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15화 (115/188)

# 115

115화 개막전 4

신중에 신중을 기했지만 얻은 결과는 신통치 않다.

브라이스 하퍼는 타석에서 벗어나 배트를 휘두르면서 리얼무토를 봤다. 끈질긴 승부를 하리라던 생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리얼무토의 존재를 너무 간과했다.

하위 팀이지만 메이저리그 주전으로 다년간 뛰며 각 팀 타자들의 성향을 꿰고 있는 포수.

더욱이 주전을 맡은 후에는 실력이 계속 늘어서 올스타에 뽑힐 정도의 포수 아닌가.

“볼넷을 줄 듯 하다가 투 스트라이크까지 오는 걸 보니 볼 배합이 좋아. 결과까지 좋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도록 해.”

“그러게 말이야. 천하의 브라이스를 솎아내려면 뭘 던져야 할까. 너 나올 때마다 골이 빠개지는 것 같군.”

“이봐, 시즌은 길어. 투수에게 맡기면 되잖아.”

“아, 그럼 방법이 있었나. 딴은, 그래도 괜찮겠어. 성낙기의 사인은 나도 늘 예측불가니까.”

대화를 마친 후, 리얼무토는 정말로 성낙기에게 사인을 넘겼다. 성낙기의 눈이 의외인 듯 더 열렸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루 주자는 호시탐탐 2루를 노리면서도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라는 무게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2루에서 객사라도 하게 되면 투수는 타자와의 승부를 꺼릴 것이고 볼넷으로 내보내면 원 아웃 1루가 된다. 후속 타자들이 점수를 내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노아웃 1루에 브라이스 하퍼의 타석, 투수를 압박하기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나 그건 1루 주자의 허망한 꿈에 불과했다.

관중들이 웅성거리면서 전광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1루 주자 앤서인 렌던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98마일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브라이스 하퍼는 팔색조의 변화구 투수인 줄 알았던 성낙기의 강속구에 당한 거였다.

워싱턴의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2선발 투수 맥스 슈어져가 더운 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러다 100마일 던지겠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투수야.”

“올해도 브라이스의 조짐이 좋지 않아. 특정 투수를 상대로 1할 대 타율이라니. 방금 공은 체감 속도가 너무 차이나서 당했을 뿐이야. 저 투수가 한 경기에 몇 개 안 던지는 공이지.”

맥스 슈어저의 말을 3선발인 엔니 로메로가 받았다. 슈어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였고 이젠 98마일을 던지지 못한다.

경력에 걸 맞는 안정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상대하는데 구속이 떨어지자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이 잘 들어맞은 케이스.

하지만, 여전히 94~95마일을 던지며 타자들을 어렵게 하는 투수 중 하나다.

브라이스에 이어 타석에 들어선 라파엘 바티스타는 홈런 타자다운 스윙을 했으나, 정작 타구는 유격수 땅볼이었다.

마이애미의 유격수 홀랜드는 경쾌한 푸드웍으로 바운드 된 공을 역동작으로 잡아내더니 2루로 뿌렸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다.

2루수 역시 1루 주자의 슬라이딩을 피하며 러닝스로우로 1루에 공을 던져 6-4-3 병살타를 완성했다.

4득점 후 맞은 노아웃 1루의 위기에서 상대의 클린업트리오를 깨끗이 처리한 성낙기는 홀랜드를 격려하면서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서 지난 시즌의 철없거나 가벼운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개막전부터 망신당하겠어.”

“그래, 완봉 각이야.”

“브라이스 하퍼가 당하는데 기대가 안 돼.”

“마이애미가 괴물을 데려왔군. 저런 투수가 워싱턴에도 있었으면 준우승하지는 않았을 거야.”

“누가 아니래. 스카우트가 능력이 없는 건지.”

“올해 전력 보강이 많지 않아. 고이면 썩는 법이야.”

워싱턴 내셔널스는 6회까지 무실점으로 허덕였다.

성낙기는 68구만을 던지며 워싱턴 내셔널스의 타선을 요리했고 무려 8개의 삼진을 잡았다. 7회 말을 앞둔 워싱턴의 더그아웃은 침울했다.

에이스인 스트라스버그가 4실점을 한 마당에 상대 투수의 공을 전혀 공략하지 못하는 타선.

스트라스버그는 4회에 4실점을 하고도 5회부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삼자범퇴로 마이애미를 막아내고 있었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에서 그걸 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실점은 어쩔 수 없지만 다시 평정심을 되찾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에이스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저러니, 월드시리즈에서도 승리투수가 되었겠지.’

비록 오늘 경기가 잘 풀려 자신이 승을 거두더라도 인정할 만한 상대라고 성낙기는 생각했다. 7회 말, 워싱턴의 공격은 5번 브라이언 굿윈부터 시작됐고,

성낙기는 거짓말처럼 두 타자에게 연달아 안타를 맞았다.

오늘 경기 최대의 위기였는데 무심코 던진 포심패스트볼이 두 번 다 안타로 연결됐다.

삼진을 잡아내지 못한 것을 투수의 실수라고 할 수는 없다.

성낙기는 맞춰 잡는 기분으로 던진 것인데 1, 2루 간, 3유간을 빠지는 땅볼 타구의 행운이 겹쳤다.

순식간에 노아웃 1, 2루.

다음 타자는 시즌을 앞두고 워싱턴이 심혈을 기울여 FA로 영입한 제이크 바우어스였다.

성낙기의 피칭에 눌려 이적 후, 첫 경기에서 안타가 없다.

그래서 내심 초조하다.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야만 앞으로 새로운 팀에 적응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팡.

“스트라이크.”

투수는 제이크의 초조함을 아는 듯 초구부터 정면 승부였다. 노아웃 1, 2루의 위기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이 포심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투수다.’

제이크는 몇 차례 스윙을 하고서 2구를 맞을 준비를 했다.

팡.

라이징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제이크는 2구 역시 같은 구질로 판단하고 배트를 냈으나, 공은 그의 생각보다 심하게 솟아올랐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마치 이 위기 상황을 모르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다. 제이크의 생각보다 훨씬 강심장이다. 투수는 사인을 받자마자 공을 뿌렸다.

따악.

제이크가 친 공은 몸 쪽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포심패스트볼이었고 타구는 유격수 정면으로 굴러갔다. 새내기 유격수 홀랜드는 신이 난 얼굴로 공을 잡자마자 2루에 뿌렸고 2루수 역시 지체 없이 1루로 공을 던졌다.

“아웃!”

“아웃!”

아웃을 선언하는 심판의 목소리가 잇따랐고 2루 주자는 3루에 안착했다.

하지만 타자와 1루 주자는 아웃, 또다시 6-4-3의 병살타가 완성되었다.

노아웃에 1, 2루였던 찬스는 순식간에 투아웃 3루의 그저 그런 찬스로 탈바꿈했다.

제이크는 병살타를 친 뒤에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면서 큰 죄를 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도 오늘 경기의 승부처였다는 걸 알았기 때문.

그리고 바로 자신이 그 찬스를 날려 먹었다. 이제 기껏해야 1점을 뽑아낼 수 있는 주자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도 투아웃이라는 아웃 카운트를 달고서 말이다.

-하여튼 성낙기는 떠는 법이 없어.

-맞아, 처음엔 나쁜 영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럼, 사과해.

-갈수록 잘 던지는 스타일이야. 젊고 싱싱해.

-여기만 막으면 좋은 개막전이 될 거야.

인터넷으로 중계를 보는 팬들이 남긴 댓글.

하나같이 성낙기를 응원하는 멘트다.

그만큼 에이스로 올라선 성낙기에게 거는 팬들의 기대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팬들의 기대대로 성낙기는 남은 한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체력이 25 남았습니다]

***

개막전 피칭이 경제적이다.

아직, 전력투구를 25개나 던질 수 있는 체력이 남았다.

지난 시즌을 던지는 동안, 체력을 아끼면서 던지는 방법을 알았고 리얼무토의 사인 또한 그에 맞춰져 있었다.

리얼무토는 체력적인 부담이 큰 라이징패스트볼이나 퀘이크볼의 사인은 가급적 자제했고 초강속구라 부르는 전광석화도 마찬가지였다.

포심패스트볼도 주자가 있을 때나 타자가 강타자일 때만 전력투구했고, 적절한 카운트에 슬라이더나 커브 같은, 상대적으로 느린 변화구를 섞었다.

작년 한 해,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성낙기와 리얼무토 모두 가장 효과적인 투구 패턴을 찾아낸 것이다.

또한, 타석에서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4점이나 앞서는 상황에서 굳이 안타를 치고 나가서 주자가 될 이유는 없었다. 혹시 홈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더 던질 수 있겠어? 개막전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 불펜투수들이 대기 중이야.”

“겨우 80구 조금 넘은걸요. 더 던질 수 있습니다.”

세이브 상황도 아니었다. 8회에 던져서 7회 같은 위기를 맞지 않는다면 던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셜리번 코치는 했다. 대신 위기가 온다면 한 박자 빠른 교체로 리스크를 최소화하면 될 일이다.

“좋아, 그 대신 주자가 나가면 언제든 내려오는 거야.”

“좋습니다.”

셜리번 코치는 성낙기의 다짐을 받고 불펜을 바라보았다. FA로 데려온 데론 카일과 사무엘이 몸을 푸는 중이다.

셜리번 코치는 두 선수를 정규리그에 써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에이스의 의중을 무시할 수 없다.

성낙기는 어느새 팀의 간판이 되어 있으므로 그만큼의 대우와 존중이 필요한 선수였다. 가장 몸값이 비싼 선수 아닌가.

그걸 증명하려면 깨끗하게 경기를 책임지는 그림도 나쁘지 않다.

워싱턴은 8회에 스트라스버그가 내려가고 불펜 투수가 올라왔다.

FA로 새로 합류한 워싱턴의 불펜 라일 스태넥은 마이매이의 타선을 두 개의 삼진을 곁들이며 8회를 끝냈다.

상당한 구위였는데 이 정도라면 워싱턴의 불펜이 한층 강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이른 바, 불펜에 특화된 투수처럼 보였다.

“성낙기 투수 8회에도 올라오는군요. 지난 시즌 초반엔 6회 정도를 던진 경기가 많았는데 올해는 개막전부터 긴 이닝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이애미가 딱 한 해의 활약만 보고 모험을 한 이유가 있겠죠. 오늘 같은 경기를 보여준다면 그 이유를 증명하는 것일 테죠. 그게 아니라면, 데릭 구단주는 팬들의 야유에 시달려야 할 겁니다.”

“네, 현재까지는 아주 잘 던지고 있습니다. 위기는 노아웃 1, 2루의 7회뿐이었습니다. 그 외, 주자가 나간 경우는 모두 원아웃이나 투아웃이었어요.”

“잘 보셨네요. 오늘 던지는 걸 봐서는 위기가 없으면 전력투구를 하지 않는 걸로 보입니다. 포심패스트볼의 속도를 측정해 보면 주자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확연히 차이 납니다. 이건, 매 이닝 전력투구를 하지 않고도 워싱턴 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뜻하죠. 그만큼 공의 스피드도 빨라지고 변화구의 각도 지난 시즌에 비해 예리합니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8회에도 올라온 성낙기의 달라진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이 투수는 지난 시즌과 달라졌고 메이저리그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까지 터득해 가고 있는 걸로 보였다.

리얼무토가 내는 사인의 패턴도 다양했고 타자들의 노림수는 늘 빗나갔다.

성낙기는 캐스터와 해설자의 칭찬을 들은 듯 8회엔 더 강력한 투구로 워싱턴의 타자들을 잠재웠다.

그리고 마이애미 팬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성낙기의 눈앞에 9회가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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