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투수 성낙기-113화 (113/188)

# 113

113화 개막전 2

KBO에도 그런 타자가 있었다.

일명 용구놀이라는 별명까지 얻어가면서 투수를 괴롭히던 타자. 나왔다하면 기본적으로 풀 카운트를 깔고 가는 타자이니 투수들은 투구 수 조절에 애를 먹는다.

선구안이 좋아서 그러는 거면 또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 선수는 이상하게 치는 타이밍이 느리다.

공을 끝까지 보는 스타일이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파울, 파울, 파울…….

계속 쳐대는 파울볼은 늘 스피드에 배트가 밀리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투구 수는 계속 늘어간다. 그러다가 투수가, 이것도 파울이냐? 하는 심정으로 던지는 평범한 공을 안타로 만들어 1루로 나가는 것이다.

투구 수는 투구 수대로 늘어나 있는데 1루로 나간 주자는 어느새 도루를 준비한다.

아마, 그런 타자가 팀에 서넛만 있으면 상대 투수는 열받은 나머지 마운드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보고 느낀 거 있지?”

“있긴 하죠. 용구놀이 하려고 그러네.”

“용구……?”

“아, 아니에요. 던지는 대로 다 커트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은 처음 받아보네요.”

“3할 타자니까.”

“음… 얼른 답이 안 떠오르네. 그냥 가운데 던져야 할까.”

“커트만 한다고 한가운데 던지면 무조건 홈런이야. 타이밍이 느리니까 퀘이크볼을 느리게 던져. 그럼, 내야 땅볼로 잡을 수 있어.”

“그보다는… 이건 어떨까요.”

“어떻게?”

“이봐, 리얼무토 홈플레이트로 돌아와!”

주심의 목소리가 들렸고, 리얼무토는 성낙기와 대화를 끝내고 홈플레이트로 돌아와 앉았다.

“이봐, 트레아. 1회부터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너무한 건 그쪽 같은데. 안타 하나 준다고 세상 무너지는 것도 아니잖아.”

성낙기는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졌다.

트레아 터너의 몸 쪽으로 향하는 공.

트레아 터너는 변화구인지 아니면 포심패스트볼 인지를 가늠하려고 타격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웃!”

성낙기가 던진 공은 몸을 맞출 듯 날아왔고 트레아 터너는 한 발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공이 휘는 게 보였다. 한때 드랙 실바의 전매특허였던 두 구종 중 하나다.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

속았음을 직감한 트레아가 헝클어진 자세에서 배트를 내밀었다.

틱.

팡.

“스트라이크 아웃!”

‘와, 그걸 맞춰서 파울 팁을 만들다니.’

마운드의 성낙기는 트레아를 아웃으로 잡아내고서도 배트 컨트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시즌과는 완전히 달라진 타격 방법에 혀를 내둘렀다.

***

워싱턴의 1, 2번 타자는 팀의 테이블세터답게 최대한 공을 오래 보고 자신이 바라는 공이 아니면 커트해 냈다.

그 결과 1번에 6구. 2번에 또 6구. 두 타자에게만 12구를 쏟아부었다. 그나마 성낙기가 가진 변화구가 대단한 수준이기에 그 정도였다.

“12구라니.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이런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런 타자들이 포심패스트볼 위주의 투수에게 작정하고 이런 방법을 쓴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mlb에서 제 스윙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상대의 투구 수를 늘리는 작전은 치졸하다는 평을 듣기 십상이다.

워싱턴 감독도 그걸 알기에, 모든 타자들에게 그걸 작전이라며 지시할 순 없다.

더욱이 지금 타석에 들어서는 브라이스 하퍼 같은 타자는 그런 지시를 내린 들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씨알이 안 먹히는 걸 떠나 재능 낭비다.

홈런을 펑펑 쳐내는 타자에게 컨택 위주의 타격으로 상대의 투구 수를 늘리라고 한다는 건 호랑이에게 쥐 사냥을 하라는 말과 같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지시를 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는 더그아웃에서 난동을 피울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마운드의 성낙기라는 투수와 원한이 쌓일 대로 쌓였다.

지난 시즌 3할에 근접한 타율의 브라이스 하퍼는 유독 성낙기에게만은 약했다.

0.212.

이게 성낙기를 상대로 한 브라이스 하퍼의 성적이다.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특정 투수를 상대로 이렇게 약한 적은 없었다. 한두 타석을 무안타로 더했다면 아마, 1할 대 후반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니,

‘또 너냐.’

브라이스 하퍼는 마운드의 투수를 상대로 이를 가는 것이다.

앞선 두 타자를 힘겹게 잡은 성낙기도 브라이스 하퍼를 보았다. 눈빛만 보면 거의 살인이라도 할 기세다.

노려보는 걸 떠나 무언가 꽉 찬 응어리를 눈으로 내뿜고 있는 브라이스 하퍼였다. 성낙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와인드업을 했다.

팡.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높이 날아오자 흠칫, 했던 브라이스는 커브가 자신의 무릎 근처까지 뚝 떨어지는 걸 보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예리한 커브라니.

그가 아는 한, 이런 정도의 브레이킹 볼은 mlb를 통틀어도 서넛에 불과하다.

그중 커쇼의 커브는 1할 대의 안타를 허용했을 뿐이다.

***

[커브의 제구력이 90으로 오릅니다]

지난 겨울, 성낙기는 채드 알라치와 훈련하면서 그동안 잘 던지지 않았던 커브를 집중 연마했다.

그 결과, 87이었던 스탯이 90까지 오르면서 제구력과 변화구의 마술사 드랙 실바의 커브를 90%나 흡수했다.

수치상으로는 겨우 3이 올랐을 뿐이지만 87일 때와는 정교함에서 차이가 났고 떨어지는 각도 또한 3이라는 스탯 이상이었다.

마치 무공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 단계에 도달한 느낌.

그러므로 92까지 오른 포심패스트볼의 제구력 또한 공 한두 개를 넣었다 빼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작년에 비해 더 좋아졌다. 알 수 없는 놈이야.’

브라이스 하퍼는 성낙기가 2구로 던진 바깥쪽 포심패스트볼을 간신히 골라내면서 내심 감탄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하나 정도가 빠졌을 뿐이다.

타자에게는 엄청난 자제력을 요구하는 컨트롤이었다.

성낙기 또한 속으로 놀랐다.

‘작년 같으면 거의 따라 나왔던 공을 골라냈어. 갈수록 발전하는군.’

2구를 유인구로 던져서 따라 나오지 않은 이상, 성낙기는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잖아도 1, 2번 타자에게 12구를 던진 마당에 이런 식으로 가면 6회도 되기 전에 체력이 바닥날 것이다.

슈욱!

라이징패스트볼(7cm/10cm)

따악!

브라이스 하퍼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솟아오르는 공을 가차 없이 때려냈다.

배트를 맞은 공이 떠오르는 순간, 성낙기는 고개를 뒤로 돌려 공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좌타자인 브라이스 하퍼가 때린 공이 좌익수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뛰어! 디카엘로!”

“간닷.”

“잡을 수 있어! 몸을 날려!”

관중석의 마이애미 팬들이 소리쳤고 디카엘로는 자신의 키를 넘어가는 공을 잡기 위해 전력으로 뒤로 물러났다.

브라이스 하퍼는 배트를 내동댕이치고 1루로 뛰어나갔다.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방금 맞은 공은 정타는 아니지만, 최소한 2루타라는 확신.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직감이었고 늘 그랬듯이 그는 1루 베이스를 밟고 2루에 가기 위해 트랙을 파울라인 쪽으로 옮겼다.

최단 시간 안에 원을 그리며 2루로 나아갈 채비를 한 것이었는데,

“아, 디카엘로 선수 담장 앞에서 브라이스 하퍼의 타구를 잡아냅니다.”

“생각보다 많이 뻗은 타구였죠?”

“그렇습니다. 디카엘로 선수 무려 20m를 달려가서 목적을 이룹니다.”

“브라이스 하퍼로서는 아깝게 되었네요. 징크스가 계속 이어지겠어요.”

브라이스 하퍼는 1루를 돌다 말고 공이 잡히자 허리를 뒤로 젖히며 괴로워했다. 2루타에 실패 했을 뿐더러 그의 눈앞엔 낯선 글자가 어른거렸다.

바로 1이라는 숫자.

이번 타석의 무안타로 상대 전적은 1할대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브라이스 하퍼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면서 중얼거렸다.

‘라이징패스트볼의 떠오름까지 예상하고 친 공인데 뻗지를 않았다. 후우… 이런 치욕이 있나.’

하지만, 브라이스 하퍼는 브라이스 하퍼였다.

지금까지 제대로 던진 라이징패스트볼을 저 정도 때려낸 타자는 없었다.

거의 내야 뜬공이나 외야 플라이 볼로 끝나는 것이 성낙기가 보아온 익숙한 풍경이다.

수비가 좋은 디카엘로가 스타트를 빨리 끊지 않았더라면,

2루타를 줌과 동시에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 라파엘 바티스타를 맞아야만 했을 것이다.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 맞는 4번 타자와 투아웃 주자 없는 가운데 맞는 타자는 압박 자체가 다르다.

“잘했어, 성낙기. 올해도 출발이 좋은데?”

더그아웃으로 오면서 리얼무토가 어깨를 툭, 쳤다.

“아니, 쉽지 않는 1회였어. 디카엘로에게 한턱 내야겠어요.”

“어려움이 있어야 야구지. 오르내림이 없는 스포츠는 역사에서 모두 사라졌어. 먼 훗날 손자에게 그렇게 말해. 브라이스라는 타자가 있었다고, 그리고 그날 디카엘로가…….”

“그쯤 하시죠. 리얼무토 씨.”

***

마이애미의 타격은 4회 선두 타자로 나온 시클라멘이 포문을 열었다. 스트라스버그의 슬라이더를 밀어 친 공이 우익수 파울라인 선상에 떨어졌다.

시클라멘은 빠른 주력으로 2루 베이스를 밟았다. 스트라스버그를 상대로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 노아웃에 2루의 득점권 찬스가 마이애미에게 왔다.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 3번 타자 가렛 쿠퍼부터 시작되는 타순 또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좋아, 오늘은 꼭 이겨야만 해. 스트라스버그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시즌 내내 공포에 시달릴 거야.”

“무슨 공포씩이나.”

특별석에 앉은 오스틴 단장의 말에 윌슨 스카우트가 토를 달았다.

“아니야. 오늘 브라이스 하퍼를 보고도 모르겠어. 저 엄청난 타자가 성낙기 앞에서는 쥐 죽은 듯 고요하잖아.”

“딴은 그러네요. 가만, 시클라멘 리드가 좀 길지 않아요?”

“…무슨 속셈이지?”

타석엔 가렛 쿠퍼가 들어서 있었고 스트라스버그는 위기라고 생각한 듯 신중했다.

특급 투수답지 않게 1구, 1구에 뜸을 들이는 모습.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가렛 쿠퍼가 스트라스버그의 강속구에 곧잘 반응했고 상대 전적도 2할 대 중후반으로 좋은 편이다.

팡.

“스트라이크.”

역시 그걸 의식했는지 날카로운 슬라이더가 바깥쪽에 꽂혔다. 가렛 쿠퍼는 내심 스트라스버그의 포심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었다.

어차피 주 무기가 그거고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가장 자신 있는 공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팡.

휘잉.

“스윙 스트라이크.”

하지만, 스트라스버그는 포심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 존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 방금 던진 공도 몸 쪽 하이패스트볼인데 배트가 따라 나왔다.

카운트는 변화구로 잡고 빠른 공으로 가렛 쿠퍼를 유인할 셈이었다. 애초에 포심패스트볼을 노릴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

‘포심을 유인구로 뿌리네. 이러다 당하겠어.’

스트라스버그의 전략대로 투 스트라이크가 만들어지고 보니 앞으로 공 세 개의 여유가 생겼다. 세 개 모두 유인구로 승부해도 좋고 빠른 승부로 타자의 의표를 찌를 수도 있다.

마운드의 스트라스버그는 후자였다.

유인구로 질질 끄는 타입도 아니고 생리에 안 맞는다.

포수인 세베리노의 바깥쪽 유인구에 고개를 저은 이유. 그리고 스트라스버그는 가렛 쿠퍼가 가장 생각하기 힘든 공을 커브라고 생각하고 그 공을 던졌다.

슈욱.

따악.

공은 유격수 앞 땅볼로 굴러갔다. 공의 속도나 바운드로 보아 유격수 트레아 터너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 하지만, 시클라멘은 재능 있는 주자였다.

긴 리드로 윌슨 스카우트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그 긴 리드가 복으로 돌아왔다.

따악, 하고 공이 맞는 순간 시클라멘은 3루를 향해 뛰었고 유격수는 공을 받기 위해 전진했다. 그리고 공이 유격수 앞에서 바운드되는 순간, 시클라멘은 절묘하게 유격수의 시야를 가리며 공을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냈다.

텅.

트레아 터너는 시클라멘의 가랑이 사이에서 분명 그런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공의 속도가 뇌를 자극했을 뿐. 그는 자신에게 오는 공의 바로 직전 바운드를 자세히 보지 못했고 그 결과 눈앞에 갑자기 공이 나타났다.

“크윽.”

트레아 터너는 뒤로 주저앉으면서 균형을 잃었고, 그 상태에서 글러브를 뻗었다.

턱, 하고 걸리는 소리. 바운드 된 공은 글러브의 끝에 맞고 뒤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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