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투수전 4
워마린 타격 코치가 성낙기 대신 대타를 권했다.
내야수인 스탈린 카스트로가 대타로 나서고 9회엔 2루를 맡으면 된다는 계산.
풀타임을 뛰면 20홈런은 칠 거라는 평가가 따르는 선수인데 타율이 2할 초중반에 머무는 게 문제였다.
백업으로 뛰는 이유.
그에 반해 주전 2루수를 꿰찬 시클라멘은 3할에 가까운 타율에 수비 또한 발군이다.
“아니, 성낙기 그대로 가지. 의욕을 보이잖아.”
“의욕으로 되는 거면…….”
“개막하고 나서 타격에 의욕을 보인 적이 없었어. 본인 말로도 그랬잖아. 체력 때문에 타격을 안 하는 거라고.”
“어쨌든 타율이 1할대입니다.”
“일단 맡겨 보자고. 8회까지 1실점으로 던진 투수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워마린 타격 코치의 대타 권유에 알렉스 비토 감독은 동의하지 않았다.
디그롬도 9회를 던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성낙기를 먼저 내리기는 싫었다.
에이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꺾인다면 먼저 꺾이는 투수가 큰 대미지를 입게 될 것이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그 대미지를 입는 주인공이 성낙기가 아니길 바랐다.
따악.
리얼무토가 디그롬의 슬라이더를 노려 쳤으나 중견수 플라이 볼이었다.
8회 말 투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성낙기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
“오, 성낙기 투수가 그대로 나옵니다. 이건 9회에도 던지겠다는 건데요. 1:1 동점인 상황에서 두 팀의 에이스가 모두 9회까지 던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든 승부를 보겠다는 거겠지요.”
“성낙기 투수, 타자로는 1할대인데 어떻습니까. 지난 시즌엔 타자가 무색할 정도의 활약을 보였었는데요. 올해는 타격에 대한 의욕도 없을 뿐더러 맥없는 타석이 많았는데요. 타격감이 살아 있을까요?”
“글쎄요. 그 부분이 우려됩니다. 안타도 쳐 본 사람이 치는 거죠. 1할대에서 헤매던 타자가 디그롬 같은 강력한 투수의 공을 공략하기란 무척 어려울 겁니다. 그러므로 이 타석은 타격을 위한 게 아니라 9회에도 던지겠다는 의지의 표현 정도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캐스터와 해설자의 말처럼 성낙가가 타석에 섰을 때, 모두들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지난 시즌에 잘 쳤다고는 하지만 올해는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디그롬은 성낙기가 타석에 서자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9회에도 던지시겠다……? 나름 끈질긴 놈이군. 기를 좀 죽여주지.’
디그롬은 포수에게 강속구 사인을 냈다.
원래 투수들이나 하위 타선에는 잘 던지지 않는 구종이다.
싱커의 회전이 가미된 포심패스트볼을 전력투구하면 공략은 고사하고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
디그롬은 몸 쪽으로 꽉 찬 공을 던질 셈이었다.
슈욱!
팡.
“우웃!”
성낙기는 가슴 위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전광판에 98마일이라는 숫자가 뜬 강속구였다.
제대로 맞으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것 같은 공. 초구는 디그롬의 의도대로 위협구였다.
‘위협구를 던졌어?’
성낙기는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화를 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분해서 타격에 지장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디그롬이 원하는 것이다.
디그롬은 성낙기의 무반응에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인내력 좋군.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상당해.’
디그롬은 성낙기가 흥분을 해서 벤치클리어링까지 가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초구의 위협구는 멘탈을 흔들어놓는 목적구이니까.
타격뿐만이 아니라 9회에 마운드에 설 때도 투구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랐다.
이대로 9회까지 끝나면 지루한 승부가 이어질 것이고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어떻게든 9회에 타자들이 점수를 내려면 상대 투수인 성낙기를 흔들어 놓는 것이 필요했다. 깨끗한 승부와는 거리가 있지만 프로는 이겨야 존재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보면 디그롬의 위협구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베테랑다운 노련함이 물씬 풍기는 초구였다.
“성낙기가 저 살인적인 공에 맞을 뻔했어. 고의 아니야?”
“고의가 확실해. 시선이 마지막까지 성낙기를 향하고 있었거든.”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위협구를 던지다니, 치졸하기 짝이 없어.”
초구를 본 마이애미 팬들은 우우, 소리치며 디그롬에게 야유를 보냈다.
매너를 지키라는 것.
하지만 관중들의 반응 역시 디그롬이 원하는 바였다.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풋내기들이 많은 마이애미에 불리해질 것이고 성낙기 역시 이제 2년 차 투수일 뿐이다.
경험으로 치면 뉴욕 메츠가 전체적으로 낫고 디그롬도 성낙기보다 월등했다.
경험이 적다는 건 작은 돌발 상황에도 흔들릴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 모든 것을 계산에 넣은 디그롬은 한층 여유를 갖고 포수의 사인을 보았다.
그러고는 힘차게 와인드업을 했다.
따악.
디그롬이 던진 공은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였다.
각이 꽤 크기 때문에 몸 쪽으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휘면서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
몸 쪽 위협구 다음에 던지는 이 공에 제대로 된 타격을 하는 타자는 거의 없다.
다시 몸 쪽일 수 있다는 공포감이 타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기 때문.
친다고 해봐야 엉덩이를 빼면서 툭, 갖다 맞히는 정도가 보통이다.
디그롬의 지금까지의 경험은 그랬다.
물론, 보통의 타자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아, 뭔가요! 날아갑니다!”
성낙기는 보통의 타자가 아니었다.
행크아론의 타격을 이어받은 특별한 타자였다.
다만, 투수였기에 체력을 아껴야 했고 타격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타자와 다를 뿐, 실력으로 치면 팀의 클린업 트리오를 맡아도 이상할 게 없는 선수였다.
그리고 디그롬이 던진 2구를 멀리 보내면서 그 능력을 증명하는 중이었다.
“중견수 따라갑니다만, 공은 쭉쭉 뻗어 관중석으로 갑니다. 오우! 2층 상단에 맞는 대형 홈런이 터졌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디그롬 투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습니다.”
“와아,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저 홈런을 투수가 때려낸 거라니요. 130m가 훨씬 넘는 대형 홈런이군요. 아마, 140m 언저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경이적입니다.”
경기장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선수가 의외의 홈런을 쳐낸 것이었고 더구나 8회 말이었다.
디그롬은 관중석으로 넘어가는 타구를 힐끗 보고난 후, 마운드에서 두 손을 무릎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좀 어처구니가 없는 홈런이다.
초구로 던진 위협구가 잘 들어갔고 바로 이어 던진 슬라이더였는데 기다렸다는 듯 쳐내는 타자.
“멍청이!”
디그롬이 땅을 보며 소리쳤고 케빈 플라웨키는 마스크를 벗고 서서 아직 환호하고 있는 외야 관중석을 응시했다.
눈동자가 약간 풀려 있었다.
이 홈런은 그의 상식을 벗어나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홈런이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늘 타석에서 빗자루처럼 서 있다가 들어가는 투수였고 타격감도 바닥인 투수였다.
그런 투수에게 위협구를 던졌고 멘탈을 흔들었다.
그렇게 한 후에 던진 슬라이더였다.
“이런 젠장할!”
그랬기에 케빈 플라웨키도 저절로 나오는 욕을 참지 못했다.
단순한 홈런 하나였고 겨우 1점이었지만 그 홈런을 친 상황은 생각하면 할수록 기이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야. 나도 감각에 의존한 것뿐이야. 운이 좋았군.”
워마린 타격 코치의 말에 알렉스 비토 감독이 답했다.
성낙기의 타자 기용에 이의를 제기했던 워마린 타격 코치는 머쓱해졌고 알렉스 비토 감독은 성낙기의 홈런에 안도했다.
코치의 의견이지만 대타를 거절한 상황에서, 성낙기가 삼진이라도 당하고 들어오면 그 책임은 감독이 져야할 것이었다.
감독이 굳이 코치의 의견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삼진 대신 역전 홈런을 때려낸 결과에 흐뭇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성낙기는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고 홈을 밟았다.
경기 스코어 2:1.
***
성낙기는 9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마운드로 올라가면서 상태창을 불러냈다.
[체력이 2 남았습니다]
오늘은 8회까지 잘 던졌지만 98개의 투구 수로 체력 관리엔 실패했다.
성낙기는 마운드에 서서 한 타자만이라도 상대할 수 있었으면 했다.
체력이 2라면 포심패스트볼 전력투구로 공 두 개면 바닥난다. 느리게 던진다면 서너 개의 공은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9회 초는 느슨하게 던져서는 안 되는 회였다.
타자들의 타격감이 올라와 있을 때이고 승부가 걸려 있는 마지막 회이니,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방심은 금물, 홈런으로 동점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게다가 9회의 첫 타자는 8번 게빈 체키니.
2할 중반의 타율에 머물고 있어도 한 시즌 17~18개의 홈런 언저리를 치는 타자.
경계해야 할 건 낮은 타율과 적은 홈런에도 결승타가 많다는 점이다.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사인을 받고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체력이 1 남았습니다]
95마일의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으로 들어갔다.
게빈은 타이밍을 맞춰보는 듯 지나간 볼을 상상하며 몇 차례 스윙했다.
다시 리얼무토의 사인을 받은 성낙기가 고개를 저었다.
커브 사인이었는데 타자를 유인하기는 좋지만 스윙을 해도 문제고 참고 기다려도 문제다. 이 카운트에 커브는 타자가 헛스윙을 할 가능성이 있다.
헛스윙과 동시에 체력은 0이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타자는 정리해야 해.’
성낙기는 이를 악물고 2구를 던졌다. 1구와 같은 코스의 같은 구질, 즉 포심패스트볼이었다.
따악.
배트에 맞은 공은 강하게 1루수 앞 투 바운드로 굴러갔다.
케빈 플라웨키가 친 타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구르는 강한 타구였다. 브라이언 앤더슨으로서는 트라우마가 생길 법한 공.
후욱.
브라이언은 짧게 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히며 바운드를 맞췄다.
투 바운드가 될 때 공이 생각보다 튀어 올랐고 브라이언은 감각적으로 글러브를 갖다 댔다. 공이 거짓말처럼 브라이언 앤더슨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고 성낙기는 1루로 뛰었다.
“헤이, 오지 마.”
브라이언 앤더슨은 타구를 잡고 허리를 편 뒤, 손을 들어 성낙기를 제지했다.
게빈 체키니는 속도를 줄이며 1루 앞에서 멈췄고 브라이언 앤더슨이 마주 달려가 글러브 터치를 했다.
원아웃.
[체력이 0입니다]
원아웃이었지만 성낙기에게는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깔끔한 승부였다.
9회 원아웃까지 기어이 잡고 체력이 0이라니.
이렇게 맞추려고 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을 향해 글러브를 들었다.
“야를린!”
이미 언제든 내려오겠다고 말한 뒤였기에 더그아웃의 대응은 빨랐다.
야를린 가르시아는 세이브 기회에 마운드에 오르게 되어 무척 상기된 표정이다.
투수가 완투나 완봉을 밥 먹듯이 해버리면 자신은 할 게 없다.
야를린 가르시아가 공을 넘겨받으며 씨익 웃었다.
“고마워, 성낙기. 설거지 깨끗이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