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21화 (121/188)

# 121

121화 난적 뉴욕 양키스 3

양키스의 관중들은 느긋하게 감상하던 경기였다.

타선이 한 번 터지면 성낙기도 막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고 6, 7회쯤이 그때라고 판단했다.

투수가 힘이 떨어질 때이고 양키스의 타선은 충분한 힘이 있었으므로.

아울러 루이스 시크릿이 버티는 마운드는 철벽이라고도 생각했다.

개막전 이후 루이스 시크릿이 거두고 있는 성적이었다.

물론 시즌 초반엔 방어율이 아주 낮은 투수들이 있다. 그러다가 시즌이 치러질수록 낮았던 방어율은 조금씩 올라가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루이스 시크릿의 데이터 역시 개막전 포함, 두 경기에 불과해서 방어율이 곧 실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경기에서 긴 이닝을 던지며 짠물 투구를 한 그였기에 성낙기에게 맞은 3루타는 눈을 비비고 보게 되는 낯선 광경이었다.

상대 투수의 발이 무척 빠르다고는 하지만 2루타 성 타구로 3루를 허용한 것부터 팬들로서는 속 터지는 일이다.

“젠장, 수비 똑바로 안 할 거야? 상대는 만년 꼴찌 마이애미라고.”

그것도 모자라, 내야 땅볼에 홈을 파고들어 세이프가 되자, 양키스 팬들의 질타는 극에 달했다. 느슨한 수비로 안 줘도 될 점수를 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점수를 준 이후 타자가 1루에 살아나간 것도 꺼림칙했다.

그리고 다음 타자를 맞아 루이스 시크릿이 초구를 던질 때 발 빠른 퀸튼은 2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히트 앤드 런.

따악.

시크라멘이 초구를 공략한 타구가 2루 베이스를 넘어 스탠튼에게 굴러갔다. 전진하던 스탠튼은 허리를 굽혀 공을 받으려다 뒤로 흘렸다.

멀리서 보면 가랑이 사이로 빠지는 공이 정말 엉덩이에서 알을 까는 것처럼 보였다.

“어어어……?”

1루 주자 퀸튼이 도루를 하듯 투구 폼을 훔치며 2루로 내달렸고 타자는 기다렸다는 듯 안타를 때려냈다. 퀸튼은 2루를 거쳐 3루까지 노렸다. 그걸 본 스탠튼이 달려 들어와 최대한 빨리 공을 처리하려다가 실수를 한 것.

침착하게 처리했으면 원아웃에 1, 3루로 그마나 병살을 노려보든, 범타로 처리하든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5회를 1실점으로 틀어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탠튼의 알까기는 그런 작은 희망마저 무너뜨리는 결정타였다.

“퀸튼 선수, 3루를 돌아 홈으로 파고듭니다. 좌익수가 펜스 앞에서 공을 잡아 2루로 공을 던집니다. 홈 송구를 포기하는 양키스의 외야입니다.”

“정말 작전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네요. 알렉스 비토 감독은 잭팟을 터뜨리는 기분일 겁니다.”

“안타 하나로 1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고, 타자 주자는 2루에 도달합니다. 2루타!”

“성낙기에게 맞은 3루타가 뼈아팠어요. 상대 투수에게 맞은 3루타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죠. 내야 땅볼 때 아웃 카운트 대신 홈 송구도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간 1루 주자 퀸튼이 안타 하나에 홈으로 들어와 버렸으니까요.”

마운드의 루이스 시크릿은 허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마치 꿈처럼 자신만 빼고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 느낌, 마운드를 중심에 두고 경기장은 돌고 있었다.

관중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고, 뛰는 선수들과 더그아웃의 고함 등이 아련한 옛날처럼 보일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의식의 공백 상태, 루이스 시크릿은 그렇게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

5회의 2실점은 양키스의 더그아웃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선수들은 뜻하지 않은 실점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깨끗하게 안타를 맞아 실점한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건 실책에서 비롯된 2점이니 여러모로 찜찜하다.

지금 마운드에 오르는 저 투수에게 맞은 2루타 성 3루타가 빌미로 작용했다.

“하여튼 신경 쓰이는 놈이야. 저 녀석이 나올 때마다 거슬려.”

“동감이야. 동양 놈 주제에 잘도 막아왔어. 하지만 걱정 마. 곧 무너질 테니까. 제깟 놈이 던지는 95마일의 공으로는 양키스 타선을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만 되면 좋으련만.”

“이번 회부터 1번 글레이버 토레스 타선이야. 놈을 박살 낼 거야.”

양키스의 타격 코치 프레이드와 배터리 코치 벤스타민의 대화였다.

벤스타민의 사심이 들어간 동양인 비하 멘트는 그의 심성을 짐작케 하고도 남았다. 195cm에 110kg의 거구를 자랑하는 그는 선풍기형의 홈런 타자였는데 가진 힘과 재능에 비해 성격은 다혈질이라는 선수 시절의 평가가 대다수였다. 그 성정은 코치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건 곧 구제불능이라는 말과 같다. 실제로 그는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나면 선수보다 더 흥분하여 날뛰어서 징계를 받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아무튼, 마이애미 관중들의 짜릿한 카타르시스 속에 맞이한 7회 초에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랐다.

글레이버 토레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글레이버! 안타를 날려!!”

“그래 날려! 이 멍충아!! 공을 쪼개 버리라고!”

글레이버가 나오자 양키스 팬 몇이 외쳤다. 웃옷을 벗은 채였고 몸 이곳저곳을 타투로 물들인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맥주를 한 손에 들고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마도 5회의 실점 후, 약이 바짝 올라 과음을 한 듯 했다.

큰 목소리였기에 성낙기는 타석에 선 글레이버를 보는 척하면서 그 관중들을 보았다.

성낙기가 보기엔 양아치와 다름없는 놈들이었다. 곁에 있는 관중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말이며 행동이 거칠었으니까.

‘신성한 경기장에 웬 맛이 간 놈들이 왔나. 글레이버는 필히 삼진을 잡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저 떨거지들이 기고만장할 거잖아.’

성낙기는 그들을 보는 순간 마음을 굳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글레이버를 돌려세우겠다고.

그러고는 여태껏 내지 않았던 사인을 냈다.

사인을 받은 채드 왈라치는 긴장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미친, 불가사의한 공을 던지겠다는 거다.

‘아, 연습 때 받아보지 못한 공인데… 집중하자.’

채드 왈라치는 속으로 되뇌며 성낙기의 공을 기다렸다.

성낙기가 와인드업을 한 뒤 공을 던졌다.

“전광석화(電光石火).”

성낙기는 낮은 목소리로 짧게 발음하며 공을 던졌다.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고 구속의 공을.

글레이버는 두 타석을 속절없이 물러난 후여서 더욱 마음을 다잡고 타석에 서 있었다.

5회에 성낙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공격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타석에 서 있다.

집중력은 최고조에 다다랐고, 앞선 두 타석에서 성낙기의 공을 눈에 익힌 만큼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팡!

다른 때와 달리 미트에 꽂히는 공 소리는 글레이버의 귀에 마치 천둥처럼 들렸다.

천둥이었고, 번개였고 벼락이었다. 공이 지나간 뒤 글레이버는 엄청난 위압감에 몸이 굳었다.

방금 지나간 공이 과연 저 투수가 던진 것이란 말인가.

글레이버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이건 뭐야……!!’

가령, 강속구 투수로 소문난 신더가드나 스트라스버그 같은 투수가 던지는 공이라면 이토록 놀랄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1회부터 그런 공을 던졌을 테니까.

같은 속도의 공을 7회에 던진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타석에 선 글레이버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본 성낙기의 공은 스피드만큼은 다른 강속구 투수와 비슷했지만, 체감 속도는 그걸 능가했다.

느린공을 던지다가 갑자기 빠른 공을 던진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더구나 글레이버는 숱한 강속구를 상대해 본 타자였다.

포수 미트에 꽂히는 소리도 다르다. 이 공은 힘이 있는 정도를 떠나 에너지가 홈 플레이트에서 폭발하는 느낌까지 줄 정도로 강한 종속을 가졌다.

99마일(159km).

99라는 숫자가 전광판에 떠오르며 반짝거렸고 그걸 본 관중들은 온몸을 다해 경이를 표현했다. 여자들은 자신이 뜰 수 있는 가장 큰 눈으로 전광판을 바라보며 소리쳤고 남자들은 뒤로 상체를 젖히거나 두 팔을 올리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옆 사람을 보았다.

마치 동의를 구해야만 할 일이라는 듯.

“오우! 뭡니까. 성낙기 투수! 99마일을 던졌습니다! 자그마치 99마일입니다!”

캐스터는 홈런을 중계하듯 목소리의 옥타브를 올렸고,

“현실입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지난 시즌에도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공을 성낙기가 또 던졌네요. 아니, 그때보다 모든 것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스피드는 물론이고 글레이버를 꼼짝 못 하게 하는 저 공 끝의 힘에 채드 왈라치의 미트가 밀렸습니다.”

경기장 안은 성낙기의 공 하나로 평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

말린스 파크의 특별석에는 데릭 구단주와 오스틴 단장이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6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성낙기를 보면서 뉴욕 양키스 전 첫 경기의 승리에 부풀었다. 시즌 첫 경기의 기선 제압은 선수단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지난 시즌 양키스를 상대로 성적이 좋지 못했기에 더 그렇다. 하위 팀은 상위팀을 상대로 초반에 밀리면 헤어날 길이 없다.

“잘하면 성낙기가 승리투수가 되겠는데요. 아마, 7회까지만 잘 막으면 불펜이 괜찮으니 승산이 있을 겁니다.”

오스틴 단장은 성낙기가 7회 초에 마운드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데릭에게 그렇게 말했다. 오스틴 단장의 머리엔 FA로 사들인 데론 카일과 사무엘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라면 8회 한 이닝 정도는 막아낼 것이고, 9회엔 가르시아로 간다는 판단이다.

혹시 성낙기가 7회에 위기를 맞더라도 수준급 불펜 투수는 준비되어 있는 셈이다.

“글쎄, 7회면 힘이 떨어질 때가 되었는데… 타선도 1번부터야.”

데릭은 그라운드를 주시하며 자신의 계약이 옳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경기 초반이야 투수의 체력이 싱싱할 때이니 무실점으로 방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7회이고 상대는 월드시리즈 우승 팀인 뉴욕 양키스였다.

거기에 더하여 1번부터 시작하는 양키스 최강의 타순이었다.

이걸 막아내는 투수라면 거액의 계약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반면, 여기서 실점이라도 한다면 그저 무난한 마이애미 에이스 정도의 실력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계약이 틀리지 않았다면 7회를 막아줘야겠죠?”

오스틴 단장은 데릭의 생각을 읽어낸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개막전의 완봉보다도 이 7회가 성낙기의 잠재력을 판단하기엔 적격이었다.

최강 팀을 상대로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7회에 최강의 타순을 맞이한다는 것.

그들은 이 7회의 의미를 단순한 한 이닝이 아닌, 한 투수가 가진 실력의 척도로 바라보고 싶어 했다.

팡.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성낙기의 사력을 다한 투구와 전광판에 찍힌 99마일이라는 선명한 숫자를.

관중들의 탄성과 환호를 들으면서 데릭과 오스틴은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낙기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었고 계약을 하기 전, 수많은 투구 모습과 팔색조 같은 변화구와 갈수록 빨라지는 포심패스트볼 영상을 분석했었다.

그런 뒤에 내린 결론이 거액의 계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오늘의 이런 투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성낙기는 강속구 투수라기보다는 그렉 매덕스처럼 정교한 제구력으로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였다.

거기에 다른 투수들이 던지지 못하는 구종을 가진 투수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99마일이라니.

***

성낙기는 글레이버 토레스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2번 타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며 소란스럽던 일부 마이애미 관중조차 숨을 죽이고 그라운드를 주시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글레이버에게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모조리 99마일이라니.”

“후우… 나도 믿기지가 않는군. 저런 투수였다니. 지난 시즌의 활약은 몸을 푸는 정도에 불과했어.”

“연간 회원권을 끊고 다닌 지가 20년인데 성낙기처럼 놀라운 투수는 처음이야. 그는… 신의 선물이야.”

말을 마친 그들은 갈증이 나는 듯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성낙기는 글레이버를 3연속 전광석화로 돌려세운 뒤, 2번을 상대로는 다시 평범한 투수 모드로 돌아왔다.

94~95마일의 포심패스트볼과 다양한 변화구 위주의 패턴이다.

그런 변화를 가만 놔둘 해설자가 아니었다.

“저런… 99마일을 던지다가 갑자기 속도를 줄여 95마일로 내려왔군요. 디디 그레고리우스 자존심 상하겠는데요? 글레이버 토레스를 상대로는 최고 구속을 뿌려댔거든요.”

“아, 그렇네요. 저런 공은… 넌 이 정도 공으로 충분해, 라고 말하는 것과 같겠군요.”

“그레고리우스 입장에서는 아마 그럴 겁니다.”

“타자의 기분은 몹시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트집을 잡을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을 성낙기 투수가 만들어 냅니다. 아무튼 재미있는 투수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해설자와 캐스터의 말대로 그레고리우스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글레이버 토레스만큼은 아니라도 자신은 양키스의 2번을 맡고 있는 만만찮은 타자였다.

한 시즌 20홈런은 거뜬했고, 타율 또한 2할 후반 대를 기록할 만큼 리그에서 알아주는 타자다.

그런 자신을 상대로 스피드를 일부러 늦춰가며 맞춰 잡는 투구를 하는 투수.

그런 투수가 마음에 들 리 없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나 정도는 우습게 본다는 뜻 아닌가.

“너희 팀 투수 웃기는구나. 글레이버에겐 99마일을 던지더니 나에겐 95마일이라니. 일부러 천천히 던지는 거야?”

“아, 아냐. 체력이 떨어져서 그럴 거야.”

채드 왈라치의 대답은 그레고리우스를 더 빡치게 만들었다.

99마일을 3구 연속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95마일을 던지는 게 체력 때문이라고?

그거 3구 던지고 나서 체력이 확 떨어져 버렸다고?

“지금 그 말, 나보고 믿으라는 얘기냐?”

“못 믿으면 어쩔 수 없지. 별걸 가지고 시비야.”

“으으으…….”

그레고리우스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행태가 채드 왈라치의 말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렇다고 그걸로 화를 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세상에 자신에게 느린공을 던진다고 싸우는 타자가 있을까.

화를 내지도 못하고 억누르자니 몸이 떨리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화를 더 내거나 해서 혹여 벤치클리어링이라도 일어나면 자신은 천하의 좀팽이는 물론이고 세간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이런 마음가짐과 흥분 상태에서 타격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따악.

성낙기는 자기 앞으로 바운드 된 힘없는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했다.

7회 초 투아웃을 잡아내고 성낙기는 한숨을 돌렸다.

두 명의 교타자를 무사히 돌려세웠다는 안도의 한숨이자 가장 강한 두 타자, 아론 저지와 스탠튼을 맞기 위한 숨 고르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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