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투수전 3
팡.
“스윙 스트라이크!”
몸 쪽 높은 공에 휘둘러 줘서 일단은 한숨을 돌렸다.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는 것과 아닌 것과는 공 한 개 이상의 차이가 난다.
투수는 다음 공을 유인구로 던질 여유를 갖게 되고 타자는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유인구를 골라낸답시고 신중을 기하다가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면 그땐 더 불리해진다.
성낙기는 2루를 힐끗 보고는 셋 포지션으로 공을 던졌다.
따악.
이번 공 역시 몸 쪽으로 들어가는 체인지업이었는데 포심패스트볼에 타이밍을 잡고 있던 브랜든 님모는 제 스윙을 하지 못했다.
브랜든이 친 공은 유격수 홀랜드에게 굴러갔고 2루수 시클라멘은 민첩하게 2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갔다.
마운드에서 둘이 나눴던 플레이에 대한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렸다.
“아. 브랜든 님모가 친 공이 유격수 앞으로 바운드됩니다. 홀랜드, 전진하면서 공을 잡아 2루에 뿌립니다. 2루에서 포스 아웃, 2루를 거쳐 1루로 송구하는 시클라멘! 1루에서, 1루에서, 타자 주자마저 아웃시킵니다. 병살타!”
“뉴욕 메츠에게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네요. 거기서 병살을 당하다니요. 홀랜드 유격수와 시클라멘 선수의 콤비 플레이가 군더더기 없이 잘 이루어졌어요. 1루에선 아슬아슬했는데 조금만 느슨한 수비를 했다면 세이프가 되었을 겁니다. 홀랜드와 시클라멘이 성낙기 투수를 살리는 플레이를 하는군요. 이로써 투아웃 주자 3루가 되었네요.”
경기장 분위기는 급변했다. 마이애미 팬들은 기립 박수로 선수들의 플레이에 화답했고, 뉴욕 메츠의 팬들은 브랜든 님모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
어떤 스포츠든 분위기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 기세가 오를 때 몰아쳐야 축구에서는 골이 나오고 야구에서는 안타가 이어진다.
그걸 골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안타로 연결시키지 못할 때, 경기장 분위기는 싸늘히 식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그대로 상대 팀으로 옮겨간다.
이젠 반대로 상대 팀의 기세가 오르게 되고, 이제껏 기세를 올렸던 팀은 위기를 맞게 된다.
7회의 황금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투아웃 3루가 되어버린 뉴욕 메츠의 타선은 이미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노아웃 1, 2루일 땐 최하 두세 점은 낼 것 같았지만 이젠 한 점만 뽑아내도 다행인 투아웃이다.
이런 상황에 나오는 타자의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다.
‘젠장, 순식간에 투아웃이라니.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욕이란 욕은 다 쏟아지겠군.’
타석에 들어서는 포수 케빈 플라웨키는 막중한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자신마저 덧없이 물러나고 나면 뉴욕 메츠의 팬들의 화살도 자신에게 쏠릴 것이다.
팀의 베테랑 타자가 주자를 3루에 두고 아웃되었다고 말이다.
“오, 케빈.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셨네.”
케빈 플라웨키의 마음을 아는 양, 리얼무토가 밝게 웃었다.
케빈 플라웨키는 그 웃음을 보자마자 비위가 상했다.
마치, 나 정도는 걱정도 안 된다는 표정 아닌가.
얼마나 나를 하찮게 봤으면 주자를 3루에 두고도 저런 웃음이 나올까 싶어서 케빈 플라웨키는 속이 부글거렸다.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서 중요한 안타를 치는 거지.”
“오, 그러셔? 음, 자신감이 우주를 찌르는군. 저 투수가 바로 워싱턴과의 개막전 완봉을 거둔 투수야. 머지않아 ERA가 0점대에 도달할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누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아? 신더가드에 비하면 햇병아리일 뿐이지.”
“그래? 기어이 한번 해보겠다 이거군.”
“좋아, 적시타가 뭔가를 보여주겠어. 가장 강한 공으로 부탁한다.”
‘애가 뭘 믿고 이러지?’
리얼무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강한 공으로 던지라고? 살짝 어이가 없다.
겨우 2할 중반대의 타격에 저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리얼무토는 케빈 플라웨키의 성향을 떠올렸다.
가만, 생각하니 빠른 공에 장점이 있는 타자다.
언젠가 아롤디스 채프먼의 강속구를 쳐서 홈런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물론, 몇 년 전이지만 친 건 친 거다.
‘맞아, 애가 강속구에 강점이 있었던 타자였어. 요즘 성적이 별로다 보니 내가 간과했군.’
리얼무토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떠올리며 케빈 플라웨키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강한 공으로 던지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다 보니 케빈이 강속구를 때리던 기억들만 골라서 떠올랐다.
잠시 심각한 표정을 한 리얼무토는 사인을 냈다.
‘초구 슬라이더……?’
포심패스트볼이나 투심 등의 속구 위주 초구 사인을 내던 것에 비하면 조금 이례적이다.
케빈 플라웨키 같은 베테랑은 배트 스피드가 떨어지니 강속구 위주의 투구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성낙기는 리얼무토의 사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리얼무토이고 그가 가장 잘 아는 뉴욕 메츠의 포수 케빈 플라웨키 아닌가.
이런 사인엔 뭔가 리얼무토만의 생각이 있을 거라고 보았다.
성낙기는 주저 없이 슬라이더를 던졌다.
타자의 몸 쪽에서 바깥쪽으로 휘어지며 떨어지는 공.
날카로운 각이었다.
따악.
그러나, 케빈 플라웨키는 기다렸다는 듯 슬라이더를 때렸다.
타구가 1루수 브라이언 앤더슨 쪽으로 강하게 굴렀다.
브라이언 앤더슨은 바운드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인 채 글러브를 갖다 댔고 공은 글러브에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엇……?”
하지만 빨려들어 갔다고 생각했던 공은 글러브 안쪽을 맞고 튀어 올랐다.
브라이언 앤더슨의 생각보다 강한 타구였고 공이 들어온 순간, 글러브를 오므리지 못했다.
타구가 브라이언 뒤쪽으로 흘렀다.
브라이언이 흘린 공을 잡으러 뒤돌아 뛰었고 그 틈에 도미닉 스미스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뜻밖의 득점에 뉴욕 메츠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괴성을 질러댔다.
마치 만루 홈런이라도 터뜨린 것 같은 감격이 그들의 얼굴에 드러나 있었는데, TV 화면에 잡힌 서넛의 여자 팬들은 소리쳐 환호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세이프!”
1루에 살아나간 케빈 플라웨키가 뉴욕 메츠 더그아웃을 보며 어퍼컷 세리머니를 했다.
브라이언 앤더슨이 화난 표정으로 케빈을 노려보았다.
저건, 그러니까 mlb에서의 옳은 태도가 아니다.
상대의 에러를 틈타 타점을 올린 타자가 취할 행동은 더더욱 아니다.
KBO라면 그냥 넘어갈 만한 간지러운 세리머니지만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모인 이곳에선 상대팀의 부아를 치밀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뽀록으로 안타 치니까 좋냐. 좋아?”
“1루 강습 안탄데 무슨 뽀록이야.”
“세리머니 적당히 하라는 말이야. 상대 실수로 1루를 밟았으면 겸손해야지, 어퍼컷을 날리고 지랄이야.”
“너 방금 욕했냐. 어퍼컷을 날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둘의 신경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양 팀 더그아웃에서는 선수들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나가서 한판 붙을 모양새다.
브라이언 앤더슨은 성질 같아선 케빈을 들어 땅바닥에 메다꽂고 싶었지만 참았다.
7회 말에 자신이 선두 타자로 나서기 때문에 타격에 영향을 주는 짓은 삼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타점 올린 건 이해하겠는데 세리머니가 심하다는 거지.”
“그래? 기분은 이해한다니 말은 통하는 친구군. 하지만… 지랄이라고? 쉣!”
“뛸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리얼무토 컨디션 좋거든.”
다툼으로 시작된 말들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기분을 이해한다는 브라이언의 한마디가 케빈 플라웨키의 화를 누그러뜨렸고 찬스를 이어가는 상황에서 굳이 벤치클리어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성낙기가 다음 타자를 투수 앞 땅볼로 가볍게 솎아내고 이닝을 끝내 버린 것은 케빈 플라웨키에게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어쨌든.
게임 스코어 1:1.
***
경기는 팽팽했다.
마치 활시위가 당겨진 것처럼.
1:1에 양 팀 에이스의 격돌이면 많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렵고 불펜으로 투수가 바뀐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뉴욕 메츠의 불펜이 불안하다지만 강한 마무리 투수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내심 월드시리즈를 노리는 팀이니 상대적으로 마무리 투수가 약하다는 것이지, 하위권 팀들에 비하면 강한 마무리 투수다.
이번 시즌 ERA 3.04의 쥬리스 파밀리아가 그렇게 만만한 투수는 아니다.
게다가 마무리 앞에 던지는 투수들은 2, 3이닝 정도는 충분히 무실점으로 막아낼 전력이다.
즉, 디그롬이 물러난다 해도 경기의 승패는 오리무중일 거라는 말.
그런 경기에선 누군가가 툭 튀어나와서 예상치 못한 활약을 해줘야 쉽게 풀린다.
양 팀 모두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연장이 기다리고 있고 승부가 날 때까지 겨뤄야 하는 mlb의 특성상, 한없이 지치고 지루해질 것이다.
두 팀 모두 연장을 피해야 다음 경기에 지장이 없다.
“이렇게 되면 누가 미쳐줘야 하는데.”
“그렇습니다. 홈런 한 방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런 역할을 해줄까.”
“브라이언 앤더슨이 하나 칠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마이애미의 구단주 데릭과 오스틴 단장은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렇게 팽팽한 투수전은 승패를 떠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데릭은 7회 말에 누군가가 한 방 쳐주기를 기다렸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브라이언 앤더슨이 삼진으로 물러나고 다음 타자들 역시 무기력했다.
그리고 경기는 8회로 넘어갔다.
[체력이 14 남았습니다]
7회의 체력 소모가 컸다. 이대로라면 완투는 힘들 것이지만 동점인 마당에 굳이 완투를 할 이유는 없다.
성낙기는 8회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전력투구를 한 끝에 실점 없이 이닝을 끝냈다.
마이애미의 불펜엔 데일 카론과 팬 파일러가 9회를 던지기 위해 몸을 풀고 있었다.
1:1의 스코어에서 마무리 투수가 마운드에 오를 이유는 없으니까.
[체력이 5 남았습니다]
성낙기가 이닝을 끝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올 때 체력을 알리는 글귀가 다시 떴다.
마이애미의 8회 말 공격은 7번 타자 홀랜드부터였다.
디그롬은 8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잭 스나이프 감독은 더 던지겠다는 디그롬을 말리지 않았고 디그롬은 9회까지 던질 속셈이었다.
자신이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서 타선의 득점 지원을 기다리겠다는 것.
승리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저런 욕심이 매년 15승이 넘는 승수를 쌓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그런 집념에 걸맞게 디그롬은 홀랜드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12K를 기록했다.
마이애미의 다음 타자는 리얼무토.
성낙기는 대기 타석에 나가 헬멧을 쓰고 배트를 휘둘렀다.
데일 카론과 팬 파일러라는 좋은 불펜 투수가 몸을 풀고 있는 상황이라면 성낙기를 내려야 맞다.
지금 타자로 나서면 9회에도 무조건 한 타자는 상대해야 한다는 결론.
굳이 대타 카드를 투수로 버리면서까지 성낙기를 타자로 기용할 이유는 없다.
거기에 성낙기는 올 시즌 0.158의 타율로 바닥이다.
이는 성낙기가 타석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결과이지만 남들이 보는 눈도 어디 그런가.
마이애미의 팬들도 성낙기가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
“리얼무토 다음 타자는 대타로 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1점이 중요한데 한 타석을 날릴 이유가 없어.”
“야! 성낙기! 너 대신 나갈 타자 많아!”
성질 급한 관중 하나는 성낙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성낙기는 관중의 웅성거림을 못 들은 척 연습 스윙에 여념이 없었다.
“성낙기 대신 스탈린 카스트로가 어떻겠습니까. 타격감이 올라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