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화 애리조나 전지훈련 1
마이애미 말린스가 전에 없는 선수 영입과 거액의 계약으로 팀의 운영 기조가 바뀐 것은 분명했다.
한때 뉴욕 양키즈의 영원한 유격수였던 데릭은 2017년 구단을 인수한 뒤, 대대적인 리빌딩에 나서 주축 선수들을 모조리 팔아치웠고 루키들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바닥을 기던 성적은 점차 나아지긴 했지만 돌파구가 보이지 않던 차에 오스틴 단장의 성낙기 영입은 신의 한 수였다.
무엇보다도 성낙기는 연패 스토퍼였고 상대팀 에이스의 킬러였다.
계속 지고 있을 때, 그걸 끊어주는 역할은 생각보다 어려우면서 팀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성낙기는 상대 에이스와 맞붙어 대부분 팀에 승리를 안겨 주면서 상대팀에게는 막대한 타격(打擊)을 주었고 마이애미 말린스에게는, 막강한 상대팀의 에이스를 이겨냈다는 자부심을 심었다.
데릭은 시즌 내내 성낙기의 투구에 대해 측근들과 의견을 나눴고 경기에서 보이는 여유로운 모습 등에 반했다. 갈수록 나아지는 구위와 제구력은 덤이었다.
그 결과 팀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와일드카드 결정전까지 나가게 되었고 성낙기는 타격으로도 공헌했다.
그가 아는 한, 이런 선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고 나서 결심했던 것이다.
거액의 계약으로라도 이 선수를 잡자.
오스틴은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데릭은 성낙기가 아니면 마이매미의 반등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수많은 시뮬레이션과 투구 영상과 피지컬 체크(physical check)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또 찍어요? 내 MRI 가지고 무슨 실험 영상 제작하는 거라면 CIA에 고발하겠소.’
성낙기가 농담조로 그렇게 얘기한 적도 있을 만큼 mlb의 도핑테스트와 구단 자체의 체크도 여러 번이었다.
데릭은 성낙기의 몸 상태에 대해 낙관했고 바로 그것이 계약의 디딤돌로 작용했다. 적어도 5년은 충분하다는 확신이었다.
그러고 나서 팀에 필요한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구단의 공격적인 스토브리그 투자에 팬들의 기대는 날로 높아져 갔다.
***
12월 15일, 한국의 삼호슈퍼스타즈와 모연비퍼스는 공교롭게도 똑같이 애리조나 전지훈련을 계획했다.
모연비퍼스야 원래 강팀이고 구단의 투자도 인색치 않으니 해외 전지훈련은 당연하다 쳐도 삼호슈퍼스타즈로서는, 늘 일본이나 제주도를 전지훈련장으로 삼았던 것에 비하면 조금은 놀라웠다.
성적이 나지 않는 팀에게 애리조나 전지훈련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어느 구단주가 하위권의 팀 성적을 받아들고 애리조나 같은 전지훈련을 계획하겠는가.
팀만 생각하면 열불이 나는데 말이다.
허봉호 감독이 맡은 후부터는 다르다.
성낙기가 있을 때 한국시리즈에 도전했었고 올해는 그에 못 미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아깝게 떨어졌다.
선수들의 투지는 어느 팀보다 좋고 원 팀이 되어간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잇따랐다.
그렇게 애리조나의 전지훈련장에 삼호슈퍼스타즈는 둥지를 틀었다.
삼호슈퍼스타즈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성낙기는 채드 왈라치와 팬 파일러와 함께 훈련장을 방문했다. 선수들이 훈련에 열중인 가운데 더그아웃에서 먼발치의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는 허봉호 감독이 보였다.
못난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낀 모습을 보고 성낙기는 픽, 웃었다.
“아하하, 감독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성낙기는 말을 마치고 나서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했다. 곁에 있던 채드 왈라치와 팬 파일러가 성낙기의 동작을 따라했다. 이계현 코치와 박종태 코치가 다가와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누구… 십니까……? 여긴, 잡상인 출입 금지올씨다.”
“하하, 왜 그러세요. 저 성낙기입니다. 얼마나 되었다고 저 모른 척하세요?”
“성낙기… 틈만 나면 마 단장한테 전화질해서 나를 모함하는 놈…이 여긴 웬일이냐.”
“무슨 모함을 했다고… 하하, 있는 사실 그대로…….”
“시꺼, 이 자식아. 낯짝을 보니 신수가 훤하구만. 그 공 가지고 방어율이 2.76이 뭐냐. 홈런이나 처맞고 다니고.”
“그게 아니라, 애들 힘이 장난 아니라니까요. 빗맞아도 넘어가요.”
“이왕에 왔으니 이계현 코치하고 훈련 좀 하고 가. 그리고 이번 계약 축하한다. 나중에 소고기 쏘는 거 잊지 마.”
“아이, 감독님도 참 농담이 심하시네요. 소고기가 얼마나 비싼 고기인데… 그걸 사 달라고 하시면…….”
“이놈은 아직도 돈 개념이 없네. 2억 5천만 달러면 소가 몇 마리인줄 알아?”
“글쎄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진작 그럴 일이지. 자식이 미국 오더니 아주 사람이 됐어. 스승을 몰라보면 너 그날로 고자가 되는 거야.”
허봉호 감독의 하나마나한 소리를 뒤로 하고 성낙기는 팬 파일러와 함께 불펜 마운드에 섰다. 체드 왈라치가 성낙기의 공을 받았고 팬 파일러의 공은 이두열이 받았다.
팡.
“웃!”
이두열은 1구를 받자마자 충격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팬 파일러에게 공을 돌려줬다. 그로 그럴 것이 팬 파일러의 공은 비시즌에도 96마일이(154~155km)이 넘었다.
팀 내에서 공성진과 안민기의 공이 빠르다지만 그건 시즌에 들어가서 날이 따뜻해질 때의 이야기고 지금 시기엔 92(148km)마일이 나올까 말까 할 정도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런 공을 던지다니.
“와아, 엄청나게 빨라.”
“저러니 메이저리그 투수지. 도대체 시즌 가면 얼마를 던진다는 거야.”
팬 파일러의 투구를 보고 있던 박종태 코치와 이계현 투수 코치가 놀라며 말했다.
208cm의 키를 자랑하는 투수가 내리 꽂는 포심패스트볼은 모두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나,
곧 제구가 확실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는 공 스피드에 놀라는 대신 팬 파일러의 투구 동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30여 구를 던졌을 무렵, 이계현 투수 코치는 팬 파일러에게 몇 마디 하더니 옆에서 투구 동작을 따라하면서 무언가를 설명했다.
발의 움직임과 어깨, 허리 등을 가리키며 코칭을 해줬고 팬 파일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계현 코치가 가르쳐 준 투구 동작을 따라 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겨우 KBO 코치가 메이저리그 투수를 가르치다니. 이거 말이 되는 거야?’
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mlb는 코치들이 한국처럼 동작 하나하나를 설명하고 따라다니면서 코칭을 해주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율 훈련이고 선수가 원하는 만큼만 가르쳐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에 비해 KBO는 선수 하나를 찍으면 될 때까지 가르쳐 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한다.
이 투수의 성공을 내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일도 자연스럽다. 열정은 덤이다.
팬 파일러 같은 투수가 팔색조 변화구와 제구력에 남다른 강점을 지녔던 이계현 투수 코치에게서 레슨을 받는 것은 그러므로,
행운 중의 행운인 것이다.
한참 동안의 레슨이 이어졌고 이계현 투수 코치의 말을 이해한 팬 파일러가 가르침대로 공을 던졌다.
그러고는 던지고 나더니 ‘good!’을 연발했다.
아무리 해도 확실히 잡히지 않던 제구에 대해 무언가 눈을 뜬 표정이다.
성낙기가 드랙 실바의 도움을 받아 조언을 해준 이후로 제구력이 상당히 좋아졌는데 투수 코치로는 S급인 이계현 투수 코치의 레슨까지 받았으니 달라지지 않으면 선수 자신의 문제인 거겠지.
‘아, 정말 대단한 코치야. 나도 모르던 나의 약점을 정확히 집어냈어. 성낙기 날 여기 데려와 줘서 고마워.’
나중에 팬 파일러가 한 말처럼 이계현 코치의 레슨은 팬 파일러에게 귀한 만남이었다.
성낙기는 불펜에서 나와 타격 연습을 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이중호가 타격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구문철이 안민기와 함께 캐치볼을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성낙기도 헬멧을 쓰고 배팅게이지로 가서 자세를 잡았다.
“어……? 낙기야, 너 언제 왔냐?”
“언제긴 진즉에 왔지. 너 근데 살이 많이 빠졌네? 감독님이 고기 안 사줬어?”
“어, 그게 아니고 풀타임은 처음이다 보니까 나중에 힘에 부치더라.”
성낙기의 말대로 이중호는 얼굴 살이 쏙 빠졌다. 105kg까지 나가던 몸무게도 95kg에 불과했다.
“당연히 살이 빠져야 정상이지. 삼호슈퍼스타즈 최초로 50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살이 안 빠지면 누가 빠지겠냐.”
“아, 코치님. 홈런 쳐서 살이 빠진 건 아니고요.”
“야, 성낙기. 너 가고 나서 애가 아주 물이 올랐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소식은 듣고 있었어요. 50홈런 축하해, 중호야.”
“헐, 축하는 네가 받아야지.”
“성낙기……?”
구문철이 다가와 성낙기를 발견하고는 반색을 했고,
“문철아 오랜만이야.”
“반갑다. 너 잘할 줄 알았어.”
“정말이야?”
“응, 워낙 겁도 없고 라이징패스트볼 하나만 있어도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튼 너희들 다시 보니 정말 반가워. 저녁에 형이 한잔 쏠게. 여기 맛있는 삼겹살집 알고 있거든.”
***
저녁 무렵, 성낙기는 예전에 셜리번 투수 코치 집에 놀러갈 때 갔었던 코리안 바비큐(Korean barbecue)집에 삼호슈퍼스타즈 선수단을 초대했다.
다 모이니 50여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허허, 오늘 성낙기가 쏜단다. 그것도 소고기로만. 그러니까 배 터지게 먹어라. 내일 오전은 휴식이다.”
“아니, 그렇다고 휴식까지 주실 필요는 없잖아요.”
“배탈 나면 약 사먹을 시간은 줘야지. 넌 어째 그리 추리력이 박약하냐. 그러니 홈런이나 처 맞고 다니는 거지.”
“shit!”
“뭐, 쉣? 아니, 근데 이 자식이 메이저 왔다고 나한테까지 영어로 욕을 하네. 어이, 이 코치 오늘 나 말리지 마.”
무려 50명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어마어마한 양이 불판에 구워졌고 입으로 잘도 들어갔다. 보통 혼자 5인분은 먹는 선수들이고 보면 식당의 고기가 남아날지 걱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식당 주인은 선수들이 먹는 속도를 파악하고는 고기를 구하러 나갔다.
성낙기는 허봉호 감독 등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성낙기 너, 공이 어떻게 갈수록 빨라지냐.”
“아, 그게 말입니다. 이곳에서 체계적인 체력 훈련을 받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빨라졌죠.”
“애가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그러네. 뭐, 그만하자. 느려지는 것보다는 빨라지는 게 나으니까. 경기 하면서 불편한 건 없어?”
“왜 없겠습니까. 이쪽 선수들 펀치력이 좋아서 걸리면 다 넘어갑니다. 잘 던지다가도 조금 방심하면 홈런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거의 이중호급 선수들이 즐비하다 생각하면 맞는 것 같습니다.”
허봉호 감독의 질문에 성낙기는 편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세븐윈터스에서 방출 당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을 입단시켜 준 감독이고 그 덕에 지금의 위치까지 온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성낙기로서는 가장 1순위의 스승이다. 허봉호 감독 역시 말은 까칠하게 해도 성낙기가 대견한지 눈을 빛내고 있다.