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개막전 5
마이애미의 구단주인 데릭과 오스틴 단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개막전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최소 1억 달러를 투자한 투수는 몸값에 어울리는 투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뒷말이 없다.
혹여, 성낙기가 몇 경기를 치르면서 무너지더라도 몸값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구단주에겐 있다. 어떻게든 투자의 이유를 찾아내어 팬들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비싼 선수는 부진하더라도 그만한 기회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성낙기는 그런 구단주의 마음을 아는 듯 8회까지 무실점의 호투를 선보였다.
“아주 적절한 출발이야. 늘 오늘 같았으면 좋겠군.”
“투구 패턴이 다양해서 쉽게 무너질 유형이 아닙니다. 작년보다는 나은 성적을 올릴 겁니다.”
“그래? 믿음은 좋지만 너무 기대치를 높이지는 말게. 잘 던지다가도 좌절하는 투수들이 얼마나 많았나. 다만, 부상이 없다면 작년만큼은 할 테지.”
구단주 데릭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보다 훨씬 나은 성적,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바였다. 또한 거액의 연봉 외에 상상을 초월한 옵션을 넣은 이유이기도 했고.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9회에 올라온 워싱턴의 불펜투수의 구위에 투아웃을 당하고 있는 마이애미 타선. 워싱턴 역시 노장보다는 젊은 선수들이 주축인 팀이라서 작년 보다 투수들의 구위가 나아졌다.
지금 마운드에서 던지는 AJ 콜 역시 그런 선수였다.
스피드는 여전했고 변화구의 제구력은 좋아졌다. 마이애미가 올해 가을 야구를 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방해자가 될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팀, 그게 워싱턴 내셔널스다.
“성낙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던질 수는 있다고 합니다만, 개막전부터 힘을 뺄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대로 가. 9회엔 어떻게 던지는지 봐야겠어. 작년엔 경기 후반에 종종 실점을 했거든.”
“알겠습니다.”
성낙기는 9회에도 마운드에 섰고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리얼무토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왔다.
“지금까지 잘 던졌어. 하던 대로 하면 될 거야.”
“7회처럼 주자가 나가면 골치 아파져요. 공도 눈에 익었을 테고.”
“어떻게 던지려고.”
“사인 내지 않았던 구종 위주로 가야 9회가 깔끔하게 떨어질 겁니다.”
“그걸 9회에 던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좋아, 완봉 가자.”
타석은 브라이스 하퍼가 좀비처럼 서 있었다. 죽여도 차례만 되면 다시 살아나 타석에 서는 브라이스 하퍼. 상대 전적은 좋지만 워싱턴 타자 중 가장 투수에게 부담을 주는 타자인 건 틀림없다. 브라이스 하퍼가 체념하듯 리얼무토에게 말을 걸었다.
“후우, 이러다가 완봉승을 안겨주게 생겼어. 어떻게 갈수록 잘 던지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야. 사실은 나도 잘 몰라. 던지니까 받을 뿐이지.”
“…shit.”
브라이스 하퍼는 작은 소리로 욕을 내뱉고는 타석이 바짝 붙어 섰다.
누구나 그렇지만 타자의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자주 던지는 성낙기의 투구 패턴을 감안한 위치였다. 리얼무토는 브라이스 하퍼를 슬쩍 바라보고는 성낙기에게 사인을 냈다.
팡.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스트라이크.”
성낙기가 던진 공은 브라이스 하퍼의 몸 쪽의 존을 통과했고 브라이스 하퍼는 배트를 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브라이스 하퍼는 2구를 맞아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방금처럼 극단적인 위치는 몸 쪽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
성낙기는 2구를 던졌다.
따악.
퀘이크볼(4cm/5cm)
타격 포인트에서 떨리는 듯한 변화를 일으키는 공을 브라이스 하퍼는 결대로 밀어 쳤다.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잡아당기면 힘이 실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타격.
보통의 공이라면 이런 경우 가볍게 3루나 유격수 키를 넘겨 안타가 된다.
홈런 타자인 브라이스 하퍼로서는 엄청난 인내력을 발휘하며 다음 타자에게 찬스를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이런 팀 배팅은 그가 좋은 타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아……!”
하지만, 브라이스 하퍼는 타구를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의 예상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타구는 내야수 높이 솟았다.
날아오는 공은 포심패스트볼의 궤적과 닮았지만, 배트에 맞는 순간의 움직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배트를 내밀었을 때 안개 속으로 공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지만 아까의 궤적이 아닌 공, 그게 퀘이크볼이었다.
물론, 마구 휘두르는 타자에게 얻어걸리면 담장을 넘어갈 수도 있는 작은 변화지만, 브라이스 하퍼 같은 만만찮은 컨택 능력의 홈런 타자에겐 아주 이상적인 공이다.
아이러니하게 배팅이 정교할수록 범타 확률이 높아진다.
***
KKKKKKKKKKKKK
정확히 13개의 K가 전광판에 새겨졌다.
성낙기는 워싱턴의 4번 타자 라파엘 바티스타를 삼진으로 잡았고 브라이언 굿윈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시즌 출발을 알리는 개막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마운드에서 마지막 타자를 돌려세우고 내려오는 동안 기립한 팬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마이애미로서는 1년에 서너 번 볼까 말까 한 보기 드문 광경이다. 그걸 개막전에서 해냈으니 팬들이 감격에 겨워할 만했다.
“올해는 시작이 너무 좋군. 성낙기라는 투수가 저 정도일거라곤 생각 못 했어.”
“내가 말했잖아. 저 코리아 투수가 일을 낼 거라고.”
“마이애미에 커다란 고래가 들어왔어.”
“벌써부터 다음 경기가 기다려지는데? 대단한 투수가 나타났어.”
“개막전 완봉승을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야. 성낙기 굿!”
[개막전 완봉을 축하합니다]
[세기의 강속구가 (89/100)으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93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85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85로 오릅니다]
성낙기가 더그아웃에서 짐을 쌀 때 상태창이 스탯 증가를 알렸다.
헤이드 존의 강속구가 165km였으니, 스탯이 100까지 오르면 성낙기도 165km를 던지게 된다. 즉, 89는 154km까지 던질 수 있다는 계산.
전력투구를 할 경우 96마일에 달하는 포심패스트볼이다. 96마일이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상당한 속구에 속한다.
물론, 각 팀엔 100마일에 근접하는 강속구 투수들이 몇 명씩은 있지만 대부분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는 불펜투수들이고 그들은 거의 투 피치 투수들이다.
한 이닝 정도를 책임지면 되니 그거로도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
선발로 96마일을 던지는 투수는 더 드문 데다 그런 강속구를 갖춘 투수는 각 팀의 에이스다.
성낙기는 에이스급 중에서도 드문 투수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
알렉스 비토 감독과 셜리번 투수 코치 등은 호텔 룸에 모여 승리를 기뻐했다.
“첫 단추를 잘 꿰었어. 선나키가 완봉을 할 줄이야.”
“앞으로 어떤 성적을 낼지 가늠이 안 되는 투수입니다. 뭔가 올해는 심상치 않은데요?”
“에이스가 우뚝 서야 나머지가 힘을 갖는 거야. 느낌은 좋아.”
“다만, 동양인의 체격으로 볼 때 4일 휴식 후 등판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아시아권 투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 왔죠.”
“글세… 난 선나키는 다르다고 봐. 오늘 경기를 자세히 보면 전력투구를 하는 타자는 몇 안 됐어. 힘을 아끼고 있다는 이야기지. 그런 면에서 보면 충분히 적응할 거라고 믿어.”
지난 시즌에도 만만찮은 이닝을 던졌지만 올해는 최소 190이닝을 넘겨야 하고 승도 최대한 쌓아야 한다.
190이닝에 18승에 1억 달러.
그리고 200이닝에 23승에 추가로 5천만 달러.
성낙기가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옵션 달성을 위해서는 강하게 던질 수밖에 없는 계약 조건이다. 셜리번 투수 코치는 바로 그런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꼭 아시아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연봉보다 많은 옵션이 걸려 있다면 누구든 과부하가 될 공산이 있다.
코칭스태프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성낙기는 스포츠 하이라이트를 시청했다.
오늘 있었던 경기의 모습과 해설가들의 촌평이 뜨겁다.
모두들 성낙기의 완봉은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투였고 브라이스 하퍼와의 천적 관계에 매우 재미있어 했다.
특히 그들은 브라이스 하퍼의 마지막 타석에서 던진 퀘이크볼에 대한 분석을 했는데, 공의 궤적이 경이롭다며 느린 화면으로 몇 번이고 재생 중이었다.
성낙기는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요즘, 팬 파일러 같은 투수들이 퀘이크볼의 궤적을 보고는 자신들도 그 공을 던지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공기의 마찰력과 기압 등으로만 설명되지 않는 공인데 트리플에서 올라온 딕 에일 같은 투수는 성낙기의 그립을 알고 나서 수십 차례씩 똑같은 그립으로 던져봤다.
하지만, 그게 그립대로 던진다고 해서 되는 공이면 누구든 던졌겠지.
안타까운 마음에 말려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 마이애미의 선발은 호세 우레나였고 워싱턴의 선발은 노장 투수 맥스 슈어저였다. 2022년 시즌 37세의 노장임에도 2선발 자리를 놓치지 않는 투수.
스피드는 전성기에 비하면 줄었지만 아직도 강속구를 던진다.
그에 비하면 올해 30세의 후세 우레나는 나이로만 보면 전성기인데 작년 후반기부터 구위가 떨어졌다. 체력 하락 때문이라고들 했지만 올해 던지는 공이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워싱턴과 마이매미의 2차전이 열리는 내셔널스파크입니다. 어제는 성낙기 투수의 호투가 아주 빛났었는데요. 오늘은 워싱턴이 설욕할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투수는 팽팽합니다. 두 투수가 지난 시즌 비슷한 성적을 기록했죠. 공의 스피드와 구위는 호세가 조금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맥스는 다양한 변화구와 제구력이 강점입니다. 오늘도 만약 마이애미가 이긴다면 하나의 사건이 될 겁니다. 월드시리즈 준우승 팀을 상대로 개막 2연승은 흔한 기록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워싱턴이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섭니다. 투수 중에서 마이애미의 성낙기가 두드러지지만 나머지 투수들은 시즌을 치러봐야 알 수 있겠지요. 그에 반해 워싱턴의 투수력은 안정적이고 5선발까지가 탄탄한 편입니다. 타선도 다소 낫죠. 변수는 마이애미의 전력 보강인데 이 선수들이 어느 정도 해주느냐를 봐야 할 것 같네요.”
“마이애미도 불펜은 좀 강해졌을 겁니다. FA를 둘이나 데려왔거든요. 만약 오스틴 단장의 뜻대로 이 투수들이 활약한다면 올해는 디비전시리즈도 노려볼 만합니다. 와일드카드 경쟁까지 할 정도로 지난 시즌 후반기에 힘을 냈던 마이애미니까요.”
호세 우레나는 1회 말에 흔들렸다. 제구가 잡히지 않는지 선두타자 볼넷을 내줬고 3번 브라이스 하퍼에게 2루타를 얻어맞았다. 그렇게 시작된 찬스는 8번 타자까지 이어졌고 호세 우레나는 3점을 헌납했다. 가장 좋지 않은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