기상청에 합격했어. 면접을 봤는데 면접관이 물었다더군. 요즘 일기 예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즈음에 오보가 워낙 많았거든. 그래서 그랬대. 내가 합격하면 야구장만큼은 책임지겠다고 말이지.”

“그게 뭔 소리야?”

“야구가 열리는 도시의 예측만큼은 오보를 내지 않겠다고 한 거지. 그런데 마침 면접관이 야구광이었대. 그래서…….”

“헤이, 크레이튼. 지금 조카 얘기 할 때가 아냐. 오늘 일찍 끝내고 한잔할 건지 말 건지가 문제지.”

“오, 잭.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어. 내가 보기엔 멎을 비가 아니야.”

잭 콜먼은 장외 마이크를 집어 들고 경기 중단을 선언했다.

선수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라운드로 나와 방수포 위에서 슬라이딩을 하며 관중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고 원래 미끄러운 방수포에 선수들은 슬라이딩의 달인들이다.

마이애미, 필라델피아 선수들 모두 피아 구분 없이 마음껏 뒹굴었다.

캐스터는 중계를 계속했다.

“아, 삼구 삼진을 당한 퀸튼이 가장 좋아합니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훔치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당연하지요. 삼진 하나가 사라졌으니까요. 오우, 저거 뭡니까. 마이애미 선수들이 일렬로 서서 슬라이딩을 시도하는군요. 아마 가장 멀리 간 선수가 이기는 승부 같네요.”

“그에 질세라 필리스 선수들도 슬라이딩 경주에 가세합니다. 아,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마치 한 팀의 선수들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립니다.”

“바로 이게 팬 서비스인 거죠. 즐거운 날입니다.”

그날의 승부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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