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화 마이애미의 투수들 2
“정말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영원히 제구력이 엉망인 투수로 남았을지도 몰라.”
“아니야. 정말 인상적인 투구였어. 엄청난 재능이야. 어떻게 그걸 그렇게 쉽게 습득했지?”
성낙기도 의문을 가질 만큼 알칸타라의 학습 능력은 대단했다.
아무리 옳은 것도 받아들이는 쪽에 문제가 있으면 그대로 옮겨가지 않는다. 쇠귀에 경 읽기인 선수들도 넘쳐난다.
그 어려운 걸 알칸타라는 가볍게 해낸 것이다.
성낙기의 물음을 들은 리얼무토가 알칸타라 대신 대답했다.
“너에 대한 믿음이지. 사실, 성낙기의 제구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잖아. 잘 모르겠지만 지난 시즌에 알칸타라가 가장 부러워한 장점은 바로 너의 제구력이었어. 제구력이 좋은 투수가 자신의 단점을 가장 잘 알거라고 알칸타라는 생각했고 레슨을 받는 동안 그 생각은 믿음이 된 거야.”
“맞아, 리얼무토의 말이 정확해.”
알칸타라가 리얼무토의 말을 듣고는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내보였다. 그러고는 성낙기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음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기분 좋은 2022 시즌이 될 조짐이었다.
개막전 이후 세 경기에서 2승 1패의 비교적 안정적인 출발이다.
***
경기 후, 호텔로 돌아온 알렉스 비토 감독은 알칸타라를 호출했다.
알칸타라는 궁금했지만 좋은 기분은 그대로였다.
승리투수에게 칭찬이라도 해주려나? 싶었을 뿐이다.
룸엔 알렉스 비토 감독과 셜리번 코치가 함께 있었다.
막 샤워를 끝낸 듯 알렉스 감독의 머릿결이 축축했다.
“앉아, 알칸타라. 오늘 수고 많았어.”
“별말씀을요. 늘 던지는 루틴대로죠. 고맙습니다.”
알칸타라는 의자에 앉으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았다. 결국 칭찬으로 가는 건가.
“아니야. 오늘은 놀라운 투구를 했어. 솔직히 궁금한 게 있어서 내가 감독님께 건의했어. 자네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뭘 말입니까?”
“스프링캠프 때까지도 잘 잡히지 않는 제구였는데 오늘은 실투도 거의 없었거든.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알고 싶군.”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변화라면… 성낙기에게 조언을 얻은 거겠죠. 그게 통했습니다.”
“경기 전에 불펜에서 의견을 나눈 것 말인가? 글쎄… 나에겐 서로가 가진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보군. 그러니까 자네 말은 성낙기가 조언을 했고 그 조언을 바탕으로 던진 것이라는 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조언대로 연습 구를 좀 던졌죠.”
“연습 구… 이해가 안 돼. 연습 구를 던졌다고 제구가 잡히는 경우는 없거든.”
셜리번 투수 코치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의문이 커졌다. 아니, 어떤 투수가 조언 몇 마디를 듣고 연습했다고 해서 하루 만에 제구가 잡힌단 말인가.
“성낙기의 조언대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실투가 여럿 있었고 그게 안타와 홈런으로 연결됐죠.”
“실투가 없었으면 7이닝 무실점도 가능했을 거야. 그 정도로 오늘 자네의 구위는 인상적이었지. 말을 듣고도 의문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일반적이지 않으니까 말이지.”
“실은… 저도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성낙기의 말을 따랐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제구가 잡히는 느낌이었고 경기 내내 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썼죠. 1회부터 공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가졌어요. 성낙기의 투구 폼에 대한 지적이 정확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고요.”
“구체적으로 성낙기가 무엇을 지적했지?”
셜리번 코치는 알칸타라에게 물으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코치 생활을 해온 자신도 알칸타라의 제구를 잡는데 애를 먹었는데 성낙기가 단숨에 해결했다는 거 아닌가.
이건 놀라운 사건이었다.
셜리번 코치는 긴장한 모습으로 알칸타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렉스 비토 감독도 자세를 고쳐 잡고 알칸타라를 바라보고 있다.
“첫째는 공이 손을 떠나기 직전의 등 번호가 일정하게 1루로 향하게 하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팔의 각도를 들어 올려서 결과적으론 10cm쯤 릴리스 포인트를 높이는 거였죠. 전 그걸 경기 전에 연습했고요.”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만.”
“이상하군. 등 번호를 일정하게 하라는 건 투구 폼을 일정하게 하라는 말과 같은데, 그건 나도 여러 번 지적한 적이 있어. 자네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었고 말이야. 그런데 긴 시간 동안 해본 연습은 별 효과가 없었는데 성낙기의 짧은 레슨은 효과가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는 거지.”
“조금 달랐습니다.”
“조금 달랐다고?”
“일정한 투구 폼은 코치님도 지적하셨던 부분이죠. 그래서 투수판을 밟는 발의 각도를 바꾸기도 했었고요. 오늘 성낙기는 발의 각도는 물론이고 위치까지 설정해 줬습니다. 1루 쪽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을 밟고 던지게 된 이유죠.”
“그래? 그렇게 던진다고 해서 등번호가 일정하게 1루로 향한다고 보기는 힘든데… 그랬다는 거군.”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발의 각도와 위치를 바꾼다고 제구가 잡힐 리는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연습 구를 던질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제구가 좋아지는 느낌을 받았죠. 마치 저에게 맞춤형으로 나온 변화 같았다고 할까요. 팔의 각도 역시 그랬습니다. 들어 올린다고 제구력이 잡히는 법은 없지만 저에겐 너무나 잘 들어맞는 릴리스 포인트였고 그 결과가 경기에서 나타난 겁니다.”
“…….”
알칸타라의 말을 듣는 동안 셜리번은 여러 차례 놀라고 있었다.
알칸타라의 제구를 잡기 위해 해보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조금씩 나아졌을 뿐이다.
한데, 성낙기는 알칸타라의 제구를 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듯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는 얘기 아닌가.
“듣고 보니 묘하네. 완전 맞춤형 투수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거잖아. 셜리번 코치나 내가 고민했던 부분인데 성낙기는 한순간에 알아냈어. 야구에 귀신같은 재능이 있다는 건 진즉에 알아봤지만 레슨 능력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 성낙기 도대체 뭐야.”
곁에서 가만 듣던 알렉스 비토 감독도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놀라면서도 묘한 감정, 그러니까 코치와 감독의 역할이 있는데 성낙기가 그걸 대신해 버린 느낌이다.
알칸타라에게 그랬듯 다른 투수들도 성낙기의 레슨을 받고 좋아진다면 감독과 투수 코치의 위상이 성낙기만 못해질 수 있다.
감독으로서는 투수들이 잘 던져 성적이 나면 좋지만, 그 성적이 한 선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건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이거 좀 겸연쩍은데요.”
알칸타라를 보내고 나서 셜리번 코치가 알렉스 비토 감독에게 한 말은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코치 생활을 하면서 이런 적은 없었기에 더 당황스럽다.
투수가 투수에게 한 지적이 코치가 해왔던 그것보다 월등하다면 누가 투수 코치에게 존경심을 갖겠는가.
“맞아, 그렇긴 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야.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코칭으로도 일가견이 있다 생각할 수밖에.”
“정말 여러 번 저를 놀라게 하는 투수입니다. 지난 시즌 후반에 팬 파일러가 좋아진 이유도 성낙기와 함께 훈련한 뒤부터였고 트리플에서 올라온 딕 에일도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었거든요.”
“괴물 같은 투수가 우리 팀에 있는 건 분명해. 그리고 이번 시즌 성적의 가장 큰 열쇠이기도 하고.”
풀리지 않던 비밀이 풀린 것처럼, 의문은 사라졌다.
알렉스 비토 감독은 과연 마이애미가 시즌이 끝날 때쯤, 어디까지 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 냉장고 안의 맥주를 꺼내 들었다.
***
마이애미는 개막전 이후 10경기에서 7승 3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가을 야구의 희망에 부풀었다.
성낙기는 2승을 챙겼고 호세 우레나도 2번째 경기에서는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트리플A에서 올라온 딕 에일도 빠른 강속구를 앞세워 인상적인 데뷔전을 가졌다.
그는 첫 승리를 거두고 성낙기에게 안겨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했다.
“성낙기 선수, 벌써 2승인데 몇 승을 목표로 하고 계시죠?”
“정해 두진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던지다 보면 결과는 따라오는 거니까요.”
“아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 둔 게 있을 것 아닙니까. 18승? 20승?”
“생각한 적 없다니까요.”
한국에서 온 한 기자는 글러 먹은 태도로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요즘, 성낙기를 따라붙는 기자들이 여럿이었는데 그중에 한국 기자들도 섞여 있었다. 아예 메이저리그에 상주하면서 성낙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고 있다.
“김아경 사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귄다는 말도 있는데요.”
“성함이 뭡니까.”
“임동철입니다만.”
“기자님. 앞으로 이런 가십거리를 취재하실 거라면 무조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저는 야구 선수지 연예인이 아닙니다.”
“하, 성낙기 선수 스타가 되더니 변했나요? 야구 선수도 공인인데 팬들의 알 권리를 위해 정보를 주셔야지요. 이런 식으로 한다면 좋은 말을 쓸 수가 없죠.”
“뭐야. 협박하시는 거예요?”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요. 누군 할 일 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젊은 사람이 너무 빡빡하게 굴면 이미지에 타격 옵니다.”
스포츠나인 소속이라는 임동철 기자는 10년 차 베테랑이었는데 늘 그런 식으로 취재를 해온 모양이었다.
한국에서는 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선수들이 내치지 못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한국이 아닐뿐더러 성낙기는 누구랑 얽히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딱히 선배도 후배도 없고 은인도 없다.
있다면 허봉호 감독 정도이겠지만, 그 감독님은 아웃사이더 스타일이다. 성낙기에게는 임동철의 말이 전혀 안 먹히는 이유다.
“알아서 하십시오. 앞으로 저에게 인터뷰 요청 모두 거절합니다.”
“허어, 미치겠네. 사람이 왜 그래.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그런가본데 세상은 독불장군 식으로 사는 게 아니야. 스포츠 기자에게 빡빡하게 굴어서 좋을 게 없다니까. 나에게 까칠하게 하던 놈들 모두 사과했어. 너도 곧 후회하게 될 거야.”
엄청난 계약을 한 뒤로 부쩍 언론의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 스포츠계에서도 성낙기의 소식은 블루칩에 속했다.
다른 스포츠 스타에겐 별무신통이던 댓글은 성낙기의 기사가 나오기 무섭게 댓글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요즘 두드러지게 성낙기를 밀착 취재하는 기자는 스포츠나인의 임동철과 베이스볼의 박미혜였다. 그러나 둘의 취재 방식은 정반대였다.
임동철이 사나이다움과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접근했다면 박미혜는 성낙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선수들끼리의 대화나 더그아웃의 분위기 등의 소소한 재미를 주는 기사를 썼다.
임동철은 계약을 할 때의 이면 스토리나 성낙기가 던지는 구질 등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캐내어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타입이어서 무리한 질문 세례는 기본으로 따라다녔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수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관계를 맺은 후에 취재원을 독식하는 스타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꽤 통하던 방식이었는데 성낙기에겐 잘 안 먹힌다는 게 문제다.
-스포츠 스타는 많다. 그러나 그 이름에 걸맞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배고픈 시절이 있고 어려운 때가 있다. 프로 야구 선수라는 직업 역시 자신과의 싸움 끝에 얻어낸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는 프로라는 이름을 닮과 동시에 공인이 된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팬들의 알 권리를 위해 인터뷰에 성실하게 임해야 함은 물론이다. 기자가 메이저리그에 와서 지난 시즌과 달라진 성낙기 투수를 보게 된 것은 유감이었다. 그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고 짜증과 노코멘트로 일관했고 심지어 협박성 멘트까지 기자에게 퍼부었다.
중략.
-많은 팬을 두고 있는 스타는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스타로서의 생명이 끝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성낙기 투수의 태도가 두고두고 아쉬운 이유다.
-임동철 기자-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이 글이 실리자 댓글이 쇄도했다. 성낙기가 그럴 리 없다는 둥, 이제 배가 불렀다는 둥, 메이저리그 진출부터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댓글이 있는가 하면.
성낙기가 그럴 리 없다.
한국에 있을 때 사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는 팬들이 원할 때까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는 선수였다. 기자가 사심을 품은 거 아니냐. 등등의 댓글도 달렸다.
“무슨 인터뷰를 했길래 임동철에게 꼬투리 잡혔어요? 원래 질이 안 좋은 인간인데.”
“막무가내인 기자와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기사를 본 김아경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한국의 상황을 알려줬다.
기자의 말대로 기사 하나의 반향은 컸다. 성낙기에게는 어느새 건방지고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이미지가 씌워졌다.
***
김아경은 나름 손을 써보았지만 임동철의 인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야구 협회 임원들은 물론이고 스포츠나인의 고위급 인사들도 쉽게 내치지 못하는 기자였다. 그가 쓴 기사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었고 독자들은 지라시급의 기사에 반응을 보였다.
거짓이든 참이든 일단 재미가 있기 때문.
‘스포츠나인을 사버릴까.’
김아경은 그런 생각마저 했다.
몇 백억이면 충분히 거둘 수 있는 포털 사이트였는데 한 사람 자르자고 팔자에 없는 스포츠 사이트를 사들이는 것도 우습기는 했다.
잘라봐야 다른 곳으로 스카우트되면 말짱 황이다.
김아경은 애가 달았다.
자신이 아끼는 선수에게 위해를 가한 기자를 가만두면 언제든 다른 기자들도 만만히 보고 달려들 것이다.
진퇴양난. 김아경은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쉽게 풀렸다.
성낙기도 그 기사를 보고 열이 받은 건 마찬가지였는데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 좋지 않는 이미지만 쌓여가는 중이었다.
기사가 나고 난 일주일 후, 성낙기는 호텔 밖을 산책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젠장, 무슨 방법 없나? 헤이 상태창아. 네 생각은 어때?’
성낙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태창을 불렀는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녹음 기능.
[김아경 사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젊은 사람이 너무 빡빡하게 굴면…….]
[너도 곧 후회하게 될 거야]
상태창 이미지가 뜨면서 임동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반응하는 성낙기의 목소리도 그대로다. 성낙기는 상태창에게 목소리의 반복을 요청하고는 휴대폰 녹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