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26화 (126/188)

# 126

126화 투수전 2

성낙기는 순조로운 반면, 디그롬은 그렇지 못했다.

ERA 1.88이 무색하게 퀸튼에게 선두 타자 홈런을 허용한 것.

디그롬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고 마이애미의 팬들은 생각지도 못한 타점에 환호했다.

1:0.

디그롬은 약간 열을 받은 듯 전력 피칭으로 강속구를 던졌고 나머지 세 타자를 연속으로 범타 처리했다.

“성낙기, 승리투수 기회다. 어쩔 수 없이 완봉가야겠다.”

셜리번 투수 코치는 마운드로 올라가는 성낙기에게 부담스러운 말을 해댔다.

경기를 하다보면 1점 차가 가장 힘들다.

지키기도 어렵지만 그 1점을 지키려고 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사구나 볼넷에 민감해지는 건 물론이고 1루에 주자라도 나가면 어떻게든 2루 진루를 막아야한다는 강박까지 생길 정도다.

“무슨 투수 코치가 투수에게 부담 가는 말만 한담.”

성낙기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뉴욕 메츠의 타선을 내야 땅볼 위주로 잘 요리했다.

작년보다 한결 제구력이나 스피드가 올라왔고 타자들을 상대하는 요령도 생겼다.

성낙기는 6회까지 무실점으로 단 2안타만을 허용하며 마운드를 이끌었다. 디그롬 역시 1회 말고는 실점이 없었다.

“성낙기 투수, 6회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뉴욕 메츠의 타선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메츠 타선을 상대로 2개의 1루타를 허용했을 뿐입니다.”

“뉴욕 메츠는 매우 초조할 겁니다. 이러다가 완봉을 당하지 말란 법도 없거든요. 만약 그렇게 되면 성낙기 투수는 자신감을 얻게 될 테고 메츠 타자들은 그 반대가 되겠죠. 경이로운 건 볼넷조차 없다는 거예요.”

“말씀드리는 순간, 성낙기가 7회 초 메츠 타선을 맞아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 타순은 뉴욕 메츠의 3번 타자, 도미닉 스미스부터입니다.”

도미닉 스미스는 굳은 얼굴로 타석에 섰다.

앞선 두 번의 타석 모두 내야 땅볼 아웃으로 체면을 구겼다.

0:1로 뒤지고 있는 7회, 투수가 지칠 시점이다.

타자는 투수의 공이 어느 정도 눈에 익을 시점이기도 하다.

도미닉 스미스는 다음을 다잡고 콤팩트한 연습 스윙을 하며 안타를 노렸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구위를 생각하면 장타 확률이 떨어진다.

선두 타자로 나선 자신이 찬스를 만들어주면 뒤엔 팀 티보와 윌머 프로레스라는 만만치 않은 타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그들을 믿고 어떻게든 1루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도미닉, 오늘 날이 좋지?”

“…….”

느닷없는 리얼무토의 물음에 도미닉 스미스는 대꾸하지 않고 모른 척했다.

지난 시즌에 세계관이 있네, 없네 하는 말에 흥분해서 타격을 망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리얼무토는 말이 없는 도미닉 스미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내 도미닉의 의중을 파악했다.

“입 꿰매고 있는 다고 안타가 나오면 누구라도 그러겠지. 그렇게 참기만 하다간 역효과야. 안타도 못 치고 삼진 당하기 십상이지.”

“…알고 그러는 거야, 그냥 찔러보는 거야?”

“내가 예전에 그랬거든. 상대 포수가 말을 걸면 꾹 참다가 타율이 1할대로 떨어졌었지. 너 건드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우린 어차피 같은 직업 동료잖아.”

“…….”

도미닉 스미스는 또 슬슬 시작되는 리얼무토의 나쁜 말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마운드 위의 투수에게 집중했다.

1회부터 3회까지는 빠른 공 위주로 던지다가 4회부터는 변화구가 많아졌다.

7회면 구위가 조금은 하락할 테니 보여주기로 포심패스트볼을 던진 다음, 변화구로 승부할 것이라고 도미닉은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초구는 포심패스트볼이 들어왔다.

팡.

“스트라이크.”

다만, 도미닉 스미스의 생각과는 달리 초구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역시 마운드 위의 성낙기라는 투수는 늘 예측을 조금씩 빗나간다.

이런 식이라면 2구도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올지 모른다.

슈욱.

딱.

파울.

2구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슬라이더였는데 예상보다 멀어서 엉거주춤 타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들지 않았으면 볼이었을 공.

이런 공이 난해하다.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하면 볼이 들어오고 볼을 던질 타이밍에 스트라이크가 들어오곤 한다.

물론, 어느 투수나 타자의 생각에 엇박자를 내려하지만 유독 성낙기라는 투수는 그런 엇박자가 심하다.

포수인 리얼무토의 패턴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에 맞추려 하면 예측이 빗나가는 걸로 보아 투수의 사인이 가미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젠장, 갈피를 잡기 힘들어. 그렇다면.’

도미닉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은 이상, 모험이라도 걸어야겠다는 생각.

이대로 물러나는 건 경기를 포기하는 거나 같다.

타순이 가장 좋은 7회에 뭔가를 하지 않으면 8, 9회에 점수를 내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도미닉은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섰다.

와인드업을 하는 성낙기가 보였다.

공이 날아왔다.

톡.

도미닉 스미스는 타격 자세를 바꿔 번트를 시도했다.

공은 3루 선상을 타고 흘렀다.

3루수가 급히 들어왔지만 최대한 힘을 죽인, 잡기 애매한 타구였다.

그렇다고 투수가 잡기도 너무 멀다. 리얼무토는 마스트를 벗고 달려 나갔다.

그나마 포수가 처리하는 것이 가장 나은 타구.

도미닉 스미스는 번트를 대고 나서 전력 질주했다. 본래 발이 빠른 데다 수비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 공을 굴려놓고 1루에 거의 다다라 있었다.

퍽.

“세이프.”

리얼무토가 맨손으로 공을 잡아 1루로 뿌렸으나 간발의 차로 세이프가 선언됐다.

도미닉 스미스의 재치에 뉴욕 메츠 팬들이 휘파람을 불며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안타로 눌려 있던 타선에 물꼬를 튼 선두 타자 안타였기 때문.

노아웃 1루로 뉴욕 메츠는 오늘 경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맞았다.

***

-굿! 도미닉은 역시 없어서는 안 될 타자야.

-번트에 마이애미 수비진이 흔들렸어. 이쯤 되면 투수도 쉽게 승부하지 못해.

-도루하고 후속 타자에게 맡기면 1점은 충분해. 역전 가자.

뉴욕 메츠 팬들은 도미닉의 번트에서 희망을 봤고 말끝에 생기가 돌았다. 반면 마이애미 팬들은,

-하아, 얍삽하게 번트가 뭐냐. 그렇게 이기고 싶었어?

-뉴욕 놈들 참 비매너네. 무슨 소프트볼 하냐?

-나가봐야 뭐 하나. 뒤에 나오는 타자들 모두 삼진 아웃일 게 뻔한데.

번트를 조롱하면서 뒷일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성낙기의 구위를 믿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정작 성낙기는 마운드에서 약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체력이 27남았습니다]

생각보다 체력이 많지 않다.

보통의 투수들이 15구 내외의 투구를 한 이닝에 하는 걸 생각하면 부족한 체력이다.

더구나 지금은 전력투구를 해야 할 시기.

도미닉 스미스는 1루에 나가자마자 리드를 벌리며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타석엔 뉴욕 메츠의 4번 타자 팀 티보가 들어섰다.

벌써 8홈런을 기록하고 있는 슬러거다.

앞선 타석에서는 커브로 삼진을 잡았지만, 이젠 느린 변화구에 대비를 하고 나올 것이다.

퍽.

성낙기는 1루에 견제구를 던졌다.

리드를 한껏 벌린 도미닉 스미스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간신히 세이프.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성낙기의 견제구가 이토록 날카롭고 빠를 줄은 생각하지 못한 눈치다.

리얼무토는 초구에 포심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바깥쪽 높은 공 사인이었다.

따악.

팀 티보가 기다렸다는 듯 배트를 휘둘렀고 공은 1루 관중석으로 들어갔다.

다분히 노림수가 있는 타격이다.

도미닉 스미스의 도루에 대비하여 빠르게 던지는 포심패스트볼을 예측한 게 분명했다. 배트가 조금 빨랐더라면 페어 지역으로 들어왔을 안타성 타구였다.

성낙기는 투심과 슬라이더 등을 던지며 유인했으나 팀 티보가 참아냈고 볼 카운트는 스리 볼 원 스트라이크로 불리해졌다.

리얼무토의 사인은 초구와 같은 포심패스트볼.

성낙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따악.

성낙기의 의도대로 팀 티보의 타격은 땅볼이었다.

포수 앞 그라운드를 강하게 맞고 튀어 오르는 타구였는데 타자의 힘이 좋아서 생각보다 큰 바운드가 만들어졌다.

탓!

성낙기가 자신의 위로 통과하는 공을 잡으려고 점프했지만 높아도 너무 높았다.

타구는 성낙기 뒤쪽에 바운드 된 뒤, 2루 베이스 위를 지나갔다.

2루수가 달려와 뻗은 글러브는 조금 늦었고, 타구는 중견수 앞으로 굴러갔다.

중견수가 공을 잡아 2루로 던졌지만 도미닉 스미스는 이미 2루를 밟고 있었다.

빗맞았지만 코스가 워낙 좋았고 바운드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행운의 안타.

경기는 순식간에 노아웃 1,2루의 황금 찬스가 만들어졌다.

“오, 이게 뭡니까! 7회 초, 번트에 이어 안타를 터트리는 뉴욕 메츠입니다. 성낙기 투수를 상대로 노아웃에 1, 2루의 찬스를 만들어냅니다.”

“흔치 않은 기회가 왔네요. 뉴욕 메츠의 끈질긴 정신이 만들어낸 찬스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팀 티보의 타구가 큰 바운드가 되면서 아무도 잡지 못했어요.”

“다음 타자는 브랜든 님모입니다. 지난 시즌 성낙기를 상대로 꽤 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른 타자들은 1할 대나, 2할 초반의 상대 전적에 머물렀지만 브랜든 선수만큼은 2할 중반의 타율에 홈런을 쳐낸 적도 있습니다.”

“맞아요. 성낙기 투수가 조심해야 할 타자죠. 과연 이 위가를 어떻게 벗어날지 성낙기의 투구가 몹시 궁금해집니다.”

셜리번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리얼무토와 내야수들도 마운드에 모였다.

뉴욕 메츠의 팬들은 커다란 함성으로 경기장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성낙기, 아직 더 던질 수 있겠어?”

“당연하죠.”

“잘 맞은 공은 없어. 알지? 하던 대로 하면 충분해. 음… 내일 오전에 팀 미팅이 있는데 모두들 늦지 않게 회의실로 오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셜리번 코치는 성낙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가렛 쿠퍼는 마운드의 흙을 스파이크로 다듬었고 유격수 홀랜드와 2루수 시클라멘은 내야 땅볼일 때 병살을 시키기 위한 이야기를 나눴다.

노아웃에 1, 2루의 위기를 맞은 선수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차분함이었다.

“나 격려해 주러 마운드에 온 거 아니야? 왜 딴청들을 피워.”

보다 못한 성낙기가 투정 섞인 항의를 했고,

“뭘 이 정도 위기 가지고 그래. 어차피 다 아웃시킬 거잖아. 괜히 위기인 척하면서 나중에 생색내려고 하지 마.”

마운드 정리를 끝낸 가렛 쿠퍼가 성낙기를 보고 씩 웃었다.

성낙기는 어이가 없었다.

이 엄청난 위기 상황에 내뱉는 말로는 최악이다.

부담만 잔뜩 키우더니 다들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선수들의 반응을 보고 성낙기는 자책했다.

그동안 위기를 척척 넘기다 보니 으레 그럴 줄 아나보다.

‘아니,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던지라든지, 침착하게 대응하라든지, 뭐 이런 위로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냐? 내 일이 아니라는 듯 가 버리면 나 혼자 어쩌라고.’

성낙기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리얼무토는 어느새 홈플레이트에서 몸 쪽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을 내고 있다.

브랜든 님모가 타격 자세를 잡기 전, 풀스윙으로 배트를 휘두른다.

저런 스윙에 걸리면 바로 넘어가겠지.

한 방 잘못 맞으면 스리런이고 그렇게 되면 오늘 경기는 끝이다.

성낙기는 침을 꼴깍 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