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19화 (119/188)

# 119

119화 난적 뉴욕 양키스 1

성낙기는 3승으로 가는 길에 난적을 만났다. 상대가 바로 지난 시즌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였기 때문이다.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익숙한 전화번호였다.

-뭐 해요?

“잠이 안 와서 산책 중이에요.”

-그래요? 내일 양키스전인데 일찍 자야 컨디션 유지하죠. 임 기자 건은 잘 해결됐어요.

“어떻게요?”

-기자들 앞에서 녹음 틀어줬죠. 그때의 난감한 표정들이란… 하하. 같은 기자들끼리 옹호해 주고 싶었나본데 결정적인 증거 앞에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군요.

“앞으로 그 기자분은 안 오시겠네요.”

-아마, 교체당할 거예요. 일을 너무 크게 벌린 대가죠. 그동안 쌓아온 베테랑 기자라는 체면도 땅에 떨어졌고요.

“그렇구나.”

-내일 상대 선발이 누구죠?

“루이스 시크릿인데 현재 1선발입니다. 지난 시즌에 15승을 거뒀고요.”

-루이스 시크릿… 강속구 투수죠. 하지만 낙기 씨가 잘할 거라 믿어요. 응원할게요.

“응원해 주신다니, 든든하네요.”

-LA에 매장을 오픈해서 종종 가게 될 것 같아요. 이번 달에도 계획이 잡혀 있고요. 그날 연락할게요.

“네, 저는 공만 열심히 던지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 숙소로 향하는데 마주 오는 그림자가 있다. 불빛에 가려서 희미했는데 자세히 보니 채드 왈라치였다.

개막 전부터 주욱 백업으로만 대기하다 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빠졌다.

같이 경기를 하지 않으니 요즘은 대화도 별로 없다.

대화의 공통분모가 조금 모자라는 느낌이다.

“나, 내일 네 공을 받을 것 같아.”

“정말?”

“응. 아까 오마르 코치님이 말씀하시더라.”

“잘됐다. 채드랑 경기를 한 지가 꽤 되어서 섭섭하던 참이었거든.”

“고마워… 그런데 좀 걱정이긴 해. 하필 양키스가 시즌 첫 경기냐. 타선이 막강한 팀인데…….”

“너무 걱정 마. 아마 양키스라서 채드를 라인업에 넣지 않았을까? 지난 시즌에 양키스를 상대로 잘해줬으니까.”

“그래서 더 부담이지. 올해는 더 잘해야 하니까. 어쨌든 너에게 달렸어.”

“볼 배합은 채드가 하는 거잖아.”

“타자들 연구하다가 답답해서 나왔어. 아론 저지 같은 애들은 단점이 거의 없어서 말이야. 스탠튼도 마찬가지고.”

“맞으면 어쩔 수 없지. 그게 야구고. 전 경기에서도 피홈런을 허용할 줄은 몰랐으니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말이구나. 세인 루크는 누구나 방심하게 만드는 타자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데다가 6번 타순이니까. 메이저리그는 쉬어가는 타순이 없어. 투수들의 지옥이지. 부상도 그래서 많은 거고 말이야.”

“좋아, 내일 잘해보자고. 난 채드만 믿을게.”

“응, 그래. 난 조금 더 연구하고 자야겠어. 아침에 보자.”

“OK.”

채드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사람 좋고 훈련만 열심히 하는 친구인줄 알았는데 지난 시즌 후반기 이후로 느낀 게 많은 모양이다.

리얼무토의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면서 부족함을 알았나보다.

지금은 백업으로 있으면서도 늘 연구하는 포수가 되어 있다.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 겨루는 4월 12일의 아침이 밝았다.

***

“ESPN의 에일 라몬입니다. 오늘은… 레전드 투수였죠. 랜 존슨 씨를 모시고 해설을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마이애미와 양키스의 경기를 말린스 파크에서 보여 드리게 되었는데요. 두 팀의 전력, 어떻게 보십니까?”

“양키스는 말이 필요 없는 우승 후보죠. 월드시리즈 2연패가 가능한지가 관심사일 만큼 화제를 몰고 다니는 팀입니다. 만약 올해도 우승하게 되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했던 연속 우승을 한 팀이 다시 재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에 비해 마이애미는 올해 새롭게 전력 보강을 했죠. 다크호스입니다.”

“다크호스입니까. 아마 그 중심엔 성낙기라는 투수가 있겠네요. 지난 시즌 혜성처럼 나타나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나이도 24세에 불과할 정도로 젊습니다. 마이애미가 거액을 투자해서 이 투수를 잡은 이유겠죠?”

“약간… 뭐랄까. 상식선에서 분석할 수 없는 투수가 성낙기죠. 제가 마운드에서 던졌던 공은 강속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 정도였는데요. 저 투수는 변화구 종류가 현란하죠. 못 던지는 구종이 없어요. 본래 변화구라는 게 한 구종이 잘되면 한 구종은 잘 안 되는 특성이 있거든요. 그립의 감각이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죠.”

“성낙기도 성낙기지만 양키스의 투수는 루이스 시크릿입니다. 지난 시즌에 포텐을 터뜨린 투수입니다. 15승 5패에 ERA 2.88로 대단한 시즌을 보냈지요. 하지만 성낙기 투수 역시 16승 8패에 ERA2.78로 환상적인 시즌을 치렀습니다.”

“아마, 오늘 경기는 성낙가 투수가 양키스 타선을 어떻게 막아내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군요.”

“랜 존슨 씨가 만약 전성기에 이 마운드에 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제가 안 될걸요. 워낙 양키스 타선이 막강하고… 전 변화구가 많지 않았거든요.”

“겸손하십니다. 강속구 하나로 리그를 주름잡은 분이 하하하.”

말린스파크는 매진이었다. 날도 좋은 데다가 주말 낮 경기여서 소풍 나온듯한 기분으로 맥주를 마시는 관중들이 보였다.

가족 동반도 많았는데 어떤 아이들은 ‘SUNNAKI!’ 라는 작은 도화지를 들고 경기 전부터 들떠 있었다.

지난 시즌의 와일드카드 경쟁이 마이애미에 가져온 효과는 상당했다.

주류 판매가 늘었고 선수들의 유니폼과 경기장 입장 수입 등의 매출이 눈에 띄게 올랐다.

마이애미의 팬을 자처하는 관광객도 늘어서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했다.

“오늘 경기 대박이다. 성낙기하고 루이스 시크릿의 경기를 보게 될 줄이야.”

“KBO 열 경기 보느니 이런 경기 하나가 더 나아. 퀄리티 죽이잖아.”

“그래, 멀긴 해도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아주 멋지고 좋아. 성낙기가 승리투수가 되면 금상첨화겠지.”

“내가 가장 기대하는 대결이 아론 저지와 성낙기의 대결이야.”

“나도 마찬가지. 아론은 괴물 중의 괴물이지. 스탠튼이 정점에서 조금 내려가는 시기라면 아론은 지금이 시작이니까.”

“프로필이 201cm, 127kg이야.”

“후우, 종족이 다르군.”

한국에서 관광을 온 야구팬 몇의 대화처럼 오늘 경기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마치, 챔피언과 도전자의 권투 대결처럼 흥미진진한 게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즌 중의 많은 경기 중 하나이지만 그들에겐 역사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질 만큼 흥분되는 승부다.

전성기의 아메리칸리그 최고 타자와, 수수께끼 같은 공을 던지는 투수의 맞대결은 경기의 결과를 떠나 팬들에게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선물할 게 분명했다.

***

성낙기는 불펜에서 채드 왈라치와 호흡을 맞추는 중이었다.

채드 왈라치와 늘 연습은 해왔던 터이지만 개막 이후 스탯이 더 올랐으니 포수의 느낌은 전과 다를 것이다.

우선은 강속구가 최고 구속 153km에 이르고 보니 위력은 상당했다.

경기 중에 늘 전력투구를 할 순 없지만 아론 저지나 스탠튼 같은 타자들에겐 최고 구속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래야 히트의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지.

팡.

“웃!”

95마일의 공이 들어가자 채드 왈라치가 움찔했다.

성낙기가 던진 공은 홈 플레이트에서 더 강하게 미트에 꽂혔다.

마치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보다, 홈 플레이트에서 최고 속도를 내는 착각에 빠질 만큼 볼 끝이 살아 있다.

성낙기는 포심패스트볼과 변화구를 골고루 던지며 구위를 점검했다.

그중에 레벨 (90/100)에 이르는 커브가 가장 각이 좋다.

물론 슬라이더나 체인지업도 87이니 큰 차이는 없지만 작은 궤적의 차이가 안타와 범타를 결정짓는 야구는 섬세한 게임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집중하면 똑같은 커브라도 조금 더 각이 좋고 볼 끝도 더 예리해.’

성낙기는 채드 왈라치에게 연속으로 커브를 던지며 스탯과는 또 다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감지하고 있었다.

스탯이 모든 걸 결정지어 주는 게 아니라, 스탯이 그만한 위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선수 본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단단한 다리로 와인드업이 흔들림 없이 진행되어야 하고 팔의 각도 역시 무슨 구종을 던지든 똑같아야 한다.

아주 작은 차이라도 느낌으로 구종을 아는 타자들이 있다.

바로 뉴욕 양키스의 글레이버 토레스 같은 타자.

지난 시즌 15홈런에 불과하지만 30도루와 0.342의 타율을 기록한 지난 시즌 수위타자다.

‘저는 기본적으로 게스히팅을 합니다. 아무리 투수가 같은 폼으로 던져도 포심과 변화구는 느낌은 다르죠.’

그렇게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감각이 남다른 선수다.

말하자면, 노력도 노력이지만 재능을 타고난 쪽이라고 봐야 한다.

글레이버에겐 성낙기의 폼이 읽힐지도 모른다.

성낙기는 실제로 약간 의심도 갔는데 지난 시즌 상대 성적이 0.302였기 때문이다.

성낙기의 공을 가장 잘 때려낸 타자였기 때문이고 다른 타자들의 성적과는 꽤 차이가 났다. 그레이버 다음으로 성낙기의 공에 강했던 타자가 0.272에 그친 걸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

1회 초, 마운드에 선 성낙기와 마주 건 타자는 바로 그 글레이버 토레스였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다부지면서도 날렵한 몸매가 이상적인 타자.

타석에 들어서서 휘두르는 스윙이 콤팩트하고 날카롭다.

지난 시즌의 성적에 고무된 듯 자신 있는 얼굴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특정 투수를 상대로 3할 이상을 치는 타자가 자신만만하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채드 왈라치도 그걸 의식한 듯 초구부터 변화구 사인을 냈다.

팡.

볼.

바깥쪽으로 뚝 떨어지는 볼이었는데 배트가 나오려다 만다.

성낙기는 다음 공 역시 포크볼을 던져 타자를 유인했다.

볼이었고 그 덕분에 볼카운트만 투 볼로 나빠졌다.

올해 처음 붙는 양키스와의 경기에 첫 타자이니 첫 단추를 잘 꿰어야만 한다.

더구나 메이저리그에서 성낙기의 공을 가장 잘 치는 타자다.

홈런 타자가 아니라서 안타를 내준다고 해도 실점을 하라는 법은 없지만 도루 능력도 있는데다 징크스를 만들기 싫다.

이런 타자는 꼭 잡아주어야 투구의 리듬을 탈 수 있다.

‘좋아. 채드. 내가 사인을 낼게.’

성낙기는 바깥쪽으로 투심을 던지라는 사인에 고개를 젓고 몸 쪽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도망가는 피칭으로 유인하기 어려운 타자인 건 알았지만, 어렵지 않게 볼을 골라내는 걸 보니 컨디션이 최고조다.

지난 시즌엔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 혹은 전광석화를 아꼈던 경향이 있었다.

단타를 치는 타자는 무섭지 않기 때문이었고 2루 도루를 허용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체력이 더 올랐고 더 이상 기를 살려주면 경기 분위기마저 넘어갈 우려가 있다.

어느새 글레이버는 홈런타자만큼 신경 쓰이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팡.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트라이크!”

주심의 손이 올라갔고 글레이버는 공의 궤적에 눈을 크게 떴다.

무릎으로 파고들다가 솟아올라 허리께로 꽂히는 라이징패스트볼은 타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글레이버는 타석에서 벗어나 호흡을 고르면서 스윙을 했다.

‘지난 시즌에 몇 번 경험하지 못한 공이야. 다시 보니 어마어마하군.’

성낙기는 4구도 같은 코스의 같은 구질을 던졌다.

글레이버의 배트가 나왔고 공은 뒷 그물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글레이버는 예상보다 높은 타격 포인트에 고개를 저었다.

볼카운트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또 같은 공이야?’

성낙기의 사인을 받은 채드 왈라치는 놀랐다.

성낙기가 5구도 몸 쪽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을 냈기 때문이다.

글레이버 같은 교타자에게 3구 연속 같은 구질과 같은 코스는 위험하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두 개 연속 던진 것으로 눈에 익었을 텐데 하나를 더 던지겠다니.

‘에이,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채드 왈라치가 체념 모드로 갈 때 성낙기의 라이징패스트볼이 들어왔다.

글레이버는 배트를 내밀었다.

볼로 유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성낙기의 공은 예상대로 승부구였다.

다만, 타격 포인트가 글레이버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팡.

라이징패스트볼(3cm/10cm).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라이징패스트볼은 생각보다 덜 떠올랐고 글레이버의 배트는 공보다 위쪽의 공기를 갈랐다.

공은 타자의 허벅지께로 들어와 꽂혔다.

글레이버는 헛스윙 삼진이 믿어지지 않는 듯 포수 미트에 들어간 공을 한창이나 바라보다가 더그아웃으로 발을 돌렸다.

첫 타자부터 삼진처리를 하자 마이애미의 더그아웃이 달아올랐다.

너도 나도 성낙기의 투구에 박수를 보냈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들도 성낙기가 유독 약한 글레이버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성낙기뿐만 아니라 마이애미의 다른 투수들에게도 강한 타자였으니까.

저런 타자는 아웃을 시켜주든지 아니면 볼넷을 각오하면서 끝까지 좋은 공을 주지 않든지 해야만 타격 감각이 떨어진다.

무조건 기를 살려주면 안 되는 타자였는데 성낙기가 보기 좋게 처리했고 더그아웃에서 보던 선수들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첫 출발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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