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난적 뉴욕 양키스 2
2번 타자까지 처리한 성낙기는 투아웃에 아론 저지를 만났다.
지난 시즌 상대 전적은 2할 대 중반의 타율에 홈런 두 방이었는데 홈런을 맞은 건 아쉽지만 3할에 육박하는 타율의 아론 저지를 상대로 피안타율은 낮은 편이다.
양쪽 모두 할 말은 있는 승부였던 셈인데 2년째에는 과연 어떨지 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아론 저지 나왔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걸.”
“스탠튼도 스탠튼이지만 저 선수를 넘지 못하면 양키스를 이길 수 없어.”
“성낙기는 해낼 거야. 갈수록 좋아지고 있거든.”
“맞아, 성낙기 공이 더 빨라졌어. 저 선수 완전 불가사의 그 자체야.”
“크아, 초구부터 스트라이크 집어넣는 거 봐.”
마이애미 팬들은 두 선수의 승부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성낙기의 공이 더 빠르고 좋아졌다는 걸 마이애미 팬들은 알고 있었고 올해의 첫 승부인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즌은 길고 첫 승부가 전체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다른 어떤 승부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성낙기의 입장에서는 아론 저지 같은 홈런타자에게 밀리면 답이 없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하면 트라우마에 시달릴 가능성도 있다.
지금이야 투아웃이니 상황이 낫지만 주자가 있는 상태에서 타석에 들어서면 더 난감해진다. 이 승부를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이유다.
“성낙기가 배짱이 좋군. 아론 저지를 상대로 포심패스트볼을 던졌어. 그것도 93마일의 공이야.”
“아론 저지 같은 타자에게 도망 다니면 시즌 내내 시달리게 되지. 맞아도 정면 승부가 옳아.”
마이애미 더그아웃에서 워마린 타격 코치와 셜리번 투수 코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성낙기와 아론 저지의 승부는 흥미진진했다.
마이애미의 에이스로 발돋움한 투수와 지난 시즌 우승팀의 최고 타자로 각광받는 타자의 첫 대결이기에 더 그랬다.
만약, 성낙기가 여기서 홈런이라도 허용한다면 이후의 파장은 끔찍할 것이다.
개막전에서 홈런을 헌납한 에이스가 되는 것이며 아론 저지에게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줄 게 뻔하다.
그뿐이면 다행이지만, 경기를 보는 마이애미 선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줄 것은 당연하고 심리적으로도 눌리게 된다.
우리의 에이스가 홈런 타자에게는 안 통한다는 걸 느끼게 되면 양키스를 만날 때마다 움츠러들 것이다.
아론 저지는 초구로 들어온 몸 쪽 포심패스트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타석에서 벗어나 스윙을 점검했다.
‘역시 공이 좋아. 쉽게 볼 투수는 아니야.’
아론 저지는 성낙기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승부에 임했다.
와인드업을 하는 투수의 모습, 그리고 투수의 손끝에서 떨어진 공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이번엔 바깥쪽이다.
초구에 포심패스브볼을 던졌으니 다음 공은 변화구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변화구가 가라앉을 것인가 솟아오를 것인가가 문제였다. 바깥쪽으로 궤적을 잡은 이상, 횡적인 움직임의 슬라이더는 아니다.
따악.
아론 저지의 배트에 맞은 공이 1루 측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투수가 던진 방금 공은 예상 외였다.
체인지업이나 커브 정도일 거라고 봤는데 거의 던지지 않던 포크볼이 들어왔다.
간신히 배트에 맞추긴 했지만 떨어지는 각이 커서 삼진 당하기 딱 좋은 공이다.
‘뭐야, 포크볼을 쳤어? 이러면 곤란한데.’
바깥쪽 공을 받으려고 미트를 내리다가 맞아 나가는 공을 본 채드 왈라치는 내심 뜨끔했다.
방금 그 공은 자신이 사인을 냈다.
포심패스트볼로 원 스트라이크를 잡은 후의 유인구였고 배트가 전혀 반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성낙기의 변화구가 다양한데다가 공의 궤적도 예리하다.
더욱이 이 상황에서 타자가 포크볼을 예측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휘둘러 봐야 헛스윙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론 저지는 예측하지 않고도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밀어 1루 관중석으로 보냈다.
마운드의 성낙기 역시 아론 저지의 배트 컨트롤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좋아. 이번엔 라이징패스트볼.’
채드 왈라치는 바깥쪽 라이징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오다가 솟아오르는 공.
성낙기는 사인을 보는 순간, 지난 시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라이징패스트볼을 던졌었다.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바깥쪽 높은 공이었는데 큰 키의 아론 저지에게는 그게 스트라이크 존이었는지 냅다 휘둘렀다.
빗맞은 공이었지만 높게 뜬공은 가라앉지 않고 관중석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낙기는 고개를 저었다.
채드 왈라치가 요구한 공은 위험하다.
***
경기는 어느덧 5회였다.
팀의 에이스인 두 투수 모두 4회까지 실점이 없었다.
마이애미는 찬스를 맞고도 후속타 불발로 번번이 맥이 끊겼다. 아깝기는 양키스도 마찬가지였다.
1회에 아론 저지가 공략한 성낙기의 커브는 타이밍을 잃은 타자의 힘이 실리지 않는 가운데 중견수 플라이 아웃이었다.
2회엔 스탠튼 마저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세를 올렸다. 안타를 몇 개 맞았지만 뒤이은 타자들을 모두 범타로 처리했다.
그리고 맞은 5회 초, 성낙기는 원아웃에서 타자로 등장했다.
앞선 타석에서는 헛스윙 삼진을 당했는데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다가 뚝 떨어지는 싱커에 말려든 결과였다.
성낙기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여러 차례 스윙을 하며 감각을 찾았다.
“무슨 배트를 그렇게 돌려. 어차피 삼진일 텐데.”
“이번은 다를 거야.”
양키스의 포수 게리 산체스였다.
그가 보기엔 루이스 시크릿의 구위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고 타자는 마이애미의 투수.
지난 시즌에 타격 성적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데이터가 적다. 적어도 한 시즌은 풀로 뛰어보아야 답이 나오는 게 타율이다.
“그래. 다르다고 생각해야 위안이라도 얻겠지. 니 맘대로 해봐.”
“…….”
성낙기는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것을 꾹 참고 타석에 바짝 붙었다. 하여간 포수라는 놈들은 늘 주둥이로 한몫을 하려고 한다.
2할 중반 정도에 머무는 포수가 대다수인데, 떨어지는 타율을 타자와의 신경전으로 만회하려는 듯한 느낌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같이 저러는 게 이해가 안 간다. 루이스 시크릿이 와인드업을 했다.
따악.
성낙기가 친 공이 외야로 죽죽 뻗었다. 그리고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갈랐다.
성낙기는 공이 맞는 소리가 나자마자 1루를 향해 전력 질주 했다.
마이애미 더그아웃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설마하니 루이스 시크릿의 초구를 날려 버릴 줄이야.
“성낙기 투수 루이스의 공을 깔끔하게 밀어 쳤습니다.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싱커였는데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이었죠. 제대로 받아치는 성낙기입니다. 공이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가릅니다. 성낙기 선수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갑니다.”
“와우, 2루타는 충분한 타구네요. 결국 우익수가 공을 잡아냈군요.”
“엇. 성낙기 선수 2루에서 멈추나 싶었는데 망설임 없이 그냥 달립니다. 3루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성낙기! 공 중계됩니다. 우익수가 2루수에게, 2루수가 다시 3루에 공을 던집니다!”
“세상에!”
“선수가 먼저냐, 공이 먼저냐. 거의 동시입니다. 에스페라도 주심 두 팔을 좌우로 펼칩니다. 세이프! 아아, 3루타입니다.”
“우익수가 조금 방심했어요. 중계 플레이 위치에 있는 유격수에게 던져야 할 공을, 평소처럼 2루로 공을 던졌죠.”
캐스터와 해설자도 놀랄 만큼 성낙기의 질주는 엄청났다.
보통은 2루타로 끝날 코스였는데 성낙기는 마치 3루타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무작정 3루로 파고들었고 결국 뜻을 이뤘다.
포수 게리 산체스는 마스크를 벗고 어이없는 표정이었고 투수인 루이스는 잔뜩 화났는지 얼굴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
그 시각, 한국의 삼호 그룹 회장실에서는 김현중 회장과 김아경이 커다란 벽면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은 TV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카아! 저기서 3루타를 터뜨리네. 역시 성낙기야. 완전 메이저를 씹어먹는구만.”
“낙기 씨가 저렇게 빨랐네요. 육상을 해도 잘하겠어요.”
“하하, 의욕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옵션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거야.”
“저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슬라이딩까지 하는지 모르겠어요. 부상이 가장 큰 적인데 말이죠.”
“괜찮아. 내가 보기엔 아주 영리한 놈이다. 오늘 같은 경우는 자신이 점수를 내야 한다는 걸 아는 거지. 워낙 상대 에이스가 좋은 공을 던지고 있거든.”
“잘해줘서 늘 고마운 사람이에요. 혹시 못하기라도 했어 봐, 어휴 끔찍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어. 아주 기특한 아이야. 미국 가거들랑 맛있는 거 많이 사줘라.”
“그렇잖아도 이달에 LA에 들러야 해요.”
“이번엔 시즌 끝나면 한국에 들어오라고 해. 밥이라도 한 끼 해야겠다. CF도 하나 찍으면 더 좋겠고.”
성낙기에 이은 타자는 신시내티에서 FA로 데려온 퀸튼이었다.
2할 대 후반은 기본적으로 치는 타자인 데다 늘 20개가 넘는 도루를 해주는 선수다.
특히 컨택 능력이 좋아서 투수들이 까다로워하는 선수 중 하나.
성낙기는 3루에 들어가서도 리드를 벌리며 호시탐탐 홈을 노렸다.
그게 또 루이스 시크릿의 신경을 긁었다.
잘 던지지 않는 3루 견제를 두 차례나 던질 정도였으니.
따악.
퀸튼이 친 공은 유격수 땅볼로 굴러갔고 전진 수비를 하던 유격수는 홈으로 송구했다.
하지만 성낙기는 이미 홈플레이트를 밟은 뒤였다.
마이애미 팬들은 모조리 일어나서 열광했다. 타자인 퀸튼은 홈 송구가 들어온 틈을 타 1루로 무혈 입성했다.
“성낙기 선수, 엄청납니다. 투수가 3루타를 치더니 얕은 유격수 땅볼에 홈을 밟았습니다. 1:0으로 앞서가는 마이애미 말린스!”
“오우! 정말 칭찬이 모자랄 선수네요. 주루 능력이 결코 타자의 아래가 아닙니다. 마치, 팀의 1번 타자처럼 치고 달리고 홈까지 훔쳐 버리는군요. 마이애미는 정말 보물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해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주는 성낙기입니다. 비싼 계약이라는 말들이 많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한 주루 플레이였습니다. 원아웃 1루로 여전히 찬스를 이어가는 마이애미 말린스입니다.”
“양키스는 여기서 조심해야죠. 퀸튼은 언제든 뛸 수 있는 선수입니다. 신시내티에서 88%의 도루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루이스 투수 견제구를 던집니다. 약간 신경질적인 몸짓이네요.”
루이스 시크릿은 확실히 흔들리는 기미가 보였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투수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2번 타자 시클라멘에게 3구 연속 볼을 던졌는데 내내 제구력이 좋았던 오늘 경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볼카운트가 스리 볼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을 때, 알렉스 비토 감독은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사인을 냈다.
따악.
바깥쪽 슬라이더를 시클라멘이 노려 쳤고 공은 중견수 스탠튼 앞으로 굴러갔다.
1루 주자 퀸튼은 투수가 센 포지션에 들어갈 때부터 뛰기 시작했는데 스태튼이 공을 잡으려고 전진할 때 이미 2루를 돌고 있었다.
“아앗, 안 돼. 지안카를로!”
“뭐, 뭐야!”
양키스 팬들의 외침이 들렸고 본래 포지션인 우익수에서 아론 저지 때문에 중견수로 밀린 스탠튼은 3루 송구를 서두르다 공을 뒤로 빠뜨렸다.
양키스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