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난적 뉴욕 양키스 4
[체력이 18 남았습니다]
성낙기는 눈앞에 떠오른 글귀를 보며 8회엔 마운드를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을 쥐어짜면 8회까지는 어찌어찌 던지겠지만 팀을 위한 길은 아니다.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선발은 적당한 때에 물러나야 하고 불펜 투수는 홀드를, 마무리 투수는 세이브를 챙겨야 한다.
성적과 기록이 쌓여야 힘이 나는 건 투수라고 예외가 없다. 불펜 투수를 둘이나 영입했는데 놀리는 것도 팀에 마이너스가 된다.
“아, 아론 저지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지난해, 51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이면서 0.288의 타율을 기록한 정교한 타자입니다. 오늘 경기, 1루에 주자를 두고 성낙기 투수로부터 안타를 뽑아냈습니다만, 점수를 내는 데 기여하지는 못했습니다.”
“성낙기 투수가 가장 조심해야 할 타자죠. 지난 시즌에도 중요한 경기에서 홈런을 허용했었습니다. 아론 저지가 나가면 뒤에 스탠튼이 있습니다. 투아웃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없는 두 선수입니다.”
따악.
초구로 던진 커브가 홈 플레이트를 맞고 1루 방면으로 흘렀다. 아론 저지는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헬멧을 두드렸다.
아마 느린 변화구를 예상치 못했으리라.
성낙기는 채드 왈라치의 투심 사인을 거부하고 자신이 마운드에서 사인을 냈다.
성낙기의 사인을 받은 채드 왈라치의 몸이 굳었다.
‘쟤는 내 몸이 무슨 돌로 만들어진 줄 아는 모양이지? 혹시 원바운드라도 오면 난 그날로 죽는다. 정신 차리자, 채드.’
채드 왈라치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마음을 다잡았고 성낙기는 있는 힘껏 공을 뿌렸다.
쇄애액!
팡!
“스윙 스트라이크!”
또다시 그 공이었다. 글레이버를 상대로 던졌던 놀라운 공.
무려 7km의 스피드가 증가된 공이면서 95마일의 공보다 볼 끝이 살아있는 무시무시한 공이었다.
아론 저지는 배트를 내밀었지만 타이밍이 늦었다. 지난 시즌에 성낙기가 던진 강속구를 상대한 적은 있지만 96마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99마일이다.
‘후아, 엄청나군. 신더가드가 마이애미에도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공 끝이 매우 지저분하다.’
아론 저지는 한 차례 스윙을 한 뒤, 타격 자세를 잡았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운드의 투수는 자신을 상대로 느린 변화구와 강속구를 던질 수 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이라는 희귀종까지 가진 투수다.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는 모습이 아론 저지의 눈에 들어왔다.
환청인가. 성낙기라는 투수의 입에서 무언가 짧은 소리가 나온 것도 같다.
“전광석화(電光石火).”
파앙.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론 저지가 배트를 휘둘렀지만 이번 공은 스트라이크 존이 아닌, 몸 쪽 하이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존이라고 해도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공이었다.
그만큼 공의 무브먼트가 남달랐다.
캐스터가 전광판을 보고 소리쳤다.
“아, 이번 공은 자그마치 99.3마일입니다. 엄청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미친 공이네요. 같은 99마일이라 해도 저렇게 휘듯이 들어가면 타자는 속수무책이죠. 성낙기… 이 투수는 약물 검사가 아니라 과연 지구인이 맞는지를 알아내야 할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원반던지기를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마치 그런 느낌이네요. 전혀 가라앉지 않으면서 휘는 공 말입니다. 비슷한 공을 던진 메이저리그 투수가 있긴 했죠. 오래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헤이드 존입니다. 그가 저런 느낌의 공을 던졌어요. 그런데 성낙기 이 투수는 아마 그보다 더할 겁니다. 헤이드 존의 공에 무브먼트가 좀 더 가미된 형태, 그게 성낙기의 공입니다.”
“휴… 헤이드 존이라면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던 강속구의 대명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공보다 성낙기의 공을 더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왜냐하면, 믿을 수 없는 공을 던지니까요.”
아론 저지마저 잡아내고 7회를 끝마치자 양키스 팬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도무지 이 순간이 현실 같지 않았다.
리그 최고의 교타자 글레이버를 삼진으로 잡아내더니 양키스가 자랑하는 아론 저지마저 3구 삼진을 잡아내는 괴력의 마이애미 투수.
심지어 성낙기라는 저 투수는 아론 저지를 돌려세우고도 별 감흥이 없는지 덤덤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실은 저게 무서운 것이다.
저 모습은 마치 아론 저지, 너 정도는 아무 때라도 삼진을 잡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글레이버와 아론을 한 회에 3구 삼진으로 잡아내는 투수는 없다. 최고의 타자 둘을 아무 일도 아닌 듯 공 6개로 처리해 버리는 무심함이 그대로 느껴져서 양키스의 골수팬들은 뒷골이 서늘했다.
“아아, 아론 저지마저 당했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탄식처럼, 양키스 팬들은 경기의 결과는 둘째 치고 최고의 타자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대 투수는 동양에서 온 루키에 불과한 2년 차 투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침묵은 그들이 입은 자존심의 상처의 크기를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내면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불길하다.
라는 말이었다. 지난 시즌 여러 번 만난 마이애미를 상대로 그렇게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저 단어가 적확하다면 마이애미는 양키스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예견이나 다름없다.
팬들은 그 단어와 함께 더그아웃으로 사라진 성낙기의 모습을 오버랩 시켰다.
***
데릭은 아론 저지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성낙기를 보며 무릎을 쳤다.
“드디어 이겨냈군. 내가 보는 눈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다고 할까. 아무튼 굉장했어.”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공은 갈수록 빨라지고 변화도 더 심해진 것 같고.”
“지난 시즌을 보고 저 친구가 현재진행형인 걸 확신했지.”
“적절한 말이네요. 현재진행형…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무서운 게 있을까요.”
“양키스 관중은 이미 느끼고 있을 거야. 하지만, 시즌은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이 더 공포스럽겠지.”
8회엔 팬 파일러 대신 새로 팀에 합류한 데일 카론이 마운드에 섰다.
5년 3천 500만 불을 주고 데려온 불펜의 기대주다.
팬 파일러와 더불어 경기 후반을 지키는 필승조 역할을 할 재목.
97마일에서 99마일을 꾸준히 던지는 강속구 투수인데 슬라이더와 체인지업까지 장착했다.
선발에 실패한 후, 불펜으로 옮겨와서 잘된 케이스.
체력은 약하지만 2이닝 정도는 전력 피칭으로 위력적인 공을 던진다.
볼.
그런 그도 양키스의 4번 타자 스탠튼을 의식한 듯 유인구로 일관하다가 볼넷을 내줬다. 그러고는 나머지 타자들을 삼자범퇴 시키며 기세를 올렸다.
6번 타자를 상대할 때, 3루 선상을 타고 흐르는 공을 수비가 잘 처리한 행운도 따랐다.
그런 뒤 맞은 9회는 양키스의 하위 타선이었고, 야를린 가르시아는 1점 대 방어율을 찍고 있는 마무리답게 경기를 매조지 했다.
2:0.
마이애미가 양키스를 셧아웃 시킨, 야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만한 결과였다.
성낙기는 경기의 MVP로 인터뷰했다. 최대한 겸손하게.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료들이 다 해줬죠. 채드 왈라치의 사인이 아주 좋았고 타자들은 점수를 내줬습니다. 그리고 제 뒤의 투수들도 점수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성낙기 선수,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요? 본래 성격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저 원래 겸손합니다. 팀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잘난 척한 경우가 조금 있었을 뿐이지요.”
“아, 그런가요?”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사람이 달라졌나.’
더그아웃에서 성낙기를 보고 있던 셜리번 코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마이애미에 올 때만해도 건방진 면이 있었고 벤치클리어링에선 브라이스 하퍼를 꼼짝 못하게 한 일로 벌금까지 문 놈이다.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성낙기도 그런가, 생각했다.
“인터뷰 어땠어요. 매우 겸손하게 잘했죠?”
성낙기가 더그아웃에 와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
내셔널리그 동부 지구는 예상대로 워싱턴 내셔널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뉴욕 메츠가 뒤를 이었다. 두 팀 모두, 스토브리그에서 전력을 보강했고 탄탄한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그 뒤를 마이애미가 바짝 따르고 있었다.
5월 5일 현재, 뉴욕 메츠와는 겨우 한 게임 차에 불과했다.
투타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애틀랜타는 꼴찌로 떨어졌고, 리빌딩 2년 차인 필라델피아는 4위로 나름 선방하고 있었다.
1위인 워싱턴과 꼴찌인 애틀랜타의 경기 차가 5경기일 정도로 올해는 동부 지구가 상향평준화 된 느낌이 강하다.
성낙기는 초반의 기세와 다르게 4승에 그쳤는데, 유독 하위권 팀과의 경기에서 타선이 터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0점대 방어율을 유지할 수는 없고 타자들이 터지지 않으면 경기를 이기는 건 난망하다.
하지만, 4월 한 달을 보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FA로 들어온 선수들도 제 몫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치고 올라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와아, 성낙기 빨리 나왔네. 야간 경기를 벌써부터 준비하는 거야? 지금 아침 9시라고.”
오늘은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2차전이 열리는 날이면서 성낙기의 선발이 예정되어 있다.
“천만에, 몰랐어? 채드가 잘 때 난 항상 이래왔거든.”
성낙기가 호텔 내부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을 타며 말했다. 30분 째 달리다 보니 허벅지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채드도 사이클에 앉아 페달을 밟기 시작했고, 조금 있으니 퀸튼과 데일카론, 그리고 사무엘까지 나왔다. FA 삼총사다.
퀸튼은 팀에 없어서는 안 될 1번 타자로 자리 잡았고 데일 카론은 팬 파일러와 함께 7, 8회를 책임지는 투수로, 사무엘은 선발이 일찍 무너지면 스윙맨으로 나와 경기를 이끌었다.
마이애미가 시즌 초반부터 안정적인 3위를 유지하는데 힘을 보태는 친구들이다.
“썬은 부지런하네. 에이스는 역시 달라.”
퀸튼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준다.
184cm의 키에 88kg의 다부진 체형에 벌써 8도루를 기록 중인 선수.
셋 모두 러닝머신에 올라타서 가볍게 몸을 푼다.
반바지 차림의 데일 카론은 껑충한 키에 하체가 다소 빈약해 보였다.
자기도 그걸 느꼈는지 성낙기의 허벅지를 보고는 한마디 했다.
“성낙기 허벅지 장난 아닌데? 투수치고도 꽤 굵은 편이야. 강속구가 하체에서 나오나 보지?”
“그럼, 데일은 키에서 나오는 거야?”
“아니, 난 팔이 유독 길어. 전에 코치님이 아주 좋은 체형이라고 하셨지.”
가만 보니 길다. 195cm의 키도 만만치 않지만 팔은 거의 무릎 근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셋 포지션에서 약간 약점을 드러내더니 팔 스윙이 커서 그랬던 것도 같다.
“그래, 데일은 하체를 조금 더 단련해 봐. 내 뒤를 막아주는 것도 잊지 말고.”
성낙기의 뒤를 받쳐주는 투수이기에 더 잘 던져주길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다.
워싱턴과의 경기에서도 팬 파일러 아니면 데일 카론이 7회나 8회에 나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성낙기가 완투나 완봉을 거두지 않는 한.
다행히 오늘 워싱턴의 선발은 트레버 고트.
5선발을 맡고 있으면서 방어율도 3점대 후반에 머물고 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투수 쪽은 성낙기의 압승이 예상되지만, 브라이스 하퍼가 이끄는 타선은 워싱턴이 한 수 위다.
물론 5선발이라고 해서 각성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정 팀에 강한 투수는 얼마든지 있고 슬로 스타터도 많다. 5월이면 어깨가 풀릴 때이고 따뜻해지면 잘 던지는 투수가 대부분.
절대라는 게 통하지 않기에 야구는 매력적이다.
동부 지구 최강이자, 지난 시즌 월드시리즈 준우승 팀인 워싱턴 내셔널스를 떠올리며 성낙기는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