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화 개막전 3
“트레아 터너답지 않은 실수! 공을 뒤로 빠뜨립니다.”
“시클라멘 선수가 시야를 막았습니다. 매우 영리한 플레이로 가렛 쿠퍼의 히트를 도왔습니다.”
“시클라멘! 홈까지 파고듭니다.”
캐스터가 의외라는 듯 소리쳤다. 유격수 뒤로는 좌익수가 달려오고 있었고 그는 상당한 강견인 굿윈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3루에 머무르기도 아깝고 그렇다고 홈으로 뛰기엔 위험부담이 크다. 좌익수 앞 얕은 안타나 마찬가진데 그 정도의 거리로는 아웃 타이밍이 맞다.
3루 베이스 코치조차 뛰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시클라멘은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째는 자신의 발이 빠르다는 거였고 둘째는 좌익수의 전진이 느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비는 항상 의외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어야만 해. 가령, 투수 쪽으로 공이 가면 그 공이 투수를 맞고 자신에게 올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거의 대부분 그걸 놓치지. 웬 줄 알아? 그게 인간의 한계야. 자신도 모르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늘 경계해야 좋은 수비수야.’
시클라멘은 언젠가 90년대의 유격수 배리라킨으로부터 코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만하고 풀어지며 흐트러지는 순간이 온다는 진리.
시클라멘은 3루를 돌아 뛰면서,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좌익수 앞으로 떨어지는 안타가 아니었기에 적어도 한 번쯤은 멈칫했을 것이고 시클라멘은 그 순간을 노렸다. 급하게 공이 날아왔고 시클라멘은 슬라이딩을 감행했다.
홈플레이트에 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주심이 허리를 숙여 눈을 크게 뜨고 보다가 드디어 모션을 취했다.
“세이프!”
시클라멘의 홈 승부로 마이애미는 1점을 선취했다.
그야말로 과격한 승부사라고 불러야 할까.
시클라멘은 주먹을 내지르며 포효했고 스트라스버그와 포수 세베리노는 망연자실했다.
평범한 타구에 상대 주자의 시야 방해, 그리고 이어진 유격수의 실책과 스타트가 늦었던 좌익수의 느슨함으로 1점을 내줘서가 아니었다.
주자가 워낙 대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수비가 뒤숭숭한 틈을 타서 가렛 쿠퍼가 2루에 진출한 것은 뼈아팠다.
2루타를 치고 나간 주자를 두고 유격수 땅볼로 타구를 제한했지만, 결과는 1실점에 이은 득점권 찬스를 또다시 허용했다.
평범한 유격수 땅볼이 2루타로 둔갑한 꼴이다.
팡.
“볼.”
팡.
“볼.”
스트라스버그는 강타자 브라이언 앤더슨을 앞에 두고 흔들렸다.
1점도 뼈아픈데 2점까지 내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 이면엔 성낙기라는 만만치 않은 투수가 존재했다.
즉, 성낙기가 2점 이상을 내줄 투수가 아니기 때문에 스트라스버그도 더 이상의 실점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늘 압박과 부담으로 다가온다.
투 볼까지 몰린 스트라스버그가 특유의 강속구를 뿌렸다. 경기 중, 가장 빠른 99.5마일의 포심패스트볼.
이를 악물고 던지는 그의 머리칼이 세차게 흔들렸다.
***
-세상에 스트라스버그가 털리다니.
-절대라는 건 없는 법이지. 그가 누구건 간에.
-그렇게 쉽게 승부하는 게 아니었어. 무엇 때문에 서둘렀지?
-4회에 4실점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브라이언 앤더슨은 그렇다 쳐도 홀랜드는 어디서 온 종잔데 우리 스티븐을 울리냐.
-마이너에서 온 루킨데 JT 리들을 밀어냈어.
-망했다. 개막전에 겨우 마이애미 따위에게 지게 생겼네.
가렛 쿠퍼를 2루에 두고 브라이언 앤더슨의 적시타가 터졌고 투아웃을 잘 잡아낸 스트라스버그는 주자를 1루에 두고 홀랜드에게 투런 홈런을 얻어맞았다.
시범 경기 성적을 보고 과감하게 개막전에 투입한 알렉스 감독의 용병술이 빛났다.
연봉이나 이름값을 제치고 라인업에 포함시키는 감독은 드물다.
그 드믄 행운이 홀랜드에게 찾아왔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트라스버그로서는 1년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불운한 날이 될 공산이 커졌다.
그리고 그게 개막전일 가능성도 함께였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성낙기가 4회 말에 안타를 맞기 전까지는.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실책으로 무사에 타자가 살아나간 것까지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1루수인 브라이언의 알까기로 2번 앤서니 렌던이 1루까지만 진루했다는 것.
적어도 득점권은 아니었으니 스트라스버그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할 수 있지만,
다음 타자가 브라이스 하퍼라는 게 문제였다.
성낙기가 기억하는 한 브라이스 하퍼를 노아웃 1루 같은 불리한 상황에서 상대한 적이 없었다.
같은 타자라도 그 순간의 경기 분위기, 찬스의 질, 경기의 중요성과 스코어 등에 따라 구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지금이 바로 그랬다.
적어도 주자 견제라는 성가신 일이 생겼고 셋 포지션으로 공을 던져야 한다.
포크나 커브 같은 구질도 좋지 않다.
볼이 빠질 위험이 있고 너무 느린 변화구는 도루를 용이하게 만든다.
거기에 덧붙이면 징크스는 언젠가는 깨지게 되며 깨지는 순간, 징크스는 거꾸로 그간의 불운을 한꺼번에 터뜨릴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브라이스 하퍼는 성낙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부담스러워지는 순간 성낙기는 그가 리그 2위의 홈런 타자였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했다.
‘후욱, 개막전에 노아웃 1루, 브라이스 하퍼라는 거지. 하지만 4점을 앞서고 있다.’
성낙기가 그동안 브라이스 하퍼에게 강했던 건 그의 심리를 역이용해서만은 아니었다.
겉으론 여유롭게 웃었지만 최대한 제구력과 볼 끝 변화에 신중을 기했고 결과가 따라줬을 뿐이다.
그게 몇 번 맞아 들어가니 모르는 이들은 징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낙기는 지금 그 무엇보다 브라이스 하퍼의 눈빛이 신경 쓰였다.
‘강한 투수다. 절대 루키가 아니야. 집중하지 않으면 지옥이 찾아온다.’
성낙기가 그간 보아온 브라이스 하퍼의 눈빛이 아니다.
노려보거나, 깔보거나, 분노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심지어 증오까지 담아내던 그런 눈빛과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한순간에 감정을 추스르고 저토록 신중해진다는 건가.
성낙기는 갸웃했다.
브라이스 하퍼는 성낙기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투수의 손을 떠나 날아올 공을 미리 예측하여 보는 중이다.
냉정한 프로의 자질을 가진 타자. 성낙기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압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스트라스버그가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4점은 지켜야 한다는 부담에서 시작한 스스로의 옥죔이었다.
“타임!”
리얼무토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슬라이더 사인을 받고 고개를 끄덕인 성낙기가 인터벌을 길게 가져간 때문이었는데 리얼무토에게는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망설이는 성낙기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너 왜 그래, 너답지 않잖아.”
“헐, 나도 사람이야. 개막전 선발에 상대는 월드시리즈 준우승 팀에 스트라스버그가 선발이고 4점을 지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형 앞에서 거짓말 할래?”
성낙기의 진심을 가볍게 짓밟고 리얼무토는 포수 마스트를 쓰고 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헤프게 굴었으면 저러나, 싶었다. 진실은 진실과 통한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성낙기는 머리에 스팀이 약간 오른 상태에서 슬라이더를 던졌다.
(87/100)에 이르는 제구력과 변화를 가진 슬라이더가 한가운데에서 외곽으로 흘렀다.
팡.
“볼.”
브라이스를 의식하기 시작해서일까. 공 한 개쯤이 바깥쪽으로 치우쳤다.
따라 나올 법한 배트는 미동도 없다. 컨디션과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말과 동격이다.
***
-마운드에서 추리소설 쓰지 마. 네가 던지고 싶은 공이 뭔가를 생각해. 던지고 싶은 공이 없어도 구질을 정했으면 네가 가진 단 하나의 공처럼 던져. 그 구질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처럼 포수 미트에 꽂아 넣는 거야.
성낙기가 만만치 않은 압박을 받고 있을 때, 불현 듯 드랙 실바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느린 공으로 타자들을 상대할 때 실바가 해주었던 말과, 그 말을 새기며 마운드에 서면 떨리는 상황에서도 여유를 찾게 되던 기억도.
떨어지는 구위로도 위기를 견디게 해주던 위무의 말이었고 힘의 근원이었다.
성낙기는 브라이스 하퍼를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역시 위압적인 타자임은 분명하다. 그걸 인정하기로 했다.
리얼무토는 브라이스의 바깥쪽으로 라이징패스트볼 사인을 냈다. 스트라이크 존이 아닌, 높은 쪽으로 들어오다가 솟아오르는 공.
초구를 스트라이크 사인을 냈으나, 슬라이더가 조금 빠졌고 2구 역시 유인구를 요구하고 있다.
팡.
“볼.”
브라이스 하퍼가 또 참는다.
볼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닌 듯싶었지만 배트를 내지 않은 이유는 타자만 안다. 볼 카운트 투 볼에서 리얼무토는 다시 한번 유인구 사인을 냈다.
이번엔 체인지업 사인이다.
타자의 바깥쪽으로 오다가 떨어지는 공. 즉,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던지라는 거였다.
리얼무토의 사인이 이랬던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타자가 반응하지 않으면 스리볼이 되고 그 다음은 더 부담이 커진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네.’
성낙기는 속으로 궁금해하면서도 리얼무토를 믿기로 했다. 다년간 브라이스 하퍼를 겪어봤을 것이고 적어도 성낙기보다는 타자의 성향을 잘 알 것이다.
스리볼이 될 위험을 감수하고 유인구 사인을 낼 때는 노림수가 있다는 것. 성낙기는 1루를 힐끗 보면서 주자의 리드를 확인한 후, 공을 던졌다.
팡.
“스윙 스트라이크!”
브라이스 하퍼의 배트가 나왔다. 3구야말로 스트라이크일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리얼무토의 계략이 먹혀 들어갔다.
브라이스 하퍼가 헛스윙을 하고 나서 허공을 향해 숨을 뱉었다.
최대한 신중했고 스트라이크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 때에 배트를 내밀었지만, 헛스윙이 되자 억눌렀던 가슴 한쪽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스리볼을 감수하고 던진 유인구를 읽어내지 못한 자신의 판단에 의심이 생겼다.
‘뭐야, 또 유인구를 던졌어……?’
변화구가 많아 어차피 게스히팅이 안 되는 투수지만 볼과 스트라이크는 구분할 수 있어야 자신에게 희망이 생긴다.
볼 카운트 투 볼 원 스트라이크.
원 스트라이크를 먹고 보니 투수에게 불리했던 볼 카운트가 꼭 그렇지도 않다. 이번 공은 더 헷갈릴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스리볼을 감수하고 던질 정도의 투수가 그보다 더 나은 카운트에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유인구를 하나 더 던질 가능성이 더 커졌을 수 있다. 하지만,
팡.
“스트라이크.”
브라이스 하퍼가 망설이는 사이, 94.5마일의 포심패스트볼이 바깥쪽으로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평소 성낙기의 공은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는 공이 볼이 되고, 볼처럼 보이는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점에 착안한 브라이스는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는 바깥쪽 공을 애써 외면했다. 브레이킹 볼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가지고 노는군. 하아, 이렇게 된 이상 느낌대로 타격한다. 생각이 너무 많았어.’
브라이스 하퍼는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 생각을 고쳐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