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30화 (130/188)

# 130

130화 쿠어스필드 2

트레버 스토리가 친 공은 1루 강습 타구였다.

팀 타선을 이끄는 타자답게 초구로 던진 바깥쪽 투심패스트볼을 가차 없이 때려냈고 마이애미의 1루수 브라이언 앤더슨은 잔뜩 긴장한 채 타구를 향해 글러브를 뻗었다.

퍽.

브라이언 앤더슨이 자세를 낮추며 1루 베이스 쪽으로 내민 글러브에 공이 빨려 들어갔다.

간혹, 불안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던 브라이언이지만 오늘은 집중력이 남다르다.

“강한 타구였는데 잘 잡았어. 저 정도는 잡아 줘야 투수가 힘이 나지.”

“어제 땅볼 타구 훈련을 한 보람이 있군.”

셜리번 코치와 마인 허지스 수비 코치는 브라이언의 수비를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땅볼 타구는 나오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까다로운 코스로 빠지는 타구도 있다.

또한 바운드가 불규칙적인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내야 수비가 잘 처리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투수의 그날 경기 성적이 좌우되기도 한다.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지 않는 한, 수비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고마워, 브라이언.’

성낙기는 타자를 아웃 시킨 브라이언에게 손을 들어 고마움을 표했다.

브라이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얼무토가 그에 화답하듯 검지를 추어올리며 원아웃을 알렸다. 그걸 보던 가렛 쿠퍼가 싱긋 웃었다.

‘오늘 뭔가 느낌이 좋은데?’

성낙기는 다음 두 타자에게도 투심패스트볼 위주의 투구로 내야 땅볼을 유도했다.

두 팀의 투수 모두 좋은 출발이다.

***

경기는 5회까지 0:0의 팽팽한 접전이었다.

아니, 접전이랄 것도 없다.

두 팀의 타선이 제 역할을 못 했으니.

제프 호프만에 3안타에 머물러 있던 마이애미 타선은 6회 초에 힘을 냈다.

선두 타자 퀸튼이 때린 공이 유격수와 3루수 사이로 굴러갔고, 유격수가 잡아 역동작으로 송구했으나 타자는 베이스를 밟은 뒤였다.

무사에 주자 1루.

오늘 경기에서 가장 좋은 찬스가 만들어졌다. 더구나 퀸튼은 언제든 도루가 가능한 선수다. 이런 주자가 나가면 투수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퀸튼은 1루 베이스에서 리드를 크게 벌리며 제프 호프만을 자극했다.

“퀸튼 선수 2루로 뛰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리드를 벌리는 퀸튼.”

“2루로 뛰든 아니든 1루 주자는 저래야 해요. 견제를 유도하면서 투수의 멘탈을 흔들어야만 타자에게 유리해지는 거죠. 변화구를 억제하는 효과도 있는 거고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제프 호프만 투수 1루로 견제구를 던집니다. 퀸튼 선수 슬라이딩 세이프. 타석엔 시클라멘 선수가 들어섰습니다. 연이어 교타자를 맞이하는 제프 호프만입니다.”

“커맨드에 균열을 일으키는 타자들이 연이어 나오네요. 시클라멘 선수도 퀸튼과 마찬가지로 까다롭고 발이 빠른 타자예요. 이런 타자들은 병살을 좀처럼 당하지 않습니다. 병살은커녕 호시탐탐 홈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선수들이죠.”

타석에 들어선 시클라멘은 배트를 짧게 잡고 제프 호프만의 공을 계속 걷어냈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파울만 세 개를 쳐내면서 투수의 진을 빠지게 했다.

그런 뒤, 깨끗한 좌익수 앞 안타로 무사 1,2루의 찬스를 이어갔다.

“좋은 찬스를 이어가는 마이애미입니다. 대량 득점의 발판을 마련했군요.”

“제프 호프만 투수의 위기네요. 방금 공은 슬라이더였는데 시클라멘이 잘 쳤습니다. 여기가 오늘의 승부처가 될 가능성이 높겠어요. 제프 호프만을 상대로 이런 기회는 흔치 않거든요.”

***

마이애미 말린스는 5회에 1점을 내는데 그쳤다.

무사 1, 2루에서 가렛 쿠퍼가 적시타를 터뜨렸으나 4번 타자 브라이언이 삼진을 당했고 5번 디카엘로는 병살타로 찬물을 끼얹었다.

마이애미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제프 호프만을 상대로 1점이라도 뽑아낸 건 그마마 다행이었다.

-좋아, 제프가 1점으로 막았어. 이제 우리 차례다.

-성낙기라는 투수에게 쿠어스필드의 쓴맛을 보여 줘.

-기다려. 곧 타선이 터질 테니까.

-6회 말은 상위 타선이야. 박살을 내버리자.

-마이애미 같은 약 팀은 철저히 밟아놔야 기어오르지 못할 거야.

-이번 회에 서너 점 뽑고 나서 불펜으로 잠그면 승부는 끝나는 거야.

콜로라도 팬들은 6회 말 상위 타선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성낙기는 1번부터 시작하는 6회 말 콜로라도의 타선을 삼진 두 개를 곁들이며 잠재워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8회까지 무실점으로 콜로라도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놀라운 퍼포먼스입니다. 제프 호프만이 6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고 마운드를 내려간 가운데 성낙기는 8회까지 콜로라도 타선을 틀어막았습니다.”

“예상외의 선전이네요. 여긴 쿠어스필드입니다. 가장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이렇다 할 플라이 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낙기 투수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지표 같은 것이죠.”

“9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라올지 궁금해집니다. 8회 말이 끝난 현재 91구를 던졌습니다.”

“제가 보기엔 충분해요. 보통 120구까지는 던지는 게 선발의 역할이거든요.”

“그렇습니까.”

9회 초, 마이애미 타선이 공격을 들어갈 때 셜리번 코치가 성낙기에게 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평소엔 가벼운 얼굴 표정인데 무언가 할 말을 앞두고는 지금처럼 표정이 굳어지곤 한다.

‘뭐야. 그만 던지라는 건가?’

성낙기는 셜리번 코치의 말을 추측해 보며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셜리번 코치가 바로 곁으로 와서 헛기침을 할 때에도 딴청을 피웠다.

“저기… 성낙기야.”

“네?”

“너 있지… 9회에도 던질 셈이야?”

“글쎄요, 던질까요, 말까요.”

“뭐어, 던지는 건 자유이긴 하지. 자유이긴 한데… 실은 불펜 투수가 오래 쉬면 좋지는 않거든. 오해는 하지 마. 난 너의 완봉을 보고 싶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불펜 투수 운운하면서 완봉을 보고 싶다니.’

“야를린은 준비되었습니까?”

“어? 하하, 그럼. 아까부터 연습구를 던지고 있지.”

“그렇다면 이쯤에서 전 쉬겠습니다. 다음 경기에도 대비해야 하니까요.”

“…고맙다. 팀을 위해서 희생하는 너의 마음을 잊지 않을게.”

“알았어요.”

성낙기는 어느새 셜리번 코치도 어렵게 대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완봉도 좋지만 공도 꽤 던졌고 굳이 9회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다.

시즌 내내 9회를 던지게 된다면 과부하는 당연한 것이고 목표로 하고 있는 디비전시리즈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나설 수 없다. 물론, 성낙기는 다르지만.

문제가 되는 건 투수가 기록을 의식하는 경우인데 다행히 성낙기는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뭐래.”

“선선히 9회를 양보했습니다.”

“그래? 성낙기 이제 보니 이타적인 투수로군. 마음에 들어.”

“그럼, 야를린 가르시아 준비시키겠습니다.”

***

콜로라도를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성낙기이 ERA는 1.55로 떨어졌다.

아직 시즌 중반에도 미치지 못한 경기를 치렀을 뿐이지만,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 중에서 3위에 랭크되었다.

1위는 신더가드, 2위는 스트라스버그였다.

둘은 나란히 1점 초반대의 방어율을 기록 중이었다.

그 외, 1점대를 기록한 투수들도 몇 명 더 있었으나 시즌 중반을 넘어가면 방어율은 치솟게 마련이고 시즌 막바지엔 언제나처럼 2점대 초반 정도의 방어율이 리그 탑을 달릴 확률이 컸다.

그렇더라도 성낙기의 성적은 팬들 사이에 반향이 컸다.

6월 초에 벌써 11승을 기록 중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와중에 김아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낙기 씨, 나 김아경이에요. 오늘 LA에 도착했어요.”

“백화점 때문에요?”

“네. 오늘 여기 일 마치고 그쪽으로 넘어갈게요. 내일 봐요.”

그리고 김아경은 정말 마이애미에 왔다. 마침 쉬는 날이었다.

마이애미에 도착하자마자 김아경은 성낙기를 꼭 안으면서 귓속말을 했다.

“낙기 씨, 그동안 나 안보고 싶었어요? 난, 보고 싶었는데.”

말해 무엇 하나.

경기가 끝나고 룸에 혼자 있으면 늘 어른거리던 얼굴이었는데.

하지만, 야구 선수인 자신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는 생각이 컸다. 더구나 나이 차이도 5살이나 된다.

그룹 회장의 딸과 야구 선수…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

김아경은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는지 해맑고 환한 웃음만 연신 띄웠다. 마이애미 해변에 있는 펜션을 잡고 나서 둘은 서핑을 하러 바닷가에 갔다.

슈트복을 빌려 입고 서핑 보트를 가지고 파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가 적당해 보이네요. 파도도 심하지 않고 초보자가 하기에 알맞아요.”

“전에 많이 해보셨어요?”

“저요? 하하 20살부터 좋아해서 대회에도 나간 적이 있죠.”

“대회요?”

“넵, 하와이 서핑 대회에서 여자부 3위로 입상한 경력을 자랑합니다.”

“와.”

“헤헷.”

김아경은 웃더니 시범을 보여준다며 물에 서핑 보트를 띄우고 균형을 잡으며 일어섰다.

성낙기도 따라해 봤지만 물속으로 계속 넘어졌다.

저만치에서 파도가 물마루를 높이며 다가오고 있다.

김아경이 서핑 보트 위에 선 채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높아지고 낮아지면서 리듬을 타는 김아경.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해변에 온 다른 서퍼들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는 김아경이 높은 파도를 타고 오르내리며 물 위에서 자유자재의 몸놀림으로 장관을 연출할 때 그들은 원더풀을 연발했다.

성낙기 역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프로서퍼들의 유영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김아경은 여자이면서 미녀이고 미녀이면서 모델 같은 몸매를 자랑한다.

“낙기 씨! 들어와요!”

소리치는 김아경. 근데 뭐, 탈 줄을 알아야 들어가든가, 말든가 하지.

김아경은 머뭇거리는 성낙기의 손을 잡고 파도가 치는 곳으로 데려가 서핑 보트 타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남자의 자존심에 김아경을 따라잡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물만 여러 모금 삼켰다.

그러는 사이, 석양이 붉게 타올랐다.

***

“올해 성적이 월등해요. 지난 시즌에 비하면요.”

“나름 열심히 했으니까요.”

“난… 나도 야구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낙기 씨의 변화를 보고는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아녀요. 아경 씨… 이렇게 불러도 돼요?”

“하하, 그럼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누나?”

“그건 좀…….”

“아경 씨라고 부르세요. 나도 듣기 좋은걸요. 메이저리그 에이스 투수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오늘 덕분에 잘 놀았어요. 서핑도 많이 배웠구요.”

“재밌죠? 늘 일에 치여 살다가 바닷가에 나와서 파도를 타다 보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들죠.”

“맞아요. 저도 무척 재미있었어요.”

“아 참, 이대로 슬럼프만 없으면 옵션 달성이 가능하겠던데요?”

“옵션… 18승에 190이닝이요?”

“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23승에 200이닝이지. 그래야 옵션에 걸린 달러를 남김없이 훑어오죠. 헤헤.”

“그동안 내 팔은 작살이 나겠군요.”

“…미안해요. 제 생각만 했네요. 실은 부상이 가장 큰 문제인데 말예요. 메이저리그는 4일 휴식 후, 등판이라서 참 힘든 리그죠. KBO에선 제구력 위주로 슬슬 던져도 먹히는 데 이곳은 전력투구를 하지 않으면 성적을 유지할 수가 없기도 하고요.”

“하하, 표정 푸세요. 농담입니다. 아직 아무렇지도 않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솔직히 말하면 옵션이 더 까다롭다고 해도 자신이 있을 만큼 컨디션이 최상이거든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잘 던져줘서 늘 고마워요.”

성낙기와 김아경은 대서양의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한 폭의 풍경화처럼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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