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17화 (117/188)

# 117

117화 마이애미의 투수들 1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4회에 또다시 2실점을 하는 바람에 경기가 기울었다.

호세 우레나는 5회에도 연속 안타를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뒤는 뻔했다.

이르게 내려간 선발 때문에 필승조를 투입하지 못한 마이애미는 9회까지 경기를 끌려가다가 9:1로 간신히 영봉패를 면했다.

“호세가 너무 안 좋군.”

“얼마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는 바람에 훈련에 차질을 빚은 영향이 큰 가 봅니다.”

“그래? 연습 투수 땐 멀쩡하던데 경기에 나서니 전혀 딴판이니 하는 얘기지.”

“다음 등판엔 나아질 거라고 봅니다. 스피드는 죽지 않았으니까요.”

경기 후, 알렉스 비토 감독과 셜리번 코치의 대화였다.

셜리번 코치는 일단 스피드가 죽지 않았으니 다음 등판엔 반등을 기대한다.

그러고 보면 묘하다.

스피드가 죽지 않았고 던지던 폼도 그대로인데 제구에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작은 심리적 허술함으로도 무너지는 게 투수이고 보면 공을 던질 때마다 유지되는 일정한 커맨드는 여러 가지 압박을 이겨낸 결과다.

성낙기는 그걸 해냈고 호세는 넘어서지 못했다. 성낙기가 호텔에 돌아와 씻고 소파에 몸을 누이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문을 연 성낙기는 깜짝 놀랐다.

문 밖엔 오늘 던진 호세 우레나와 아담 콘리, 샌디 알칸타라와 딕 에일이 서 있었다.

“억, 웬일이야.”

“왜긴,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자.”

샌디 알칸타라가 밀고 들어오며 말했고 성낙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거 좋지.”

모두들 소파 앞의 탁자에 둘러앉아 맥주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 호세는 오늘 경기가 속상한지 두 병을 연거푸 비우고 세 병째를 땄다.

설마, 밤을 샐 작정은 아니겠지? 성낙기도 호세의 그럼 모습을 보고는 눈치가 살짝 보였다. 호세가 입을 열었다.

“실은, 내가 성낙기 방에 가자고 했다.”

“오, 의외야.”

“워싱턴을 상대로 던지는 네 투구를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는데 내 공은 잘도 맞추더군. 넌 알겠지, 내 공이 왜 맞아 나갔는지.”

의견을 묻는 건가? 작년까지 1선발이었던 호세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언뜻 해야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 그게 그러니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설픈 이유는 집어치우고 네 생각을 듣고 싶다.”

“굳이 말해야 한다면 제구력이 일정하지 않았어. 워싱턴 타자들은 실투성 공을 놓치지 않았고.”

“쩝, 코치님 보는 것 같네. 됐고, 오늘 방문한 사람들 보고 느끼는 점 없나?”

“가만, 그러고 보니 다 투수네.”

“투수는 정답, 그리고 하나 더 있지. 5선발이라는 거.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그럴 줄 알았어. 말하자면 이런 거지. 내가 마이애미에 있는 동안 마이애미는 단 한 번도 디비전 시리즈에 나가지 못했거든. 심지어는 와일드카드 경쟁을 한 경험도 지난 시즌이 최초였지.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모를 거야. 이제 느낌이 오니?”

“글쎄… 작년은 좀 아쉬웠어.”

“하아, 너 이제 보니 매우 순수한 놈이구나. 말귀를 전혀 알아먹지를 못하네.”

“무슨 소리야?”

“작년 와일드카드는 너 때문에 경쟁이라도 하게 된 거야.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우린 나름 한다곤 했지만 성적이 변변치 못했고. 하지만 올해는 달라. 와일드카드를 두고 싸운 경험이 동기부여가 되어서 모두들 어느 때보다 열심히 했거든. 난 오늘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할 말 없지만 실망했을 뿐, 절망하진 않았어. 아니, 오히려 다음 경기에선 복수를 해주겠다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해.”

“이제 알았어. 올해는 더 잘해보자는 거지?”

“맞아. 지난 시즌 후반기에 팬 파일러가 좋아진 게 내 덕분이라는 말을 들었어. 그동안은 내가 에이스였지만 이젠 네가 에이스야.”

“아니, 난 겨우 2년 차 투수일 뿐이야.”

“1년차건 2년차건 그런 건 필요 없지. 그저 성적이 좋은 투수가 에이스인 거야. 부정할 필요 없어.”

“…….”

성낙기는 호세 우레나의 말을 들으면서도 감이 안 잡혔다.

좋은 뜻으로 온 건 분명하고 5선발로 나서는 투수들이 모두 나선 걸 보면 잘해보자는 말인데 어쩐지 호세의 말은 경계를 돌면서 변죽을 울리는 느낌이다.

“말이 길어지지? 핵심을 말할게. 팬 파일러에게 그랬듯 네 노하우를 우리와 공유해 줘. 팬 파일러는 네가 코치님도 짚어내지 못한 약점을 알려줬다면서 좋아하더군. 지난 시즌에 그 말을 듣고 그러려니 했지만 올해는 안 되겠어. 오늘 엉망이 되고 보니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 그런데 내가 딱히 가진 노하우라는 게… 그 뭐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동양인은 한 번 튕기고 본다더니 역시 그렇군. 잔말 말고 네가 가진 모든 걸 토해내. 우리도 디비전시리즈 좀 해보자.”

성낙기의 말을 자르며 호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째 느낌이 심상치 않더라니.

성낙기는 다 같이 잘해보자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난감했다. 사실, 자신이 가진 노하우라는 게 기껏 상태창일 뿐이다.

각 구질의 그립에 대해 연습을 많이 한 건 맞지만 겨우 그 정도일 뿐, 누구를 가르칠 만한 실력이 아니다.

더욱이 팬 파일러는 실바의 도움이 있었지, 성낙기의 노하우가 아니었다. 성낙기는 투수가 던지는 걸 보고 좋아질 방법을 찾아줄 위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딱 잘라서 거절하자니 옆에서 성낙기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들이 걸린다.

특히 트리플에서 올라와 성낙기에게 도움을 받는 바 있는 딕 에일의 갈색 눈동자는 갈망으로 가득하다.

“그, 그러지 뭐. 내가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별 소득이 없다고 날 원망하지는 마.”

성낙기는 마지못해 승낙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우선은 실바나 존을 본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른다.

성낙기가 부른다고 순순히 와서 저 투수들을 봐줄까.

둘 다 성깔이 까탈스러워서 장담할 수 없다.

남의 속도 모르고 성낙기의 말을 들은 투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칸타라는 성낙기가 들고 있는 병을 제 병으로 부딪히면서 환하게 웃는다.

‘혹시 상태창이 이런 건 안 해주나?’

성낙기가 혼자 속으로 되뇌었다. 혹시나 싶어서였는데 역시나인 듯 상태창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상태창이 떠오른 건 성낙기가 속엣 말을 한 지 10여초가 지난 후였다.

[…원래는 안 해줍니다만 간절한 요청이 있을 시, 자세 교정 프로그램을 통해 교정 가능합니다]

‘정말이야? 와아… 그럼 뭐야. 지금까지 나에겐 전혀 그럼 프로그램을 적용하지 않았잖아.’

[레전드의 제구력이 입력된 경우, 프로그램은 필요 없습니다]

성낙기의 속말에 고맙게도 상태창이 반응했다. 성낙기가 좌우를 둘러보면서 환하게 웃었고 선수들은 성낙기가 참 맑고 사심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라는 말을 듣고도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니.

***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개막전을 1승 1패로 마감하고 맞은 다음 상대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샌디 알칸타라는 경기가 열리기 전, 성낙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펜피칭을 했다.

성낙기가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한결 좋은 커맨드를 유지했지만 워낙 빠른 공을 뿌리는 투수다.

평균적으로 95마일에서 99마일까지의 공을 던지지만 워낙 제구력에 약점이 있어서 가지고 있는 구위를 썩히고 있는 케이스.

성낙기는 열심히 알칸타라의 공을 관찰했지만 특별한 단점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내가 보기엔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정말 제구력은 별로군.’

[와인드업 자세에서 몸의 회전이 불규칙합니다. 왼발을 땅에 디딜 때, 등번호가 1루를 향하고 있어야 제구력이 잡힙니다]

성낙기는 상태창의 의견에 따라 알칸타라에게 말을 전했다. 알칸타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투구 동작을 반복했다.

곁에서 바라보던 호세 우레나가 성낙기에게 엄지를 들었다. 알칸타라는 등 번호 위치에 신경을 쓰면서 투구를 했고 거짓말처럼 제구력이 한결 나아졌다.

[50도에 머무는 팔의 각도를 60도로 맞추고 릴리스 포인트가 10cm 올라가야 합니다]

성낙기는 말을 전한 후, 동영상 촬영을 하면서 알칸타라의 변화를 기록했다.

알칸타라는 성낙기의 말을 교본처럼 믿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애썼다.

두어 시간 동안 투구 폼 교정을 한 뒤, 알칸타라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성낙기의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직 자세가 완전하진 않지만 들쭉날쭉 하던 공은 크게 벗어나는 일 없이 꽤 일정한 포인트를 형성했다.

더 큰 변화는 낮은 코스의 공이 들어가기 시작한 거였다.

팔을 조금 들어 올리자 타자의 높은 코스로 가던 공들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낮아진다는 말은 홈런 허용 비율이 낮아진다는 말과도 통했다.

“오늘 경기에서는 교정한 대로는 되지 않을 거야.”

“응, 알고 있어. 투구 폼 교정이라는 게 그냥 되진 않겠지. 하지만, 몰랐던 걸 알았어. 아주 좋은 느낌이야. 고마워.”

팬 파일러는 연습한 것들을 되새기면서 마운드로 올라갔다. 타석엔 필리스가 자랑하는 호타 준족, 세자르 에르난데스가 들어섰다.

지난 시즌 상대 전적이 12타수 8안타에 홈런 2개로 알칸타라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에르난데스 역시 지난 시즌의 좋은 기억들이 머리에 떠오르는 듯 알칸타라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

“여러분 ESPN의 에일 라몬입니다. 제임스 씨 모시고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시즌에 두 팀의 성적이 갈렸죠? 시즌 초반 하위권을 형성하리라던 예상과 달리 마이애미는 치고 올라갔어요. 와일드카드에 도전까지 할 정도로 후반기에 강세를 보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죠. 그 변화의 중심엔 알렉스 비토 감독과 성낙기라는 투수가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성낙기 투수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오늘 경기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캐스터는 지난 시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는 해설자의 말을 돌렸다.

중요한 건 오늘 경기에 대한 말인데 가끔 해설자들은 자기도취에 빠진 나머지 상황 판단을 못 할 때가 있다. 제임스는 특히 그런 경향이 있는 해설자였다.

“오늘 경기… 는 한마디로 난타전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3선발로 나온 투수들이 모두 시원찮거든요. 5회 이전에 강판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대 전적이 매우 좋지 않은 투수들입니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에르난데스만 보더라도 알칸타라의 천적이죠.”

“말하자면 톰과 제리 같은 관계인가요?”

“제리는 반항이라도 하고 골탕이라도 먹이죠. 알칸타라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밟힌 거나 마찬가집니다.”

“…아, 네. 알칸타라 투수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칸타라는 에르난데스를 맞아 긴 숨을 토해냈다.

경기 전, 투구 훈련을 했던 몸의 기억과 그전부터 계속해 왔던 몸의 기억이 다르다. 의식하지 않으면 곧바로 지난 시즌으로 돌아간다는 성낙기의 말을 되새겼다.

팡.

“스트라이크.”

에르난데스의 몸 쪽으로 꽂히는 포심패스트볼이었다.

볼 끝과 스피드 모두 좋았다. 에르난데스는 초구부터 몸 쪽 승부가 오리라곤 예상 못했는지 초구를 놓치고 알칸타라를 슬쩍 봤다.

알칸타라는 2구 역시 포심패스트볼로 바깥쪽을 공략했고 에르난데스는 파울볼을 쳐냈다.

‘공이 좋은데……?’

에르난데스는 손목에 오는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상대한 알칸타라에게서 위압적인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쎄… 뭔가가 다른 것 같다.

천적 관계인 자신에게 몸 쪽 스트라이크를 과감하게 던진 것 하며,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당해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기억은 에르난데스에게 없었다.

적어도 지난해의 알칸타라는 자신만 보면 움츠러들기 일쑤였고 항상 도망가는 피칭으로 일관했다.

‘느낌이 좋다.’

반면, 마운드의 알칸타라는 사인대로 꽂힌 두 개의 공에 자신감을 얻었다.

누군가 이런 알칸타라를 본다면, 겨우 공 두 개로 어떻게 자신감을 얻느냐고 하겠지만 제구가 잘된 자신의 공이 타자에게 먹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투수의 전투력은 급상승한다.

제구도 제구지만 볼 끝도 왠지 힘이 있다.

게다가 2구째 에르난데스가 건드린 공은 배트가 밀렸다.

알칸타라는 리얼무토의 사인대로 하이패스트볼로 유인한 뒤에 4구째 슬라이더를 던졌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에르난데스의 배트가 헛돌았고 알칸타라는 첫 타자부터 삼진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제구력이 업그레이드된 알칸타라는 1회를 깔끔하게 마쳤고 그게 시작이었다.

무려 7회까지 던지며 6안타 2실점으로 선방했고 마이애미의 타선은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7점을 뽑아냈다.

7:2의 리드를 안고 알칸타라는 마이애미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7회를 마쳤다.

알칸타라는 7회를 마치고 더그아웃에 앉아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쉽게 믿지 못했다.

-알칸타라가 이 정도였어?

-공도 쫙쫙 뻗고 겨우 6안타만을 내줬을 뿐이야.

-6회에 홈런을 맞지 않았다면 무실점이었을 텐데.

-놀라운 일. 알칸타라가 살아나면 엄청난 투수가 될 거야.

-그렇지. 잘 제구 된 98마일의 공을 누가 쉽게 쳐내겠어.

-노. 컨디션 좋을 땐 100마일도 던져. 지난 시즌에도 여러 차례 100마일을 넘겼지.

-올해는 정말 뭐가 되려나보네. 호세가 좀 아쉽지만 이유가 있었고 성낙기는 더 강해졌고 알칸타라만 살아나면 와일드카드를 바라볼 수 있어.

-겨우 와일드카드? 그렇게 꿈이 작아서야. ㅉㅉ

중계 사이트에 달린 댓글들은 알칸타라의 투구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미완의 대기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알칸타라는 팬들에게 가능성은 인정받았지만 잘 잡히지 않는 제구력이 가장 큰 숙제였다.

그런데, 스프링캠프에서도 통제되지 않던 제구력 불안이 시즌 첫 등판에서는 말끔히 해소된 것처럼 보였다.

경기 중에 부지불식간, 예전의 투구 폼으로 돌아가서 안타와 홈런을 내주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추스르고 공을 던진 알칸타라는 정말 다른 선수처럼 보였다.

‘알칸타라 대단해. 경기 전 몇 시간 동안 교정한 투구 폼을 거의 경기 내내 유지했어.’

성낙기도 감탄할 만큼 알칸타라는 끊임없이 예전 폼으로 돌아가려는 몸의 습관과 싸웠고 그 결과는 퀄리티스타트 플러스였다.

알칸타라에 이어 마운드를 넘겨받은 불펜 진은 무실점으로 그날의 경기를 끝냈다.

7:2. 알칸타라의 기분 좋은 첫 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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