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화 브라이스 하퍼 2
성낙기는 2회 말, 3타자를 맞이해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KKKK, 4삼진을 기록했다.
심상치 않은 삼진 행렬에 마이애미 팬들은 급히 조달한 종이에 K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삼진은 멈추지 않았다.
5회까지 6개를 더 잡아 10삼진을 기록했고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성낙기 투수, 5회까지 안타 2개만을 허용하며 무려 열 개의 삼진을 잡아냅니다. 믿어지십니까? 아직 5회입니다.”
“제구력이 엄청납니다. 타자들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공을 던지고 있어요. 지난해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네요. 워싱턴으로서는 뭔가 대책이 필요해요.”
“브라이스 하퍼 역시 2번 나와 모두 삼진입니다. 이렇게 되면 징크스는 계속됩니다.”
“그렇죠. 브라이스 하퍼가 올해 들어 이토록 작아 보이기도 처음이에요. 심각합니다.”
경기는 7회까지 그대로였다.
성낙기는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고 트레버 고트 역시 2회를 제외하고는 역투를 거듭했다.
양 팀 모두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지 못하고 헛스윙 연발이었다.
트레버 고트도 7삼진이나 잡아냈다.
그중 2삼진은 성낙기가 당한 거였는데 체력 안배상, 치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치는 것보다 1점을 지키는 쪽을 택한 것.
8회엔 워싱턴의 불펜이 나왔고 마이애미 타선은 침묵, 성낙기는 8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체력이 13입니다 적극 관리 요망합니다]
변화구 위주의 투구라면 1이닝은 충분한 체력이다. 성낙기는 와인드업을 하기 전, 관중석을 보았다.
KKKKKKKKKKKKKK.
자그마치 K가 14.
5회까지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을 거의 삼진으로 잡아낸 수치였다.
브라이스 하퍼와 라파엘 바티스타가 버티는 막강 타선을 상대로 한 엄청난 활약. 워싱턴 팬들은 5회가 넘어가면서 조용해졌다.
도무지 삼진 행렬을 끊어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운드의 투수는 갈수록 힘 있는 공을 뿌려대고 있고 워싱턴 타자들은 전염이라도 된 듯 헛스윙으로 일관했다.
“8회에도 성낙기 투수가 나옵니다. 이대로라면 완봉이 머지않아 보입니다.”
“워싱턴 타자들이 제대로 당했네요. 오늘 삼진이 14개인데 그중 9개는 볼에 헛스윙하면서 타석에서 물러났어요. 워낙 유인구가 그럴듯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타자들이 참아내지 못한 결과죠. 리얼무토의 볼 배합이 아주 좋습니다.”
“만약 8, 9회에도 삼진 퍼레이드가 이어진다면 근래에 드문 기록이 만들어질지 모릅니다. 지난 시즌 워싱턴이 당한 삼진은 커쇼 투수에게 15삼진이었거든요.”
“맞아요. 그게 작년에 가장 많이 당한 기록이었죠. 그런데 7회에 벌써 14삼진이면 워싱턴으로서는 치욕적이에요. 배트를 짧게라도 쥐고 단타를 노리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시점입니다.”
마운드에 선 성낙기를 보면서 워싱턴 타자들을 걱정해 주는 캐스터와 해설자. 삼진의 제물이 될 타자는 해설자의 말을 들은 듯 배트를 짧게 잡고 있다.
삼진 기록은 헌납하기 싫다는 몸짓인데 꽤나 설득력은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안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피홈런이 드문 투수가 성낙기였고 지금 워싱턴 타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타이밍이다. 하지만,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따악.
내야 땅볼 아웃.
성낙기는 8회에도 삼진 둘을 추가하여 16K를 만들었다.
워싱턴으로서는 미칠 노릇.
성낙기는 16K를 잡고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어떻게 보면 몹시 냉정하기도 했다.
이런 정도의 성적을 올리고도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선수는 드물기 때문이다. 성낙기는 적어도 냉정한 남자 정도의 캐릭터를 원하고 있는 셈이었지만 팬들의 반응은 달랐다.
“쟤 오늘 왜 저러냐. 누구 죽었어?”
“내 말이 그 말이야. 다 좋아하는데 혼자 비장하네.”
“원래 K를 많이 잡으면 그런 거야. 킬을 많이 할수록 사내다워지게 마련이지.”
“혹시 너무 잘 던져서 충격 받은 게 아닐까.”
“하여튼 작년과는 달라졌어. 아니, 얼마 전 경기에도 저렇진 않았지.”
“저러다 또라이 되는 거 순식간이니까 의료진이 잘 살펴봐야 할 거야.”
“설마.”
“현실은 영화보다 더 리얼해. 오늘 여기서 누구 하나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지.”
[체력이 5 남았습니다]
더그아웃으로 성낙기가 들어올 때 상태창이 떴다.
저 체력이라면 도저히 9회는 던지지 못한다. 삼진 기록이 걸려 있는 만큼 알렉스 비토 감독도 함부로 교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체력이 5라면 전력투구 5구면 끝이다.
성낙기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9회를 던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러나 던지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
“던질 수 있겠어?”
“던지겠습니다.”
셜리번 코치가 그렇게 물었을 때 성낙기는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
셜리번 코치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갸웃했다.
던지는 거야 던지는 건데 마치 전장에 나가는 무사처럼 눈빛이나 표정이 자못 비장하다.
셜리번 코치가 성낙기의 체력에 대해 알 리 없었다.
성낙기로서는 모험이나 다름없다. 겨우 체력을 5 남겨두고 더 던지겠다고 나서다니.
“리얼무토, 9회엔 내가 사인을 낼게요.”
“왜? 또 그 무시무시한 공 던지려고?”
“노우, 세 타자 모두 맞춰 잡는 쪽으로 가겠습니다.”
“삼진 기록 때문에 더 던지겠다고 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럴 바엔 더 던질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성낙기는 9회 말에도 마운드로 걸어갔다. 팬들은 K행렬이 적힌 종이를 흔들어댔다.
오늘 맞은 안타는 4안타.
9회 선두 타자는 2번 앤서니 렌던이다.
대기 타석에 브라이스 하퍼가 배트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빠른 승부가 답이다.
성낙기가 사인을 내고 공을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이런… 바깥쪽 완벽한 스트라이크 존인데 배트를 내다가 거둬들인다.
앤서니 렌던은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는지 몸짓에서 묻어나오는 감정들이 신중하기 그지없다.
‘곧 교체 요청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스트라이크인데도 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체력은 곧 0이 될 테고 9회 도중 마운드를 내려가야 한다.
속으로 쓴웃음을 삼킨 성낙기는 2구로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전매특허처럼 아래로 가라앉는 구종이 아니었다.
1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과 똑같은 코스.
똑같은 궤적으로 날아오는, 속도를 줄인 공이었다.
궤적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 성낙기는 타이밍 싸움을 걸었고 타자는 반응했다.
워낙 눈에 들어오는 공이었으므로 배트가 가만있지 못했다고나 할까.
따악.
앤서니 렌던은 배트를 내다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속도를 늦췄다.
그러고는 손목을 이용해 타격하는 B플랜을 가동했다.
하지만 성낙기의 공은 생각보다 더 느렸고 공은 빗맞아 3루로 굴러갔다.
3루수 가렛 쿠퍼가 전진하면서 맨손으로 공을 잡아 1루에 던졌다.
“아웃!”
1루심이 오른손을 들어 아웃을 알렸다. 대기 타석에 있던 브라이스 하퍼가 타석에 들어섰다.
눈빛이 흉흉한 걸 보니 9회엔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보였다.
[체력이 4 남았습니다]
1구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전력투구가 아니었기에 체력은 1이 소모되었다.
공 2개에 체력 1의 소모라면 최대한 경제적인 피칭.
체력이 다 되면 어떻게 되는지 성낙기는 알고 있었다.
그건 곧, 120km를 던지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공을 던진다면… 포심패스트볼로는 기네스북에 오를지 모른다.
아마, 역사관에도 기록되지 않을까.
100년 동안 가장 느린 포심패스트볼을 던진 투수로 말이다.
이 상황이 사면초가인 건 맞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체력 탓을 할 순 없다.
주어진 체력 스탯 안에서 최대한 긴 이닝을 끌어가는 법을 터득하는 수밖에.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걸 익힐 수 있는 기회다.
타석엔 브라이스 하퍼가 들어섰다.
성낙기는 남을 힘을 쥐어짜는 느낌으로 공을 던졌다.
브라이스 하퍼에게 느린공은 거저 던져주는 떡이나 다름없을 터.
전력으로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타자의 바깥쪽으로 날아갔다.
따악.
좋은 공이다 싶은 구질에 바로 배트를 내는 브라이스 하퍼.
경쾌한 소리가 났고 우익수가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이 성낙기의 눈에 잡혔다. 우익수 루이스 브린슨이 낙구 지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고 중견수 시에라도 빠르게 움직였다.
중견수와 우익수 중간으로 날아가는 공이었고 브라이스 하퍼는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우중간을 가르면 2루타는 기본이고 원아웃에 득점권의 위기를 맞게 된다.
성낙기는 날아가는 공과 외야수들의 움직임을 함께 주시했다.
루이스 쪽이 더 가까워 보이지만 거의 2루타 성 코스로 날아가는 공이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의 타구를 루이스가 따라갑니다. 쭉쭉 뻗는 타구! 중견수 시에라도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2루타 코스! 루이스 사력을 다해 달립니다. 순식간에 워닝트랙까지 물러난 루이스, 펜스를 앞에 두고 글러브를 내밉니다. 잡느냐!”
“워우, 잡았네요. 잡았어요. 완전히 빠지는 공인데 타구를 잡아내고 펜스에 부딪혔습니다. 아, 부상인가요?”
루이스 브린슨은 펜스에 다 와서야 점프하면서 공을 잡았고 펜스에 부딪혔다. 땅에 내려온 뒤 글러브를 들어 아웃을 알린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펜스에 어깨를 부딪친 충격이 상당한 모습.
외야수들이 다가갔고 한참만에야 일어선 루이스는 교체되어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우익수 자리엔 카메론 메이빈이 들어갔다.
본래 좌익수가 포지션이지만 워낙 수비가 좋은 탓에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외야 유틸리티 자원인데 타격 부진으로 한동안 트리플에 있다가 올라왔다.
타격만 올라오면 주전 중의 주전인데 안타까운 선수.
[체력이 3 남았습니다]
‘아아, 미치겠다.’
성낙기는 자꾸 떨어지는 체력과 상태창의 압박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완봉을 한 타자 남겨두고 4번 바티스타를 상대해야 한다.
브라이스 하퍼의 포심패스트볼 공략을 보니 바티스타에게 같은 공을 던졌다간 홈런이 나올 확률이 높다.
성낙기는 초구로 커브를 선택해 타자의 몸 쪽으로 던졌다. 유인구가 아닌,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는 공.
맞아도 하는 수 없다.
야구는 어차피 선택의 연속이니까.
***
따악.
파울.
다행히 3루 파울 지역으로 공이 굴러갔다. 빠른 배트 타이밍을 잡았다가 커브가 들어오니 파울이 날 수밖에 없다.
성낙기는 바깥쪽으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파울.
연속으로 공을 건드리며 타격감을 잡아가는 바티스타.
변화구 2구를 던졌으나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
느린 변화구 하나에 0.5의 체력 소모를 감안하면 3이었던 체력이 2가 남았어야 맞지만 수학 공식처럼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그때그때의 체력 소모는 오로지 투수의 몸 상태와 변화구의 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다.
성낙기는 신중하게 리얼무토와 사인을 교환한 다음 힘껏 공을 뿌렸다.
구질은 라이징패스트볼.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바티스타의 배트가 돌아갔고 리얼무토는 공을 받고 뛰어올랐다.
워싱턴을 상대로 완봉승이라니.
9회에 리그 톱 슬러거 두 타자를 잡아낸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바티스타는 죄인처럼 더그아웃으로 향했고, 리얼무토가 성낙기를 향해 뛰어왔다. 내야수들도 모두 성낙기의 완봉을 축하하기 위해 마운드로 향했다.
[체력이 0입니다. 더 이상 던질 수 없습니다]
상태창은 친절하게 더 이상 던지지 말라는 글귀를 떠올렸다.
리얼무토와 성낙기는 서로를 안았고 마운드를 중심으로 내야수들이 둥근 원을 형성했다.
이럴 때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팀원끼리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게 보통.
다만, 마이애미는 좀 달랐다.
“아까 뭐랬지? 고기 맛있는 집이 있다고?”
“그렇다니까. 루이스 삼촌이 거기 사장이고 농장에서 직접 수급하는 곳이야. 맥주 한잔하기엔 그만한 곳도 없지.”
“그런데 넌 루이스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잘 알아?”
“나? 루이스 베프잖아. 작년에 가봤거든.”
“그럼, 시에라 말을 믿고 가보자. 설마 푸줏간을 소개하기야 하겠어?”
“근데 루이스는 고기보다 치료가 먼저일 텐데.”
“괜찮아. 거기 가자니까 활짝 웃었거든.”
팬들이 모두 일어서서 완봉을 축하하는 마당에 선수들은 마운드에서 저희끼리 속닥였다.
물론, 더그아웃에서 걸어 나오는 감독과 코치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흐뭇한 표정의 알렉스 감독이 이런 작당을 알 리 없다. 그리고 그때 성낙기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체력이 95로 오릅니다]
체력이 무려 92에서 3이나 올랐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멀게만 느껴지던 체력 100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